• 최종편집 2026-02-1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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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언론, ‘심판의 돌’을 던질 것인가, ‘생명의 펜’을 들 것인가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AI 이미지 '심판의 돌과 생명의 펜' 언론의 칼날과 십자가의 사랑 사이 언론(言論)은 본래 날카롭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그 펜의 무게와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언론이 ‘팩트(Fact)’를 무기로 상대를 베어내는 데 주력한다면, 기독교 언론은 그 팩트 너머에 있는 ‘진실(Truth)’과 ‘생명(Life)’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교계 매체가 보도한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관련 기사는 기독교 언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빗나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을 들추어내어, 이미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로 봉합된 상처를 다시 찢어발기는 행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이며, 무엇을 위한 보도인가.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기독교 언론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문화인가, 생명의 문화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사형틀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살려낸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언론 또한 그 생명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일부 기독교 언론 행태는 생명이 아닌 ‘사회적 매장’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김문훈 목사에 대한 보도는 전형적인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래전 발생한 일이며, 목회자로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했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을 공개하고, 심지어 독자들이 그 자극적인 음성 파일을 직접 다운로드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언론의 공익적 기능을 넘어선 인격 살인에 가깝다. 이는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어치려 했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율법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팩트는 여인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팩트로 여인을 죽이지 않으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기독교 언론의 펜 끝에는 예수의 ‘용서’가 묻어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의 ‘살기’가 서려 있는가. ‘알 권리’라는 미명 하의 폭력성 해당 기사는 목회자의 리더십 검증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내세웠다. 물론 공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는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익(公益)이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공익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지, 공동체의 일원을 파괴하여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균형의 상실’과 ‘자극적 배포 방식’이다. 기사는 제3자의 증언과 녹취 등 공격 측의 자료는 방대하게 싣고 있으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김 목사의 현재 입장이나 과거 사과 과정에 대한 반론권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공정성을 훼손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녹취 파일의 다운로드 제공이다. 욕설이나 거친 언사가 담긴 파일을 대중에게 직접 유포하는 것은 사실 전달을 넘어선다. 이는 독자들에게 “이 사람을 함께 미워해 달라”고 선동하는 정서적 폭력이며, 클릭 수를 위한 선정주의적 상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허물을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기독교 언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죽음의 문화’다. 파괴가 아닌 ‘세움’을 향하여 세상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은 다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만일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바로잡다’라는 헬라어는 뼈가 부러졌을 때 다시 맞추는 의료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그를 공동체에서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건강한 지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김문훈 목사의 과거 언행이 목회자로서 부덕(不德)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허물을 딛고 회개하며 목양에 힘써왔다면, 그리고 당사자와의 화해가 있었다면, 언론은 그를 다시 과거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갱신된 지도자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감시하되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다. 교회와 성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비난이 더 치명적일 때가 많다. 기독교 언론이 ‘내부 총질’의 선봉장이 되어선 안 된다. 비판은 하되 비난하지 말고, 지적은 하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팩트(Fact)를 다루되 임팩트(Impact) 있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펜을 든 사명자들에게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세워주며 거룩한 방파제가 되는 것인가. 이번 보도 사태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언론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기사는 사람을 살리는가, 죽이는가?”, “나의 펜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인가, 아니면 형제를 찌르는 흉기인가?” 기독교 언론의 사명은 명확하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생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다.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덮어주고, 싸매주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치유의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김문훈 목사를 향한 이번 보도가 단순히 하나의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기독교 언론이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생명의 펜’을 다시 쥐는 거룩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만이 교회가 살고 언론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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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언론, ‘심판의 돌’을 던질 것인가, ‘생명의 펜’을 들 것인가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AI 이미지 '심판의 돌과 생명의 펜' 언론의 칼날과 십자가의 사랑 사이 언론(言論)은 본래 날카롭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그 펜의 무게와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언론이 ‘팩트(Fact)’를 무기로 상대를 베어내는 데 주력한다면, 기독교 언론은 그 팩트 너머에 있는 ‘진실(Truth)’과 ‘생명(Life)’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교계 매체가 보도한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관련 기사는 기독교 언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빗나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을 들추어내어, 이미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로 봉합된 상처를 다시 찢어발기는 행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이며, 무엇을 위한 보도인가.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기독교 언론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문화인가, 생명의 문화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사형틀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살려낸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언론 또한 그 생명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일부 기독교 언론 행태는 생명이 아닌 ‘사회적 매장’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김문훈 목사에 대한 보도는 전형적인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래전 발생한 일이며, 목회자로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했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을 공개하고, 심지어 독자들이 그 자극적인 음성 파일을 직접 다운로드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언론의 공익적 기능을 넘어선 인격 살인에 가깝다. 이는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어치려 했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율법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팩트는 여인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팩트로 여인을 죽이지 않으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기독교 언론의 펜 끝에는 예수의 ‘용서’가 묻어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의 ‘살기’가 서려 있는가. ‘알 권리’라는 미명 하의 폭력성 해당 기사는 목회자의 리더십 검증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내세웠다. 물론 공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는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익(公益)이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공익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지, 공동체의 일원을 파괴하여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균형의 상실’과 ‘자극적 배포 방식’이다. 기사는 제3자의 증언과 녹취 등 공격 측의 자료는 방대하게 싣고 있으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김 목사의 현재 입장이나 과거 사과 과정에 대한 반론권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공정성을 훼손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녹취 파일의 다운로드 제공이다. 욕설이나 거친 언사가 담긴 파일을 대중에게 직접 유포하는 것은 사실 전달을 넘어선다. 이는 독자들에게 “이 사람을 함께 미워해 달라”고 선동하는 정서적 폭력이며, 클릭 수를 위한 선정주의적 상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허물을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기독교 언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죽음의 문화’다. 파괴가 아닌 ‘세움’을 향하여 세상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은 다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만일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바로잡다’라는 헬라어는 뼈가 부러졌을 때 다시 맞추는 의료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그를 공동체에서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건강한 지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김문훈 목사의 과거 언행이 목회자로서 부덕(不德)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허물을 딛고 회개하며 목양에 힘써왔다면, 그리고 당사자와의 화해가 있었다면, 언론은 그를 다시 과거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갱신된 지도자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감시하되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다. 교회와 성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비난이 더 치명적일 때가 많다. 기독교 언론이 ‘내부 총질’의 선봉장이 되어선 안 된다. 비판은 하되 비난하지 말고, 지적은 하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팩트(Fact)를 다루되 임팩트(Impact) 있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펜을 든 사명자들에게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세워주며 거룩한 방파제가 되는 것인가. 이번 보도 사태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언론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기사는 사람을 살리는가, 죽이는가?”, “나의 펜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인가, 아니면 형제를 찌르는 흉기인가?” 기독교 언론의 사명은 명확하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생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다.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덮어주고, 싸매주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치유의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김문훈 목사를 향한 이번 보도가 단순히 하나의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기독교 언론이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생명의 펜’을 다시 쥐는 거룩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만이 교회가 살고 언론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이재명의 자유의 성벽 허무는 ‘정교분리’의 역설 : 종교의 심장을 겨눈 국가의 총구

時事칼럼/양봉식 국장 동영상 갈무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침묵의 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보이지 않는 성벽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는 선언은 국가가 국민의 영혼에 개입할 수 없음을 천명한 인류 지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터져 나온 발언들은 이 거룩한 성벽에 균열을 내고 있다.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목소리를 거세하려는 시도는, 보호의 언어가 아닌 섬뜩한 통제의 언어였다. 거룩한 강단에 가해진 ‘반란’의 낙인 이재명은 기자회견에서 특정 종교와 일부 개신교를 겨냥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비판하는 설교를 두고 “국민에게 총구를 겨냥하는 반란행위”라며 형사적·안보적 프레임을 씌웠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위험한 비유다. 종교인의 설교는 신앙적 가치에 기반한 양심의 표현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그 자체다. 설교 내용이 위정자의 입맛에 쓰다고 해서 그것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순간, 국가는 이미 신앙의 영역을 검열하는 심판자로 군림하게 된다.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권력이 종교의 입을 막기 위해 ‘정교분리’라는 칼을 빼 드는 것은, 이 원칙의 탄생 배경을 완전히 오독한 비극이다. ‘큰 돌부터 제거’라는 섬뜩한 단계론의 정체 가장 날카로운 우려는 “큰 돌부터 집어내고 그다음 자갈, 잔돌을 집어내겠다”는 그의 수사적 비유에서 정점을 찍는다. 법치국가에서 사법적 판단은 개별 범죄 혐의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단계적 제거’를 운운하는 이 언어는 법적 정의가 아니라 정책적 타도 대상을 설정하는 통치자의 서늘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문법이 아니다. 서구 유럽 국가에서 종교 단체나 비영리법인의 해체는 테러나 무장 폭력 같은 명백한 반국가적 범죄가 입증될 때만 사법부의 극히 보수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면, 종교를 ‘국가의 관리 대상’으로 보고 비판 세력을 ‘사회 해악’으로 몰아 해체하는 방식은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나 전체주의 체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적 종교 길들이기가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선택적 정의, 그리고 공적 신앙의 사멸 이재명의 분노는 지극히 선택적이다. 정치권에는 특정 정권을 지지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종교 세력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권력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종교적 행위에는 침묵하며, 오직 비판적인 목소리에만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것은 원칙의 수호가 아니라 권력의 편의를 위한 ‘선택적 정의’일 뿐이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사적 클럽’이 아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사회 정의를 외치고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갖는다. 정교분리를 이유로 교회를 침묵의 섬으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는, 결국 국가 권력을 견제할 마지막 정신적 보루를 무너뜨리겠다는 선언과 같다. 헌법의 족쇄를 풀지 마라 정교분리는 권력자가 종교를 휘두르기 위해 만든 회칙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국민의 신앙과 양심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채워둔 ‘헌법적 족쇄’다. 위정자가 이 족쇄를 스스로 풀고 “질서와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생사여탈권을 쥐려 할 때, 자유의 시대는 저물고 통제의 시대가 밝아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사와 해체의 위협이 아니다. 권력 앞에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 그리고 그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민주적 절제다. 영혼의 영역까지 국가의 발길질 아래 두려는 오만을 멈춰야 한다. 성벽이 무너진 뒤에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거대한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뿐이기 때문이다.

신천지의 성명서가 던진 역설: 한국 교회는 지금 무엇을 파수(把守)하는가

데스크칼럼/양봉식 국장 AI이미지 낯선 풍경, 거꾸로 된 질문 최근 이단으로 규정된 집단인 신천지가 정부의 특정 종교 단체 해산 논의와 관련하여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며 묘한 불쾌감과 함께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교차함을 느꼈다. 정통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온 집단이 역설적이게도 ‘헌법상의 종교의 자유’를 역설하며 국가 권력의 향방에 문제를 제기하는 장면은 지극히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 장면을 단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목소리가 옳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던진 ‘종교 자유의 위기’라는 화두가 현재 한국 교회가 마주한 거대한 시대적 징후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은 무엇인가. 이단의 입에서 나온 정의(正義)가 오히려 잠자는 정통 교회의 죽비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픈 자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치를 넘어 체제와 가치의 영역으로 한국 사회의 모든 논쟁은 블랙홀처럼 정치적 구도로 수렴되곤 한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좌와 우라는 이분법적 틀은 복잡한 본질을 단순한 호불호의 문제로 치환해 버린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한 종교 단체 해산 논의와 그에 따른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공방의 소재가 아니다. 이는 국가의 체제와 자유의 근간, 그리고 신앙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토양에 관한 실존적 문제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혹은 대중적 지지율에 따라 특정 집단을 ‘해산’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정당화된다면, 그 칼날의 끝이 언제나 이단만을 향해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종교의 자유는 국가가 부여한 시혜적 권리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천부적 권리이자 국가 권력이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다. 이를 훼손하는 선례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신앙의 자유라는 가장 소중한 가치를 정치적 거래의 제물로 바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진리의 분별과 권력의 칼날 정통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단과 거짓 교리에 맞서 피 흘리는 싸움을 지속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거짓된 누룩을 경계하고 진리의 말씀을 수호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쳤다. 교회는 교리를 세우고 분별의 잣대를 엄격히 함으로써 공동체를 지켜왔다. 참된 진리를 붙드는 공동체는 이단의 존재 그 자체에 과도한 공포를 느끼거나 국가 권력을 빌려 그들을 멸절하려 들지 않는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고, 참이 서면 거짓은 스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교회의 힘은 공권력의 강제 집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생명력과 도덕적 우위에서 나온다. 그런데 지금의 형국은 묘하기 짝이 없다. 이단 집단이 ‘자유’를 외치며 방어막을 치는 동안, 정작 한국 교회는 이 문제를 ‘체제와 자유’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성찰하기보다 침묵하거나 방관하고 있다. 불편하고 혐오스러운 집단을 공권력이 대신 처리해 주는 것에 안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가진 영적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AI 이미지 종교의 자유, 그 헌법적 가치의 엄중함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적 핵심 가치로 삼는 국가다. 우리가 거리에서 찬양하고, 노방전도를 하며, 대규모 광장 집회를 통해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토양은 바로 이 자유의 보장에서 기인한다. 만약 현재 눈앞에 가시 같은 종교 집단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국가 권력의 종교 개입을 묵인하거나 당연시한다면, 훗날 그 '개입의 기준'이 정통 교회를 향할 때 우리는 어떤 명분으로 저항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반복된다. 권력에 의한 종교 억압은 대개 사회적 공감대가 낮고 소외된 집단을 제물 삼아 시작된다. 대중의 분노를 동력 삼아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그 칼날은 점차 예리해지고 범위는 넓어진다. 결국 국가가 '허용하는 신앙'과 '허용하지 않는 신앙'을 가르는 심판관의 자리에 앉게 될 때, 진정한 신앙의 공간은 사라지게 된다. 이는 이미 수많은 전체주의 국가와 역사 속에서 증명된 비극적인 공식이다. 말세의 징후와 깨어 있는 영성 성경은 마지막 때를 경고하며 예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 날이 올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막연한 종말론적 상상이 아니라, 역사적 실체로서 우리 앞에 다가오는 현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종교에 대한 적대감과 행정적 규제의 움직임이 어떤 영적 징후를 내포하고 있는지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음’이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조차 자신들의 존립을 위해 성명서를 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 현실 앞에서, 한국 교회의 평온함은 오히려 위태로워 보인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차원을 넘어, 복음이 선포되고 신앙이 호흡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 그 자체를 사수하는 일이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 사람의 세계관과 신념은 법이나 강압으로 바뀌지 않는다. 오랜 시간 성경을 가르치고 교리를 주입해도 인간의 내면은 완강한 성벽과 같다. 하물며 국가 권력이 물리적 힘으로 종교적 확신을 통제하거나 교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회심하게 하는 역사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명확하다. 파수꾼의 사명으로 질문을 던지고, 시대의 오류에 대해 경고하며, 성도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혐오에 편승하여 자유를 파괴하는 길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더라도 진리의 길을 묵묵히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파수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적 분노나 선동적 구호가 아니다. 무엇이 본질이며, 무엇이 체제의 문제인가를 차분히 짚어보는 지혜다. 또한 신앙의 자유를 지키는 길이 단순히 내 울타리를 지키는 것을 넘어,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지키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단의 성명서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 시대, 한국 교회는 과연 무엇을 파수하고 있는가. 눈앞의 편의인가, 아니면 영원한 자유의 가치인가. 이 무거운 질문 앞에 더 이상 외면이나 침묵으로 답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그 대답을 삶과 실천으로 증명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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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성기를 내려놓고, 양심으로 다시 서는 기독언론”

한국기독언론협회 회장 2026년 신년사 사랑하는 기독언론인 여러분, 그리고 한국교회를 섬기는 모든 언론 동역자 여러분. 새로운 한 해의 문 앞에서, 우리는 축하보다 먼저 성찰의 질문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지난 한 해, 기독언론으로서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 있었는가. 교회를 살리는 언론이었는가, 아니면 교회를 소모하는 언론이었는가? 신뢰를 쌓는 언론이었는?, 아니면 신뢰를 앗아간 소란한 언론이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결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습니다. 신년의 첫 고백, 위기의 책임은 시대가 아닌 우리 오늘 기독언론이 처한 위기는 단순한 환경 변화의 결과가 아닙니다. 디지털 전환, AI의 등장, 교회 환경의 변화는 분명 큰 도전이지만, 기독언론의 신뢰가 무너진 근본 이유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있었습니다. 이단과의 유착, 출처가 광고 요구, 기사 거래와 협박성 보도, 검증 없는 기사가 난립은 일부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언론 전체가 함께 짚어야 할 부끄러운 현실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기독언론을 경계하게 되었고, 성도들은 기독언론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년의 첫날, 우리는 이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회개 없는 새 출발은 없습니다. 기독언론, 정체성 다시 세워야 할 2026년 기독언론은 교회의 홍보 수단이 아닙니다. 교회를 미화하는 언론이 아니라, 교회를 살리는 언론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분명히 선언합니다. 기독언론은 교회의 공론장이며, 교회의 양심이며, 교회와 사회 사이의 신학적 번역자입니다. 교회 내부의 분쟁과 구조적 문제를 묻는 언론이 아니라, 사실과 문서, 규정에 근거해 교회가 스스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돕는 언론이 되어야 합니다. 사회적 이슈 앞에서 감정적 구호나 정치적 선동이 아니라, 성경과 신학, 공공 윤리에 근거한 해석을 제시하는 언론이 되어야 합니다. 2026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세 가지 약속 첫째, 윤리를 선언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세우겠습니다. 한국기독언론협회는 취재 윤리, 기사 거래 금지, 이해충돌 방지 기준을 분명히 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점검하는 구조를 만들겠습니다. 정치적 언론이 손해 보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협회의 책무입니다. 둘째, 전문성은 열정이 아니라 훈련으로 키우겠습니다. 교회법과 교단 헌법, 비영리 회계, 사회변화와 디지털 환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언론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습니다. 기자 교육과 아카데미, 검증 시스템을 통해 ‘일하는 기사’ 이전에 ‘신뢰받는 기사’를 세우겠습니다. 셋째, 공익성을 기준으로 생존 전략을 다시 짜겠습니다. 광고 의존에서 벗어나 구독, 교육, 포럼, 공론장 형성으로 이어지는 지속 가능한 구조를 모색하겠습니다. 생존을 위해 원칙을 버리는 언론이 아니라, 원칙 위에서 살아남는 언론이 되겠습니다. 신년의 다짐! 다시, 양심으로 설 것 기독언론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원하지 않는 언론’이 될 것이고, 돌아서면 다시 ‘필요한 언론’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홍보의 확성기로 남지 않겠습니다. 교회의 눈치를 보는 언론도, 교회를 공격하는 언론도 아닌,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양심의 언론으로 다시 서겠습니다. 2026년은 기독언론이 변명하는 해가 아니라, 증명하는 해가 되어야 합니다. 말이 아니라 기사로, 선언이 아니라 실천으로, 신뢰를 다시 쌓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기독언론협회는 그 길의 맨 앞에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2026년 새해를 앞두고 한국기독언론협회 회장

국민노예화, 진리로 해결하라

時事칼럼/양봉식 국장 헌정 질서가 흔들리는 시대 최근 국회에서 논의된 일련의 법안들은 우리 헌정사에 전례 없는 충격을 던지고 있습니다. 내란특별재판부 설치 법안과 사법부 판결에 대한 국회의 직접 개입 시도는 단순한 정치적 논란을 넘어,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사안입니다. 입법부가 사법부를 통제하려 할 때, 권력의 견제와 균형은 무너지고 권력 집중의 길이 열립니다. 이는 법이 국민을 지키는 도구가 아니라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위험한 전환점입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공의 아래 있습니다. 권력은 하나님께서 질서를 위해 허락하신 도구이지,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타락한 왕정 아래서 신음할 때마다 예언자들은 외쳤습니다. "너희는 고아의 송사를 도우며 과부의 사정을 변론하라"(이사야 1:17). "의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즐거워하나, 악인이 다스리면 백성이 탄식한다"(잠언 29:2). 정의로운 통치는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타락한 권력은 사람을 종처럼 다룹니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사법 통제 시도와 권력 집중 현상은 성경이 오래전 경고한 바로 그 위험과 맞닿아 있습니다. 포퓰리즘이 만드는 '의존의 구조' 문제는 정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역사적 최고치를 기록한 국가부채에도 불구하고 현금성 지원과 단기 인기 정책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당장은 달콤해 보이지만, 조세 기반 없이 빚으로 재정을 메우는 방식은 결국 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무너뜨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정책이 국민을 국가에 의존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삶의 기반을 국가에 예속시키는 구조는 시민의 주체적 판단력을 약화시키고, 점차 '국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이는 성경이 말한 애굽의 노예 제도와 본질이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바로에게 종 되었더니, 그 고된 노동으로 신음하매 여호와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다"(출애굽기 2:23). 노예화란 쇠사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적·정치적·정신적 구조 전체가 사람을 예속시킬 때 진정한 노예 상태가 됩니다. 전제주의로 가는 위험한 패턴 언론의 독립성과 감시 기능이 약화되는 현상도 우려스럽습니다. 공영방송 이사회 개편과 방송법 개정 논란은 다양한 목소리를 제한하려는 시도로 비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고 선언하신 것은 진리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는 순간 자유도 함께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언론이 침묵할 때 국민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기준을 잃게 됩니다. 정보가 통제될수록 시민은 권력이 보여주는 것만 보게 되고, 이것이 바로 내면적 노예화입니다. 정치·경제·언론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사법부 통제 시도, 입법부로의 권력 집중, 포퓰리즘을 통한 국민 예속화, 언론 약화와 정보 통제—이는 역사 속 독재 국가들이 걸어간 전형적인 경로입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바벨탑 체제로의 회귀입니다.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창세기 11:4)던 바벨의 비극은 인간 권력의 집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조짐도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단순한 정치적 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책임을 지고 살아갈 수 있는 존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기에, 어떤 권력도 사람을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국민이 권력의 도구가 되거나 권력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면, 이는 단순한 정책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영적 침탈입니다. 필요한 것은 영적 각성 오늘의 위기는 정권이나 정책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자유의 본질을 잊어버린 데서 비롯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외칩니다. "깨어 있으라"(마태복음 24:42),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로마서 12:2). 정치가 타락할 때 필요한 첫 번째 변화는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영적 분별력입니다. 그 분별력이 회복될 때 국민은 포퓰리즘의 달콤함을 거부할 힘을 얻고, 권력 집중의 위험을 파악하며, 거짓에 속지 않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행동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삼권분립이 흔들리고 재정이 무너지며, 국민은 국가 의존 구조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이 흐름은 시간이 지나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망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 3:17). 자유는 인간의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자유를 지키려 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권력의 피지배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존엄한 존재로 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원점으로의 회복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찰리 커크, 새로운 믿음의 세대를 일으키는 밀알이 될 것”

세계 자유 사랑 운동을 이끌던 찰리 커크(Charlie Kirk)가 9월 10일, 유타밸리대학교 강연 도중 저격수의 총탄에 쓰러졌다. 이 소식은 전 세계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겼다. 찰리 커크는 미국 건국 이념에 충실하며 자유를 수호한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국가적 비극으로 받아들여졌고, 국민들은 조기를 게양하며 애도에 동참했다. 그는 불과 18세의 나이에 ‘터닝 포인트 USA(Turning Point USA)’를 창립하고, 청년과 대학생에게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신앙 회복 운동을 선도했다. 이러한 사역은 전제주의와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저항을 불러왔다. 자유와 거룩을 무시하고 인간을 짐승이나 단순한 도구로 여기는 세력은 인명을 경시할 뿐 아니라, 자유를 억압하고 심지어 반대자를 제거하기까지 한다. 이번 참혹한 사건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찰리 커크는 자유와 신앙의 가치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귀한 존재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또 “자유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역사의 교훈을 전했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자유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진리이다. 대한민국의 자유 또한 피로 지켜졌다. 6.25 전쟁에서 자유를 지켜낸 미군 3만 6,500여 명이 희생되었으며, 지금도 약 2만 8,500명의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며 한미 혈맹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은 세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헌신해왔다. 그러한 정신을 이어가던 찰리 커크에 대한 공격은 단지 개인에 대한 테러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전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때 자유를 사랑하는 참된 크리스천은 미국과 함께 아픔을 나누어야 한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명한다.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우리는 모두 형제이며, 대한민국도 미국의 아픔을 함께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이 총탄에 쓰러져도 그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의 피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듯, 찰리 커크의 피 역시 결코 묻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대신해 셋을 세우셨듯, 그리고 스데반의 죽음이 바울을 회심시키는 씨앗이 되었듯, 찰리 커크의 죽음 또한 새로운 믿음의 세대를 일으키는 밀알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신앙인으로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 세계 자유와 평화를 위한 씨앗이 되리라 믿는다. 자유대한민국과 미국의 건국 이념이 영원히 빛나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유선화 사모의 요한계시록 더보기

밧모 섬의 요한(계 1:9)

1. 너희 형제 요한 “나 요한은” 요한은 1절에서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라고 말하였고, 2절에서는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다 증언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1인칭으로 “나 요한은”이라고 하여 서신의 발신자가 자신임을 확실히 짚어줍니다. “나 요한”은 누구입니까?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나 요한”은 편지의 수신자들인 “너희 형제”라고 말합니다. 누가 계시록의 수신자입니까? 하나님의 종들(계 1:1),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상징되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가 계시록의 수신자들입니다(계 1:4). 요한은 우리 형제입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왕권)에 동참했지만, 환난과 참음에도 동참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2. 밧모라 하는 섬에 있는 이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증언하였으므로”는 동사가 아니라 명사 ‘마르튀리아’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밧모섬에 있었습니다. ‘마르튀리아’는 계시록에서 ‘증언’, ‘증거’로 번역되었는데, 믿는 자의 전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의 증거(증언)”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자만이 예수의 사람입니다(롬 8:9). 이는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인입니다. 또한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인 영생이 증거입니다(요일 5:11).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또한 천사는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계 19:10). 예수의 증언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입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을 가진 자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합니까? “예수의 증언함(‘마르튀리아’)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 보좌에 앉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합니다(계 20:4). 즉 그들은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기 생명이 죽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이 사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합니다(계 20:6). 계시록에서 성도에 대해 처음 하신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을 위한 나라(왕)와 제사장이고(계 1:6), 마지막 말씀은 왕 노릇입니다(계 22:5).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려진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할 것입니다(계 5:9,10). 그들은 요한처럼 하나님의 나라 즉 왕권에 동참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마르튀리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자기 생명이 죽은 자들)이 제단 아래에서 신원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계 6:9). 용은 여자의 남은 자손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마르튀리아’)를 가진 자들과” 싸우려 합니다(계 12:17). 그는 박해하는 용(계 12:13), 유혹하는 뱀입니다(계 12:15). 그는 그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와 싸웁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성도의 인내와 믿음을 말씀합니다(계 13:10, 14:12). 성도가 당하는 환난과 참음입니다. 당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비롯한 모든 교회가 박해와 유혹 가운데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옥에 던져지고 순교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음을 말합니다. 환난과 참음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보고 들은 계시를 기록하여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기 위하여 요한은 어떤 배경에서 계시록의 계시를 받게 되었는가 설명합니다. 그는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가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 기록합니다. 출처 :https://blog.naver.com/rsh6771/223840355442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주하나님(계 1:7,8)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1. 구름을 타고 오실 그리스도 “볼지어다” 요한은 “보라”라고 말합니다.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그가 즉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하시고(5절),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왕)과 제사장 삼으신 그분(6절)이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5절). 주님은 이 땅에 계실 때에도 장차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마 24:30, 26:64, 막 13:26, 14:52, 눅 21:27).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각 사람의 눈 즉 각각의 사람의 눈이 그분을 볼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즉 모든 인류가 한 날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눅 21:35). 예외의 사람이 없습니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그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할 것입니다. 그러하다고 한 번 더 긍정합니다. 마태도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라고 같은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마 24:30). 주님께서 오시는 날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통곡”할 것입니다. 그 날에 통곡하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은 누구이고, 그들은 왜 통곡합니까? 계시록에서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은 믿지 않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땅에 사는 자들”, “땅에 거주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통곡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과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남아 있던 자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것입니다(살전 4:16,17). 믿는 자들의 휴거입니다.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 그리스도는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것입니다(히 9:28). 그들은 통곡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사람들이 보는 그 때에,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3:26,27). 휴거는 조용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 즉 땅에 사는 모든 족속이 보는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날 자신들이 거절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복음을 거절한 대가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인류는 두 부류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것이며,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아갈 것입니다(요 5:28,29). 주님께서 그분의 영광으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의인들은 영생에, 불의한 자는 영벌에 들어갈 것입니다(마 25:31,32,46). 그분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통곡할 것입니다. 2. 장차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시작한 일을 마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이십니다. 지금도 계신 하나님, 전에도 계셨던 하나님께서 장차 오실 것입니다. 앞 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주 하나님께서 오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분은 시작하신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은 일곱째 나팔을 부는 날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입니다(계 11:18).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계 11:17).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계시록에서 세 번씩 말씀하여 그 말을 확증합니다. 특별히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홉 번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십니다. https://blog.naver.com/rsh6771/223836988362

인사와 경배(계 1:4~6)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1. 인사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요한은 먼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고 말합니다. 편지를 시작하면서 수신자를 밝힙니다. 수신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는 어느 교회들입니까? 주님은 요한에게 그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절). 그리고 2장과 3장에서 그 교회의 사자들을 각각 지목하시며 그들에게 보낼 말씀을 주십니다.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는 말로 서신을 시작한 요한은 그들에게 그가 본 것을 기록하여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일차적인 수신자는 당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수는 상징입니다. "일곱"은 하나님의 수로 "완전함"과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즉 일곱 교회는 완전하고 충만한 교회로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실질적인 수신자는 모든 믿는 자들입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종들(계 1:1, 22:6), 교회들(계 22:16)을 위한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는 말로 시작하였지만, 이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를 향한 인사가 될 것입니다. 2. 기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이어서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말하며 그 삼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삼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8절에서도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 즉 시작과 마침이 되십니다. “전에도”가 아니라 “이제도”가 먼저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이제도 있고”입니다. 순서상 현재가 우선입니다.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과거의 성도들과 함께 하셨고, 앞으로의 성도들과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2)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 ‘일곱’은 하나님의 완전함, 온전함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완전하고 온전한 일곱 영은 성령님이십니다.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계 4:5). 3)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를 계시하시는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근본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골 1:18). 요한은 삼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3. 경배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어서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설명하며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피를 주셨습니다. 우리를 대속하신 피는 오직 흠 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벧전 1:18). 그분은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습니다(계 5:9,10). ‘나라’는 ‘바실류스’로 ‘(절대형의)주권자 또는 왕’이라고 정의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분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고. 그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계시록에서 교회에 대해 처음 하신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나라와 제사장”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었고, 영으로는 에덴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습니다(창 1:28, 2:15). 그러나 인류가 타락함으로 통치권은 빼앗겼고(눅 4:6),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창 3:24).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 안에서 이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왕,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교회의 모든 영광은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를 왕과 제사장 삼았다는 말씀은 앞으로 전개될 계시록의 말씀을 집약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합니다(계 5:10). 요한은 영광과 능력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출처]인사와 경배(계 1:4~6)|작성자말씀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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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끝까지 밝혀야 한다” 전국 신천지 피해자들, 압수수색·특검 촉구 성명 발표

▲전국신천지피해자연대는 최근 진행 중인 압수수색과 관련 특별검 검사를 포함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전피연 사진 제공 코로나19 이후 사회 전반에 깊은 상처를 남긴 각종 범죄와 가정 파괴의 원인으로 지목돼 온 신천지에 대해, 피해자 가족들이 다시 한 번 강력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하고 나섰다. 전국신천지피해자연대는 1월 30일 성명서를 통해 최근 진행 중인 압수수색과 관련한 수사가 이번에도 흐지부지 마무리되는 것 아니냐는 깊은 우려를 표하며, 합동수사본부 또는 특별검사 도입을 포함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이들은 성명에서 “대한민국은 지금, 신천지로 인해 파괴된 가정과 인생, 그리고 각종 범죄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중대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며 “그러나 그동안 반복돼 온 수사 중단과 미진한 처벌의 전례를 떠올릴 때, 피해자들은 다시 한 번 좌절을 겪을 수 있다는 불안 속에 있다”고 밝혔다. 특히 피해자연대는 과거 수사 과정에서 ‘증거 부족’, ‘고령’을 이유로 핵심 인물들에 대한 책임 추궁이 흐려졌던 사례들을 언급하며, 이번 수사에서는 정치권과 검·경 내부의 유착 의혹이 철저히 차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신천지와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는 정치인, 경찰, 검찰 관계자들이 수사에 개입하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며 “합수부나 특검이 구성될 경우, 신천지 소속이거나 관련성이 의심되는 검·경 인력은 전면 배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전국 각지에 뿌리내린 신천지 12지파 사무실에 대해서도 동일 범죄의 온상으로 지목하며, 전면적인 압수수색과 실체 규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피해자연대는 “청년들이 학업과 직장, 꿈을 포기한 채 교주 이만희의 노예로 전락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가족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며 “이는 단순한 종교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사회적 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명서는 특히 그간 외부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내부 성폭력 사건과 각종 비리, 조직적 범죄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며, “이번 수사를 통해 정치 개입은 물론 교주를 포함한 범죄집단 신천지의 실체가 낱낱이 밝혀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아울러 피해자연대는 신천지를 향해 “부모와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간 자녀들을 즉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라”며 강력히 요구했다. 이들은 “백만 피해 가족들은 이번 수사를 끝까지 지켜볼 것”이라며 “국민들 또한 이 문제를 특정 집단의 갈등이 아닌 사회 정의의 문제로 인식하고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이번 성명은 단순한 처벌 요구를 넘어, 종교를 가장한 조직적 범죄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사법 정의의 실현을 다시 한 번 묻고 있다. 수사가 어디까지 나아갈지, 그리고 과거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수능 이후, 이단 사이비 ‘고3 학생 집중 포섭’…교회·사회 경계 강화 필요

매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직후, 이단과 사이비 단체들이 고3 학생들을 주요 포교 대상으로 삼아 활동을 강화한다는 경고가 나왔다. 여수종교문제연구소(소장 신외식 목사)는 11월 1일 “수능 이후부터 오는 2026년 3월까지 ‘이단 사이비 주의보’를 발령한다”고 밝히며 전국 교회와 학부모, 교육 관계자들의 적극적인 경각심을 요청했다. ▲여수종교문제연구소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난 직후, 이단과 사이비 단체들이 고3 학생들을 주요 포교 대상으로 삼아 활동을 강화하다며 주의를 요망했다(사진은 기사와 무관) 수능을 마친 학생들은 해방감과 진로 불안이 교차하는 심리적 공백기에 놓이기 쉽다. 이를 노린 이단 단체들은 다정한 이미지와 도움을 제공하는 척 접근하며 관계를 형성한 뒤, 조직적 포섭을 시도한다. 연구소는 “특히 수시모집으로 대학을 방문하는 고3 수험생에게 대신 원서를 접수해준다거나 정서적 위로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단 단체들의 대표적 포섭 방식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설문조사’를 명목으로 이름, 연락처, 주소 등 개인정보를 수집하는 형태다. 둘째는 문화·교육센터를 가장해 POP, 종이공예, 서예, 수화 등을 무료로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청소년을 유인한다. 셋째는 같은 학교 출신, 선후배, 동아리 인맥 등 친분을 활용한 접근이며, 넷째는 대학 내 동아리 활동을 통해 신입생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는 방식이다. 특히 연구소는 “처음에는 따뜻한 관심과 친절로 다가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성경 공부 모임이나 교리 교육으로 끌고 가며 본격적인 통제와 세뇌가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정통교회 목회자나 선교사’를 사칭하는 경우도 있어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수종교문제연구소는 이번에 ‘수능 이후 이단·사이비 이렇게 대처하자’라는 A4 자료를 전국 교회에 배포했다. 내용에는 ▲수능 이후 교회의 진로지도 및 청소년 프로그램 운영 ▲설문조사 참여 금지 교육 ▲문화센터 및 무료 강좌 출처 확인 ▲대학 신입생의 동아리 가입 시 선교단체를 통한 정보 확인 등이 포함돼 있다. “고3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가 전국 교회에서 열리고 있지만, 동시에 이단 침투에 대한 대비와 기도도 병행돼야 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연구소는 각 교회가 고등부 학생과 청년부를 대상으로 예방 교육을 강화하고, 학부모와 교역자, 선배들이 수험생의 생활과 인간관계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단 문제는 사후 처리가 아니라 사전 예방이 가장 효과적이며, 특히 수능 이후 4개월은 가장 취약한 시기”라고 재차 경고했다.

출국금지 류광수, 부산 벡스코서 청소년 집회 강연 논란

부산시의 대표적인 공공시설인 벡스코(BEXCO)가 성범죄 및 700억 원대 횡령 혐의로 수사 중인 류광수 씨가 이끄는 단체에 청소년 대상 대형 행사를 대관해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선 행사는 오는 7월 29일부터 8월 1일까지 열릴 예정인 ‘세계렘넌트대회(World Remnant Conference, 이하 WRC)’다. 세계복음화전도협회와 세계청소년교류연맹이 공동 주관하는 이 대회는 수천 명의 국내외 청소년들이 참석하는 연례행사다. 문제는 이번 대회에서 류광수 총재가 직접 무대에 올라 설교 및 강연을 할 예정이라는 점이다. 류 씨는 현재 법무부로부터 출국금지 처분을 받은 상태로, 성범죄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업무상 횡령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법조계와 시민단체는 이에 대해 강력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코람데오연대 자문변호사 김상수(법무법인 선린)는 “수많은 미성년자 청소년이 참여하는 행사에서 성범죄 수사 중인 인물을 강사로 세운다는 것은 정신건강과 발달에 심각한 위해가 될 수 있다”며 “이는 정서적 학대에 해당할 수 있으며, 아동복지법 및 아동학대방지 차원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벡스코가 부산시의 출자·출연기관이라는 점에서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다. 부산시는 벡스코의 최대 주주로 42.5%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26%를 보유하고 있다. 즉 벡스코는 사실상 공공시설로, 아동과 청소년의 안전과 정신건강 보호에 대한 공적 책무를 지닌다. 이에 대해 벡스코 측은 “해당 대관은 내부 절차에 따라 접수 및 승인된 사안”이라고 설명하면서도, “다락방(세계복음화전도협회)의 성범죄 관련 의혹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유사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한 대비와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시민단체 측은 이런 입장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입장이다. 특히 공공시설 대관의 책임성이 문제가 된 이번 사례는 단순한 행정 절차의 문제를 넘어, 아동 보호와 공공기관의 도덕적 책무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한편, 류광수 총재는 과거에도 종교적 권위를 이용한 정신적 통제와 성적 착취 문제로 언론 및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있었으며, 이번 출국금지 및 수사 상황에서도 여전히 청소년을 대상으로 강연에 나선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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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가 음해인가… 욕설 녹취 배포까지 한 ‘쌍욕 목사’ 기사, 언론 경계 넘었나

한 종교 매체가 보도한 「쌍욕하는 목사와 상처 받고 좌절하는 교역자」 기사가 교계 안팎에서 논란을 낳고 있다. 기사에는 특정 목사의 욕설 녹취와 SNS 글, 제3자의 증언이 담겼고, 독자가 녹음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어 단순한 문제제기가 아닌 개인적인 명예훼손은 물론 형사적 문제까지 번질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보도의 구성과 방식, 균형성, 공익성 측면에서 언론이 지켜야 할 최소 기준을 충족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사실 전달을 넘어 인물 공격과 여론 조성에 가까운 방식이라는 지적이다. 공익적 의제는 분명… 그러나 면책이 되지는 않는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이 사안의 주제 자체는 공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기사도 부총회장 당선과 차기 총회장 가능성을 전면에 놓고 지도자 적격성, 갑질, 언어폭력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공적 지위와 영향력이 큰 종교 지도자의 인격과 리더십은 공익적 관심사에 포함될 수 있다. 공동체를 책임질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면 검증 역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공익적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보도가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공익은 면책의 근거가 아니라 출발점일 뿐이다. 기사 작성 방식이 부정확하거나 일방적이라면 오히려 법적 위험은 더 커진다. 공익의 이름을 내세운 채 개인을 무너뜨리는 방식이라면 그 순간 보도는 공익을 잃는다. 반론 없는 기사… 김문훈 목사의 입장은 사라졌다 이 기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지점은 균형의 부재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사 안에는 김문훈 목사 본인의 해명이나 반박, 경위 설명, 사과 여부 등이 직접 인용되거나 확인된 흔적이 거의 없다. 문제 제기는 강하게 전개된다. 욕설 녹취, SNS 글, 제3자의 진술이 이어지고, 기사 톤은 “이제라도 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요구형 결론으로 곧장 나아간다. 그러나 당사자의 입장은 비어 있다. 취재 과정에서 확인을 요청했는지, 어떤 답을 받았는지조차 기사 구조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구조는 이렇게 형성된다. 문제 제기는 강하고, 근거는 제3자 자료에 의존하며, 당사자 반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균형성, 즉 반론권 보장의 원칙에서 매우 취약한 보도 방식이다. 고발문에 가까운 문체… 이미 결론이 정해진 기사 기사의 문체와 구성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이 글은 사실 보도라기보다 고발문이나 성명서, 논평에 가까운 형식으로 읽힌다. “인격과 풍문은 소문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식의 표현은 풍문을 사실 근거처럼 제시하는 방식이다. “막장” 같은 낙인성 단어는 평가를 일반화한다. “어떻게 총회를 지도하는 지도자로 세울 수 있겠는가”라는 문장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독자를 설득하려는 문장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독자에게 ‘이미 결론이 정해진 글’이라는 인상을 준다. 실제 사실관계와 별개로 매도와 편파 논란을 불러오기 쉬운 편집이다. 녹취파일 다운로드 제공… 보도에서 확산으로 넘어간 지점 이번 기사에서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욕설 녹취파일을 독자가 직접 내려받을 수 있도록 안내한 점이다. 이는 사실 전달의 영역을 넘어 개인 발언을 대중에게 직접 확산시키는 행위다. 언론은 필요에 따라 자료를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녹취 전체를 배포하거나 다운로드를 유도하는 방식은 보도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정 확산과 낙인의 재생산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독자는 사건의 본질보다 욕설 자체에 집중하게 되고, 인물에 대한 혐오 감정이 강화된다. 언론이 사실 전달자가 아니라 감정 유통자로 변하는 순간이다. 더구나 이런 행위는 형사적 책임의 면책을 벗어날 소지보다 책임을 더 강하게 물을 수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법률적으로도 취약… 공익과 인격 침해의 경계 이 기사에는 법적 위험 요소도 적지 않다. 특정 인물의 인격 결함과 지도자 부적격을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반론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녹취와 평가를 결합했다는 점은 명예훼손 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녹취파일 다운로드 제공은 공개 범위의 적정성, 동의 여부, 편집 가능성 등 추가적인 법적 쟁점을 낳는다. 사적 발언이 맥락 없이 유통될 경우 인격권 침해 문제까지 제기될 수 있다. 홈페이지 갈무리 신앙 공동체의 기준에서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언론 윤리를 넘어 신앙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경은 사랑이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말한다. 이는 잘못을 숨기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경고다. 기사에서 이 문제와 관련된 사역자와 사과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이미 사과와 해결이 있었던 사안이라면 그것을 현재형 공격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공동체 회복과 거리가 멀다. 회개를 촉구하는 보도와 인물을 낙인찍는 보도는 다르다. 전자는 공동체를 살리고, 후자는 공동체를 찢는다. 공익의 이름으로 행해진 판단이라면 종교 지도자 검증은 필요하다. 그러나 검증은 절차와 균형 위에서만 설득력을 가진다. 반론이 없고, 맥락이 비어 있으며, 결론이 먼저 제시되고, 녹취까지 확산시키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보도가 아니다. 이미 판단을 강요하는 행위다. 공익을 말하려면 절차가 먼저다. 비판을 하려면 균형이 먼저다. 고발을 하려면 책임이 먼저다. 언론이 공익의 이름으로 개인을 무너뜨리는 순간, 그 피해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로 번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폭로가 아니라 성찰이다. 언론이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 말이다.

"작은 교회의 비밀은 '명확한 비전'과 '가족 같은 분위기'"

목회데이터연구소가 10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개최한 '제4차 목회데이터 포럼'에서 출석교인 50명 미만 '강소교회'에 대한 대규모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전국 소형교회 담임목사 300명과 교회 출석자 400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9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됐으며, 소형교회가 '작지만 강한 교회'로 성장하기 위한 핵심 요인과 현실적 어려움을 동시에 드러냈다. 예장통합교단 교세 현황에 따르면 전체 교회 중 출석교인 50명 이하 교회가 58%로 절반을 넘어, 소형교회가 이미 한국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조사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소형교회가 단순히 '작은 교회'에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 경쟁력 있는 '강소교회'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기획됐다. 명확한 비전과 설교가 만족도 높인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조사 결과, 교인들이 현재 교회에 만족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분명한 비전과 방향성'(38.9%)과 '목사님의 설교'(36.9%)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교인 간 관계가 끈끈하고 또래와 친밀한 교제가 있어서'(35.2%), '담임목사의 리더십'(22.8%) 순이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특히 소형교회의 최대 강점으로는 '성도 간 가족적 분위기(강한 유대감)'가 67.8%로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 약 3명 중 2명이 소형교회만의 친밀한 공동체성을 가장 큰 장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대형교회에서 느끼기 어려운 긴밀한 관계성과 돌봄이 소형교회의 핵심 경쟁력임을 보여준다. 김진양 목회데이터연구소 부대표는 "소형교회가 강소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 요인은 '목회 비전'과 '공동체 구현'으로 나타났다"며 "소형교회의 정체성과 강점을 살리는 목회 방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재정 취약성 심화, 외부 지원도 감소 추세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반면 소형교회의 재정적 취약성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소형교회의 작년 총 결산 규모는 평균 5,442만원, 중위값은 5,000만원 미만으로 집계됐다. 절반 이상(51%)이 연 예산 5천만 원 미만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특히 15명 미만 교회의 평균 결산액은 2,420만원에 불과했다. 반면 30~50명 미만 교회는 8,131만원으로 약 4배 차이를 보여, 교회 규모에 따른 재정 격차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더 큰 문제는 외부 재정 지원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부 지원이 감소하고 있다'고 응답한 목회자는 36.5%로, 소형교회 3곳 중 1곳은 외부 지원이 줄어들고 있었다. '증가하고 있다'는 응답은 9.5%에 불과했다. 헌금·봉사 부담이 교회 이탈 요인 성도들의 교회 이탈 의향도 주목할 만한 수치를 보였다. 소형교회 성도 4명 중 1명(27.5%)은 교회 이탈 의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탈을 고려하는 주요 이유로는 '설교에 대한 불만족'(24.6%)이 가장 높았고, 이어 '헌금에 대한 부담감'(22.0%), '봉사에 대한 부담감'(18.8%), '성도 간 관계에서의 소외감'(18.7%) 등이 꼽혔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이는 소형교회일수록 헌신과 재정 부담이 특정 개인에게 집중될 경우 이탈 위험이 커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헌금과 봉사가 자발적이지 않고 의무로 인식될 때 교회를 떠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목회자의 자책감과 경제적 빈곤 심각 소형교회 목회자들이 겪는 어려움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목회자의 개인적 어려움으로 '나의 역량 부족'이 48.3%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교회에 불만족을 느끼는 이유로는 '교회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아서'가 40.5%를 차지했다. 이는 소형교회 목회자가 느끼는 패배감과 무기력감이 목회 지속에 심각한 장애 요인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 심각했다. 소형교회 목회자 중 29.0%는 사례비를 비정기적으로 받거나 아예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사례비를 받는 목회자의 연 평균 사례비는 2,093만원에 불과했다. 특히 15명 미만 교회 목회자의 평균 사례비는 1,230만원으로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수준이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이로 인해 소형교회 목회자의 23.7%, 사모의 49.2%가 목회 외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목회 외 겸직이 선택이 아닌 생계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강소교회는 한국교회의 현실적 대안" 이날 포럼에서는 통계 발표와 함께 어울림교회(임원빈 목사)와 사귐의교회(강정규 목사)의 실제 개척 및 성장 사례가 소개됐다. 김선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합 분석을 통해 "작은 규모 자체가 약점이 아니라, 소형교회에서만 가능한 긴밀한 관계성과 공동체적 역동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강소교회의 핵심"이라며 "강소교회는 한국교회의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지용근 대표는 "이번 조사를 통해 소형교회가 직면한 현실과 가능성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며 "명확한 비전, 좋은 설교, 가족 같은 관계를 중심으로 한 목회 전략이 강소교회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번 조사 결과 발표는 추후 목회데이터연구소 유튜브 채널(youtube.com/@mhdataTV)에 공개될 예정이다.

벼랑 끝에 선 아이들, ‘중독’의 늪에서 구하라… 국회서 울려 퍼진 골든타임 경고음

청예본의 세미나 진행 모습 2026년 대한민국 청소년들이 위험하다. 과거 술이나 담배에 머물렀던 청소년 비행은 이제 마약류 확산, 온라인 불법 도박, 성범죄와 결합한 디지털 중독 등 범죄와 직결된 고위험군으로 급격히 다변화되고 있다. 특히 SNS 등 디지털 플랫폼의 발달은 중독의 문턱을 낮추고 연령대를 초등학생까지 끌어내리는 등 우리 사회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다. 이에 지난 2월 9일, 국회도서관 소강당에서 국회와 학계, 시민사회가 한자리에 모여 청소년 중독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청소년 중독 예방 촉진 연구 포럼’이 열렸다. 국민의힘 조정훈·김민전·서지영 의원실과 사단법인 청소년중독예방운동본부(이사장 홍호수, 이하 청예본)가 주최한 이번 포럼은 단순한 실태 보고를 넘어 AI 뇌과학적 접근과 미래적 재활 대안을 논의하며 국가적 과제로서의 중독 예방 시스템 구축을 촉구했다. 인사말을 하는 홍호수 목사 인사말에서 청예본 홍호수 이사장은 “청예본은 중독으로 고통받고 가정들을 중독의 폐해로부터 구해내는 국민운동을 하고 있다.”며 “우리가 예방과 재활을 위해 달려가는 속도보다 중독의 속도가 빠르다. 중독 예방의 핵심은 반드시 청소년기에 시작해야 한다.”면서 “한 번 중독의 길에 들어서면 회복 과정은 매우 어렵고 고통스럽다.”고 강조하고 “치료 시기를 놓칠 경우 평생 전문가의 도움에 의존하거나, 중독으로 인해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또한 홍 이사장은 “그동안 청예본이 500여 명의 강사를 발굴 교육했지만 우리 목적은 매년 1천 명 이상의 강사진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중독자도 더 많기 때문이다"며 "재활시설 부족도 큰 상황이지만 아직 우리 청예본의 능력으론 재정 및 여력이 미치지 못해서 회복을 위해서 더 나아가야 하는 길에서 안타까움만 더하고 있지만 국회와 종교계가 더 큰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란다”고 관심을 촉구했다. 청소년 중독세미나의 기념 사진 “중독은 사회가 방치한 결과”… 정치권, ‘버텨라’ 대신 ‘지켜주겠다’ 약속 국회 일정으로 참여치 못한 조정훈 의원, 김민전 의원. 서지영 의원이 개회사를 장동혁(국민의힘/당대표), 송언석(국민의힘/원내대표), 정점식(국민의힘/정책위원장), 김용태(국민의힘/의원) 등이 보낸 축사문으로 오늘 포럼에 힘을 보태어 오늘 ‘중독없는 건강한사회, 청소년 중독 예방 촉진 연구포럼’에 중요함을 밝혔다. 한편 이날 배포한 자료집에서 개회사를 한 포럼 주최 조정훈 의원은 “지금의 청소년 중독 문제는 개인의 선택 이전에 사회가 어떤 환경을 허용하고 무엇을 방치했는지를 되묻는 질문”이라며, “중독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며, 치료가 아닌 예방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할 국가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김민전 의원 역시 자료집 축사에서 “청소년 중독은 공교육이 감당해야 할 핵심 정책”이라며, “학교와 지역사회, 전문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회복 중심의 지원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점식 정책위의장은 자료집에서 “10대 마약 사범이 2005년 30명에서 2023년 1,477명으로 폭증했다”며, AI·뇌과학 기반 분석 체계 도입과 국가 컨트롤타워 재정비를 지체할 수 없는 국가적 의무로 규정했다. 10대 마약·도박·디지털 성범죄… ‘스마트폰’이 중독의 고속도로 본격적인 발제에서는 현장의 생생한 실태와 과학적 진단이 이어졌다. 최경찬 박사(법무부 주무관)는 국내 마약 사용 실태를, 김영한 대표(Next세대Ministry)는 현대 청소년 문제의 동향을 짚었다. 스마트폰 중독이 불러오는 청소년 문제를 지적하는 김영한 목사 김영한 대표는 특히 스마트폰이 청소년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부산 가정법원 판사의 말을 인용해 “청소년 사건 150여 건 중 거의 모든 사건이 스마트폰과 관련되어 있다”며, 초등학생들이 음란물을 강제 시청하게 하거나 신체 접촉을 시도하는 등 디지털 성범죄의 저연령화 실태를 고발했다. 또한 유해 미디어 노출은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의 상당수가 경험하고 있을 정도로 일상화되었으며, 이는 곧 중독으로 가는 관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AI 뇌과학으로 본 중독 메커니즘… “예방 교육의 패러다임 바꿔야” 이창배 박사(오이코스대 교수)는 중독을 AI 뇌과학적 현상으로 분석하며 과학적 접근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청소년기의 뇌는 아직 발달 중이기에 중독 물질이나 자극에 노출될 경우 성인보다 훨씬 치명적이며 회복 또한 수배 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창배 박사는 중독과 뇌의 메카니즘을 강의했다. 이미숙 박사(중독전문치유새움교육원장)는 미래적 대안 연구를 통해 현재의 실효성 없는 방안들을 비판하며, 지금 당장 ‘씨를 심는’ 심정으로 대안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법적 강화뿐만 아니라 지자체별 예방 교육 활성화, 학교 내 상담 프로그램 운영, 민간단체의 멘토링 등이 입체적으로 작동해야 함을 시사했다. 민간 현장의 외침… “5년간 강사 400명 양성, 이제 국가가 나서야” 포럼을 공동 주최한 청예본의 홍호수 이사장은 지난 5년간의 성과와 향후 계획을 발표했다. 홍 이사장은 “중독은 반드시 청소년기에 선제적으로 예방해야 한다”며, 지난 5년간 400명의 전문 강사를 배출한 데 이어, 사랑의열매 지원을 통해 향후 3년간 1,000명의 강사를 추가로 양성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청소년들이 스스로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중독 예방 전문 캠프’를 본격화하고, 영적 회복과 사회 복귀를 돕는 ‘청소년 중독재활 영성센터’ 설립 계획을 밝히며 민간 차원의 사각지대 해소 노력을 설명했다. 종합 토론: “낙인 아닌 치유로, 고립 아닌 연대로” 이어진 토론에서는 김도형 박사(기독교 국제중독전문원장), 윤석주 교수(한국열린사이버대), 신애자 교수(하이맘심리상담센터)가 참여해 열띤 논의를 벌였다. 전문가들은 중독 청소년을 ‘범죄자’로 낙인찍어 사회 밖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학교와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 따뜻한 치유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데 입을 모았다. 이용희 대표(바른교육교수연합)는 “한 아이를 중독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온 국가와 학계, 시민사회의 지혜가 결집되어야 한다”며 ‘중독의 대중화 시대’에 걸맞은 국민적 인식 변화를 촉구했다. 결론: 대한민국의 지속 가능한 미래, ‘중독 제로’에서 시작된다 이번 포럼은 청소년 중독 문제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을 넘어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가르는 국가적 위기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2026년 현재,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화려한 빛 이면에 중독이라는 짙은 그림자 속에 방치되어 있다. 정치권의 입법 의지와 민간의 헌신적인 활동, 그리고 AI 뇌과학 등 최신 기술을 결합한 통합적 대응 체계만이 우리 아이들을 벼랑 끝에서 구할 수 있다. "버텨라"고 말하기보다 "지켜주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회, 중독이 아닌 '성취'를 향해 꿈꿀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 기성세대의 가장 시급한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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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얕은 인맥은 옛말”... 대한민국, ‘관계 가성비’와 ‘소수 정예’에 빠지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의 인간관계 지형도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과거의 인맥 관리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의 논리에 따라 인맥의 넓이를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면, 2026년을 앞둔 현재의 트렌드는 ‘관계의 효율화’와 ‘선택과 집중’으로 요약된다. 무분별한 인간관계 확장보다는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소수의 핵심 관계에 쏟아붓는 이른바 ‘관계 가성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지인 수’ 줄었는데 ‘행복지수’는 올랐다... 역설적 지표의 의미 한국리서치가 발표한 ‘2025 인간관계인식조사’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우리 국민이 인지하는 ‘평소 친밀한 지인 수’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2022년 평균 6.4명이었던 지인 수는 2023년과 2024년을 거쳐 2025년 현재 4.1명으로 집계되며 조사 이래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흥미로운 지점은 관계의 양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 만족도’는 오히려 상승했다는 점이다. 2025년 관계 만족도는 6.4점(10점 만점 기준)으로 2022년 조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는 현대인들이 불필요한 인맥을 걷어내고 내실 있는 관계에 집중함으로써 정서적 포만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음을 시사한다. 연령별로는 70세 이상의 만족도가 7.0점으로 가장 높았고, 18~29세 청년층이 6.7점으로 뒤를 이었다. 특히 가장 젊은 세대와 가장 고령 세대가 전년 대비 만족도 상승폭(각 0.5점)이 가장 컸다는 점은, 두 세대가 각자의 방식대로 관계의 질을 높이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 “다수보다 소수, 다양성보다 동질성”... 유유상종형 관계 선호 조사 결과, 우리 국민의 89%는 ‘다수와 얕은 관계’보다 ‘소수와 깊은 관계’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특히 여성(37%)과 2030 청년세대(20대 46%, 30대 40%)에서 이러한 경향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관계의 대상에 있어서도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을 선호하는 비율이 72%에 달했다. 이러한 ‘유유상종형’ 선호 현상은 남성(63%)보다 여성(80%)에서, 그리고 60대 이상 고령층(80~82%)에서 압도적이었다. 이는 사회적 경험이 쌓일수록 성격이나 가치관의 ‘다름’에서 오는 갈등과 에너지 소모를 피하고, 공감대 형성이 쉬운 안정적인 관계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이러한 데이터는 교회 소그룹이나 커뮤니티 활동 전략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성원 간의 다양성을 강요하기보다는 관심사나 연령대가 비슷한 이들을 그룹화하여 초기 정착의 문턱을 낮추고 공감대를 극대화하는 편성이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관계에도 도입된 ‘가성비’ 논리... 75%가 “부담되는 인맥 정리했다”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임계점에 달하면서, 이제는 관계 맺기에도 ‘효율성’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응답자의 58%는 한정된 시간과 감정을 고려해 인간관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관계 가성비’ 중심의 태도를 보였다. 65%는 의미 없는 상대에게 들이는 ‘감정노동’에 고통을 느낀다고 답했다. 실제로 국민 4명 중 3명(75%)은 부담스러운 인간관계를 직접 정리한 경험이 있었다. 정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정서적 피로감(46%)’이었다. 만남 후에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거나 에너지가 방전되는 관계라면 과감히 단절을 택하는 ‘관계 다이어트’가 보편화된 것이다. 덕분에 2023년 58%에 달했던 인간관계 피로감 경험률은 2025년 48%로 떨어지며 조사 이래 처음으로 40%대에 진입했다. ■ 세대별 온도 차... ‘축소’에 힘주는 30대 vs ‘확장’ 열망하는 70대 인간관계를 대하는 태도는 세대별로 확연히 달랐다. 30대는 관계 확장에 가장 소극적(34%)인 반면, 관계 축소 및 정리에는 가장 적극적(51%)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직장 내 경쟁, 육아, 경제적 자립 등으로 인해 에너지 소모가 극심한 30대가 새로운 관계를 ‘부담’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반면 70세 이상 고령층은 관계 유지(92%)와 확장(54%) 모두에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은 의지를 보였다. 이는 노년기 고립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이 연결에 대한 강한 욕구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디지털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만남에 대한 열망은 전 세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국민 86%가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친구 맺기를 선호했으며, 특히 2030 세대에서 오프라인을 ‘매우 선호’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나 대면 접촉을 통한 실질적 정서 교감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었다. ■ 스트레스 1위는 ‘불통’... 지인 많으면 ‘감정 기복’, 적으면 ‘소외감’ 인간관계 스트레스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숙제다. 국민 63%가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으며, 주된 발원지는 ‘일터(직장 동료 66%, 상사 65%)’였다. 특히 3040 세대는 직장 내 갈등, 20대는 친구 관계, 40대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레스 유발의 핵심 요인은 ‘대화와 소통의 부재(54%)’였다. 이어 ‘반복되는 갈등(47%)’, ‘상대방의 감정 기복(37%)’ 순이었다. 특이한 점은 지인 수에 따라 스트레스의 종류가 달랐다는 점이다. 지인이 10명 이상인 응답자는 ‘상대방의 감정 기복’으로 힘들어한 반면, 지인이 전혀 없는 응답자는 ‘소외감과 거리감’을 주된 고통으로 꼽았다. 결국 너무 넓지도, 너무 좁지도 않은 ‘적정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현대인의 심리 방역에 핵심 과제임을 알 수 있다. 이번 조사를 진행한 전문가들은 “현대인의 인간관계가 ‘양적 팽창’에서 ‘질적 심화’로 옮겨가고 있다”며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과 결이 맞는 사람들과 깊게 교류하는 것은 개인의 정신 건강을 위한 중요한 생존 전략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종교단체 해산을 제도화하는 길 열어”

종교의 자유와 헌법 질서를 정면으로 위협하는 민법 개정안이 국회에 발의되자,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전국 17개 광역시도 기독교 연합체로 구성된 17개광역시도‧악법대응본부(이하 악대본)는 1월 27일 성명서를 통해 “이번 민법 개정안은 사실상 종교단체 강제 해산법”이라며 즉각적인 철회를 촉구했다. 악대본에 따르면, 이번 논란의 중심에 선 법안은 최혁진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공동 발의한 민법 개정안이다. 법안은 비영리법인이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하거나 공직선거법 등을 위반해 정치 활동에 개입할 경우, 설립 허가를 취소하고 해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영리법인 규제라지만, 실질적 대상은 종교법인” 악대본은 성명에서 “법안은 적용 대상을 비영리법인으로 명시하고 있으나, 조문에 ‘정교분리 원칙’을 굳이 삽입한 점에서 종교법인을 직접적인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개신교 교단 총회, 기독교 연합기구, 종교계 재단법인, 종교계 방송사 등 광범위한 종교법인이 법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정안에는 행정기관이 ‘정교분리 위반이나 정치 개입의 의심이 상당한 경우’라는 판단만으로 법원의 영장 없이도 법인 사무소에 출입해 장부와 재산을 조사하고, 관계자를 상대로 질문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해산 시에는 잔여 재산을 국고에 귀속하도록 하는 내용도 담겼다. 악대본은 “이는 헌법이 보장한 영장주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조항이며, 행정 권력이 종교기관을 직접 압수·수색할 수 있게 하는 독재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일제 ‘포교규칙’ 떠올리게 하는 위험한 입법” 성명서는 이번 법안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포교규칙」에 비유했다. 악대본은 “일제는 정교분리라는 명분을 내세워 종교가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통제했고, 포교 활동 전반을 허가와 보고의 대상으로 묶었다”며 “이번 민법 개정안 역시 왜곡된 정교분리 개념을 통해 종교를 정치·사회 현실로부터 분리시키고, 국가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특히 악대본은 “서구 민주국가의 정교분리는 국가가 종교에 간섭하지 않는 원칙이지, 종교의 공적 발언과 사회 참여를 봉쇄하는 제도가 아니다”라며 “이번 법안은 정교분리를 종교 통제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종교 자유 아닌 행정 관리 대상으로 전락” 악대본은 이번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종교가 더 이상 자유의 영역이 아니라 ‘행정 관리 대상’으로 취급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헌금과 기부금으로 형성된 종교법인의 재산을 국가가 몰수할 수 있도록 한 조항에 대해서도 “종교 탄압의 전형적인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현행 민법은 해산된 법인의 재산을 정관에 따른 목적이나 유사한 목적을 위해 처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개정안은 이를 국고 귀속으로 전환해, 국가가 종교 재산을 직접 흡수하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각 철회 없으면 거센 저항 불가피” 악대본은 성명 말미에서 “이 법안은 정치적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동시에 침해하는 반민주적 악법”이라며 “즉각 철회하지 않을 경우,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번 민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한 법률 개정 문제를 넘어, 정교분리의 의미와 헌법이 보장한 종교 자유의 경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한국 사회에 던지고 있다. 국회의 책임 있는 논의와 헌법적 재검토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처벌이 아니라 말소다”… 헌법 질서 흔드는 ‘해산권’의 역설

[기획/진단] 22대 국회에서 논의 중인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종교계와 시민사회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법안은 ‘법인격 남용 방지’와 ‘헌법 질서 수호’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그 실질을 들여다보면 특정 단체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강력한 ‘해산권’을 행정부에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법 행위가 있다면 법에 따라 처벌하면 될 일이지, 왜 공동체의 존립 근거를 통째로 박탈하려 하느냐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존재의 소거: 행위 처벌을 넘어선 법적 사형선고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주무관청이 비영리법인(종교·시민단체 포함)의 설립 허가를 취소할 수 있는 근거를 대폭 확장한 데 있다. 법안에 따르면 주무관청은 특정 법인이 ▲정교분리 원칙 위반 ▲선거·정당·후보자와 관련한 ‘조직적·반복적 정치 개입’ ▲‘공익을 현저히 해한 때’에 해당한다고 판단할 경우 설립 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형사 처벌이나 과태료 같은 행정 제재를 넘어, 법인이 쌓아온 공동체의 역사와 기반을 일시에 소멸시키는 조치다. 특히 위법 행위에 대한 명확한 사법적 판단이 내려지기 전이라도 행정권의 자의적 해석에 의해 해산권이 발동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이는 법치의 강화를 넘어, 국가가 민간 단체의 생사여탈권을 쥐는 구조로 흐를 위험이 크다. 헌법 제20조의 위기: 종교의 자유는 ‘내면’에만 갇혀야 하는가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마음속 신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 설교, 집단적 선언, 그리고 사회적 실천이라는 공적 영역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헌법재판소 역시 종교의 자유가 공적 영역에서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판례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개정안은 종교를 철저히 사적 영역으로 유폐시키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 법안의 논리는 “종교는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러야 하며, 조직적으로 공적 사안에 목소리를 내면 해산될 수 있다”는 위협으로 비칠 수 있다. 이는 종교의 자유를 국가가 ‘허가한 범위 내에서의 침묵’으로 전락시키는 일이다. 신앙에 기초한 사회적 발언이 ‘정치 개입’으로 간주되어 단체의 존립을 위협받게 된다면, 이는 헌법상 기본권에 대한 본질적 침해로 볼 수밖에 없다. 정교분리의 왜곡: 권력 분리의 안전장치가 발언 통제의 도구로 정교분리 원칙의 본질은 국가 권력이 특정 종교를 이용하거나 억압하지 못하도록 하고, 종교가 국가 권력을 직접 행사하지 못하게 하는 ‘상호 간섭 금지’에 있다. 즉, 국가로부터 종교의 자율성을 지켜내기 위한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개정안은 이를 ‘종교단체의 정치적 의견 표명 금지’라는 프레임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종교단체가 특정 사안에 대해 조직적으로 의견을 내는 행위 자체를 정교분리 위반으로 보는 것은, 이 원칙을 권력 분리의 원칙이 아닌 ‘발언 통제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처사다. 인류 역사상 노예제 폐지나 민주화 운동 등 수많은 인권 진보가 종교의 공적 발언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이 법안의 논리는 역사의 퇴보를 불러올 수 있다. ‘공익’이라는 모호한 칼날: 자기 검열과 위축 효과의 서막 법안에서 가장 치명적인 독소 조항으로 꼽히는 것은 **‘공익을 현저히 해한 때’**라는 문구다. 무엇이 공익인지, 어느 정도가 ‘현저한’ 수준인지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법률은 명확해야 하며, 국민이 자신의 행위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명확성의 원칙’은 법치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처럼 모호한 문구는 정권의 성향이나 행정부의 입맛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 해석될 수 있다. 결국 단체들은 “해산당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스스로 입을 닫는 **‘위축 효과(chilling effect)’**를 겪게 될 것이며, 이는 법안이 시행되는 순간부터 민주주의의 근간인 공론장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해외 사례와 대조: 민주적 모델인가, 통제적 모델인가 민주주의 선진국인 독일이나 프랑스 역시 단체 해산 제도를 두고 있지만, 그 적용 기준은 극도로 엄격하다. 헌정 질서를 파괴하려는 폭력적 전복 시도나 테러 연계가 명백한 경우에 한해, 사법부의 엄격한 판단을 거쳐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단순히 정치적 발언이나 이념적 주장만으로 종교·시민단체를 해산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정치적 발언을 빌미로 종교 활동을 제한하고 해산을 명하는 구조는 오히려 중국식 통제 모델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가가 종교를 ‘관리’하고 허가된 활동만 허용하는 방식은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통제 중심의 비영리법인을 강제하는 법안은 종교탄압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사진은 포괄적차별법과 관련한 반대집회 모습 해산의 문을 여는 순간, 헌법의 방파제는 무너진다 역사는 증언한다. ‘공익’을 명분으로 휘두른 해산권은 언제나 가장 비판적인 소수에게 먼저 향했으며, 그 문이 한 번 열리면 결국 사회 전체의 자유가 잠식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특정 종교나 정파의 이해관계를 넘어선 ‘헌법적 이성’이다. 이 법안은 단순히 특정 단체를 겨냥한 칼날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헌정 질서의 토대를 묻는 질문이다. 국가가 공동체를 합법적으로 말소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는 순간, 우리가 누려온 자유의 공간은 돌이킬 수 없이 축소될 것이다. 이제는 감정이 아닌 법과 헌법의 언어로 이 입법 폭주를 멈추고 공적 이성을 회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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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말씀, 창조주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다

유듀브 동영상 갈무리 1.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 비웃음 속에 찾아온 낯선 초대 저는 대구에서 나고 자란 뼛속까지 불교 집안의 자녀였습니다. 제게 교회란 그저 ‘천국과 지옥’이라는 보이지 않는 담보로 사람들을 현혹해 장사를 하는 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저 또한 평생을 교회를 욕하며 지냈습니다. 서른다섯 되던 해, 서울에서 사업에 매진하던 제게 뜻밖의 제안이 찾아왔습니다. 평소 신앙이 깊어 보이지 않던 한 지인이 ‘크리스천 CEO 스쿨’을 추천한 것이지요. "저 형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습니다. 이전에도 친구를 따라 새벽기도에 가본 적은 있었으나,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기겁하여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기억뿐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CEO 스쿨의 ‘섬김의 리더십’ 강의는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비록 속으로는 "나중에 저들도 뒤에서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기도하겠지"라고 비웃었지만, 그들의 삶에 배어있는 진정성은 제 차가운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녹여갔습니다. 2. 창조의 확증: 원숭이의 후예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여름 방학 중 떠난 ‘미국 창조과학 탐사’ 비전트립이었습니다. 그저 휴가나 다녀오자는 마음으로 신청한 그곳에서 지질학자 출신의 한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본래 철저한 진화론자였던 그분이 어떻게 성경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강의를 듣는 동안, 제 평생을 지탱해온 진화론의 허구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사실이다. 이것은 팩트다.” 그 외침이 제 심장에 박혔습니다. 제가 우연히 생겨난 원숭이의 후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 속에 지어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 그분이 바로 제가 그토록 욕했던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자 세상 모든 만물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옆에 앉은 장로님부터 어린아이 한 명까지 모두가 너무나 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였고, 그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제 안에서 솟구쳤습니다. 3. 주인이 바뀌는 회개: 내 삶의 보좌를 내어드리다 예수님을 창조주로 영접하고 나니 비로소 제가 지은 ‘진짜 죄’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저는 제가 꽤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열심은 결국 나를 주인 삼고 내 영광을 위해 살아온 교만일 뿐이었습니다. 진짜 죄는 살인이나 강도가 아니라, 내 생명의 주인인 창조주를 거부하고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고집했던 바로 그 마음이었습니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감했습니다. 제 생명보다 귀한 자식의 생명인데, 하늘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사랑의 확증은 없었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나니 과거에 함부로 대했던 인연들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관계가 끊겼던 친구들과 퇴사한 직원들에게까지 일일이 전화를 걸어 "당신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형상인지 몰랐다"고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며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해 나갔습니다. 4. 팩트를 외치는 사명: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다 이제 제 삶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팩트’를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진화론과 공산주의라는 거짓 사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가리고 성경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귀의 전략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 현장이나 대형 교회 앞에서도 이 복음을 타협 없이 전합니다. 때로는 과격하다는 소리를 듣고 불편해하는 시선도 마주하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보다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 더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으나, 영원한 내일인 ‘천국과 지옥’ 중 어디로 갈 것인지는 반드시 정해야 합니다. 믿음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전적인 선물입니다. 저처럼 평생 교회를 욕하던 완악한 사람도 창조주를 만나 새 생명을 얻었듯,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삶의 주인을 바꾸는 참된 회개를 경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간증 출처 : 간증. 풀버전. 국대떡볶이 김상현 대표

“하나님은 사람을 먼저 예비하신 뒤, 길을 여신다”

1997년, 아프리카 중서부 케냐에 들어가 27년 동안 한결같이 케냐를 사랑하고 온몸으로 사랑을 전하다가 2023년 7월 5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토록 사랑하던 그곳에서 하나님께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선교의 삶 가운데 일어났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간증을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TWNt6PiiJg0)에서 발췌하여 싣습니다. -편집자 주- ▲ “제가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그다음에 저를 그 길로 밀어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케냐의 오지, 기독교인이 거의 없는 이슬람권 지역에서 사역해 온 이원철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여정에 대해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이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 고백은 추상적인 신학적 표현이 아니라, 한 아이의 생명이 꺼져가던 시간 속에서 ‘기가 막히게’ 준비되어 있던 사람들, 문, 돈, 그리고 결정을 통해 확인된 현실의 기록이다. 이 간증은 ‘믿으면 된다’는 단순한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왜 그 순간에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가’, ‘왜 그 문이 그때 열렸는가’, ‘왜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를 촘촘히 되짚으며, 한 선교사가 경험한 섭리의 디테일을 따라가게 만든다. 1. “예배 때마다 밀려오던 사랑”이 방향을 바꿨다 그가 처음 선교사의 길을 결심한 계기는 거창한 ‘소명 체험’의 장면이 아니라, 반복되는 예배의 시간이었다. 그는 “매주일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너를 구했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왔다”고 말한다. 그 사랑이 계속해서 그를 압박했다. “내가 나를 위해 살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보답하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결론은 단순했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길”이라는 확신. 그 확신은 그를 케냐의 오지로 데려갔다. 2. “현상금이 걸린 사역지”… 그러나 더 큰 전쟁은 ‘집 안’에서 시작됐다 사역지는 험했다. 그는 “무슬림들이 나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죽이면 얼마”라는 말을 담담히 꺼낸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담대한 믿음을 주셔서 두려움 없이 사역한다”고 했다. 그런데 선교지에서 가장 깊은 흔들림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가족의 위기’에서 왔다.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보딩스쿨)에 아이를 맡기고 사역하던 어느 때, 큰아이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밤에 잠을 못 자고, 화장실을 자주 가고, 먹지 못하고, 물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마셨다. 체중은 급속도로 줄어들어 마침내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내려갔다. 병원은 “이 아이가 이렇게 말라가면 죽는다”고 했다. 케냐에 있던 의료진, 미국에서 온 의료선교사 의사들까지 원인을 찾지 못했다. “이 방법도, 저 방법도” 다 해봤지만, 답은 없었다. 3. “회교 병원에 가라”는 권유 앞에서—그는 왜 ‘거절’했나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케냐 나이로비에 위장 전문의가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예약까지 잡혔다. 병원 이름도 있었다. 아가칸(Aga Khan) 병원.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이상할 만큼 결박되었다. 그는 그 병원을 “회교 병원”이라고 표현하며, 그 문턱을 넘는 순간을 상상했다. 병원 서류에 적힐 “부모 직업: 기독교 선교사”라는 한 줄.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올 것 같은 조롱—“네가 믿는 하나님으로는 아이를 못 살려서 여기 왔느냐.” 의료적 판단만 놓고 보면, ‘가야 한다’는 결론이 상식적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이 비난받을 수 있다”는 영적 문제로 받아들였다. 간호사 선교사가 격하게 반응할 만큼 그는 단호했다. “나는 이 아이를 회교 병원에 데려갈 수 없다.” 이 대목에서 그의 신앙은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고 싶어 하는 신앙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그 결정이야말로 이후의 모든 길을 여는 ‘첫 단추’였다고 회고한다. 4. “아내의 울음”… 그리고 한 줄기 균열 하지만 믿음의 고백은 흔들리지 않는 강철이 아니었다. 현실은 계속해서 ‘급박’으로 밀어붙였다. 어느 날, 사역 일정 중이던 그에게 아내의 전화가 걸려왔다. “제 아내는 잘 울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내는 울고 있었다. 흐느끼는 목소리로 전해진 말은 단순했다. “아이(큰아들)가 화장실 갔다가 오면서 쓰러졌어요.” 그는 차를 세웠고, 마음 한가운데로 “이 아이가 죽는구나”라는 직감이 찔러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덮쳤다. “죽을 때 아빠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그는 남은 거리(약 한 시간 반)를 달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5. “응답은 받았는데… 왜 현실은 안 변하는가” 기도팀에서 연락이 왔다.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이 이 일을 고치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기뻤다. 아이에게 달려가 “하나님이 너를 고치셨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도 기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하루 이틀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토하고, 힘들어하고,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엔 낙심이 쌓였다. 그때 그가 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는 차를 닦고 있었다. 그 평범한 순간에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셨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지만, 하나님은 이미 고치셨다. 그러나 그 고치신 ‘시점’이 우리에게 도달할 때, 우리는 그 치유를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 그는 이 깨달음을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믿음의 시간표’로 받아들였다. 아이에게 다시 말했다. “인정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너를 고치셨다. 그 시점까지 믿음을 잃지 말자.” 6. LA로 가라는 낯선 초대—“갈 형편이 아닌데, 길이 열렸다” 그때 또 하나의 의외의 통로가 등장한다. LA로 오라는 메시지. 그것도 넉넉해 보이지 않는 한 전도사에게서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이는 누워 있어야 했고, 선교지 사역은 진행 중이었다. 무엇보다 항공권 값이 문제였다. 그런데 그는 기도 중 “네가 LA 가서 할 일이 있다”는 마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곧, 마치 그 ‘마음’에 반응하듯 한 사람이 나타난다. 이미 고인이 된 한 목회자가 그에게 3천 불을 건네며 말했다. “병원 좀 데려가 봐.” 놀랍게도 그 돈은 “두 사람 비행기 값”과 거의 맞아떨어졌다. 그는 그 돈을 사역비로 쓰고 싶었지만, 마음에 주어진 ‘LA로 가야 한다’는 부르심을 따라 항공권으로 바꿨다. 여기서부터 ‘사람의 예비’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필요한 순간,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말을, 필요한 액수로 가져온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보내게 하신 것”이라고 표현한다. 7. 비자도, 비행기도—“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통과되었다” LA행의 또 다른 벽은 비자였다. 아이는 대사관 인터뷰를 받을 상태가 아니었다. “의자에 앉으면 머리가 무거워서” 버티지 못했다. “거부당할 게 당연”해 보였다. 그는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아이를 대사관 밖에 두고, 아이의 여권만 들고 들어갔다. “아이 비자를 주십시오.” 영사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이 얼굴도 안 보고 비자를 줄 수 없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로 흘렀다. 영사는 결국 비자를 찍어주었다. 인터뷰도 없이. 아이는 비자를 받았다. 비행기에서도 길이 열렸다. 걷지 못하는 아이는 휠체어로 탑승했고, 승무원은 아이를 눕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심지어 그들이 안내한 자리는 “맨 앞자리(1등석)”였다. ‘상식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따라붙는 장면들이 연속된다. 그는 그 연속성 속에서 ‘우연’이 아니라 ‘인도’의 패턴을 읽어낸다. 8. “응급실에 안 가려 했다”… 그런데 ‘그 의사’가 왔다 미국 도착 후에도 그는 쉽게 응급실로 향하지 못했다. “선교사”라는 정체가 또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하나님이 비난받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그때, 링거를 놓아주려 찾아온 간호사와 단기팀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동행했다. 중국인 의사. 그것도 의대 교수. 그 의사는 아이를 보자마자 단정했다. “당장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의료 조언이 아니었다. 선교사의 마음을 굳게 잠근 ‘종교적 체면’의 문을 강제로 두드리는 선포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망설였지만, 그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살아서 미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 그는 아이에게 직접 물었다. “병원에 가고 싶니?” 아이는 답했다. “아빠, 왜 이렇게 오래 토했는지 원인이라도 알고 싶어요.” 바로 이 ‘아이의 입’이, 아버지의 완강함을 무너뜨리는 열쇠가 되었다. 그가 문을 열자, 주변 사람들은 기뻐했다. 어떤 이는 “당신 마음이 바뀌도록 우리가 기도했다”고 나중에 말했다고 한다. 9. 응급실의 기적: “절차 없이 들어갔고, 곧바로 CT를 찍었다” 응급실은 피가 흐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전쟁터 같았다. 그런데 그 중국인 의사가 미리 전화한 덕분에 “아무 수속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인턴이 아이를 보더니 말했다. “뇌를 찍어야 합니다.” 곧바로 CT. 그리고 아이는 ICU(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때 선교사는 아이 곁을 떠나지 못해 복도 의자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새벽, 의료진이 환자 요약 파일을 복도에 두고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무심코 그것을 보게 된다. 거기에 적혀 있던 한 문장이 그를 멈춰 세웠다. “부모에게 알리지 말 것.” 그리고 이어진 내용. “뇌에 종양 2개(1cm, 2cm).” 이 장면이 이 간증의 독특한 역설을 만든다. 보통 ‘종양’은 절망의 단어다. 그런데 그는 “너무 기뻤다”고 말한다. 이유는 분명했다. 케냐에서도, 미국에서도 찾지 못했던 원인을 하나님이 드디어 “알게 하셨다.” “고칠 수 있는 병원에서 원인을 알게 하셨다.” 그는 아이에게 달려가 말했다. “드디어 원인을 알았다. 하나님이 너를 고치시려고 여기로 인도하셨다.” 10. “그때, 그 교수”… 그리고 또 하나의 예비 중환자실에서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키가 크고 머리가 희끗한 교수. 차트를 보더니 묻는다. “너 케냐에서 왔니? 우리 아버지가 케냐 의료선교사였다.” 그리고 그는 거의 ‘개인 담당’처럼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놀랄 정도의 관심. “돈도 없어 보이는 선교사 가족”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말이 뒤이어 나왔다. “네 아이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병원비를 무료로 하겠습니다.” 선교사는 당황했다. 아이와 “평생 갚자”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것이 무너졌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하나의 확신이 찾아왔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고치시려고, 네가 돈이 없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시려고, 여기로 부르셨다.” 이쯤 되면 ‘사람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말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가 된다. 케냐를 아는 교수, 케냐 선교사의 아들을 돕는 의료진, 비용을 감당하는 시스템, 그리고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하는 안내자들. 이들은 마치 “누군가가 미리 배치해 둔 것”처럼 움직인다. 11. “머리를 열지 않아도 되는 병원”으로—또 한 번 문이 열렸다 아이의 종양을 제거하려면 머리를 열어야 한다. 그런데 의료진은 “머리를 열지 않고 치료할 수 있는 더 좋은 병원”이 있다고 했다. 문제는 그곳이 사립병원이라는 점. 비용이 또 다른 벽이었다. 하지만 그 병원도 아이를 받아주기로 했다. 의료진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기도 많이 했지? 기도 많이 해서 하나님이 길을 여신 거야.” 아이를 태운 앰뷸런스가 또 한 번 문을 통과했다. 새 병원에 도착하자 젊은 의사는 말했다. “이 아이는 케냐에 있었거나, 한국으로 갔으면 죽었을 겁니다.” 그는 그것을 “럭키”라고 표현했지만, 선교사는 그 ‘럭키’라는 말을 ‘인도’로 번역했다. 12. “우리는 둘 다 ‘사역자의 자녀’야”—마지막 열쇠 같은 한 마디 새 병원에서 또 한 사람이 들어온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 의사. 차트를 쭉 보더니 묻는다. “너의 아버지가 케냐 선교사냐?”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우리 아버지는 목사다. 너와 나는 둘 다 미니스터의 자녀다.” 이 짧은 문장은, 선교사의 눈에 ‘우연히 만난 의료진’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한 사람’으로 그를 확정시켰다. 그 의사는 아이를 끝까지 치료했고, 아이는 회복했다.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마침내 케냐로 돌아와 “선교사로” 아버지를 돕고 있다. 13. “그때 병원에 갔으면 오히려 죽었을 것”—하나님이 ‘눈을 가리신’ 시간 그는 한 가지 섬뜩한 결론을 덧붙인다. “제가 (처음부터) 그 병원에 데려갔으면, 얘는 죽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초기에 의료진이 찾은 건 위장 문제가 아니었다. 뇌 문제였다. 케냐에서 섣불리 수술하거나, 준비되지 않은 곳에서 손을 댔다면 더 위험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이 ‘수술할 수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셨다. 원인을 못 찾게 하셨다.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원인을 보게 하셨다. 이 대목에서 그의 간증은 단순한 기적담을 넘어선다. 하나님이 “치유”만 행하신 것이 아니라, 치유가 가능한 “시간과 장소”를 먼저 준비하셨다는 서술이기 때문이다. 14. 선교 재정이 끊겼을 때도—“하나님이 돈은 안 주시고, 말씀을 주셨다” 아이의 치유가 ‘생명의 극적 인도’였다면, 재정의 사건은 ‘사역의 지속을 위한 인도’였다. 그는 한 교단 선교를 통해 파송을 받았고, 초기에는 교회가 생활비와 사역비를 약속했다. 그는 케냐에서 기독교 학교를 세웠다. 그 지역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학교가 되었고, 회교도든 기독교인이든 4년 동안 성경을 배우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 분쟁이 터졌다. 헌금이 ‘재판 비용’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헌금을 멈췄고, 결국 선교 후원이 끊기기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도저히 못 보낸다”는 통보가 왔다. 그는 현실적으로 ‘신입생을 받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건물을 더 지을 수 없으니, 확장을 멈추자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주신 것은 돈이 아니라 말씀이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는 “돈은 안 주시고 말씀만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씀이 그를 움직였다. 그는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을 택했다. 직접 땅을 파고, 가능한 만큼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나이로비로 돌아왔을 때, 은행 계좌에 돈이 들어와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돈. 그는 그 돈으로 건물을 올렸다. 또 필요가 생겼을 때 또 돈이 들어와 있었다. 결국 후원이 끊어진 해에 건물 두 개를 세우려 했던 계획은 더 커져, “보너스로 교회까지” 세웠다. 그는 결론을 이렇게 내린다. “중요한 건 ‘재정이 있느냐’가 아니라, ‘이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다. 그분의 뜻이면 재정은 따라온다.” 15. “하나님은 ‘길’을 예비하신다”—그의 간증이 남기는 한 가지 질문 이원철 선교사의 간증은 ‘나는 믿었더니 기적이 왔다’는 단순한 도식으로 닫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묻는다. 왜 그때 3천 불이 ‘항공권 값만큼’ 주어졌는가? 왜 아이는 인터뷰도 없이 비자를 받았는가? 왜 응급실에서 ‘절차 없이’ 들어갈 수 있었는가? 왜 케냐를 아는 교수, 사역자의 자녀임을 공유하는 의사가 연달아 나타났는가? 왜 ‘원인을 찾지 못하게’ 하셨다가, ‘고칠 수 있는 곳’에서 보게 하셨는가? 그는 이 모든 질문을 하나로 묶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나를 준비시키시고, 길을 준비시키신다.” 그리고 그 준비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도 계속되는 방식으로 그를 붙들었다. 맺으며: 케냐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 아들의 치유는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들에게 말했다. “아빠와 같이 선교사 하지 않을래?” 아들은 “하겠다”고 답했다. 지금 그 아들은 케냐에서 선교사로 아버지를 돕고 있다. 선교사는 이 결말을 ‘내 아이를 살려보자’는 목적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열매로 본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 한 아이,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미리 배치된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비난받지 않게 해달라”고 울며 기도하던 한 아버지. 그가 말하는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은, 멀리 있는 교리가 아니라 현장 한복판에서 사람과 시간과 길을 정교하게 엮어내는 살아 있는 인도였다. ※ 故 이원철 선교사의 이들 이인 선교사와 그의 장모는 무슬림에 납치되어 2년째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기도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법의 판결은 정의 이전에 연민과 존엄과 존중이 먼저입니다

프랭크 카프리오 판사 법정은 차갑다. 나무 망치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판결은 때로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다. 벌금을 내지 못해 절망하는 가난한 시민, 병든 가족을 돌보느라 어쩔 수 없이 교통법규를 어긴 사람, 힘겨운 생계 속에서 실수를 저지른 이들에게 법정은 두려움의 공간이다. 그러나 미국 로드아일랜드주의 한 법정에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프랭크 카프리오 판사의 법정이다. 그는 단순히 벌금과 형벌을 집행하는 판사가 아니었다. 법복을 입은 그의 가슴에는 여전히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는 법정에 선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는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의를 실행하기 위해 여기 있고, 정의에는 연민과 이해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 한 마디에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카프리오 판사는 법의 원칙을 지키되, 인간의 삶을 존중하는 판결을 내리는 데 주력했다. 그에게 법은 인간을 돕는 수단이었고, 처벌보다 회복과 회생이 우선이었다. 가난, 질병, 가족 문제 같은 삶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모든 사람을 존엄과 존중으로 대했다. 공정함과 이해, 그리고 연민—이 세 가지가 그의 판결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이었다. 그의 법정은 단순한 재판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사람의 눈물과 사정을 들어주는 공간이었고, 절망한 이들이 다시 희망을 발견하는 치유의 장소였다. 사람들은 그를 '미국에서 가장 따뜻한 판사', '자비로운 정의의 상징'이라 불렀다. 그의 판결은 미국 사법제도에 '연민 사법'이라는 화두를 던졌고, 수많은 시민들에게 "법은 차갑기만 한 것이 아니라 따뜻할 수 있다", "정의는 인간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법의 본질적 목적은 무엇인가? 교통법규의 목적은 교통질서를 지켜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구하는 데 있다. 일반적인 법의 목적도 동일하다. 공공질서를 유지하고 공공의 유익과 정의를 세워 사람들이 공평하고 안심하며 평화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법은 질서를 깨뜨리는 이에게 징벌을 행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정의와 함께 생명을 지키고 안정된 삶을 유지하도록 사용되어야 한다. 카프리오 판사는 바로 이 본질을 잊지 않았다. 브라질에서 미국을 여행 온 데이지라는 젊은 여성이 교통법규 위반으로 그의 법정에 섰다. 긴장한 얼굴로 판사를 바라보던 그녀에게 카프리오 판사는 부드럽게 물었다. "지금 미국을 방문 중이시죠?" 데이지가 대답했다. "네, 여기 정말 마음에 듭니다. 아름다운 곳이에요." 판사는 다시 물었다. "미국은 브라질과 어떻게 다른가요?" 데이지의 눈이 반짝였다. "티켓을 받으면 설명할 기회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자비롭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을 좋아합니다." 카프리오 판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말했다. "데이지, 제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법정은 이해와 연민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정의를 행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정의란 종종 우리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의 형편을 고려하고,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연민과 이해를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그들에게 어떤 필요가 있을 때 말입니다. 아이들이 있다면, 일하며 가정을 꾸리고 있다면, 돈이 없다면 말이지요. 만약 그렇지 않고 그냥 면허를 정지시켜 버리면, 그들은 차를 몰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생계를 위해 불법으로 운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법정에 고요가 흘렀다. 판사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따뜻했다. "저는 특별한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을 존엄하게 대할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존엄과 이해, 그리고 연민 속에서 대우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노력하는 일입니다. 오늘 제가 그렇게 했나요?" 데이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네, 그렇게 했습니다." 판사는 미소 지었다. "이것은 판단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나간 뒤 누군가 이렇게 물을 겁니다. '거기서 당신을 어떻게 대하던가요?'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하게 되겠죠. '정말 친절했어요.' 이 말을 기억하세요. 공정함, 이해, 그리고 연민." 프랭크 카프리오 판사는 엄격한 정의와 따뜻한 인간애를 동시에 실천한 판사였다. 그의 판결은 단순히 법 집행을 넘어서,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정의가 무엇인가"를 온 세상에 보여주었다. 전 세계 기독교인, 종교인, 교육자, 사회복지 관계자들이 그의 태도를 모범 사례로 언급한다. 법정을 나서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감사가, 절망 대신 희망이 피어난다. 그것이 바로 카프리오 판사가 꿈꾸는 정의의 모습이다. 법은 사람을 짓누르는 무게가 아니라,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손길이어야 한다는 믿음. 그 믿음이 오늘도 그의 법정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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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마지막 원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여전히 금기시되는 주제다.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죽음을 자연스럽게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란 쉽지 않다. 많은 신자가 죽음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고 준비하는 구체적인 길을 안내받지 못한 채, ‘사후의 정화 과정’이나 ‘죽음 이후의 또 다른 기회’ 같은 비성경적 관점과 불확실한 정보 사이에서 혼란을 겪곤 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신약학의 권위자 가이 프렌티스 워터스(Guy Prentiss Waters) 교수의 신간 『마지막 원수, 죽음을 마주할 때』(생명의말씀사)가 출간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은 죽음을 ‘마지막 원수’로 규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 저주가 깨졌다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며 성도들이 담대하게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도록 돕는다. 죽음, 타락의 비극이나 그리스도의 승리로 정복되다 저자인 가이 워터스 교수는 죽음이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된 ‘비정상적인 현실’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이 신자에게 영원한 생명과 승리를 보장한다는 복음의 결론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단순히 ‘두렵지 않다’는 식의 감정적 자기암시로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성경이라는 정교한 좌표 위에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태도로 맞이해야 할지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는 중간 상태, 마지막 심판, 몸의 부활, 천국과 지옥 등 자칫 흐릿할 수 있는 내세에 관한 교리들을 성경적으로 명쾌하게 정리하여, 독자들이 막연한 기대가 아닌 ‘교리적 확신’ 위에서 평안을 누리게 한다. 교리를 넘어 실제적인 ‘임종 돌봄’과 ‘윤리적 지침’까지 『마지막 원수, 죽음을 마주할 때』는 이론적인 교리 설명에 머물지 않는다. 책의 후반부인 제2부와 제3부에서는 죽음과 관련된 실제적인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룬다. 죽음의 준비: 가족과 친구들을 어떻게 준비시킬 것인가, 재산 정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장례와 매장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등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성경적 원리 안에서 제시한다. 실제적인 돌봄: 죽음을 앞둔 이에게 필요한 태도, 남은 가족과 함께하는 공동체의 동역, 특히 현대 의학에서 민감한 문제인 ‘연명 치료’를 둘러싼 윤리적 고민까지 다루며 ‘믿음을 살아내는 법’을 안내한다. 함께하는 위로: 죽음을 앞둔 이 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려울 때 적게 말하거나 침묵하며 곁을 지키는 지혜를 전한다. 저자는 “죽음에 대한 준비는 결코 죽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데서 시작된다”고 역설한다. 부활 신앙, ‘오늘의 삶’을 지탱하는 강력한 동력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유익은 죽음 너머의 소망이 결코 오늘의 삶을 약화하지 않는다는 깨달음이다. 저자는 부활 신앙이 일상의 삶이 허무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울이는 모든 노력과 섬김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설명한다. 천국을 소망하는 마음이 간절해질수록 성도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기를 원하게 되고, 이웃을 섬기는 과업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죽음을 바르게 마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랑과 책임과 거룩한 삶의 동기를 강화하여 ‘가장 잘 사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과 같다.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입을 모아 전하는 ‘필독서’ 세계적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이 책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엘 R. 비키 총장은 “죽음에 대해 성경적으로 충실하고 찬란한 소망이 담긴 책”이라며, 확신에 찬 소망으로 죽음을 맞고 싶은 모든 이에게 실질적인 답을 준다고 평가했다. 싱클레어 B. 퍼거슨 교수는 “성경적으로 풍부하고 목회적으로 신뢰할 만한 지혜로운 가르침”이라며 “모든 가정에 비치해 둘 가치가 있는 고전”이라고 추천했다. 데릭 W. H. 토머스 목사는 “신약학자의 시각으로 쓰였지만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며 죽음을 마주하는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귀중한 도움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지막 원수, 죽음을 마주할 때』는 죽음 앞에서 신앙의 확신을 갖고 싶은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임종 사역을 하는 목회자, 사별의 슬픔에 잠긴 이들, 그리고 교리와 삶을 연결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진영 논리 너머 ‘제3의 길’… 하나님의 나라, 정치의 중심이 되다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는 ‘심리적 내전’ 상태라 불릴 만큼 극심한 진영 갈등에 함몰되어 있다. 보수와 진보라는 거대 양당 체제 속에서 성도들 또한 신앙의 본질보다는 정치적 논리에 매몰되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 광경이 낯설지 않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올바른 정치적 스탠스와 태도를 명쾌하게 제시한 신간이 출간되어 교계와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윤석 박사(KAIST 경영학, 총신대 조직신학)의 신간『하나님의 나라와 정치적 중도의 길』(예영커뮤니케이션)은 극단적인 양극화 속에서 갈 길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주는 친절한 안내서다. ‘정치적 중도’는 회색지대가 아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중도(Moderate)’는 결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기회주의적인 회색지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저자는 본문에서 "우리가 말하는 ‘중도’는 그저 중립이나 회색 지대에 머무는 자세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그가 말하는 중도란 양극단의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오직 복음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사안별로 진리와 정의에 따라 행동하는 적극적인 태도다. 즉, ‘좌파’나 ‘우파’라는 세속적 틀에 갇히는 대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안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기독교적 중도’를 의미한다. 책의 프롤로그 제목인 ‘나는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았습니다 : 예수당의 고백’은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관통한다. 저자는 기독교인이 특정 정당을 지지할 수는 있지만,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시민권과 지상 시민권을 동시에 가진 이중 구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경 속 요셉, 다니엘, 에스더의 사례를 들어 권력 안에서 어떻게 신앙인으로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분석한다. 특히 "‘예수당’이라는 말은 정당이 아닌 정체성"임을 강조하며, 기독교적 가치로 후보를 분별하고 정책 중심의 시각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혐오와 선동을 이기는 ‘사랑의 정치’ 책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정치적 정체성부터 구체적인 실천 방안까지 폭넓게 다룬다. 특히 2부 ‘진영 논리와 갈등의 시대’에서는 혐오와 선동이 난무하는 현 정치 문화를 비판하며,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만드는 자(Peacemaker)가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가짜 뉴스와 왜곡된 담론이 넘쳐나는 시대에 신앙인이 가져야 할 분별력을 강조하며, 맹목적인 적대감 대신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조화를 이루는 정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분별력 없는 신앙은 쉽게 선동에 흔들린다"며, 정치 지도자나 유명 목회자의 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성경의 원리에 입각해 사안별로 판단할 것을 권고한다. MZ세대와 한국 정치의 미래 저자는 미래 세대에 대한 고민도 놓치지 않는다. 6부 ‘기독교 청년과 중도의 미래’를 통해 정치에 무관심해지거나 혐오감을 느끼는 MZ세대 기독 청년들에게 새로운 정치 감수성을 제안한다. 청년들이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 단순한 권력 쟁취가 아닌,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공공선을 실현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강점 중 하나는 저자의 이력에서 나오는 현실감이다. 이문석 박사는 KAIST에서 경영학을, 총신대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한 학자일 뿐만 아니라, 삼성SDS 컨설턴트, 포스코경영연구소 연구위원, 그리고 아산시와 충남에서의 정책 보좌관 및 전략연구원장 등 공공 영역에서 실무를 두루 거쳤다. 현장의 언어와 신학의 언어를 조화시킨 그의 글은 ‘탁상공론’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자치단체에서 현실 정치를 다년간 경험하며 느꼈던 고민을 토대로, 기독교적 가치가 어떻게 실질적인 정책과 삶의 영역에서 구현될 수 있는지를 매우 쉽게 풀어낸다. 성경적 통찰로 중립과 중도 차이 밝혀 책의 출간 소식에 교계 지도자들의 추천도 이어지고 있다. 강웅산 교수(총신대 신대원장)는 "이 땅의 풍조와 맞서 국가를 지키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부해야 할 필독서"라고 평했으며, 배준완 목사(서울서문교회)는 "정치적 양극화와 침묵의 유혹 사이에서 길을 제시하는 안내서"라고 추천했다. 신국원 교수(총신대 명예교수)는 "성경적 통찰로 중립과 중도의 차이를 밝혀주는 훌륭한 안내서"라고 극찬했으며, 성인경 대표(라브리 코리아)는 "진정한 중도의 길을 통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이 실현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하나님의 나라와 정치적 중도의 길』은 정치를 혐오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몰입해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신앙의 균형을 선사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진영의 논리가 아닌 ‘복음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력을 얻게 될 것이다. [도서 정보] 저자: 이석 출판사: 예영커뮤니케이션 가격: 13,000원 발행일: 2026년 1월 14일

“병실에서 전장으로” ― 『킹덤 인사이트』, 복음을 다시 ‘왕의 명령’으로 불러내다

교회는 왜 이토록 뜨겁게 찬양하면서, 세상 한복판에서는 그렇게도 조용한가. 예배당 안에서는 믿음이 넘치는데, 문밖만 나서면 공기처럼 사라지는 신앙. 염보연 목사의 『킹덤 인사이트』는 이 침묵과 무력감을 향해 단호히 묻는다. “누가 왕인가?” 그리고 이렇게 선언한다. 복음은 사후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전면 선언이라고. 책은 먼저 신앙을 둘로 갈라버린 영지주의적 이분법을 정면으로 겨눈다. 교회는 병원이며 성도는 상처 입은 환자라는 오래된 위로의 언어를 넘어, 저자는 “성도는 싸워야 할 군사”라고 말한다. 위로보다 각성이, 휴식보다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단순한 보호자가 아닌 ‘왕’으로 회복하는 순간, 신앙의 자리는 병상이 아니라 전장이 된다. 그 전장은 추상적이지 않다. 가정, 경제, 문화, 정치.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공간이 곧 영적 전쟁의 현장이다. 책은 가정을 신앙 교육의 최전선으로, 자녀를 성공의 수단이 아니라 제자의 자리로 다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맘몬의 유혹과 미디어의 중독 앞에서 성도의 삶이 얼마나 쉽게 타협되는지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거룩”이라는 낯선 단어를 일상의 언어로 되살릴 수 있는지 구체적인 길을 제시한다. 특히 정치와 사회 영역에 대한 저자의 언급은 도발적이면서도 깊다. 그는 크리스천을 “왕의 대사”라 부르며, 신앙이 개인의 위안으로만 갇혀 있을 때 사회는 악의 구조 속으로 기울어진다고 진단한다. 젠더 이데올로기와 반(反)창조 질서를 향한 분별의 목소리는, 교회가 도피처가 아니라 깃발을 드는 자리여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으로 읽힌다. 『킹덤 인사이트』는 신학서처럼 무겁지 않지만, 가볍게 넘길 수도 없는 책이다. 위로보다는 도전을, 관념보다 실천을 요구한다. 시대를 읽어내는 영적 감각, ‘창조주의 시선’을 갖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단순한 읽을거리가 아니라 하나의 ‘지휘 명령서’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믿음이 다시 야성을 되찾기를 바라는 이들, 다음 세대를 지키고 싶은 부모와 교회, 그리고 여전히 복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모든 독자에게 이 책은 묻는다. “당신은 아직 병상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군복을 입고 일어설 것인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다시 깨어나는 신앙

『중간사 수업』(샘솟는 기쁨/박양규 지음) 고요 속에 숨겨진 거대한 움직임 역사는 늘 요란하게만 흐르지 않는다. 때로는 긴 침묵 속에서 더 깊은 변화를 준비한다. 박양규 저자의 『중간사 수업』은 바로 그 고요한 400년,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대를 향해 귀를 기울이게 한다. 흔히 ‘성경의 공백기’라 불리는 이 시기를 저자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준비기로 재조명한다. 이 책은 세종대학교에서 15주간 진행된 강의를 바탕으로 집약된 결과물이다. 지성(로고스), 정서(파토스), 인품(에토스)이 어우러진 강의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단순한 학문적 분석을 넘어, 역사와 신앙을 긴밀히 연결하며 오늘의 독자에게 살아 있는 질문을 던진다. 학문을 넘어 현실을 깨우는 역사서 저자는 중간사를 흔히 쓰이는 ‘제2성전기’라는 학술 용어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라,신앙과 현실을 연결하는 역사적 해석서이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연구자로 살아온 저자는 단순한 용어 정리를 넘어, 실제 사건들의 의미를 오늘의 독자가 체감할 수 있도록 재구성한다. 마카비 전쟁과 유대 전쟁을 신약 시대의 형성과 연결하며, 그 시대 성도들의 질문을 오늘 우리의 질문과 겹쳐 읽는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지킬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택할 것인가?” 이 물음은 과거의 성도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오늘의 교회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초대교회의 회복된 정체성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정체성이다. 저자는 우리가 2천 년 전 그들과 같은 성경,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감성적 고백이 아니라, 신앙이 역사성을 지닌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본질을 되찾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방식임을 깨달은 이들이었다. 그들이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문명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삶의 기준이 분명했다 :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도덕적 규범이 아닌 존재의 중심으로 삼았다. 가치의 숭고함을 추구했다 : 권력이나 질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삶으로 구현했다. 삶 자체가 증언이었다 : 복음을 말하는 것보다 복음으로 존재하는 것을 더 중시했다. 오늘 교회가 초대교회의 본질로 돌아간다면, 세상 속에서 다시금 소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문자에 갇힌 신앙은 소멸한다 책의 또 다른 날카로운 통찰은 “성경과 시대의 접점을 찾으려는 고민을 하지 않고 문자에 갇힌다면 결국 소멸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태어난 언어임을 강조한다. ‘복음’, ‘교회’, ‘소망’이라는 단어조차 당시 정치·사회·종교적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 말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말씀을 읽은 것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적 장면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삶으로 살아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는 문자적 정지 상태로 읽어서는 안 된다. 말씀의 역사적 온도, 사람들의 질문, 사회의 긴장까지 함께 읽어내야 한다. 바리새파의 변혁과 유대교의 생존 저자는 유대교가 어떻게 ‘랍비 유대교’로 전환되어 명맥을 이어 왔는지 주목한다. 사두개인은 문자만을 고집하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사라졌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적용을 고민하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아내려 했다. 이 점은 오늘 교회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문자주의에 머무는 신앙은 쇠퇴한다. 해석과 적용의 고민을 멈춘 공동체는 현실을 잃고, 결국 미래도 잃는다. 초대교회와 유대교의 변화를 함께 보아야 오늘 교회의 길이 선명해진다. 지금 우리의 시대가 또 하나의 중간사 오늘 한국 사회는 정치·종교·문화의 충돌 속에 서 있다. 가치의 붕괴, 정체성의 혼란, 교회의 위상 약화, 급격한 사회 변화… 이 모든 모습은 중간사가 보여준 시대적 긴장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저자는 말한다. “중간사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읽는 해석학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마카비 전쟁’은 무엇일까? 신앙을 압박하는 문화적 힘은 어디서 오는가? 초대교회가 보여준 회복의 정체성은 오늘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중간사 수업』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신앙의 본질과 역사의 흐름을 다시 읽어내는 눈을 회복하게 한다. 『중간사 수업』은 단순히 성경 사이의 400년을 해석하는 책이 아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을 깨우는 신앙의 교과서이다. 하나님 나라가 새 질서를 준비하던 격변기를 새롭게 비추며, 오늘의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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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 “선교는 결국 사람이 남는다” “선교는 사람이다.” 이현국 목사는 이 말을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내뱉었다. ▲선교 사역의 핵심은 사람이라고 밝힌 이현국 목사(운화교회) 그의 목소리에는 30여 년의 목회와 선교 여정이 응축된 단단한 울림이 배어 있었다. “교회를 세우는 것도,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 남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건물이 크고, 프로그램이 많고, 헌금이 많아도 제자가 세워지지 않으면 그건 잠깐의 열매일 뿐이죠.” 그는 “선교란 사람을 세우는 일이며,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그가 쓴 책 『사람을 세우는 선교』(쿰란출판사)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책 속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도 결국 사람을 통해 완성된다.” 이현국 목사는 경기도 성남의 온화교회 담임목사로, 1990년대 초부터 인도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선교 여정은 ‘성공 스토리’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그 안에는 ‘실패’와 ‘절망’, 그리고 ‘회복’을 통한 진정한 선교의 본질 발견이 담겨 있다. ■ “열정과 재정으로 시작했지만… 실패를 통해 배웠다” 그의 인도 선교는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같은 노회의 한 목사로부터 인도 마니푸르 지역의 소식을 들었다. “그곳 인구의 40퍼센트가 기독교인이라 들었어요. 그래서 그곳을 중심으로 선교 거점을 세우면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등으로 복음이 확산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는 곧바로 한 인도인 신학생(D)을 소개받았다. 그는 신학교 건립을 요청했고, 온화교회는 열정적으로 응답했다. “기도하고 헌금하면 하나님이 하시겠지요. 그렇게만 믿었습니다.” 교회는 매월 50만 원으로 시작해 점차 후원 규모를 늘렸다. 2008년 이후에는 1억 원 가까이 지원하기도 했다. 신학교 건물 건축, 운영비, 교회당 건축까지 합쳐 약 10억 원에 달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그 재정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보니 현지인 리더의 사생활 문제, 재정 부정, 관리 실패가 연이어 드러났습니다. 결국 신학교는 무너졌죠.” 그는 “그때 선교의 본질을 몰랐다”며 회고했다. “열정만 있었지, 선교가 뭔지 몰랐어요. 사람을 세우지 않고 돈만 보냈죠. 그게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 “선교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현국 목사는 그 실패를 통해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는 겁니다.” 그는 한동안 인도 사역을 중단했다. 그러나 ‘왜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이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선교의 본질을 다시 성경에서 찾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를 세웠지요. 그게 바로 선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는 ‘제자 삼는 제자’라는 원리를 붙잡았다. 그제야 그가 말하는 ‘사람을 세우는 선교’의 뿌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피터 티우마이와의 만남 — “한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다” 그런 전환의 시기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만나게 하셨다. 그가 바로 인도 나갈랜드 출신의 피터 티우마이(Peter Thiumai) 교수였다. ▲이현국 목사는 선교의 동역자 피터 티우마이(Peter Thiumai) 교수를 통해 선교자의 사람을 세우는 일을 사역하고 있다. “그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40대 젊은 교수였습니다. 신앙이 진실하고, 제자 양육에 열정이 있었어요.” 피터 교수는 기존 신학교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자, 디마푸르 지역의 작은 월세집에서 학생들과 함께 합숙하며 복음 전도를 시작했다. 이 목사는 그에게 재정적 후원을 약속하는 대신, 단 하나의 원칙을 제시했다. “먼저 교회를 개척하고, 제자를 세워 자립하시오.” 그것이 멘토링의 출발점이었다. 피터는 곧 집을 떠나 한 교단의 수양관을 빌려 신학교를 열었고, 교회를 개척했다. 몇 년 후 그 교회는 스스로 자립했다. “그는 매년 충실하게 보고서를 보내왔고, 사역의 결실이 보였어요. 저는 매년 그를 만나 함께 멘토링을 했습니다.” ■ “제자를 세우는 신학교, 1,000개의 교회를 낳다” 10년이 지난 지금, 피터 티우마이의 신학교는 인도 동북부 6개 지역에 ‘제자훈련센터(DTC)’를 운영하며 1,000개 이상의 교회를 개척했다. “처음엔 믿기 어려웠죠. 하지만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다시 제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더군요. 바로 이것이 ‘제자 삼는 제자’의 선교였습니다.” 그는 “이 신학교는 단순한 학문 기관이 아니라, ‘제자를 세우는 제자를 양성하는 학교’”라며 “피터의 신실함과 헌신은 ‘사람 중심 선교’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 저서 『사람을 세우는 선교』 ― 선교의 본질로 돌아가다 ▲현지인 한 사람을 멘토링하여 10년만에 천교회를 세운 이야기를 수록한 책 이현국 목사는 이러한 여정과 깨달음을 담아 책 『사람을 세우는 선교』(쿰란출판사)를 펴냈다. 그는 책에서 선교의 실패와 성공을 가감 없이 기록했다.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 본질을 가르치십니다. 건물을 세우는 선교에서 사람을 세우는 선교로 돌아올 때 비로소 복음의 생명이 살아납니다.” 책은 4부 구성으로 되어 있다. 1장은 “멘토링을 통한 제자 양육”을, 2장은 “피터 선교사의 제자 세우기”, 3장은 “제자의 제자가 세운 교회들”, 4장은 “신학교와 훈련센터 운영의 실제”를 다룬다. 그는 각 장에서 ‘사람 중심의 선교’가 어떻게 교회 자립과 선교 확장을 이끌어냈는지를 실제 사례로 보여준다. 책의 부제처럼, “선교는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사람을 통해 진행되며, 결국 사람이 남는다.” ■ “실패의 뿌리는 무지였다” 이 목사는 자신의 실패를 이렇게 분석했다. “그때 저는 선교를 잘 몰랐습니다. 후원금을 보내면, 현지인이 알아서 잘 하겠지 생각했죠. 하지만 그건 선교가 아니라 송금이었습니다.” 그는 “선교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라며 “감동으로 시작해도 체계적 훈련과 평가가 없다면 오래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선교사도, 현지인도, 후원 교회도 모두 ‘사람 세우기’ 원리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세우면 재정은 따라옵니다. 반대로 돈으로 사람을 세우려 하면, 결국 둘 다 잃습니다.” 그는 자립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선교의 목적은 현지의 자립입니다. 하지만 자립은 건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제자 삼는 제자가 세워질 때 자연스럽게 자립이 옵니다.” 그는 현지 교회들이 스스로 땅과 물질을 헌신하며 교회를 세우는 모습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현지 성도들이 제자로 성장하면 그들은 주체가 됩니다. 스스로 목회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죠. 그게 진짜 선교입니다.” ■ “한국 교회 선교, 이제 바뀌어야 한다” 그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선교 패러다임에도 경종을 울린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보내는 선교’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우는 선교’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는 ‘후원금 중심 구조’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교회가 돈만 보내면 선교사가 알아서 할 것이라 믿는 구조는 이제 끝내야 합니다. 그건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세우지 않으면 그 사역은 반드시 멈춥니다.” 그는 선교사를 의료인 훈련 과정에 비유했다. “의사는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야 전문의가 되잖아요.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훈련, 멘토링, 실제 사역 경험을 거쳐야 진짜 현장에서 설 수 있습니다.” ▲재정과 선물 중심에서 현지인 사람을 먼저 세우는 것을 우선하는 선교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이현국 목사 “선교사를 세우는 목회자, 교회를 세우는 선교사” 이것은 이 목사의 선교의 경험에서 오는 모토이다. 그는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넘어서 ‘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목사로 2~3년 함께 사역하며 전도와 제자 양육, 지역 섬김을 실제로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 개척 과정을 지켜보며 훈련받으면, 선교지에서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온화교회가 실제로 그렇게 해왔음을 밝혔다. “우리 교회 부목사님들 중 몇 분은 그렇게 훈련받고 국내 지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지금은 자립해서 잘하고 있죠. 저는 이걸 ‘국내 선교의 모델’이라 부릅니다.” ■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선교하지 말라” 이현국 목사는 선교의 시작점은 언제나 ‘사람’임을 강조한다. “돈이 있다고 바로 시작하면 안 됩니다. 먼저 준비된 사람을 찾으세요. 제자가 된 사람, 신실한 사람과 함께 하세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을 세우면 나중에 두 배의 고통이 옵니다. 차라리 시간을 두고 기다리십시오. 준비된 한 사람이 천 명의 미숙한 사역자보다 낫습니다.” ■ “인도는 지금,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현국 목사는 여전히 인도를 향한 열정을 멈추지 않는다. “인도는 14억 인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중 기독교인은 3퍼센트도 안 돼요.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영혼이 너무 많습니다.” 그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했다. “거리마다, 시장마다, 힌두 사원 주변마다 수많은 영혼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 일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교는 재정보다 사람입니다. 사람을 세우면 재정은 따라옵니다. 사람을 세우지 않으면, 아무리 건물을 세워도 금세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선교의 핵심은 ‘사람을 세우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인도의 미종족전도의 현황 ■ 실패에서 성공으로,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이현국 목사의 선교 이야기는 ‘실패에서 출발한 성공’이다. 그는 실패를 통해 진리를 배웠고, 진리를 통해 사람을 세웠으며, 그 사람이 다시 사람을 세우는 순환을 만들어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요약된다. “선교는 제자 삼는 제자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불타는 확신이 있었다. “교회가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미소 지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끝까지 사람을 세우는 선교를 하겠습니다. 그게 복음의 길이니까요.” <책 정보> 『사람을 세우는 선교』 | 저자: 이현국 | 출판: 쿰란출판사 | “선교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제자 삼는 제자를 세워라.” 실패에서 시작된 참된 선교의 길, 그리고 ‘사람 중심 복음’의 회복. 목회자와 선교사 모두에게 길잡이가 되는 실제적 교본.

“나는 문화로 싸우는 독립군”

▲문화를 통한 진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장이레 감독 이름에 담긴 사명, 신앙으로 열리다 장이레 감독의 본명은 장석봉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은 ‘장이레’다. 이 별명은 단순한 예명이 아니었다. 청년 시절 그를 만난 고(故) 하용조 목사가 “장은 짱이다”라는 유쾌한 격려와 함께 ‘이레’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나님의 때”를 뜻하는 히브리어적 어감을 품은 이 이름은 장 감독의 이후 여정과 사명을 예고하는 듯했다. 불교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우연히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10살 무렵 처음 발을 들인 교회는 그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어린 장석봉에게 신앙은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지만, 이후 연예계 아역 활동을 하며 자연스레 문화예술의 현장을 경험했고, 신앙은 그의 내면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깊이는 30대 초반 한차례의 극적인 체험을 통해 열리게 된다. 그는 당시 폐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밥 잘 먹어야지 무슨 금식이냐”라는 자신의 생각을 뒤엎고, 한 목사의 권유로 10일간의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는 금식 중 배고픔을 전혀 느끼지 않았고, 봉사와 설거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10일이 지나 의사의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어떻게 이렇게 폐가 깨끗할 수 있느냐”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폐에 남아 있던 병의 흔적은 미미하게 사라져 있었다. 장 감독은 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가슴으로 신뢰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때부터 신앙은 그에게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실체가 되었다. 우연에서 시작된 역사 탐험 이후 그의 삶은 점차 “복음을 문화로 전하는 길”로 나아갔다. 요한계시록을 주제로 한 뮤지컬 제작, CGN TV 시절 ‘꿈꾸는 요셉’ 같은 작품을 통해 그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예술로 구현하는 일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는 6·25 전쟁 당시 ‘춘천대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춘천대첩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춘천역 앞에서 열린 승전기념 행사를 마주친 것이 시작이었다. 민·관·군·경이 하나 되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는 이야기는 처음엔 그에게 과장된 전설처럼 들렸다. 그는 “이게 과연 진짜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고, 오히려 그 의심이 발걸음을 역사 속으로 깊이 이끌었다. 자료를 뒤지고 현장을 찾으며 만난 것은 놀라운 사실의 연속이었다. 공장 여공들이 주먹밥을 쥐고, 학도병과 대한청년들이 폭탄을 나르며, 민초들이 단 한 시간을 버텨 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던 실체적 기록들이 쏟아졌다. “이건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라는 확신이 생긴 그는 3일간 금식 기도를 드린 끝에,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이 역사를 먼저 증언하기로 결심했다. ▲2024년에 개봉되었던 <춘천대첩 72시간>다큐멘터리 영화 다큐멘터리 「춘천대첩」의 탄생 그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쏟아부은 시간은 6년. 처음엔 영화 「작전명 폭풍」을 구상했지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계획’처럼 다큐·영화·뮤지컬 세 가지 형식으로 역사적 진실을 전하겠다는 비전을 품게 됐다. 그는 100명이 넘는 증언자를 만나며 사실 고증을 거듭했고, 국회·CGV·롯데시네마 등에서 시사회를 열며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완성까지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계엄 선포로 인해 극장 상영이 갑자기 중단됐고,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려는 진보 진영의 조직적 방해가 이어졌다. 동시에 보수 진영의 무관심은 그를 더욱 깊은 실망에 빠뜨렸다. 춘천시의 지원도 끝내 받지 못한 그는 결국 “집을 팔았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좌우 진영 모두에게 외면받았지만, 그는 “나는 좌우를 떠나 사실을 밝히려 한다”는 신념으로 버텼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그의 열망은 신앙적 확신과 맞닿아 있었다. “장이레 감독이 역사와 문화에 천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예술적 취향이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무력보다 더 무서운 방식으로, 문화 속에 사상을 스며들게 한다”고 경고한다.” 문화는 곧 전쟁터 장이레 감독이 역사와 문화에 천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예술적 취향이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무력보다 더 무서운 방식으로, 문화 속에 사상을 스며들게 한다”고 경고한다. 히틀러, 김일성, 소련이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온 역사를 예로 들며, “우리는 너무 모른다. 문화가 곧 전쟁의 최전선”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춘천대첩의 의미는 단순히 과거의 한 전투가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전, 민초들이 보여준 결집과 희생은 대한민국 건국의 분수령이었다. “역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그는 춘천대첩이 낙동강 방어선과 UN군의 개입,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존속을 가능케 한 결정적 사건임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의 시각에서, 그날 나라를 지킨 진정한 영웅은 위정자가 아니라 민초들이었다. ▲역사적 인식은 물론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르게 세워야 국가의 미래가 밝다고 말하는 장이레 감독 진보의 공격, 보수의 안일 하지만 그는 좌우 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환영받지 못했다. 진보 진영은 그의 작업을 방해하거나 왜곡하려 했고, 보수 진영 역시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다. “우리 진영은 돈을 투자하지 않고, 진보는 (자신의 입맛에 낮게) 조금만 고치라며 미혹한다”는 그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이 정작 문화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진보 진영의 치밀한 문화 전략에 밀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겉으로는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공산주의적 사고가 깊이 침투했다”고 진단한다.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거짓과 카르텔적 구조, 그리고 교회마저도 세속적 권력 다툼에 휩쓸린 현실을 그는 성경적 관점에서 통렬히 비판했다. 장 감독은 “공산주의의 첫 번째 작전은 거짓말”이라며, 진영 논리에 갇혀 스스로를 속이는 시대를 향해 “회개와 고백 없이는 진정한 자유도 없다”고 경고했다. 다큐에서 영화, 그리고 뮤지컬로 「춘천대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장 감독은 현재 영화 「작전명 폭풍」을 준비하고 있다. 북한이 6·25 남침 작전명을 ‘폭풍’으로 명명했던 것에서 따온 이 제목은, 그가 3일 금식기도 중에 받은 영감을 담고 있다. 그는 홍천전투까지 포함해 “한국전쟁의 전모”를 영화로 완결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뮤지컬 제작을 통해 젊은 세대가 역사적 진실을 더 깊이 체험하도록 하는 꿈도 품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제작비 조달을 위해 국내외 투자자를 찾고 있지만, 그는 “나는 월세에 살며 집을 팔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열정은 단순히 흥행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는 그의 신앙적 사명감이 이 모든 노력을 지탱한다. ▲춘천대첩을 영화와 뮤지컬로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장 감독은 재정적인 투자가 필요하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고 밝혔다. 신앙이 삶을 이끌다 장이레 감독에게 작품 활동은 곧 신앙의 연장이다. 그는 “예수님이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치셨다”고 말한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믿을 자유와 믿지 않을 자유”를 발견하며, 이를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뿌리로 본다. 정치적 좌우를 넘어, 인간의 죄성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것이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복음이 단순한 종교적 교리나 사상이 아니라, 역사를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힘임을 믿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다큐나 공연을 넘어, ‘문화 독립 운동’이라는 이름의 영적 전쟁으로 자리 잡는다. 장 감독이 말하는 “문화 독립군”이란 표현에는, 복음을 드러내는 문화가 곧 시대와 사상을 변혁하는 힘이라는 신념이 담겨 있다. “문화는 전쟁터다. 우리는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민초들이 나라를 지켰다” – 후대를 향한 메시지 그가 「춘천대첩」을 통해 가장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나라를 지킨 것은 위정자가 아니라 평범한 민초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민초들이야말로 진정한 주권자이며, 그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자유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매년 이들을 위한 진정한 예배와 감사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 감독은 이 메시지를 단순한 과거의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젊은 세대가 직접 느끼고 고민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그는 학교와 교회에서 자비를 들여 상영회를 열며 학생들과 교인들이 “공산주의의 위협과 자유의 가치를 뼈아프게 깨닫는다”고 증언한다. “우리가 역사를 잊으면 미래는 없다”는 그의 호소는 단순한 경고를 넘어, 다음 세대가 스스로의 자유를 지켜내야 한다는 간절한 부탁이다. 장이레 감독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이자 신앙의 증언이다. 어린 시절 불교 가정에서 출발해, 금식 기도를 통해 신앙의 깊이에 들어서고, 역사 속 숨겨진 진실을 문화로 드러내기까지—그의 여정은 단순히 한 감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도전이자 초대다. ▲ 정치적 좌우를 넘어, 인간의 죄성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것이 장 이레 감독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말한다. “문화는 전쟁터다. 우리는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그의 발걸음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부자 되기" - 철강공학자가 말하는 신앙과 투자의 품위

주식회사의 시대, 우리는 왜 '주주가 되는 길'을 외면하는가? "이상하게도 나는 기업의 R&D를 총괄하며 수많은 자문과 보고를 받았으면서도, 정작 자본주의의 꽃인 '주식회사'의 혜택을 절반만 누려왔다." ▲ <천천히 부자되기>저자 이덕락 집사 포스코에서 부사장과 기술연구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포스코 고문으로 일하는 이덕락 저자(남서울은혜교회 안수집사)의 솔직한 고백이다. 은퇴를 바라보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평생 월급을 받는 '근로자'로만 살았지, 기업의 성과를 함께 나누는 '주주'로는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개인적 반성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포항공대(POSTECH)의 교수·교직원·대학원생을 시작으로 인근 연구소·대학·기업을 다니며 '천천히 부자 되기'의 핵심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알아야 할 상식"이라는 확신 끝에 강의안을 책으로 묶었다. 제목은 단호하다. 《천천히 부자 되기》. 철강 분야에서 평생을 보낸 공학자가 왜 갑자기 투자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단순한 재테크 조언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오히려 그는 신앙과 일, 그리고 돈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탐욕의 회로를 끊는 투자 원칙 이덕락의 출발점은 역설적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성경의 명령을 투자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그는 답을 '방식의 전환'에서 찾는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택하는 길—개별종목 선택과 단기매매—은 변동성이 커서 마음을 빼앗기기 쉽고, 일상과 직무를 흔든다"고 그는 말한다. 모델을 맞추려는 강박, 호가창과 차트를 붙드는 불안, 저점·고점에 대한 집착이 신자의 내면을 소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반면 시장 전체를 사는 장기·분산·적립은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그는 이를 "탐욕의 회로를 끊는 신앙적 기율"이라고 표현한다. 투자 방식 자체가 신앙적 삶을 도울 수 있다는 발상이다. 그의 투자 원칙은 명확하다: - 무엇을 살 것인가? 개별종목이 아니라 주가지수 추종 ETF(국내·미국·글로벌 시장). 즉, '전체 경제의 흐름'에 참여하라. -언제 살 것인가? 타이밍을 재지 말고 매달 급여일에 10~30%를 기계적으로 적립하라(정액·정기 매수). - 얼마나 오래? 평생. 최소 20~30년의 복리를 전제로 한다. - 어떻게 흔들림을 견딜 것인가? 시세 확인을 습관에서 지워라. "처음엔 6개월쯤 궁금하지만 곧 일상이 된다." 그는 강연에서 미국 지수의 장기수익률 같은 수치를 예시로 들곤 하지만, 더 강조하는 것은 숫자 자체가 아니라 리듬이다. "복리는 시간을 친구로 삼는 훈련이다." '빨리'가 아니라 '꾸준히'가 핵심이라는 뜻이다. ▣ 워런 버핏의 지혜, 신자의 생활 기율 "아무도 천천히 부자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그 유혹을 이기는 법 이덕락은 워런 버핏의 유명한 일화를 자주 인용한다. "사람들이 내 방식대로 투자하지 않는 이유? 아무도 천천히 부자 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단순한 투자 격언이 아니라, 현대인의 심리를 꿰뚫는 통찰이다. 특히 그는 '빨리'의 유혹이 신자에게 더욱 위험하다고 본다. 빠른 시세차익과 일확천금의 서사는 탐욕을 정당화하고, 결국 돈에 마음을 빼앗기는 구조를 강화한다. 반대로 ETF·장기·적립은 '느림'을 제도화하여 마음을 지켜 준다. 그는 이를 "신앙의 절제와 금융의 규율을 결합한 생활 기율"이라 부른다. "주가는 우리 통제 밖에 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매수의 규칙성과 기간뿐이다. 신앙생활이 매일의 기도와 예배 루틴에 기대듯, 재정도 규칙과 기간에 기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투자법은 단순한 재테크를 넘어선다. 그것은 일종의 '영성 수련'이다. 욕망을 통제하고, 시간을 존중하며, 규칙을 통해 자유를 얻는 훈련이다. 마치 수도사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듯,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금액을 투자하는 것이다. ▣ '코인'이 아닌 '회사'에 투자하라 "밤새 시세가 출렁이면 삶이 무너진다" 그는 암호화폐 투자에 대해서는 명확한 선을 긋는다. 한 증권사 지점장의 경험담을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분이 코인에 투자했더니 3일을 잠을 못 잤다고 하더군요." 이덕락의 평가는 간명하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회사'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본질적이다. 회사는 생산·연구·고용을 통해 사회와 상호작용한다. 그들은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며, 사람을 고용하고, 세금을 납부한다. 신자가 장기 주주로 남을 때 기업은 안정적 자본으로 성장하고, 주주는 그 과실을 나눈다. "내가 속한 소사이어티의 성장에 동참하면서 과실을 나누는 선순환"—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투자 윤리다. 반면 암호화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생산적 활동과는 거리가 멀고, 순전히 투기적 성격이 강하다. 무엇보다 변동성이 극심해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밤새 시세가 출렁이면 삶이 무너집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코인 차트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은퇴자의 포트폴리오: '가격'보다 '현금흐름' 배당 위주, 생활비의 '두 번째 월급'을 만들라 은퇴가 가까워질수록 현금흐름의 중요성이 커진다. 이덕락은 자신의 사례를 솔직하게 밝힌다. 고문 재직의 마지막 해를 지나며 매달 들어오는 급여가 끊길 것을 알기에, 배당이 꾸준한 종목·ETF의 비중을 높여 국민연금 + 배당금으로 생활비 체계를 설계 중이라고 한다. 그는 한때 연금형 상품만으로 노후를 설계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20년 받으면 원금이 사라지는 구조보다, 배당으로 현금흐름을 만들면서 원금을 보전하는 구조가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은퇴 설계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젊을 때는 주가 상승에 초점을 맞출 수 있지만, 은퇴 후에는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더 중요하다. 주가가 오르내리는 것보다 매달 일정한 배당금이 들어오는 것이 실질적으로 더 도움이 된다. "은퇴자의 핵심은 가격 변동이 아니라 현금흐름의 안정"이라는 그의 조언은 많은 예비 은퇴자들에게 실용적인 지침이 될 것이다. 특히 그는 국내 배당주뿐만 아니라 해외 배당 ETF도 적극 활용할 것을 권한다. 미국의 우량 기업들은 수십 년간 꾸준히 배당을 지급해왔고, 일부는 매년 배당을 늘려왔다. 이런 기업들에 분산 투자하면 환율 변동 위험은 있지만,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달러 배당금을 받을 수 있다. ▲돈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라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덕락 저자 ▣ '몰빵'의 심리학을 경계하라 목돈의 일시투자보다, '시간에 나눠 사기' 이덕락은 "목돈이 생겼을 때 일시에 투입하는 몰빵 투자는 심리적으로 버티기 어렵다"고 강조한다. 고점에서 사면 회복까지 몇 년을 견뎌야 하고, 그 시간은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이는 많은 투자자들이 겪는 전형적인 실수다. 퇴직금이나 상속받은 돈, 사업 매각 대금 등 목돈이 생기면 '한 번에' 투자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타이밍 리스크를 극대화한다. 대안은 간단하다. "목돈을 열 등분해 수개월~1년에 걸쳐 분할 매수하라." 그는 이 원칙을 자신에게도 엄격히 적용한다. "타이밍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타이밍과 종목 선택이라는 불가능한 숙제를 포기하는 순간, 투자는 삶을 방해하지 않는 일상이 됩니다." 실제로 그는 강의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1억 원의 목돈이 생겼다면, 한 번에 투자하지 말고 매월 1천만 원씩 10개월에 걸쳐 투자하라는 것이다. 혹은 더 보수적으로 2천만 원씩 5개월, 아니면 5천만 원씩 2개월에 나눠서 투자하는 방법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한 번에'라는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죠." ▣ 직장에서의 '승리' : 일의 탁월함이 신자의 명함 "존경받는 동료가 먼저다. 돈 이야기는 그 다음이다" 흥미롭게도 이덕락의 책은 앞부분에 직장 생활의 원칙을 배치한다. 투자 이야기보다 일의 품위를 먼저 다루는 것이다. 그는 카이스트 김영길 총장을 멘토로 떠올리며 "자기 분야에서 탁월함을 이루어 타인의 신뢰와 존경을 얻는 것"을 신자의 첫 소명으로 제시한다.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회식이나 소통에서 스스로 담을 쌓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존경받는 동료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직격하는 조언이다. 일부 신자들은 '세상과 구별된다'는 명목 하에 동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 업무에서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덕락의 생각은 다르다. "신앙은 일을 도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일을 더 잘하게 만드는 동력이어야 합니다." 투자 원칙 역시 이 맥락에서 제시된다. 개별종목 단타는 업무 집중을 해치고 '월급 루팡'이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반면 지수·장기·적립은 직무의 탁월함을 보존하면서 재정을 꾸리는 길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차트부터 보고, 점심시간에 매매하고, 퇴근 전에 또 확인하면서 어떻게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모습을 동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의 투자 철학은 결국 '일 잘하는 신자'가 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투자 때문에 일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 교회와 기금 운용: 쉬쉬할 문제가 아니다 "이미 대형 교단은 ETF로 연금을 운용한다—공개적 토론을" 취재와 강의를 다니다 보니, 교회 안에는 여전히 투자를 꺼리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덕락은 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힌다.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제도와 문화는 변합니다. 우리는 민주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그 핵심 제도는 주식회사입니다. 물속의 물고기가 물을 외면할 수는 없어요." 실제로 이미 대형 교단들은 목회자 연금을 주식 등에 투자해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교회 내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는 특히 목회자 연금과 같은 제도적 재정은 공개적 토론과 원칙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ETF가 수익이 적다는 통념은 오해입니다. 복리 10~15%의 장기 성과가 기금 운용의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직접투자를 통한 고수익 집착이 아니라, 규칙·분산·기간으로 제도를 설계하는 일이다. 교회 기금을 특정 부동산이나 개별 종목에 몰빵하기보다는, 분산된 지수 상품을 통해 안정적으로 운용하자는 제안이다. "교회도 하나의 조직입니다. 미래의 목회자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합리적인 재정 운용이 필요합니다. 이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특히 그는 젊은 목회자들의 현실을 언급한다. "요즘 젊은 목회자들은 학자금 대출도 있고, 집값도 비싸고, 아이 교육비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청빈'만 강조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에요." 주식을 비판적인 시각이 아니라 삶을 자유롭게 하는데 사용하면 된자는 저자 ▣ FIRE 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돈이 많아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삶은 허물어졌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운동에 대해서도 그는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그가 들려준 지인의 사례는 강렬하다.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벌어 조기 은퇴했으나, 일상의 구조가 무너지고 소비와 방황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경제적 자유가 곧 삶의 의미인가요?" 그의 대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먹고사는 걱정이 없어도, 보람과 공동선에 기여하는 일이 없으면 삶은 쉽게 무너집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자아실현을 하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의 '자유'는 일에서 도망치는 자유가 아니라, 탐욕과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다. 그 자유는 규칙적인 투자와 성실한 직무가 함께 만든다. "진정한 자유는 일하지 않는 자유가 아니라,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라,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투자법은 FIRE와는 방향이 다르다. 빨리 많은 돈을 벌어서 일을 그만두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돈에 대한 걱정 없이 의미 있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 그리스도인과 부(富): '깨끗한 부자'의 윤리 "부 자체는 죄가 아니다—문제는 방식과 마음" 이덕락은 "아브라함도 부자였다"는 성경적 상식을 조용히 상기한다. 부의 문제는 존재론이 아니라 윤리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는 김동호 목사의 표현을 빌려 '깨끗한 부자'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깨끗한 부자'의 윤리는 세 가지 층위로 나뉜다: 방식의 윤리 : 투기는 배제하고,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회사에 장기 참여한다. 이는 돈을 버는 방법 자체에 관한 것이다. 남의 손실을 전제로 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포지티브섬 게임에 참여하자는 것이다. 주식 투자가 도박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의 윤리 : 탐욕을 부채질하는 단타·레버리지·코인에 거리를 둔다. 이는 투자하는 과정에서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투자라도 마음을 빼앗기면 신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투자 방식 자체가 마음의 평정을 해치지 않도록 설계해야 한다. 사용의 윤리 : 나중에 남에게 짐이 되지 않는 재정, 이웃의 짐을 덜어 주는 자원을 준비한다. 이는 모은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나아가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을 갖추자는 것이다. 그는 "투자는 신앙의 본질 문제가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다만 한다면 방식이 신앙을 도와야 합니다"라고 못 박는다.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투자 자체를 신앙의 필수 요소로 만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금기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다면 올바른 방식으로, 신앙적 가치와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다. ▣ 강의 현장에서 들려온 실제 변화들 "월급의 10~30%를 기계적으로"—대학원생·교수들의 반응 그의 강의를 들은 대학원생들은 "장래가 걱정되던 마음이 정리됐다"며 소액 적립투자를 시작했다고 한다. 월 20~30만 원이지만 꾸준히 시작한 것이다. 교수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무엇을 사야 하나, 언제 사야 하나'의 고민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한 포스텍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에는 주식 뉴스가 나올 때마다 신경이 쓰였는데, 이제는 그냥 넘어가게 됩니다. 어차피 매달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금액만 투자하면 되니까요." 실제로 이것이 핵심이다. 투자 결정의 부담을 없애는 것이다. 매일 매일 '사야 하나, 팔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원칙을 정하면 그 이후에는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물론 부정적 반응도 있다. 개별종목 발굴로 높은 수익을 노리는 이들에게 그의 메시지는 "단조롭고 재미없어" 보인다. 하지만 성과를 비교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조롭지만 지속 가능한 길이 결국 삶을 지킵니다." 그의 확신이다. 재미는 없을지 몰라도, 생활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 신앙·일·투자의 삼중주 '느림'의 미학, '복리'의 언어, '품위'의 직업윤리 이덕락이 말하는 '천천히 부자 되기'는 단순한 재정 테크닉을 넘어 삶의 태도다. 그의 철학은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신앙의 축 : 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규칙과 절제로 탐욕의 회로를 끊는다. 이는 투자를 영성 훈련의 일부로 보는 관점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기도를 하듯,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투자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투 자 : 시장 전체·장기·적립·분할로 삶을 안정시키고, 은퇴에는 현금흐름(배당)을 더한다. 그는 말한다. “빠름의 욕망을 이기는 길은, 느림을 습관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매달 정해진 날, 정해진 비율로, 정해진 상품을, 평생 사는 것. 신앙의 일상처럼.” 철강 연구의 오랜 시간 끝에, 그는 이제 사람의 마음과 돈의 시간을 연구한다. 그 연구의 결론은 간명하다. “천천히”는 재정의 전략이자, 신앙의 언어다.

자연이 들려준 소리, 믿음으로 빚어낸 빛의 기록

“꽃은 어두운 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언제나 빛을 향해 자라죠. 마침내 향기로운 꽃잎을 열고 세상을 향기로 채우는 것처럼요.” 한정희 작가의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곧 그의 삶이며, 그림이며, 신앙의 고백이자, 회복을 향한 내밀한 서사이다. 2025년 봄, 뉴욕과 스톡홀름을 오가며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온 서양화가 한정희가 8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연다. 〈자연의 소리 – 전개〉, 경기도 안산 ‘꿈의 교회’ 내 더갤러리에서 4월 3일부터 13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단지 작가의 귀국전이 아니다. 이것은 오랜 시간 예술과 신앙, 봉사와 회복의 길을 걸어온 작가의 진실된 내면의 기록이자, 관람객과 영적으로 호흡하고자 하는 그의 가장 깊은 기도에 가깝다. ■예술은 그에게 신앙의 통로 한정희 작가는 1953년생, 화가인 한봉덕 화백의 딸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예술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고교 시절 첫 개인전을 열며 미술계의 이목을 끈 그는 24살이던 1978년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유학을 떠나며 본격적인 작가의 삶을 시작했다. 그의 예술 여정은 이후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스웨덴 스톡홀름 등 세계 각지에서 100회가 넘는 전시를 이어가며 활발히 펼쳐졌다. 그러나 그에게 예술은 단순한 작업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을 체현하는 삶의 도구이자, 이웃과 연결되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봄의 환희> 한정희 작가는 모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삶의 시련과 함께 깊어졌다. 결혼과 이혼, 홀로 아들을 키우는 고단한 시간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고백한다. “‘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는데, 그 순간 마음속에 울림이 왔어요. '너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웃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진리를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후, 자신의 그림이 하나님과의 만남과 깨달음을 고백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랐고, 자연을 주제로 작품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연은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누가 만들었는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죠. 저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하고 싶었어요.” 한정희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인사동 인사이트 전시관 풍경 ■한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 ‘색’을 금식하다 그의 삶과 예술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뉴욕에 머물던 시절, 그는 도시에 만연한 마약과 음란, 물질주의의 이면을 뼈저리게 목격했다. 그때 만난 한국계 마약 중독 청소년들, 고통과 방황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해 그는 예술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색을 금식'했다. “10년 넘게 흑백으로만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이들의 어둠 속 고통을 더 진실하게 담고 싶었거든요.” 그는 그렇게 ‘빛’을 내려놓았다. 그가 말하는 흑백은 단지 색상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과 절망의 실체였다. 그러나 이 깊은 동참의 시간은 그의 몸과 정신을 점점 병들게 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산토리니에 갔을 때였습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바다를 마주하며 마음속으로 외쳤죠. ‘나는 다시 색을 그려야 한다. 이것이 진리다.’” 그 순간부터 그의 작품은 부활의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고통에서 소생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흑백에서 다시 원색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은 마치 십자가를 지나 부활로 향하는 신앙의 순례길 같았다. ■ 그림, 그 이상의 실천… 예술은 '살아있는 사랑' 한정희 작가의 삶은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실천가로서도 빛난다. 그는 스웨덴 유학 시절, 8000여 명의 한국 입양아를 위해 15년간 한글학교에서 봉사했고, 미국 LA에서는 마약에 빠진 청소년들을 위한 사역에 헌신했다. 그는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접 체험했다”며, “단순히 물질적 지원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이 회복되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의 길”이라고 말한다. 작품 활동의 수익도 봉사와 선교로 이어졌다. 그에게 예술은 물질이 아니라 도구였고, 명성이 아니라 통로였다. “예술은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 세계가 그대로 드러나죠. 그 세계가 진실하고 따뜻해야 관람자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그는 지금도 뉴욕에서 권사로 활동하며, 신앙과 예술을 결합한 나눔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림이 곧 예배이고, 전시가 곧 설교이며, 색채 하나하나가 곧 기도이자 사랑인 셈이다. ■‘자연의 소리’, 그리고 ‘전개’ 이번 전시 〈자연의 소리 – 전개〉는 그의 지난 시간들을 아우르는 예술적 신앙 여정의 연속선상에 있다. ‘전개’라는 부제는 그가 경험한 자연 속 하나님의 메시지를, 화폭 위에 차곡차곡 펼쳐나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한정희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추운 겨울을 이겨낸 꽃처럼, 고난을 견디고 믿음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삶의 기쁨”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전시작들 속 자연은 생명력 그 자체로 피어오른다. 바람 속에서 꺾이지 않는 가지들,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꽃잎들, 광야에서 솟아오르는 푸른 싹은 모두 그의 내면에서 피어난 영혼의 풍경이다. 작품의 색채 또한 의미가 뚜렷하다. 붉은색은 성령의 열매, 노란색은 예수의 영광, 파란색은 평안, 하얀색은 정결, 검은색은 고난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전하는 것은 단순한 신학적 상징을 넘어선다. 그것은 결국 ‘감사’와 ‘기쁨’이라는 깊은 정서, 다시 살아갈 힘을 관람자에게 전하는 조용한 감동이다. ■ 귀향, 그리고 새봄처럼 다시 피어난 이야기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익숙하지만, 제 마음속 밑바닥엔 언제나 한국이 있었습니다. 이 땅의 분들에게 저의 그림이 위안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한정희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땅에 '신앙적 감성'을 뿌리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정서를 품고, 다시금 이곳의 공기와 눈빛을 마주하며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되묻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젊은 작가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한다. “진실한 자기 색깔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술은 결국 자신을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가 필요하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정희 작가의 삶과 그림은 이 성경 구절을 증명하는 여정이었다. 그는 진리를 좇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림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고,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했다. 그의 이번 전시는 단순한 ‘작품 전시’가 아니라, 삶의 고백이고, 신앙의 찬송이며, 사랑의 전도다. 그는 말한다. “제가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누워 있고 싶진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나누며 살다 가고 싶습니다.” 그 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안산의 더갤러리 한편에서 새처럼 날아와, 조용히 우리 가슴 어딘가에 내려앉고 있을 것이다. [전시 정보] 전시명: 자연의 소리 – 전개 기 간: 2025년 4월 3일 ~ 13일 장 소: 경기도 안산시 꿈의교회 ‘더 갤러리’ 작 가: 서양화가 한정희 특 징: 자연을 주제로 한 영적 회복, 동서양 융합의 색채 표현, 신앙과 예술의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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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영적 기류 바꾼다... 성극 ‘리턴’, 3년 연속 공연 대장정 돌입

▲출범식 후에 기념사진 대학로 기독교 성극의 자존심, 연극 ‘리턴(Return)’이 2026년 시즌의 화려한 시작 알렸다. 연극 ‘리턴’ 제작팀은 11일 오전 일산광림교회에서 출범식을 갖고, 오는 4월부터 시작될 8개월간의 장기 공연 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행사에는 제작자인 김성한 전도사(YDP하나교회 담임)와 제작·후원을 맡은 코리아 투게더 대표 박동찬 목사(일산광림교회), 그리고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2026년 시즌 배우들이 참석했다. ▲문화를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김성한 전도사 김성한 전도사 “수익 앞둔 현실의 벽,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넘었다” 제작과 극본을 맡은 김성한 전도사는 인사말을 통해 문화 현장의 치열함과 제작 과정의 비화를 가감 없이 전했다. 김 전도사는 “문화의 힘은 사람의 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든 뒤 저변에서부터 가치관을 바꿔놓는 무서운 요소”라며, “사단이 문화를 도구로 쓰듯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 도구를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되찾아올 사명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사실 대학로에서 1년 넘게 무대를 지키는 것은 수익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라 2025년 마지막 공연 때는 이제 그만두려 마음을 정리했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날 박동찬 목사님이 공연을 보러 오셨고, ‘더 해야 한다’는 격려 한마디에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는 확신을 얻었다”며 “2026년 멤버들과 함께 대학로의 영적 기류를 바꾸기 위해 다시 사명감을 갖고 무대에 들어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빛은 반드시 어둠을 이기든, 교회는 문화를 통해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밝힌 박동찬 목사 박동찬 목사 “세상의 밤 문화, 빛의 자녀들이 기독교 방식으로 이겨내야” 이어 설교를 맡은 박동찬 목사는 문화 사역의 중요성과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 여섯 문장의 핵심 메시지를 전했다. 박 목사는 “오늘날 세상의 밤 문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 빛의 자녀들이 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진단하며, “하지만 캄캄한 밤하늘 위 비행기에서도 담뱃불 같은 작은 빛이 보이듯 어둠 속에서 빛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독려했다. 또한 “우리는 세상적인 힘을 가져야 이길 수 있다는 오해를 버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방식대로 세상과 싸워야 한다”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기력한 패배자처럼 보였으나 결국 그 사랑으로 전 세계를 바꾼 것처럼 우리도 거룩함과 사랑을 무기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세상의 계략 앞에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시며 비웃으신다는 시편의 말씀처럼,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며 “대학로에서 여러분이 서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될 것”이라고 축복했다. ▲출범식에서는 뮤자콜터닝포인트팀의 시연공연도 가졌다. 공연모습 3년 연속 공연의 기적...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던지는 경종 연극 ‘리턴’은 2024년과 2025년에 이어 올해까지 3년 연속 대학로 무대에 오른다. 이는 기독교 성극이 상업 연극의 메카인 대학로에서 거둔 보기 드문 성과다. 이번 시즌부터는 사단법인 ‘코리아 투게더’가 제작과 후원에 본격 참여하며 기독교 문화의 지평을 일반 대중으로까지 넓힌다는 계획이다. 이번 공연은 대학로 ‘시윤아트홀’에서 2026년 4월 2일부터 12월 31일까지 진행된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주 1회 정기 공연을 통해 8개월간의 대장정을 이어갈 예정이다. [공연 개요] 공연명: 연극 ‘리턴 (Return)’ 공연기간: 2026년 4월 2일 ~ 12월 31일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공연장소: 대학로 시윤아트홀 제작/후원: 코리아 투게더, YDP컬쳐베이스 문의: YDP하나교회(02-2636-7447) 또는 김성한 전도사(010-3136-4486)

8세 소녀가 본 ‘예수 얼굴’, 한국을 홀리다… 아키아나 특별전 3월까지 연장

8세의 어린 나이에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바탕으로 예수의 초상화를 그려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천재 화가, 아키아나 크래매릭(Akiane Kramarik)의 작품 세계가 서울 서초동에서 그 감동의 여정을 이어간다. 사랑의교회(담임 오정현 목사)는 현재 진행 중인 특별전 「아키아나: 예술을 통한 믿음의 여정」이 관람객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당초 예정된 일정을 변경, 오는 2026년 3월 1일(일)까지 연장 전시하기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지하 5층 공간의 변신, 1만 관객 사로잡은 ‘몰입형 예술’ 미국 비영리 예술재단 ‘Belóved Gallery’의 후원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사랑의교회 지하 5층 전체 공간을 전문 미술관 수준으로 탈바꿈시킨 대규모 프로젝트다. 지난해 11월 개막 이후 현재까지 약 1만 명에 가까운 관람객이 다녀가며 교계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깊은 예술적 영감을 선사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핵심은 단연 아키아나의 대표작인 「Prince of Peace(평강의 왕)」이다. 이 작품은 아키아나가 여덟 살 때 그린 예수의 초상화로, 오프라 윈프리 쇼와 CNN 등 주요 언론에 소개되며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특히 한때 도난당해 20년간 행방이 묘연했다가 기적적으로 작가에게 돌아온 극적인 서사를 품고 있어, 해외 최초로 한국에서 공개되는 이번 전시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27m LED와 미디어 아트, 오감으로 느끼는 ‘믿음의 여정’ 전시장은 단순히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 다각적인 체험이 가능하도록 구성됐다. ●다채로운 작품군: 아키아나의 정수가 담긴 대표작 20여 점 전시. ●압도적 스케일: 높이 27m에 달하는 대형 LED 작품과 6분간 진행되는 몰입형 스크린 영상. ● 입체적 스토리텔링: 작가의 생애를 다룬 영화 상영 및 미디어 아트를 통한 영적 교감. ▲ 아키아나 어린시절, 꿈과 환상 속에 자꾸 찾아온 본, 사랑과 평화 예수님! 사랑의교회 아트디렉터 안기순 권사는 “이번 전시는 예술이라는 도구를 통해 복음과 믿음의 여정을 시각적으로 경험하는 특별한 기회”라며, “남은 전시 기간 동안 더 많은 이들이 작품 속에 담긴 평화와 위로의 메시지를 마주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전시 가이드] 전시명: 아키아나: 예술을 통한 믿음의 여정 기 간: ~ 2026년 3월 1일(일)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장 소: 사랑의교회 지하 5층 (서울 서초구 반포대로 121) 주최/주관: Belóved Gallery(미국), 사랑의교회 공동주관 자료제공 : 사랑의교회 아트디렉터 안기순 관람 문의: 문화예술사역부 02-3495-1458

청현재이 말씀그라피선교회, 2026 말씀그라피 신년기획전 개최

갤러리 1관 전시포스터_ “하나님의 선물” 갤러리 2관 전시포스터_ “축복” 청현재이 말씀그라피선교회는 2026년 새해를 맞아, 말씀으로 한 해를 시작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말씀그라피 신년기획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2026년 1월과 2월, 두 달간 청현재이 아트센터에서 진행된다. 이번 신년기획전은 매년 새해마다 말씀 앞에 다시 서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이어져 온 청현재이 말씀그라피선교회의 정기 기획전으로, 말씀을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며, 삶으로 살아내는 믿음의 결단을 돕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갤러리 1관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주제로, 9명의 말씀선교사가 신년을 맞아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삶을 위해 묵상하며 표현한 말씀그라피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하나님께서 새해를 살아갈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본질적인 선물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다시 묻는다. 각 작품은 위로와 소망, 순종과 감사라는 신앙의 고백을 담아, 관람객들이 말씀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해의 방향을 조용히 정돈하도록 이끈다. 갤러리 2관에서는 17명의 말씀선교사가 참여하는 ‘아르카 루하(Arca Ruha)’ 정기전시회가 ‘축복’이란 주제로 함께 열린다. ‘아르카 루하’는 ‘말씀을 담는 그릇, 말씀으로 숨 쉬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말씀그라피를 통해 성경 말씀이 기록을 넘어 살아 있는 영적 호흡으로 흐르기를 바라는 공동체적 신앙 고백을 담고 있다. 이번 정기전시는 새해를 향한 각 말씀선교사들의 말씀 묵상과 고백이 모여, 한 해의 시작을 말씀 위에 세우고자 하는 공동체적 다짐의 장이 될 것이다. 이번 갤러리 1관과 2관에서 열리는 전시는 단순한 캘리그라피 전시를 넘어, 말씀을 쓰고, 바라보고,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 한 해의 시작을 말씀과 동행하는 삶 위에 세우도록 돕는 신앙의 자리이다. 청현재이 말씀그라피선교회는 매년 신년 말씀그라피 기획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새해의 목표보다 말씀 앞에 서는 태도를 먼저 회복하고, 계획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이 전시를 이어오고 있다. 이번 2026 신년 말씀그라피 기획전이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고, 지친 마음에는 위로가 되며, 나아갈 길에서는 방향이 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청현재이 말씀그라피선교회는 2026년에도 말씀그라피를 통해 말씀이 삶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문화를 꾸준히 세워가고자 한다. ■ 전시 안내 • 전시장소_ 청현재이 아트센터 갤러리 1관, 2관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39번길 25) • 전시 기간: 2026년 1월 ~ 2월 30일 • 관람 시간: 평일 오전 11시 ~ 오후 5시 • 휴관일: 매주 월요일, 주일, 공휴일

사과 하나 드실래요?

時의 초대/이원좌 얼마 전 아파트 옆동에 사시는 강 이모님이 카톡을 넣었다 오후에 차 한잔 하면 좋겠다고~ 장소가 어디가 좋겠냐고 하시길레 스타벅스에서 보자했더니 메가커피가 어떠냐 하신다 장소가 어둡다고 했더니 그러면 뚜레쥬르빵집으로 하자고 또 바꾼다 아! 커피값에 신경쓰시는구나 하고 커피는 제가 살께요 ~ 했다 몇년전 아파트 노인정에서 요청이 와서 회계를 봐준 적이 있다 회계라 봐야 장본 거 영수증 확인하고 잔고 정리해주는 게 전부인데 외부인이 확인해야 하는 란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노인정회장과 회원인 강이모님이 사소한 일때문에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노인정회장이 몸이 아프게 되었는데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앓게 되어 노회장을 모시고 병원을 다니게 된거다 소식을 들은 강이모님은 아픈 거 같지 않은데 뭘그렇게 친절하게 하냐면서 나에게까지 언짢은 표현을 했다 그 때 강이모님은 연세든 분 같지 않게 한 번 말한 것을 누그러뜨리는 거 없이 강경하게 난처한 상황으로 몰아갔었다 그렇게 뜸하게 시간이 가고 해가 바뀌고 이년 가까이 지났을 때 연락이 온 것이다 길 건너 커피와 빵을 함께 파는 뚜레쥬르빵집에 들어가니 안쪽의 자리에서 손짓하는 강이모와 마주하게 되었다 수척해진 얼굴에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는 내 손을 잡으며 반가워 한다 무슨 일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얼굴이나 한 번 보고싶었다고 하면서 그렇게 앙숙이었던 노인회장에게도 차마 못할짓을 했다고 후회를 하며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고 하는 거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나? 그렇게 못잡아먹어서 난리이더니 해가 지나가려하니 아쉬움이 생긴건가? 속으로 혼잣말을 하게 되었는데 ᆢ 몇달 전에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고 전하며 눈시울을 적신다 팔십이 되는 적지않은 나이에도 그렇게 꼿꼿하게 자기주장을 내던 분이 가족이 쓰러지니 이렇게 심신이 무너지는가 보다 노인회장을 만나 진정으로 사과하고 싶다고 제차 이야기를 하는 거 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데 문제는 사과받아야 할 노인회장이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나올 수가 없다 이제는 만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거 그 좋은 시간을 억하심정으로 보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래도 늦게나마 사과를 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주위에는 잘못을 하고도 시간에 맡기고 뭉개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지않은가 저녁시간이 되어 식사를 사드리고 다음에 연락을 하기로 하고 집에 왔는데 문 앞에 뭔가 놓여져 있다 견과류 다과가 들어 있는 쇼핑백 메모에는 안녕하세요 옆집 501호입니다 ):: 올한 해 이래저래 마음 많이 써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남은 연말 평안하게 보내시고 2026년 더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되세요 ps 저희집 아기는 어제부터 조금씩 걷기 시작했습니다 ???? 돌이 언제지? 옷이라도 한 벌 ㅋ 지난 해 이사간 아기는 잘 자라고 있을까? 에이~ 눈에보이는 아기한테나 마음써야겠다 이사간 그곳에서 좋은 이웃을 만났겠지ㅎ 나의 모토는 손끝에 닿는 인연들과 잘지내는 거다 그래서 그런가? 외로움이 적다 정말 안된사람 생각하면 나의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기현상이다 이제 두 밤이지나면 올해도 안녕이다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말로 하는 사과 한 알씩 돌리는 거다 살아가면서 느낀다 사과한다는 것은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 효과는 가성비가 대단하다고 할 수있다 진정한 사과는 문제를 회복시키고 그의 마음을 다 갖을 수가 있어 남는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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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도어, 동계올림픽 박해국 출신 선수 위해 기도 캠페인 시작

유튜브 Olympics 캡처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와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에서 2026년 동계올림픽이 개막한 가운데, 기독교 박해 감시 단체 오픈도어 선교회가 박해 국가 출신 선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에반젤리컬포커스가 11일 보도했다. 이번 올림픽은 2월 6일부터 22일까지 열리며, 93개국에서 3500명 이상의 선수들이 스키, 피겨스케이팅, 아이스하키 등 다양한 종목에서 금메달을 놓고 경쟁한다. 조직위원회는 20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해 대회를 관람할 것으로 추산했다. 오픈도어는 올림픽이 “전 세계 사람들이 차이를 내려놓고 평화롭게 경쟁하며 공통된 인간성을 확인하는 시간”이라며, 기독교인들에게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올림픽을 “기도의 기회”로 삼을 것을 권면했다. 오픈도어는 2026년 기독교 박해 국가 순위(WWL)에서 기독교 박해가 심각한 50개국 중,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14개국을 대상으로 기도 캠페인을 전개한다고 밝혔다. 해당 국가는 에리트레아,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이란,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모로코, 우즈베키스탄, 멕시코, 키르기스스탄, 튀르키예, 카자흐스탄, 콜롬비아다. 이들 14개국에서 총 192명의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며, 가장 많은 선수단을 파견한 국가는 중국(125명)으로 집계됐다. 이어 카자흐스탄(36명), 튀르키예(8명), 멕시코(5명), 이란(4명) 순이었다. 나머지 국가들은 1~2명 수준의 참가자로 구성됐다. 오픈도어는 각 국가별 기독교인들이 처한 위험과 필요를 설명하고, 짧은 기도문도 함께 제시했다. 단체는 “선수들이 출전하는 경기를 볼 때 그 나라의 형제자매들을 떠올리며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도 제목으로는 에리트레아에서 기독교인들이 겪는 극심한 감시와 폭력적 급습, 기한 없는 구금 문제부터, 나이지리아에서 테러 단체들이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자행하는 지속적 폭력, 파키스탄에서 기독교인들이 겪는 차별과 치명적 폭력 위협, 신성모독 혐의 고발 위험 등이 포함됐다. [복음기도신문] 제공

공익인가 음해인가… 욕설 녹취 배포까지 한 ‘쌍욕 목사’ 기사, 언론 경계 넘었나

한 종교 매체가 보도한 「쌍욕하는 목사와 상처 받고 좌절하는 교역자」 기사가 교계 안팎에서 논란을 낳고 있다. 기사에는 특정 목사의 욕설 녹취와 SNS 글, 제3자의 증언이 담겼고, 독자가 녹음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어 단순한 문제제기가 아닌 개인적인 명예훼손은 물론 형사적 문제까지 번질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보도의 구성과 방식, 균형성, 공익성 측면에서 언론이 지켜야 할 최소 기준을 충족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사실 전달을 넘어 인물 공격과 여론 조성에 가까운 방식이라는 지적이다. 공익적 의제는 분명… 그러나 면책이 되지는 않는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이 사안의 주제 자체는 공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기사도 부총회장 당선과 차기 총회장 가능성을 전면에 놓고 지도자 적격성, 갑질, 언어폭력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공적 지위와 영향력이 큰 종교 지도자의 인격과 리더십은 공익적 관심사에 포함될 수 있다. 공동체를 책임질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면 검증 역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공익적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보도가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공익은 면책의 근거가 아니라 출발점일 뿐이다. 기사 작성 방식이 부정확하거나 일방적이라면 오히려 법적 위험은 더 커진다. 공익의 이름을 내세운 채 개인을 무너뜨리는 방식이라면 그 순간 보도는 공익을 잃는다. 반론 없는 기사… 김문훈 목사의 입장은 사라졌다 이 기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지점은 균형의 부재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사 안에는 김문훈 목사 본인의 해명이나 반박, 경위 설명, 사과 여부 등이 직접 인용되거나 확인된 흔적이 거의 없다. 문제 제기는 강하게 전개된다. 욕설 녹취, SNS 글, 제3자의 진술이 이어지고, 기사 톤은 “이제라도 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요구형 결론으로 곧장 나아간다. 그러나 당사자의 입장은 비어 있다. 취재 과정에서 확인을 요청했는지, 어떤 답을 받았는지조차 기사 구조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구조는 이렇게 형성된다. 문제 제기는 강하고, 근거는 제3자 자료에 의존하며, 당사자 반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균형성, 즉 반론권 보장의 원칙에서 매우 취약한 보도 방식이다. 고발문에 가까운 문체… 이미 결론이 정해진 기사 기사의 문체와 구성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이 글은 사실 보도라기보다 고발문이나 성명서, 논평에 가까운 형식으로 읽힌다. “인격과 풍문은 소문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식의 표현은 풍문을 사실 근거처럼 제시하는 방식이다. “막장” 같은 낙인성 단어는 평가를 일반화한다. “어떻게 총회를 지도하는 지도자로 세울 수 있겠는가”라는 문장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독자를 설득하려는 문장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독자에게 ‘이미 결론이 정해진 글’이라는 인상을 준다. 실제 사실관계와 별개로 매도와 편파 논란을 불러오기 쉬운 편집이다. 녹취파일 다운로드 제공… 보도에서 확산으로 넘어간 지점 이번 기사에서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욕설 녹취파일을 독자가 직접 내려받을 수 있도록 안내한 점이다. 이는 사실 전달의 영역을 넘어 개인 발언을 대중에게 직접 확산시키는 행위다. 언론은 필요에 따라 자료를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녹취 전체를 배포하거나 다운로드를 유도하는 방식은 보도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정 확산과 낙인의 재생산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독자는 사건의 본질보다 욕설 자체에 집중하게 되고, 인물에 대한 혐오 감정이 강화된다. 언론이 사실 전달자가 아니라 감정 유통자로 변하는 순간이다. 더구나 이런 행위는 형사적 책임의 면책을 벗어날 소지보다 책임을 더 강하게 물을 수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법률적으로도 취약… 공익과 인격 침해의 경계 이 기사에는 법적 위험 요소도 적지 않다. 특정 인물의 인격 결함과 지도자 부적격을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반론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녹취와 평가를 결합했다는 점은 명예훼손 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녹취파일 다운로드 제공은 공개 범위의 적정성, 동의 여부, 편집 가능성 등 추가적인 법적 쟁점을 낳는다. 사적 발언이 맥락 없이 유통될 경우 인격권 침해 문제까지 제기될 수 있다. 홈페이지 갈무리 신앙 공동체의 기준에서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언론 윤리를 넘어 신앙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경은 사랑이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말한다. 이는 잘못을 숨기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경고다. 기사에서 이 문제와 관련된 사역자와 사과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이미 사과와 해결이 있었던 사안이라면 그것을 현재형 공격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공동체 회복과 거리가 멀다. 회개를 촉구하는 보도와 인물을 낙인찍는 보도는 다르다. 전자는 공동체를 살리고, 후자는 공동체를 찢는다. 공익의 이름으로 행해진 판단이라면 종교 지도자 검증은 필요하다. 그러나 검증은 절차와 균형 위에서만 설득력을 가진다. 반론이 없고, 맥락이 비어 있으며, 결론이 먼저 제시되고, 녹취까지 확산시키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보도가 아니다. 이미 판단을 강요하는 행위다. 공익을 말하려면 절차가 먼저다. 비판을 하려면 균형이 먼저다. 고발을 하려면 책임이 먼저다. 언론이 공익의 이름으로 개인을 무너뜨리는 순간, 그 피해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로 번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폭로가 아니라 성찰이다. 언론이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 말이다.

기침 총회, ‘돌봄통합지원법’ 시행 발맞춰 돌봄목회 집중과정 개설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총회장 최인수 목사)가 급변하는 사회 구조와 법적 변화에 대응해 지역사회와 상생하는 ‘돌봄목회’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는 지난 2월 5일, 서울 구로구 새서울교회에서 제6회 돌봄목회 집중과정을 개설하고 제1차 정책 포럼을 개최했다. 이번 과정은 오는 3월 ‘돌봄통합지원법’의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한국교회가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 통합 돌봄)의 관점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할지 논의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 "돌봄은 교회의 본질적 사명… 공공성 회복이 관건" 이날 강사로 초청된 장헌일 박사(한국공공정책개발연구원장, 신생명나무교회 목사)는 ‘돌봄통합지원법 시행에 따른 돌봄목회’를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장 박사는 "이제 보건의료, 요양, 돌봄 서비스, 주거가 하나로 통합되는 시대가 왔다"며 "교회는 단순히 종교 시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공공 돌봄 파트너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장 박사는 돌봄의 가치를 ▲인간 존엄과 존경 ▲신체·정서·영적 건강을 아우르는 포괄적 접근 ▲지역 회복을 위한 연대로 정의했다. 특히 최근 통계 자료를 인용하며 "예배 다음으로 지역사회 돌봄을 강화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위기 극복 방안"이라며, 교회가 사회적 약자와의 유대감을 형성해 돌봄 사각지대 해소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 성경적 원리에 기초한 ‘전인적 돌봄’ 모델 제시 신학적 근거에 대한 제언도 이어졌다. 장 박사는 "돌봄목회의 성공을 위해서는 성경적 돌봄의 원리(창 1:28)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요 3:16)과 만물을 충만케 하는 교회(엡 1:23)로서의 선교적 소명을 회복할 것을 주문했다. 그는 "전인적 돌봄은 육체와 정신, 영성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이는 곧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구현하는 길"이라고 덧붙였다. 강연 후에는 참석자들에게 실질적인 돌봄 모델 연구를 위한 '워크시트 작성 가이드'를 제공하고 열띤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 현장 중심의 실무 교육 이어갈 예정 이번 행사는 박진웅 목사(총회 공보부장)의 총괄 진행 아래, 윤배근 목사(사회부장)의 대표기도, 이길연 목사(군경부장)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한편, 돌봄목회 집중과정은 이론에 그치지 않고 현장 실무 교육으로 이어진다. 오는 3월에 열릴 2차 강의는 ‘돌봄 조직과 커뮤니티 케어 거버넌스’를 주제로 진행된다. 참석자들은 신생명나무교회 엘드림통합돌봄센터를 방문해 현장 실습을 진행하고, 대흥동 교동협의회의 실제 활동 사례를 공유하며 실천적인 역량을 강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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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붕괴 위험, 지정학을 넘어 영적 전환할 때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격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 체제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진단한다. 경제는 마비되고 사회는 분열되었으며, 주민들은 기근과 질병에 노출돼 있다. 무엇보다 북한을 지탱해온 중국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를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나 군사 전략의 변화로만 본다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를 하나님께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하시는 과정, 그리고 어둠의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는 영적 질서의 드러남으로 해석해야 한다. 산사태처럼 오는 통일 많은 이들은 통일이 단계적 대화와 협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역사와 국제정치의 현실은 다르다. 독일, 예멘, 작은 국가들의 병합 사례까지도 모두 ‘붕괴’가 먼저 찾아온 뒤에야 가능했다. 성경은 “빛과 어둠은 섞일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와 전체주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통일은 이상적일 수 있으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결국 통일은 대화로 설계되는 구조물이 아니라, 내부 붕괴가 외부 질서와 맞물리는 순간 갑작스럽게 열리는 문과 같다.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체제의 한계 북한의 붕괴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니다. 그 뿌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체제 유지의 도구로 취급한 데 있다. 농부는 생산 수치로, 아이들은 행사 도구로, 노인은 인구 숫자로만 계산되었다. 예배와 성경은 금지되었고, 생각은 통제되었다. 인간 존엄이 철저히 무너진 체제는 결국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죄로 세워진 권력과 우상화된 통치가 역사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이다. 중국의 흔들림, 북한의 비틀거림 북한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신호는 중국의 흔들림이다. 북한의 생명줄은 중국이었고, 그 그림자 권력 역시 중국이었다. 그러나 중국도 성장의 한계에 봉착했다. 개방하면 경제가 살아도 정권은 무너지고, 닫으면 정권은 유지되지만 국민 경제가 붕괴한다. 이는 북한과 동일한 딜레마다. 결국 진리를 억압하고 자유를 통제하는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북한, 평행선의 대화 최근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 가능성은 사라졌다. 표면적으로는 핵 문제 때문이지만, 본질은 세계관의 충돌이다. 미국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북한은 통제와 국가 우선을 말한다. 겉으로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둠이 교제할 수 없듯, 이 구조에서는 대화가 평행선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체성,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 북한과 중국의 흔들림은 한국이 체제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할 때라는 신호다. 북한 체제를 존중하거나 ‘두 국가 인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헌법뿐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와도 충돌한다. 현 정권의 북한 체제를 존중한다는 태도는 곧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폭정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유와 양심, 예배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승인하는 것이다. 한국이 체제의 본질을 흐리면 역사의 전환기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붕괴의 영적 의미: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북한의 붕괴는 단순히 냉전의 마지막 불씨가 꺼지는 사건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억눌린 백성들을 향해 열어가시는 해방의 시간이며,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순간이다. 북한 붕괴는 비극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가 어둠을 깨뜨리는 영적 승리의 순간이다. 북한의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 산사태가 오랜 균열 끝에 무너지고, 빛이 한순간에 어둠을 몰아내듯, 역사의 전환도 그렇게 온다. 그 순간을 준비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의 체제 정체성을 분명히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북한 주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북한의 붕괴는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기독교인들, 특별히 한국교회는 그 빛 아래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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