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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언론, ‘심판의 돌’을 던질 것인가, ‘생명의 펜’을 들 것인가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AI 이미지 '심판의 돌과 생명의 펜' 언론의 칼날과 십자가의 사랑 사이 언론(言論)은 본래 날카롭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그 펜의 무게와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언론이 ‘팩트(Fact)’를 무기로 상대를 베어내는 데 주력한다면, 기독교 언론은 그 팩트 너머에 있는 ‘진실(Truth)’과 ‘생명(Life)’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교계 매체가 보도한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관련 기사는 기독교 언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빗나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을 들추어내어, 이미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로 봉합된 상처를 다시 찢어발기는 행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이며, 무엇을 위한 보도인가.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기독교 언론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문화인가, 생명의 문화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사형틀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살려낸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언론 또한 그 생명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일부 기독교 언론 행태는 생명이 아닌 ‘사회적 매장’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김문훈 목사에 대한 보도는 전형적인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래전 발생한 일이며, 목회자로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했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을 공개하고, 심지어 독자들이 그 자극적인 음성 파일을 직접 다운로드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언론의 공익적 기능을 넘어선 인격 살인에 가깝다. 이는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어치려 했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율법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팩트는 여인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팩트로 여인을 죽이지 않으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기독교 언론의 펜 끝에는 예수의 ‘용서’가 묻어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의 ‘살기’가 서려 있는가. ‘알 권리’라는 미명 하의 폭력성 해당 기사는 목회자의 리더십 검증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내세웠다. 물론 공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는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익(公益)이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공익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지, 공동체의 일원을 파괴하여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균형의 상실’과 ‘자극적 배포 방식’이다. 기사는 제3자의 증언과 녹취 등 공격 측의 자료는 방대하게 싣고 있으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김 목사의 현재 입장이나 과거 사과 과정에 대한 반론권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공정성을 훼손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녹취 파일의 다운로드 제공이다. 욕설이나 거친 언사가 담긴 파일을 대중에게 직접 유포하는 것은 사실 전달을 넘어선다. 이는 독자들에게 “이 사람을 함께 미워해 달라”고 선동하는 정서적 폭력이며, 클릭 수를 위한 선정주의적 상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허물을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기독교 언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죽음의 문화’다. 파괴가 아닌 ‘세움’을 향하여 세상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은 다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만일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바로잡다’라는 헬라어는 뼈가 부러졌을 때 다시 맞추는 의료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그를 공동체에서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건강한 지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김문훈 목사의 과거 언행이 목회자로서 부덕(不德)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허물을 딛고 회개하며 목양에 힘써왔다면, 그리고 당사자와의 화해가 있었다면, 언론은 그를 다시 과거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갱신된 지도자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감시하되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다. 교회와 성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비난이 더 치명적일 때가 많다. 기독교 언론이 ‘내부 총질’의 선봉장이 되어선 안 된다. 비판은 하되 비난하지 말고, 지적은 하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팩트(Fact)를 다루되 임팩트(Impact) 있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펜을 든 사명자들에게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세워주며 거룩한 방파제가 되는 것인가. 이번 보도 사태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언론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기사는 사람을 살리는가, 죽이는가?”, “나의 펜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인가, 아니면 형제를 찌르는 흉기인가?” 기독교 언론의 사명은 명확하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생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다.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덮어주고, 싸매주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치유의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김문훈 목사를 향한 이번 보도가 단순히 하나의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기독교 언론이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생명의 펜’을 다시 쥐는 거룩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만이 교회가 살고 언론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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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가 곧 나의 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영광스러운 신분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인생의 근원적 갈망: 하나님 앞에 설 자격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심장이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 놀라운 진리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에 관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사탄의 본성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태를 가리켜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라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었으며, 마치 교도소에 수감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선포합니다. 우리가 도달할 수 없었던 그 ‘의’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고, 이제 그 하나님의 의가 바로 우리의 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감격적인 속량의 드라마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속의 신비: 죄가 되신 예수님과 의가 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방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는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반을 둡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법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절인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 안에는 우주적인 교환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치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분이 실제로 ‘죄’ 자체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불의로 인해 그분은 실제로 불의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들과 우리 자신을 떠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육체를 떠난 후, 공의의 요구가 모두 만족될 때까지 고통의 장소에 머무르셨습니다. 인류를 위해 고통당하신 분은 다름 아닌 ‘신성(Deity)’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온 인류의 처벌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이제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공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켰다!”라고 선포하셨을 때, 비로소 예수님은 다시 의롭다 함을 얻으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은 이 사실을 못 박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의로우시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분을 믿는 우리가 이제 합법적으로 의로워졌다는 영광스러운 영수증과 같습니다. 덮는 죄에서 씻는 의로: 속죄와 재창조의 능력 우리는 구약 시대의 ‘속죄’와 신약의 ‘의’를 구별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속죄(Atonement)’라는 단어는 죄를 ‘덮는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담 이후 예수님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 인간의 죄를 잠시 덮어두셨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17장 11절이 말하는 피의 제사는 죄를 깨끗하게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죄가 잠시 가려질 뿐, 인간의 본성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결부되어 ‘속죄(덮음)’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덮는 수준을 넘어, 죄를 완전히 씻어내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의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법정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너는 죄가 없다, 의롭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창조가 그랬듯이, 우리를 향한 그분이 선언은 곧 그 선언 그대로입니다. 둘째, 실제적인 재창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Divine Nature)에 참여한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선포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상 의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로 삼으신 것이 확실한 만큼,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를 의가 되게 하셨음도 확실합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즉시 일어나는 영적 실재입니다. 회복된 통치권과 담대한 교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왜 하나뿐인 아들을 죄로 만드시면서까지 우리를 의롭게 하셨을까요? 그 목적은 단 하나, 바로 ‘교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 교제를 끊어버렸고, 인간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잃어버린 그 의와 교제의 특권,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돌려주길 원하셨습니다. 만약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 구원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회복한 우리에게는 놀라운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첫째, 정죄함이 없는 평강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제 우리 마음에는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이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했으니,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담력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담대히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두려움 없이, 열등감 없이 아버지의 임재 안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친밀히 대화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입니다. 셋째, 예수 이름의 권세입니다. 우리의 의가 회복되는 순간, 잃어버린 통치권 역시 회복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인입니다! 이 의가 우리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늘의 법정은 움직이고 기적은 일어나게 합니다. 엘리야가 누렸던 그 기도의 능력이 이제 하나님의 의가 된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복음의 열쇠를 쥐고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타락한 인간을 합법적으로 회복시켜 당신과 똑같이 의로운 존재로 만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고, 그 아들의 생명을 통해 우리를 재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에 어떤 이의나 의문도 품지 마십시오. "내가 과연 의로울까? 내가 이런 실수를 했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이런 질문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행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완전한 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롬 1:17). 이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과거에 얼마나 사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주님이라 고백하는 그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의 그 자체가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행위에 집착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소환하고 정죄하는 일에 익숙하지만 하나님은 현재에 의로운 새로운 피조물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과거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오늘의 새로운 본성을 집중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삶, 그것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신분을 가지고 세상으로 당당히 나아가십시오. 정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아버지가 주시는 화평을 누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스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생생한 실재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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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도어, 동계올림픽 박해국 출신 선수 위해 기도 캠페인 시작
유튜브 Olympics 캡처 이탈리아 밀라노(Milano)와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에서 2026년 동계올림픽이 개막한 가운데, 기독교 박해 감시 단체 오픈도어 선교회가 박해 국가 출신 선수들을 위해 기도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에반젤리컬포커스가 11일 보도했다. 이번 올림픽은 2월 6일부터 22일까지 열리며, 93개국에서 3500명 이상의 선수들이 스키, 피겨스케이팅, 아이스하키 등 다양한 종목에서 금메달을 놓고 경쟁한다. 조직위원회는 20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해 대회를 관람할 것으로 추산했다. 오픈도어는 올림픽이 “전 세계 사람들이 차이를 내려놓고 평화롭게 경쟁하며 공통된 인간성을 확인하는 시간”이라며, 기독교인들에게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올림픽을 “기도의 기회”로 삼을 것을 권면했다. 오픈도어는 2026년 기독교 박해 국가 순위(WWL)에서 기독교 박해가 심각한 50개국 중, 이번 올림픽에 참가한 14개국을 대상으로 기도 캠페인을 전개한다고 밝혔다. 해당 국가는 에리트레아, 나이지리아, 파키스탄, 이란,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모로코, 우즈베키스탄, 멕시코, 키르기스스탄, 튀르키예, 카자흐스탄, 콜롬비아다. 이들 14개국에서 총 192명의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며, 가장 많은 선수단을 파견한 국가는 중국(125명)으로 집계됐다. 이어 카자흐스탄(36명), 튀르키예(8명), 멕시코(5명), 이란(4명) 순이었다. 나머지 국가들은 1~2명 수준의 참가자로 구성됐다. 오픈도어는 각 국가별 기독교인들이 처한 위험과 필요를 설명하고, 짧은 기도문도 함께 제시했다. 단체는 “선수들이 출전하는 경기를 볼 때 그 나라의 형제자매들을 떠올리며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도 제목으로는 에리트레아에서 기독교인들이 겪는 극심한 감시와 폭력적 급습, 기한 없는 구금 문제부터, 나이지리아에서 테러 단체들이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자행하는 지속적 폭력, 파키스탄에서 기독교인들이 겪는 차별과 치명적 폭력 위협, 신성모독 혐의 고발 위험 등이 포함됐다. [복음기도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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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인가 음해인가… 욕설 녹취 배포까지 한 ‘쌍욕 목사’ 기사, 언론 경계 넘었나
한 종교 매체가 보도한 「쌍욕하는 목사와 상처 받고 좌절하는 교역자」 기사가 교계 안팎에서 논란을 낳고 있다. 기사에는 특정 목사의 욕설 녹취와 SNS 글, 제3자의 증언이 담겼고, 독자가 녹음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어 단순한 문제제기가 아닌 개인적인 명예훼손은 물론 형사적 문제까지 번질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보도의 구성과 방식, 균형성, 공익성 측면에서 언론이 지켜야 할 최소 기준을 충족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사실 전달을 넘어 인물 공격과 여론 조성에 가까운 방식이라는 지적이다. 공익적 의제는 분명… 그러나 면책이 되지는 않는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이 사안의 주제 자체는 공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기사도 부총회장 당선과 차기 총회장 가능성을 전면에 놓고 지도자 적격성, 갑질, 언어폭력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공적 지위와 영향력이 큰 종교 지도자의 인격과 리더십은 공익적 관심사에 포함될 수 있다. 공동체를 책임질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면 검증 역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공익적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보도가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공익은 면책의 근거가 아니라 출발점일 뿐이다. 기사 작성 방식이 부정확하거나 일방적이라면 오히려 법적 위험은 더 커진다. 공익의 이름을 내세운 채 개인을 무너뜨리는 방식이라면 그 순간 보도는 공익을 잃는다. 반론 없는 기사… 김문훈 목사의 입장은 사라졌다 이 기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지점은 균형의 부재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사 안에는 김문훈 목사 본인의 해명이나 반박, 경위 설명, 사과 여부 등이 직접 인용되거나 확인된 흔적이 거의 없다. 문제 제기는 강하게 전개된다. 욕설 녹취, SNS 글, 제3자의 진술이 이어지고, 기사 톤은 “이제라도 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요구형 결론으로 곧장 나아간다. 그러나 당사자의 입장은 비어 있다. 취재 과정에서 확인을 요청했는지, 어떤 답을 받았는지조차 기사 구조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구조는 이렇게 형성된다. 문제 제기는 강하고, 근거는 제3자 자료에 의존하며, 당사자 반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균형성, 즉 반론권 보장의 원칙에서 매우 취약한 보도 방식이다. 고발문에 가까운 문체… 이미 결론이 정해진 기사 기사의 문체와 구성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이 글은 사실 보도라기보다 고발문이나 성명서, 논평에 가까운 형식으로 읽힌다. “인격과 풍문은 소문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식의 표현은 풍문을 사실 근거처럼 제시하는 방식이다. “막장” 같은 낙인성 단어는 평가를 일반화한다. “어떻게 총회를 지도하는 지도자로 세울 수 있겠는가”라는 문장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독자를 설득하려는 문장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독자에게 ‘이미 결론이 정해진 글’이라는 인상을 준다. 실제 사실관계와 별개로 매도와 편파 논란을 불러오기 쉬운 편집이다. 녹취파일 다운로드 제공… 보도에서 확산으로 넘어간 지점 이번 기사에서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은 욕설 녹취파일을 독자가 직접 내려받을 수 있도록 안내한 점이다. 이는 사실 전달의 영역을 넘어 개인 발언을 대중에게 직접 확산시키는 행위다. 언론은 필요에 따라 자료를 인용할 수 있다. 그러나 녹취 전체를 배포하거나 다운로드를 유도하는 방식은 보도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정 확산과 낙인의 재생산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독자는 사건의 본질보다 욕설 자체에 집중하게 되고, 인물에 대한 혐오 감정이 강화된다. 언론이 사실 전달자가 아니라 감정 유통자로 변하는 순간이다. 더구나 이런 행위는 형사적 책임의 면책을 벗어날 소지보다 책임을 더 강하게 물을 수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법률적으로도 취약… 공익과 인격 침해의 경계 이 기사에는 법적 위험 요소도 적지 않다. 특정 인물의 인격 결함과 지도자 부적격을 단정적으로 서술하고, 반론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녹취와 평가를 결합했다는 점은 명예훼손 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특히 녹취파일 다운로드 제공은 공개 범위의 적정성, 동의 여부, 편집 가능성 등 추가적인 법적 쟁점을 낳는다. 사적 발언이 맥락 없이 유통될 경우 인격권 침해 문제까지 제기될 수 있다. 홈페이지 갈무리 신앙 공동체의 기준에서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언론 윤리를 넘어 신앙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경은 사랑이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말한다. 이는 잘못을 숨기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을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말라는 경고다. 기사에서 이 문제와 관련된 사역자와 사과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이미 사과와 해결이 있었던 사안이라면 그것을 현재형 공격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은 공동체 회복과 거리가 멀다. 회개를 촉구하는 보도와 인물을 낙인찍는 보도는 다르다. 전자는 공동체를 살리고, 후자는 공동체를 찢는다. 공익의 이름으로 행해진 판단이라면 종교 지도자 검증은 필요하다. 그러나 검증은 절차와 균형 위에서만 설득력을 가진다. 반론이 없고, 맥락이 비어 있으며, 결론이 먼저 제시되고, 녹취까지 확산시키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보도가 아니다. 이미 판단을 강요하는 행위다. 공익을 말하려면 절차가 먼저다. 비판을 하려면 균형이 먼저다. 고발을 하려면 책임이 먼저다. 언론이 공익의 이름으로 개인을 무너뜨리는 순간, 그 피해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 전체로 번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폭로가 아니라 성찰이다. 언론이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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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목사아카데미 컨퍼런스’ 개최…성경적 예배 회복 위한 신학적 모색
성경적 예배의 본질과 교회다움 회복을 모색하는 ‘제5회 목사아카데미 컨퍼런스’가 오는 2월 23일 경기도 고양시 올곧은교회에서 열린다. 이번 행사는 ‘교회다운 교회의 성경적 예배’를 주제로, 목회 현장에서 예배의 방향성과 신학적 토대를 재정립하기 위해 마련됐다. 컨퍼런스는 이날 오후 1시부터 5시 30분까지 진행되며, 개회 인사에 이어 신학 강의와 대담, 질의응답, 교류 프로그램 등이 이어질 예정이다. 목회자와 신학생, 예배 사역자 등 예배의 본질을 고민하는 이들의 참여가 기대된다. 종교개혁 전통 속 예배 이해 재조명 첫 강의는 문화랑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예배학)가 맡아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배우는 예배’를 주제로 발표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예배 이해와 원리를 바탕으로,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예배의 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 이어 신호섭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예배’를 주제로 강의한다. 개혁교회 전통 속에서 정립된 예배 신학과 교회의 신앙 고백이 어떻게 예배에 구현되는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할 계획이다. 세 번째 강의는 임대웅 교수(고신대학교 실천신학)가 ‘사중구조를 통해 보는 예배순서의 의미’를 주제로 진행한다. 예배 순서가 지닌 신앙적·목회적 의미를 분석하고, 실제 예배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행사는 개회 인사 이후 세 차례 강의가 이어지고, 중간 휴식과 서적 전시가 마련된다. 이어 발제자들이 참여하는 대담과 질의응답 시간이 진행되며, 참가자들이 목회 현장에서 경험하는 예배의 문제와 고민을 공유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프로그램 마지막에는 기념 촬영과 저녁 식사가 이어져 참가자 간 교류의 시간도 마련된다. “예배 회복이 교회 갱신의 출발점” 주최 측은 이번 컨퍼런스가 단순한 강의 행사를 넘어, 교회 예배의 본질을 다시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예배를 공동체의 중심이자 신앙 고백의 자리로 회복하는 일이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중요한 과제라는 인식에서다. 목사아카데미는 그동안 목회자 재교육과 신학적 토론의 장을 제공하며 현장 중심의 학습 플랫폼으로 자리 잡아 왔다. 이번 다섯 번째 컨퍼런스 역시 예배 신학과 목회 현장을 연결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행사 참가 신청은 사전 등록 또는 현장 등록으로 가능하며, 등록비가 있다. 주최측은 “교회의 본질을 묻는 시대에 예배의 회복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며 “목회자와 성도 모두가 함께 고민하는 공론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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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반대’ 전국 집회 예고…종교·표현의 자유 쟁점 재점화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시민단체들이 전국 규모의 집회와 세미나를 예고하며 본격적인 여론전에 나섰다. 이들은 법안이 종교·표현·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전국 각지에서 대회를 열고 시민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차별금지법 논쟁 속 ‘자유 침해’ 우려 제기 단체 측이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차별금지법은 성별·성적지향·종교 등 다양한 요소를 포괄적으로 규정해 차별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이들 단체는 법안이 개인의 신념이나 종교적 표현까지 규제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으며, 법적 제재와 손해배상, 집단소송 등 강력한 처벌 조항이 포함될 경우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성별 정체성 인정, 성전환 수술 없는 성별 변경, 동성결혼 합법화 등과 연결되는 정책 논의가 확대될 경우, 기존 가치관과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일부 자료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다수 시민의 의견과 괴리될 수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함께 제시됐다. 전국 순회 대회와 세미나 개최 주최 측은 오는 3월 말 서울 도심에서 ‘거룩한방파제 통합국민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에 앞서 국회 세미나와 기도회, 지역 집회를 순차적으로 진행한다. 광주·전남·전북, 부산 등지에서도 동일한 취지의 지역 대회를 열어 참여를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행사에서는 차별금지법의 법적 구조와 예상되는 사회적 영향, 종교 자유 문제 등을 주제로 강연과 토론이 진행될 예정이다. 단체는 “법 제정 논의가 국민적 합의 없이 속도전으로 진행돼서는 안 된다”며 공론화 과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적 갈등과 합의 필요성 차별금지법은 오랜 기간 한국 사회에서 찬반이 첨예하게 갈려온 사안이다. 인권 보호를 위한 필수 입법이라는 주장과,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동시에 제기되어 왔다. 전문가들은 법안 논의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집단의 의견을 균형 있게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특정 가치만을 강조하거나 반대로 모든 규제를 배제하는 방식은 사회적 합의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집회와 세미나는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향후 국회 입법 과정에서 어떤 방향으로 논의가 이어질지, 그리고 사회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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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의와 하나님의 의: 죄의식의 종에서 의의 통치자로
양봉식 목사(길과생명연구소 소장) AI 이미지 그림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서 겪는가장 큰 내적 갈등은 "분명 구원받았는데, 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를 때 더 마음이 편한가?"라는 의문입니다. 많은 성도가 "나는 의롭다"라고 말하는 것을 교만으로 여기고, "나는 비천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겸손이라 오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거듭난 당신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의'그 자체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사탄의 참소와 환경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이 글을 통해 율법의 의를 넘어 하나님의 의로 옷 입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삶에 적용하는 구체적인 훈련법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율법의 의: 인간의 한계와 정죄의 법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의 의(The Righteousness of the Law)'는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행위와 노력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려는 모든 시도를 뜻합니다. 행위의 완전성 요구 :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율법은 99%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함을 요구하기에,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이 법으로 결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폭로하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판결문 : 하나님의 법은 거룩하지만, 죄인에게는 자비 없는 심판을 선언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은 아무리 선하게 살려 노력해도 결국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판결 아래 갇히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대전환 율법이 우리의 무능함을 증명했다면, 복음은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낸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선물합니다. ① 법정적 전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이것은 영적 교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 '죄 자체'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의를 넘겨받아 '의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과거가 아닌, 우리가 입고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보십니다. ② 생명의 기원: 조에(Zoe)의 소유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Zoe)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7) 그리스도인의 의는 단순히 '죄가 없다'는 상태를 넘어,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인 '조에'를 소유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태어났기에, 그분의 본성인 의로움을 본질적으로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③ 존재론적 재창조: 의로 지어진 새 사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새 사람은 행동이 고쳐진 사람이 아니라, 존재가 다시 창조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은 이제 죄를 지을 수 없는 의로운 본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AI 이미지 그림 3. 의의 회복이 가져오는 5가지 권세 우리가 하나님의 의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이 누리셨던 것과 동일한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당당한 위치(Standing):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더 이상 정죄감에 눌려 고개를 숙이지 않고,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아가 대화할 권리를 가집니다. 친밀한 교제(Fellowship):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종의 두려움이 아닌 자녀의 친밀함으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환경을 다스리는 믿음: 예수님이 폭풍을 꾸짖으시고 죽은 나사로를 부르셨던 것처럼, 의의 의식을 가진 자는 환경 앞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명령하여 다스립니다. 사탄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사탄의 참소는 의의 방패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왕의 통치: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질병, 가난, 저주를 다스리는 왕의 신분을 가집니다. 4. 실전 훈련 가이드: '의의 의식'을 세우는 4단계 의로운 신분을 가졌더라도 오랫동안 길들여진 '죄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음의 구체적인 훈련을 통해 당신의 생각을 새롭게 하십시오. 1단계: 매일 아침 '신분 선포' (Affirmation) 눈을 뜨자마자 거울을 보고 자신의 이름을 넣어 선포하십시오. 이것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진리의 선포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 합법적인 권리가 있다!" "나는 오늘 죄의식에 휘둘리지 않고 의의 본성으로 행한다!“ 2단계: '죄의식'의 언어 삭제하기 자신의 언어 습관에서 '영적 열등감'이 담긴 표현을 지워버리십시오. 수정 전 : "하나님, 이 비천한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수정 후 : "아버지, 저를 의롭게 하시고 아들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나의 공급자이시며 나의 승리이십니다!“ 주의 :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백하되, 그 죄가 당신의 '의인'이라는 신분을 파괴할 수 없음을 믿고 즉시 의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3단계: 말씀 묵상과 동화 (Identification) 다음 세 구절을 매일 3번씩 소리 내어 읽고, 그것이 당신의 현재 모습임을 받아들이십시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내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음을 묵상) 로마서 8:1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요한일서 4:17 :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4단계: 즉각적인 대적 훈련 정죄감이나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즉시 반응하십시오. 상황:과거의 실수나 죄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질 때. 대응 : "사탄아, 너는 거짓말쟁이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는 그 안에서 이미 의로워졌다. 나는 이 정죄감을 거절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 지배자로 사십시오 의(Righteousness)는 단순히 천국 가는 티켓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의 교제를 나누고, 사탄과 질병과 환경을 발아래 두는 지배자의 자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는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보며 "내 의로운 아들아,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이제 그 음성에 화답하십시오. 당신의 의의 의식이 견고해질 때, 당신의 삶에는 기적과 승리가 일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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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대규모 복음 집회서 청년 2000명 결단
이번 행사는 미국 애틀랜타의 2819교회(2819 Church)와 필립 앤서니 미첼(Philip Anthony Mitchell) 목사가 주도했으며, 집회장인 런던 엑셀에 7000명 이상이 모였다. 참석자 대부분은 젊은이들로, 최근 몇 년 사이 런던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공개 신앙 결단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이 매체는 소개했다. 2819교회는 이번 집회를 단발성 행사로 끝내지 않고, 런던 전역에서 거리 전도와 지역사회 봉사 활동을 진행했다. 또한 미첼 목사는 약 60명의 영국 목회자들과 함께하는 집중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 교회가 결단자들을 책임 있게 양육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췄다. 2819교회는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대위임령을 의미하는 복음주의 성향의 선교적 교회로, 지역 전도와 세계 선교를 동시에 추구하는 교회로 알려지고 있다. 집회 당일 행사 시작 전부터 행사장 주변에는 긴 줄이 이어졌다. 입장을 기다리던 참가자 마이클은 “감옥 독방에서 예수님께 ‘예’라고 대답했다”며 “오늘은 더 깊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석자 로레나(Lorena)와 이사벨라(Isabella)는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며 집회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집회 현장에서 미첼 목사는 유다서를 본문으로 설교하며, 편안함과 안일함에 길들여진 신앙을 경계하고 헌신을 촉구했다. 그는 “나는 여기에 장남삼아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명으로 보내셨다”며, “여러분은 이 방에 들어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설교 이후 수천 명이 결단했고, 이들을 위해 현장에서 기도팀이 중보했다. 예배가 계속되는 가운데 많은 이들이 반응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집회에서 나타난 반응은 최근 보고서들이 보여주는 영국 내 신앙 변화의 흐름과도 맞물린다. 2025년 스튜어드십 기부 보고서(Stewardship Generosity Report)는 향후 영국의 자선 기부자의 80%가 18~34세 연령대에서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2025년 한 해 동안 영국에서 성경 판매량이 증가했으며, 출판사들은 특히 처음 성경을 구매하는 젊은 층의 수요가 늘었다고 밝혔다. ‘조용한 부흥(Quiet Revival)’ 보고서 역시 대학 캠퍼스와 직장에서 청년들이 주도하는 기도 모임과 성경 공부, 신앙적인 대화가 늘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첼 목사는 이번 집회에서 “사람들이 복음을 갈망하고 있으며, 추수할 밭은 준비됐다”며 “교회가 타협 없이 일어나 이 순간에 응답할 것인지가 남은 질문”이라고 말했다. 2819교회는 다음 대규모 집회를 미국 뉴욕에서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복음기도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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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영적 기류 바꾼다... 성극 ‘리턴’, 3년 연속 공연 대장정 돌입
▲출범식 후에 기념사진 대학로 기독교 성극의 자존심, 연극 ‘리턴(Return)’이 2026년 시즌의 화려한 시작 알렸다. 연극 ‘리턴’ 제작팀은 11일 오전 일산광림교회에서 출범식을 갖고, 오는 4월부터 시작될 8개월간의 장기 공연 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행사에는 제작자인 김성한 전도사(YDP하나교회 담임)와 제작·후원을 맡은 코리아 투게더 대표 박동찬 목사(일산광림교회), 그리고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2026년 시즌 배우들이 참석했다. ▲문화를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김성한 전도사 김성한 전도사 “수익 앞둔 현실의 벽,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넘었다” 제작과 극본을 맡은 김성한 전도사는 인사말을 통해 문화 현장의 치열함과 제작 과정의 비화를 가감 없이 전했다. 김 전도사는 “문화의 힘은 사람의 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든 뒤 저변에서부터 가치관을 바꿔놓는 무서운 요소”라며, “사단이 문화를 도구로 쓰듯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 도구를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되찾아올 사명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사실 대학로에서 1년 넘게 무대를 지키는 것은 수익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라 2025년 마지막 공연 때는 이제 그만두려 마음을 정리했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날 박동찬 목사님이 공연을 보러 오셨고, ‘더 해야 한다’는 격려 한마디에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는 확신을 얻었다”며 “2026년 멤버들과 함께 대학로의 영적 기류를 바꾸기 위해 다시 사명감을 갖고 무대에 들어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빛은 반드시 어둠을 이기든, 교회는 문화를 통해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밝힌 박동찬 목사 박동찬 목사 “세상의 밤 문화, 빛의 자녀들이 기독교 방식으로 이겨내야” 이어 설교를 맡은 박동찬 목사는 문화 사역의 중요성과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 여섯 문장의 핵심 메시지를 전했다. 박 목사는 “오늘날 세상의 밤 문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 빛의 자녀들이 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진단하며, “하지만 캄캄한 밤하늘 위 비행기에서도 담뱃불 같은 작은 빛이 보이듯 어둠 속에서 빛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독려했다. 또한 “우리는 세상적인 힘을 가져야 이길 수 있다는 오해를 버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방식대로 세상과 싸워야 한다”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기력한 패배자처럼 보였으나 결국 그 사랑으로 전 세계를 바꾼 것처럼 우리도 거룩함과 사랑을 무기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세상의 계략 앞에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시며 비웃으신다는 시편의 말씀처럼,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며 “대학로에서 여러분이 서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될 것”이라고 축복했다. ▲출범식에서는 뮤자콜터닝포인트팀의 시연공연도 가졌다. 공연모습 3년 연속 공연의 기적...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던지는 경종 연극 ‘리턴’은 2024년과 2025년에 이어 올해까지 3년 연속 대학로 무대에 오른다. 이는 기독교 성극이 상업 연극의 메카인 대학로에서 거둔 보기 드문 성과다. 이번 시즌부터는 사단법인 ‘코리아 투게더’가 제작과 후원에 본격 참여하며 기독교 문화의 지평을 일반 대중으로까지 넓힌다는 계획이다. 이번 공연은 대학로 ‘시윤아트홀’에서 2026년 4월 2일부터 12월 31일까지 진행된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주 1회 정기 공연을 통해 8개월간의 대장정을 이어갈 예정이다. [공연 개요] 공연명: 연극 ‘리턴 (Return)’ 공연기간: 2026년 4월 2일 ~ 12월 31일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공연장소: 대학로 시윤아트홀 제작/후원: 코리아 투게더, YDP컬쳐베이스 문의: YDP하나교회(02-2636-7447) 또는 김성한 전도사(010-3136-4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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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언론, ‘심판의 돌’을 던질 것인가, ‘생명의 펜’을 들 것인가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AI 이미지 '심판의 돌과 생명의 펜' 언론의 칼날과 십자가의 사랑 사이 언론(言論)은 본래 날카롭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그 펜의 무게와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언론이 ‘팩트(Fact)’를 무기로 상대를 베어내는 데 주력한다면, 기독교 언론은 그 팩트 너머에 있는 ‘진실(Truth)’과 ‘생명(Life)’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교계 매체가 보도한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관련 기사는 기독교 언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빗나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을 들추어내어, 이미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로 봉합된 상처를 다시 찢어발기는 행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이며, 무엇을 위한 보도인가.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기독교 언론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문화인가, 생명의 문화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사형틀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살려낸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언론 또한 그 생명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일부 기독교 언론 행태는 생명이 아닌 ‘사회적 매장’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김문훈 목사에 대한 보도는 전형적인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래전 발생한 일이며, 목회자로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했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을 공개하고, 심지어 독자들이 그 자극적인 음성 파일을 직접 다운로드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언론의 공익적 기능을 넘어선 인격 살인에 가깝다. 이는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어치려 했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율법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팩트는 여인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팩트로 여인을 죽이지 않으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기독교 언론의 펜 끝에는 예수의 ‘용서’가 묻어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의 ‘살기’가 서려 있는가. ‘알 권리’라는 미명 하의 폭력성 해당 기사는 목회자의 리더십 검증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내세웠다. 물론 공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는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익(公益)이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공익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지, 공동체의 일원을 파괴하여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균형의 상실’과 ‘자극적 배포 방식’이다. 기사는 제3자의 증언과 녹취 등 공격 측의 자료는 방대하게 싣고 있으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김 목사의 현재 입장이나 과거 사과 과정에 대한 반론권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공정성을 훼손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녹취 파일의 다운로드 제공이다. 욕설이나 거친 언사가 담긴 파일을 대중에게 직접 유포하는 것은 사실 전달을 넘어선다. 이는 독자들에게 “이 사람을 함께 미워해 달라”고 선동하는 정서적 폭력이며, 클릭 수를 위한 선정주의적 상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허물을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기독교 언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죽음의 문화’다. 파괴가 아닌 ‘세움’을 향하여 세상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은 다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만일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바로잡다’라는 헬라어는 뼈가 부러졌을 때 다시 맞추는 의료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그를 공동체에서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건강한 지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김문훈 목사의 과거 언행이 목회자로서 부덕(不德)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허물을 딛고 회개하며 목양에 힘써왔다면, 그리고 당사자와의 화해가 있었다면, 언론은 그를 다시 과거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갱신된 지도자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감시하되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다. 교회와 성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비난이 더 치명적일 때가 많다. 기독교 언론이 ‘내부 총질’의 선봉장이 되어선 안 된다. 비판은 하되 비난하지 말고, 지적은 하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팩트(Fact)를 다루되 임팩트(Impact) 있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펜을 든 사명자들에게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세워주며 거룩한 방파제가 되는 것인가. 이번 보도 사태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언론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기사는 사람을 살리는가, 죽이는가?”, “나의 펜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인가, 아니면 형제를 찌르는 흉기인가?” 기독교 언론의 사명은 명확하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생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다.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덮어주고, 싸매주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치유의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김문훈 목사를 향한 이번 보도가 단순히 하나의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기독교 언론이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생명의 펜’을 다시 쥐는 거룩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만이 교회가 살고 언론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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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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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언론, ‘심판의 돌’을 던질 것인가, ‘생명의 펜’을 들 것인가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AI 이미지 '심판의 돌과 생명의 펜' 언론의 칼날과 십자가의 사랑 사이 언론(言論)은 본래 날카롭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그 펜의 무게와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언론이 ‘팩트(Fact)’를 무기로 상대를 베어내는 데 주력한다면, 기독교 언론은 그 팩트 너머에 있는 ‘진실(Truth)’과 ‘생명(Life)’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교계 매체가 보도한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관련 기사는 기독교 언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빗나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을 들추어내어, 이미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로 봉합된 상처를 다시 찢어발기는 행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이며, 무엇을 위한 보도인가.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기독교 언론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문화인가, 생명의 문화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사형틀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살려낸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언론 또한 그 생명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일부 기독교 언론 행태는 생명이 아닌 ‘사회적 매장’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김문훈 목사에 대한 보도는 전형적인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래전 발생한 일이며, 목회자로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했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을 공개하고, 심지어 독자들이 그 자극적인 음성 파일을 직접 다운로드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언론의 공익적 기능을 넘어선 인격 살인에 가깝다. 이는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어치려 했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율법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팩트는 여인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팩트로 여인을 죽이지 않으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기독교 언론의 펜 끝에는 예수의 ‘용서’가 묻어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의 ‘살기’가 서려 있는가. ‘알 권리’라는 미명 하의 폭력성 해당 기사는 목회자의 리더십 검증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내세웠다. 물론 공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는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익(公益)이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공익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지, 공동체의 일원을 파괴하여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균형의 상실’과 ‘자극적 배포 방식’이다. 기사는 제3자의 증언과 녹취 등 공격 측의 자료는 방대하게 싣고 있으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김 목사의 현재 입장이나 과거 사과 과정에 대한 반론권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공정성을 훼손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녹취 파일의 다운로드 제공이다. 욕설이나 거친 언사가 담긴 파일을 대중에게 직접 유포하는 것은 사실 전달을 넘어선다. 이는 독자들에게 “이 사람을 함께 미워해 달라”고 선동하는 정서적 폭력이며, 클릭 수를 위한 선정주의적 상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허물을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기독교 언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죽음의 문화’다. 파괴가 아닌 ‘세움’을 향하여 세상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은 다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만일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바로잡다’라는 헬라어는 뼈가 부러졌을 때 다시 맞추는 의료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그를 공동체에서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건강한 지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김문훈 목사의 과거 언행이 목회자로서 부덕(不德)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허물을 딛고 회개하며 목양에 힘써왔다면, 그리고 당사자와의 화해가 있었다면, 언론은 그를 다시 과거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갱신된 지도자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감시하되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다. 교회와 성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비난이 더 치명적일 때가 많다. 기독교 언론이 ‘내부 총질’의 선봉장이 되어선 안 된다. 비판은 하되 비난하지 말고, 지적은 하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팩트(Fact)를 다루되 임팩트(Impact) 있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펜을 든 사명자들에게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세워주며 거룩한 방파제가 되는 것인가. 이번 보도 사태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언론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기사는 사람을 살리는가, 죽이는가?”, “나의 펜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인가, 아니면 형제를 찌르는 흉기인가?” 기독교 언론의 사명은 명확하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생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다.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덮어주고, 싸매주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치유의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김문훈 목사를 향한 이번 보도가 단순히 하나의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기독교 언론이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생명의 펜’을 다시 쥐는 거룩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만이 교회가 살고 언론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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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자유의 성벽 허무는 ‘정교분리’의 역설 : 종교의 심장을 겨눈 국가의 총구
時事칼럼/양봉식 국장 동영상 갈무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침묵의 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보이지 않는 성벽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는 선언은 국가가 국민의 영혼에 개입할 수 없음을 천명한 인류 지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터져 나온 발언들은 이 거룩한 성벽에 균열을 내고 있다.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목소리를 거세하려는 시도는, 보호의 언어가 아닌 섬뜩한 통제의 언어였다. 거룩한 강단에 가해진 ‘반란’의 낙인 이재명은 기자회견에서 특정 종교와 일부 개신교를 겨냥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비판하는 설교를 두고 “국민에게 총구를 겨냥하는 반란행위”라며 형사적·안보적 프레임을 씌웠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위험한 비유다. 종교인의 설교는 신앙적 가치에 기반한 양심의 표현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그 자체다. 설교 내용이 위정자의 입맛에 쓰다고 해서 그것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순간, 국가는 이미 신앙의 영역을 검열하는 심판자로 군림하게 된다.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권력이 종교의 입을 막기 위해 ‘정교분리’라는 칼을 빼 드는 것은, 이 원칙의 탄생 배경을 완전히 오독한 비극이다. ‘큰 돌부터 제거’라는 섬뜩한 단계론의 정체 가장 날카로운 우려는 “큰 돌부터 집어내고 그다음 자갈, 잔돌을 집어내겠다”는 그의 수사적 비유에서 정점을 찍는다. 법치국가에서 사법적 판단은 개별 범죄 혐의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단계적 제거’를 운운하는 이 언어는 법적 정의가 아니라 정책적 타도 대상을 설정하는 통치자의 서늘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문법이 아니다. 서구 유럽 국가에서 종교 단체나 비영리법인의 해체는 테러나 무장 폭력 같은 명백한 반국가적 범죄가 입증될 때만 사법부의 극히 보수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면, 종교를 ‘국가의 관리 대상’으로 보고 비판 세력을 ‘사회 해악’으로 몰아 해체하는 방식은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나 전체주의 체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적 종교 길들이기가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선택적 정의, 그리고 공적 신앙의 사멸 이재명의 분노는 지극히 선택적이다. 정치권에는 특정 정권을 지지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종교 세력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권력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종교적 행위에는 침묵하며, 오직 비판적인 목소리에만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것은 원칙의 수호가 아니라 권력의 편의를 위한 ‘선택적 정의’일 뿐이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사적 클럽’이 아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사회 정의를 외치고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갖는다. 정교분리를 이유로 교회를 침묵의 섬으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는, 결국 국가 권력을 견제할 마지막 정신적 보루를 무너뜨리겠다는 선언과 같다. 헌법의 족쇄를 풀지 마라 정교분리는 권력자가 종교를 휘두르기 위해 만든 회칙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국민의 신앙과 양심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채워둔 ‘헌법적 족쇄’다. 위정자가 이 족쇄를 스스로 풀고 “질서와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생사여탈권을 쥐려 할 때, 자유의 시대는 저물고 통제의 시대가 밝아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사와 해체의 위협이 아니다. 권력 앞에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 그리고 그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민주적 절제다. 영혼의 영역까지 국가의 발길질 아래 두려는 오만을 멈춰야 한다. 성벽이 무너진 뒤에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거대한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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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신앙과 무례한 기독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최근 정치권에서 불거진 한 유력 정치인의 언사(言辭)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던 이혜훈 전 의원이 과거 국회 인턴을 향해 쏟아낸 폭언과 고성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를 죽였으면 좋겠다"는 식의 극단적인 언어와 고압적인 태도는 공적 권력을 가진 자의 언어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유독 기독교계 안팎에서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교회에서 간증하며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해온, 이른바 ‘독실한 기독교인’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간증에 은혜를 받았던 수많은 교인들은 이번 사태를 접하며 적잖은 충격과 자괴감을 토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한 개인에 대한 비난을 넘어, 한국 교회가 지향해온 ‘독실함’의 실체와 오늘날 기독교의 고질적인 병폐인 ‘무례함’에 대해 뼈아픈 자문을 던져야 합니다. 독실함의 기준: 종교적 열심인가, 인격적 성숙인가 우리는 흔히 주일 성수에 철저하고, 십일조를 거르지 않으며, 뜨겁게 기도하고, 교회 직분을 가진 이들을 향해 ‘독실하다’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이혜훈 전 의원 역시 이러한 종교적 외피(外皮) 안에서 독실한 신앙인으로 추앙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열심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보증하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신앙이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앙은 본래 자신을 끊임없이 십자가 앞에 세우고 깎아내는 자기 부인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신앙적 열심이 사회적 성취나 권력과 결합할 때, 그것은 타인을 압박하는 ‘종교적 권위’로 변질되곤 합니다. 예수께서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대상이 당대 종교적으로 가장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참된 신앙은 영향력이 커질수록 더 조심하게 만들고, 높아질수록 더 낮은 곳을 향하게 만드는 힘이어야 합니다. 무례함, 복음이 사라진 자리에 돋아난 독버섯 리처드 마우(Richard Mouw)는 그의 저서 《무례한 기독교》에서 현대 기독교인들이 잃어버린 ‘시민적 예절(Civility)’을 통렬히 지적합니다. 그는 "우리는 진리를 말한다는 이유로 타인을 모욕할 권리를 부여받지 않았다"고 강조했습니다. 복음을 수호한다는 명분, 혹은 공의를 실현한다는 명분 아래 자행되는 공격적 언사와 무리한 태도는 오히려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어둠이 됩니다. 무례함은 단순히 말투나 예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나보다 약한 존재,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나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을 때 무례함은 고개를 듭니다. 이번에 드러난 ‘갑질’ 논란 역시 권력이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파산의 증거입니다. 사랑 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속성 중 하나로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를 꼽습니다. 성경의 어디에서도 무례한 진리를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진리가 무례함을 입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끝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과 같아서, 힘을 증명하려 애쓰는 ‘갑질’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의 무례한 이웃들 우리는 이 문제를 정치인 한 사람의 일탈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우리 주변의 교회 안에서도 무례한 목사, 장로, 권사들의 이야기들을 익숙하게 들어왔습니다. 직분이 계급이 되고, 신앙의 연륜이 텃세가 되어 연약한 교우들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세상은 기독교인의 실수를 기독교 전체의 모습으로 치환하여 바라봅니다. 한 사람의 무례함은 곧 '기독교는 무례하다'는 낙인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먼저 말과 태도에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획예산처 장관이라는 공직에 오르기 전에, 혹은 교회의 중직자가 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한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공손함’과 ‘겸손’을 갖추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숙한 기독교를 향한 제언: 사랑은 실력이다 진짜 독실한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도의 유창함이나 간증의 화려함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독실함은 상대방이 누구든, 특히 나보다 약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배려와 존중, 그리고 품위에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배의 권위가 아닌 섬김의 권위로 사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 손길에는 무례함이 아닌 지극한 존중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독실함’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합니다. 말은 절제되고, 태도는 온유해야 합니다. 권력은 낮아지는 데 쓰여야 하며, 신앙은 자신을 성찰하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무례함의 반대인 ‘인격적 대함’이 기독교인의 가장 큰 영적 실력이 되어야 합니다. 이혜훈 전 의원의 사례는 한국 교회 전체를 향한 뼈아픈 경종입니다. 우리는 과연 세상 속에서 ‘친절한 이웃’입니까, 아니면 ‘무례한 신앙인’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례한 자를 통해 영광 받지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인은 진리를 소유했다는 오만함이 아니라, 진리에 붙들린 자다운 겸허함으로 세상을 대합니다. 무례함이 상식이 된 시대일수록, 기독교인의 공손함과 품격 있는 삶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전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복음이 살아 있다면, 우리의 언어는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부디 한국 교회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독실함’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벗고, 타인의 인격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성숙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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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파고를 넘어, 화해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
時論/양봉식 국장 다시 짙어지는 이념의 그림자 한국전쟁은 이념의 갈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어디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지 보여준 비극적인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족상잔"의 참상은 단순한 정치적 실패를 넘어, 이념이라는 명분 아래 신앙과 도덕이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 잔혹한 현장이었습니다. 전쟁이 남긴 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닌, 깊은 폐허와 상처뿐이었습니다. "이념이 인간을 도구로 삼을 때, 인간은 얼마나 쉽게 잔혹해질 수 있는가"라는 뼈아픈 질문만이 남겨졌습니다. 이후 우리 사회는 철학적 성찰을 시작했고, 문학은 인간의 내면을 살폈으며, 신학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와 폭력을 통곡하며 자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다시금 이념의 진창 속으로 미끄러지고 있습니다. 좌우의 진영 논리는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상대방을 대화의 파트너가 아닌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언어들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갈등은 해소되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치열한 ‘보이지 않는 전쟁’이 우리 삶 전반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이념은 결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모든 이념은 겉으로 정의와 평등, 약자 보호를 외칩니다. 그러나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념은 종종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이용하는 폭력의 체계로 변질되었습니다. 역사 속의 여러 사회주의 실험들이 그러했듯, 해방을 약속했던 목소리들은 결국 억압과 통제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민주화 이후 분출된 다양한 에너지가 일부 급진적 이념과 결합하며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이념 투쟁이 "우리는 선, 너희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고착화한다는 점입니다. 이념이 절대화될 때 사회는 폭발 직전의 긴장 상태를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념의 종교화’와 교회가 마주한 위기 이러한 갈등은 교회 담장 밖의 일만이 아닙니다. 신앙의 중심에 계셔야 할 하나님 대신, 그 자리를 이념이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보다 앞선 가치로 자리 잡은 정치적 담론들이 성도들의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교회 안에서도 신앙적 진리보다 정치적 옳음을 우선시하며, 서로를 정죄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견해 차이를 넘어 교회가 이념의 전장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다는 위험한 징후입니다. 교회가 진영 논리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닌 또 하나의 이익 집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이념이 절대화된 곳에는 반드시 파국과 폭력이 뒤따랐습니다. 이념은 구원을 약속하지만, 결국 인간을 비극으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그 어떤 정치 체제나 사상도 인간을 구원할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인간을 살리고, 그리스도만이 역사를 새롭게 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인간의 존엄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습니다. 화해와 화목을 위한 교회의 사명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상처를 덧내는 전투 부대가 아니라, 상처를 싸매는 ‘치유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갈라놓는 구호가 아니라, 서로를 품게 하는 ‘화해의 다리’가 절실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후 5:18)을 맡기셨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실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회복합시다: 어떤 이념도 복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모든 정치적 정의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합시다: 세상이 말하는 정의가 하나님의 정의와 일치하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사상적 정의가 신앙의 자리를 대체하지 않도록 경계합시다. 화해의 언어를 사용합시다: ‘적’이 아닌 ‘형제’로, ‘정죄’가 아닌 ‘회복’의 언어로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연합을 지킵시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함께 예배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포용의 공간을 지켜내야 합니다. 이념을 넘어 복음의 편으로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이 전쟁은 사람들을 나누고 교회마저 분열시키려 합니다. 이 상황에서 교회는 갈등의 한 축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이 전쟁을 멈추게 할 마지막 방파제가 되겠습니까? 역사가 증명하듯 이념의 끝은 파국이지만, 복음의 끝은 언제나 생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념의 편이 아닌 복음의 편에 서야 합니다. 편가르기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화해와 화목의 길을 선택합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 한국 교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숭고한 사명입니다.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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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커크, 새로운 믿음의 세대를 일으키는 밀알이 될 것”
세계 자유 사랑 운동을 이끌던 찰리 커크(Charlie Kirk)가 9월 10일, 유타밸리대학교 강연 도중 저격수의 총탄에 쓰러졌다. 이 소식은 전 세계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겼다. 찰리 커크는 미국 건국 이념에 충실하며 자유를 수호한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국가적 비극으로 받아들여졌고, 국민들은 조기를 게양하며 애도에 동참했다. 그는 불과 18세의 나이에 ‘터닝 포인트 USA(Turning Point USA)’를 창립하고, 청년과 대학생에게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신앙 회복 운동을 선도했다. 이러한 사역은 전제주의와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저항을 불러왔다. 자유와 거룩을 무시하고 인간을 짐승이나 단순한 도구로 여기는 세력은 인명을 경시할 뿐 아니라, 자유를 억압하고 심지어 반대자를 제거하기까지 한다. 이번 참혹한 사건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찰리 커크는 자유와 신앙의 가치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귀한 존재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또 “자유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역사의 교훈을 전했다. 이는 미국뿐 아니라 자유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진리이다. 대한민국의 자유 또한 피로 지켜졌다. 6.25 전쟁에서 자유를 지켜낸 미군 3만 6,500여 명이 희생되었으며, 지금도 약 2만 8,500명의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며 한미 혈맹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은 세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헌신해왔다. 그러한 정신을 이어가던 찰리 커크에 대한 공격은 단지 개인에 대한 테러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전체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때 자유를 사랑하는 참된 크리스천은 미국과 함께 아픔을 나누어야 한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명한다.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우리는 모두 형제이며, 대한민국도 미국의 아픔을 함께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이 총탄에 쓰러져도 그 정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의 피의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듯, 찰리 커크의 피 역시 결코 묻히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대신해 셋을 세우셨듯, 그리고 스데반의 죽음이 바울을 회심시키는 씨앗이 되었듯, 찰리 커크의 죽음 또한 새로운 믿음의 세대를 일으키는 밀알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신앙인으로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 세계 자유와 평화를 위한 씨앗이 되리라 믿는다. 자유대한민국과 미국의 건국 이념이 영원히 빛나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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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정부업무보고 -외교안보 분야: 튼튼한 외교안보, 착실한 통일준비-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2016년 정부업무보고(외교안보분야)에 참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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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사칭 악성 이메일 합동수사…북 움직임 철저감시”
청와대는 15일 “최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대량 유포된 청와대 사칭 악성 이메일 사건은 현재 관계당국 합동으로 면밀히 수사 중에 있다”고 밝혔다. 정연국 대변인은 이날 ‘최근 국내외 안보·안전 관련 서면브리핑’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정 대변인은 “북한이 4차 핵실험 이후 전단 살포 및 무인기 침범 등 대남 자극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북한의 추가 도발 가능성에 대해 철저하고도 면밀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 대변인은 “정부는 국민의 불안을 덜어드리기 위해 보유한 정보 자산을 통해 북한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고 높은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등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또한, “최근 터키와 자카르타에서 잇따라 발생한 민간인 대상 테러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갖고 주시하면서 해외여행 국민의 안전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국민 불안을 해소하고 국민이 편안해 할 수 있도록 테러방지법 등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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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협력업체 전부 주저앉을 판인데 원샷법 막혀”
박근혜 대통령은 21일 “지금 우리 학령인구도 자꾸 줄고 그래서 어차피 대학구조개혁은 안 할 도리가 없다”며 대학구조개혁법의 국회통과를 거듭 촉구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청년일자리 창출 및 맞춤형 복지’를 주제로 교육부와 고용노동부 등 4개 부처로부터 합동 업무보고를 받은 뒤 민간 전문가 및 일반인들과 가진 토론회에서 교육개혁을 강조하면서 이 같이 말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20일 청와대에서 ‘청년일자리 창출 및 맞춤형 복지’를 주제로 교육부와 고용노동부 등 4개 부처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어떤 데는 (인력 공급이)과잉이 되고, 어떤 데는 수요가 많은데 모자라는게 있어서 어차피 대학구조개혁은 안 할 도리가 없는데 이것을 쉽게 촉진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통과되면 참 힘을 받을 텐데 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박 대통령은 “지금 우리 교육이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중점을 둬야 되고 또 청년들이 취업과 창업에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역점을 둬야 한다”며 “대학에서는 지속적인 구조개혁 추진과 더불어서 사회 맞춤형 학과 같은 것을 확대하고 산학 협력을 활성화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인력의 미스매치 문제를 해결 하는데 노력해야 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박 대통령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중인 ‘원샷법(기업활력제고특별법)’과 관련, “원샷법도 마찬가지 아닌가”라면서 “산업계에서 너무 과잉이 돼서 어차피 이렇게 되다보면 딸린 협력 업체까지 전부 주저앉을 판이다. 미리미리 구조개혁을 해서 다 같이 좀 경쟁력도 키우고 살자는 건데 원샷법도 막혀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런 딱한 사정이 우리나라에 있는데 계속 두들겨야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국민 삶속에 뿌리 내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것”이라면서 “발로 뛰면서 현장에서 답을 찾고 열린 자세로 국민의 의견을 정책에 담아달라”고 당부했다.
다시 읽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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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가 곧 나의 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영광스러운 신분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인생의 근원적 갈망: 하나님 앞에 설 자격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심장이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 놀라운 진리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에 관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사탄의 본성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태를 가리켜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라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었으며, 마치 교도소에 수감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선포합니다. 우리가 도달할 수 없었던 그 ‘의’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고, 이제 그 하나님의 의가 바로 우리의 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감격적인 속량의 드라마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속의 신비: 죄가 되신 예수님과 의가 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방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는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반을 둡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법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절인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 안에는 우주적인 교환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치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분이 실제로 ‘죄’ 자체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불의로 인해 그분은 실제로 불의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들과 우리 자신을 떠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육체를 떠난 후, 공의의 요구가 모두 만족될 때까지 고통의 장소에 머무르셨습니다. 인류를 위해 고통당하신 분은 다름 아닌 ‘신성(Deity)’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온 인류의 처벌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이제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공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켰다!”라고 선포하셨을 때, 비로소 예수님은 다시 의롭다 함을 얻으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은 이 사실을 못 박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의로우시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분을 믿는 우리가 이제 합법적으로 의로워졌다는 영광스러운 영수증과 같습니다. 덮는 죄에서 씻는 의로: 속죄와 재창조의 능력 우리는 구약 시대의 ‘속죄’와 신약의 ‘의’를 구별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속죄(Atonement)’라는 단어는 죄를 ‘덮는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담 이후 예수님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 인간의 죄를 잠시 덮어두셨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17장 11절이 말하는 피의 제사는 죄를 깨끗하게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죄가 잠시 가려질 뿐, 인간의 본성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결부되어 ‘속죄(덮음)’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덮는 수준을 넘어, 죄를 완전히 씻어내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의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법정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너는 죄가 없다, 의롭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창조가 그랬듯이, 우리를 향한 그분이 선언은 곧 그 선언 그대로입니다. 둘째, 실제적인 재창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Divine Nature)에 참여한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선포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상 의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로 삼으신 것이 확실한 만큼,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를 의가 되게 하셨음도 확실합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즉시 일어나는 영적 실재입니다. 회복된 통치권과 담대한 교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왜 하나뿐인 아들을 죄로 만드시면서까지 우리를 의롭게 하셨을까요? 그 목적은 단 하나, 바로 ‘교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 교제를 끊어버렸고, 인간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잃어버린 그 의와 교제의 특권,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돌려주길 원하셨습니다. 만약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 구원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회복한 우리에게는 놀라운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첫째, 정죄함이 없는 평강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제 우리 마음에는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이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했으니,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담력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담대히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두려움 없이, 열등감 없이 아버지의 임재 안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친밀히 대화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입니다. 셋째, 예수 이름의 권세입니다. 우리의 의가 회복되는 순간, 잃어버린 통치권 역시 회복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인입니다! 이 의가 우리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늘의 법정은 움직이고 기적은 일어나게 합니다. 엘리야가 누렸던 그 기도의 능력이 이제 하나님의 의가 된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복음의 열쇠를 쥐고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타락한 인간을 합법적으로 회복시켜 당신과 똑같이 의로운 존재로 만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고, 그 아들의 생명을 통해 우리를 재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에 어떤 이의나 의문도 품지 마십시오. "내가 과연 의로울까? 내가 이런 실수를 했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이런 질문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행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완전한 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롬 1:17). 이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과거에 얼마나 사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주님이라 고백하는 그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의 그 자체가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행위에 집착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소환하고 정죄하는 일에 익숙하지만 하나님은 현재에 의로운 새로운 피조물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과거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오늘의 새로운 본성을 집중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삶, 그것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신분을 가지고 세상으로 당당히 나아가십시오. 정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아버지가 주시는 화평을 누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스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생생한 실재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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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의와 하나님의 의: 죄의식의 종에서 의의 통치자로
양봉식 목사(길과생명연구소 소장) AI 이미지 그림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서 겪는가장 큰 내적 갈등은 "분명 구원받았는데, 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를 때 더 마음이 편한가?"라는 의문입니다. 많은 성도가 "나는 의롭다"라고 말하는 것을 교만으로 여기고, "나는 비천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겸손이라 오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거듭난 당신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의'그 자체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사탄의 참소와 환경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이 글을 통해 율법의 의를 넘어 하나님의 의로 옷 입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삶에 적용하는 구체적인 훈련법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율법의 의: 인간의 한계와 정죄의 법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의 의(The Righteousness of the Law)'는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행위와 노력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려는 모든 시도를 뜻합니다. 행위의 완전성 요구 :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율법은 99%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함을 요구하기에,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이 법으로 결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폭로하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판결문 : 하나님의 법은 거룩하지만, 죄인에게는 자비 없는 심판을 선언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은 아무리 선하게 살려 노력해도 결국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판결 아래 갇히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대전환 율법이 우리의 무능함을 증명했다면, 복음은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낸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선물합니다. ① 법정적 전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이것은 영적 교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 '죄 자체'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의를 넘겨받아 '의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과거가 아닌, 우리가 입고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보십니다. ② 생명의 기원: 조에(Zoe)의 소유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Zoe)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7) 그리스도인의 의는 단순히 '죄가 없다'는 상태를 넘어,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인 '조에'를 소유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태어났기에, 그분의 본성인 의로움을 본질적으로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③ 존재론적 재창조: 의로 지어진 새 사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새 사람은 행동이 고쳐진 사람이 아니라, 존재가 다시 창조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은 이제 죄를 지을 수 없는 의로운 본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AI 이미지 그림 3. 의의 회복이 가져오는 5가지 권세 우리가 하나님의 의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이 누리셨던 것과 동일한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당당한 위치(Standing):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더 이상 정죄감에 눌려 고개를 숙이지 않고,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아가 대화할 권리를 가집니다. 친밀한 교제(Fellowship):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종의 두려움이 아닌 자녀의 친밀함으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환경을 다스리는 믿음: 예수님이 폭풍을 꾸짖으시고 죽은 나사로를 부르셨던 것처럼, 의의 의식을 가진 자는 환경 앞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명령하여 다스립니다. 사탄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사탄의 참소는 의의 방패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왕의 통치: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질병, 가난, 저주를 다스리는 왕의 신분을 가집니다. 4. 실전 훈련 가이드: '의의 의식'을 세우는 4단계 의로운 신분을 가졌더라도 오랫동안 길들여진 '죄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음의 구체적인 훈련을 통해 당신의 생각을 새롭게 하십시오. 1단계: 매일 아침 '신분 선포' (Affirmation) 눈을 뜨자마자 거울을 보고 자신의 이름을 넣어 선포하십시오. 이것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진리의 선포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 합법적인 권리가 있다!" "나는 오늘 죄의식에 휘둘리지 않고 의의 본성으로 행한다!“ 2단계: '죄의식'의 언어 삭제하기 자신의 언어 습관에서 '영적 열등감'이 담긴 표현을 지워버리십시오. 수정 전 : "하나님, 이 비천한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수정 후 : "아버지, 저를 의롭게 하시고 아들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나의 공급자이시며 나의 승리이십니다!“ 주의 :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백하되, 그 죄가 당신의 '의인'이라는 신분을 파괴할 수 없음을 믿고 즉시 의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3단계: 말씀 묵상과 동화 (Identification) 다음 세 구절을 매일 3번씩 소리 내어 읽고, 그것이 당신의 현재 모습임을 받아들이십시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내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음을 묵상) 로마서 8:1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요한일서 4:17 :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4단계: 즉각적인 대적 훈련 정죄감이나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즉시 반응하십시오. 상황:과거의 실수나 죄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질 때. 대응 : "사탄아, 너는 거짓말쟁이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는 그 안에서 이미 의로워졌다. 나는 이 정죄감을 거절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 지배자로 사십시오 의(Righteousness)는 단순히 천국 가는 티켓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의 교제를 나누고, 사탄과 질병과 환경을 발아래 두는 지배자의 자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는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보며 "내 의로운 아들아,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이제 그 음성에 화답하십시오. 당신의 의의 의식이 견고해질 때, 당신의 삶에는 기적과 승리가 일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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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죽음
양봉식 목사(길과생명 연구소 소장)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로마서 6:1–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생명으로 가는 길에 놓인 역설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 진리의 깊은 역설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복된 소식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얻는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복된 소식에는 언제나 함께 따라오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은, 반드시 죽음을 통과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생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본질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그 죽음은 영적 죽음,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 영적 죽음이 결국 육신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과 함께 인류에게 들어온 죽음은 바로 이 영적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건이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는 이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로마서 5:19) 비록 육신은 살아 있으나 영으로는 죽은 상태, 곧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이상 영적인 존재로 살지 못하고, 육신 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으며, 그 삶의 열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절망과 어둠, 비참함과 슬픔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말합니다. 죽음이 유익하다고 말입니다. 물론 아무 죽음이나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세상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죽음의 비밀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살려고 애쓰는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는 구약의 모형이 실체로 드러난 삶이었습니다. 구약의 약속이 성취된 삶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의 삶,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왕 노릇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삶은 통치와 다스림의 삶이었고, 동시에 섬김과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부요할 수 있고, 왕이면서도 종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단절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하십니다. 그분 안에 충만하셨던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는 경험을 하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죄가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연합해 계셨던 독생자께서, 죄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처절한 기도였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님과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버림받으셨고, 참으로 죄가 되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셨을 때는 우리와 같지 않으셨지만, 십자가에서는 우리와 완전히 같아지셨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종말 죄 없는 분이 죄가 되어 죽으셨을 때, 그분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로마서 6:6–7) 예수님이 죄인으로 우리와 동일시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여 동일시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의 종말이며,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완전한 해방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결정적 분기점입니다. 이 죽음은 세상이 주는 모든 생명을 폐합니다. 자랑도, 채무도, 얽매임도 함께 끝납니다. 우리는 악한 것뿐 아니라, 선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분별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로새서 2:14) 이제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해방이며 자유입니다. 십자가의 현재성, 그리고 믿음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의 현재성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현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지” 하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것은 완료된 사실입니다. 죽음 안에 있는 생명 예수님과 연합한 온전한 죽음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그분이 내 안에 사실 때, 이전의 나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이 펼쳐집니다. 연합된 죽음은 삶의 자리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내가 애써서 죽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자아를 꺾으려 할 때는 언제나 억울함과 자기 의가 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에는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생명으로 충만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관념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구체적인 삶의 십자가 자리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십시오. 그곳에서 죽고, 그곳에서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관련기사 :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 부르는가? 관련기사 :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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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양봉식 목사(길과 생명연구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담의 자손들을 다시 회복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획을 실행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 전에,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그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을 때, 성령님으로 잉태하셨으며,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 수많은 얻게 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들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죽음이며, 그 죽음을 통해 비로소 인류 가운데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6)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이 생명은 오직 하늘에서 오는 것으로 믿는 자는 땅에서 태어난 육신의 출생과 다른 하늘에서 오는 새로운 출생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태어나신 것처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늘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며, 그 생명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성품, 혹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 자라고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소식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사함이 아닌 하니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 새로운 피조물에 관한 것입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마귀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어둠에서 빛의 존재가 된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복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 제칩니다. 현실에 있으면서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낯설면서도 가장 친밀한 삶, 현실의 시간을 넘어서 경이로운 세계를 들어가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실상의 세계, 즉 살아 계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셰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이 경이로운 세계와 보이는 현실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입니다. 이 생명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태초부터 예정하신 계획이 분명해질 뿐만 아니라 삶에 의미가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실 때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고 다가올 미래의 일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그 생명을 간절히 원하고 믿는다고 예수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주셨음을 고백하는 자는 누리기 시작합니다. 삶의 유일한 기적은 바로 이 생명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똑같은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아무런 대가 없이 오직 믿기만 하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생명(조에, ζωὴ)은 단순히 “죽지 않는 생명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인간 안에 들어와 작동하는 실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이미 이 생명을 받았습니다(요 5:24).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이 말씀은 왜 이미 받은 생명이 더 풍성해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 생명이 실제 삶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를 묻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1. 왜 하나님의 생명은 ‘소유’가 아니라 ‘충만’이어야 하는가 첫 번째, 생명은 씨앗이 아니라 ‘통치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날 때 하나님의 생명은 씨앗처럼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그러나 씨앗은 심어졌다고 자동으로 숲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은 “새로운 피조물”의 신분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10은 그 신분이 삶 전체를 지배하는 상태로 확장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즉, 조에는 단순한 ‘출생 사건’이 아니라 ‘삶을 지배하는 생명 질서’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왜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하지 않으면 ‘구원받은 옛 사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은 받았지만, 사고방식은 여전히 육신 중심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육신이 중심이 되면 육신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명을 따르지 않게 되면 삶에서 나타나는 반응은 두려움과 분노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리고 삶의 결정은 세상 논리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는 생명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명이 통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골 2:6) 받은 생명으로 ‘행하지 않으면’, 생명은 잠재력에 머물 뿐입니다. 2.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질 때 그리스도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일까요? 먼저는 하나님의 생명은 ‘죄를 참는 힘’이 아니라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작동합니다 로마서 8장은 조에의 작동 방식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롬 8:2)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감정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 원리입니다. 죄를 참는 윤리가 아니라 죄를 넘어서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이 생명이 풍성해질수록 그리스도인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게 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생명의 풍성함을 의미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말씀의 지배가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가득할 때, 그 말씀은 생명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생명은 정체성을 ‘증명’이 아니라 ‘표현’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부족할수록 사람은 인정받으려 애쓰고, 자기 의를 세우고 비교와 경쟁 속에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지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아들은 증명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드러날 뿐입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존재는 변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하고 착하게 살아도 죄인이자 마귀 자녀입니다. 노력해도 그 정체성은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천상에서 빛나는 존재입니다. 흰 옷을 입은 의롭고 거룩한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찮아 보이고, 성공하지 못하고, 잘 못살아도 영의 세계에서는 빛나는 존재입니다. 숨어있어도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냥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 마귀도 알고 천사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즉 아들이면 이렇게 해 봐 라고 미혹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진짜 아들이다”라고 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성령님이 보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뭐래도 유일하신 독생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처럼 생각하고 아들처럼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인을 ‘애써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품을 흘려보내는 존재’로 만듭니다. 네 번째, 하나님의 생명은 고난의 의미를 바꿉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세력이 약해지면 고난은 항상 질문이 됩니다. “왜 나에게?” “왜 하나님이 허락하셨지?” 그러나 생명이 풍성해질수록 고난은 차단막이 아니라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나님의 생명은 고난을 제거하기보다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내게 합니다. 다섯 번째, 하나님의 생명의 풍성함은 교회를 ‘조직’이 아니라 ‘몸’으로 작동하게 합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이 많은 이유는 대부분 조직 논리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풍성해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몸의 조직인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유연하게 서로를 위해 헌신합니다. “온 몸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16) 조에는 교회를 규칙으로 유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명이 흐르며 자라는 몸으로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은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 새사람입니다. 그런데 새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계속 변화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하게 되어 있고 변화하는 것만이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 또한 이 초점에 맞추어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율법적인 완전함을 하나님의 온전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또 자기 생각의 틀에 갇혀 생명의 욕구를 제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온전함은 '생명의 성장'입니다. 매일매일 생명의 영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 새사람의 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실 때 생명의 언약을 주십니다. 그 뜻이 주어지는 것은 10년, 20년, 후은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씨는 아무리 작아도 생명이기에 반드시 자라고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비밀에 속한 영역은 알 수 없기에. 그 언약이 실현되는 동안 매일 깨어나는 새로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뜻은 단순히 일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기경하고 영적 실상을 바라보는 눈이 깨어나야 합니다. Already, but Not Yet(이미와 아직) 어둠의 진영은 끊임없이 이 단순한 믿음을 반대하고 박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실현되는 것을 결코 방해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박히셨을 때 드디어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승리를 믿고 나갈 때 우리의 옛사람, 자아가 깨지면서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점점 알게 됩니다.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중요한 일이 함께 따라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옛사람의 영역을 다루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고 하나님께 생명을 받아 새사람으로 거듭났을지라도, 옛사람으로 살아오며 무의식적으로 고집했던 지-정-의의 삶의 방식들까지 모두 정복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 믿음은 '이미(already)' 이루어졌지만 '아직(not yet)' 이루어지지 않은 긴장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망의 옛 영역을 완전히 정복하고 새로운 생명의 영역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짧은 기도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하나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또 하나의 산고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 길은 목자되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가야 하는 길입니다. 3. 결국, 왜 하나님의 생명은 풍성해야 하는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존재의 신분이 아니라 삶의 통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풍성하지 않으면 구원받았어도 여전히 육신의 방식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죄, 두려움, 죽음, 고난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이 풍성해질 때,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 증거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천국행 티켓”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넣으셨고, 그 생명이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로새서 1:27)
이슈와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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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의 비밀은 '명확한 비전'과 '가족 같은 분위기'"
목회데이터연구소가 10일 서울 종로구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개최한 '제4차 목회데이터 포럼'에서 출석교인 50명 미만 '강소교회'에 대한 대규모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전국 소형교회 담임목사 300명과 교회 출석자 400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9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됐으며, 소형교회가 '작지만 강한 교회'로 성장하기 위한 핵심 요인과 현실적 어려움을 동시에 드러냈다. 예장통합교단 교세 현황에 따르면 전체 교회 중 출석교인 50명 이하 교회가 58%로 절반을 넘어, 소형교회가 이미 한국교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번 조사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소형교회가 단순히 '작은 교회'에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 경쟁력 있는 '강소교회'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기획됐다. 명확한 비전과 설교가 만족도 높인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조사 결과, 교인들이 현재 교회에 만족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분명한 비전과 방향성'(38.9%)과 '목사님의 설교'(36.9%)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교인 간 관계가 끈끈하고 또래와 친밀한 교제가 있어서'(35.2%), '담임목사의 리더십'(22.8%) 순이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특히 소형교회의 최대 강점으로는 '성도 간 가족적 분위기(강한 유대감)'가 67.8%로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 약 3명 중 2명이 소형교회만의 친밀한 공동체성을 가장 큰 장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는 대형교회에서 느끼기 어려운 긴밀한 관계성과 돌봄이 소형교회의 핵심 경쟁력임을 보여준다. 김진양 목회데이터연구소 부대표는 "소형교회가 강소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핵심 요인은 '목회 비전'과 '공동체 구현'으로 나타났다"며 "소형교회의 정체성과 강점을 살리는 목회 방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재정 취약성 심화, 외부 지원도 감소 추세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반면 소형교회의 재정적 취약성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소형교회의 작년 총 결산 규모는 평균 5,442만원, 중위값은 5,000만원 미만으로 집계됐다. 절반 이상(51%)이 연 예산 5천만 원 미만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특히 15명 미만 교회의 평균 결산액은 2,420만원에 불과했다. 반면 30~50명 미만 교회는 8,131만원으로 약 4배 차이를 보여, 교회 규모에 따른 재정 격차도 큰 것으로 나타났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더 큰 문제는 외부 재정 지원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부 지원이 감소하고 있다'고 응답한 목회자는 36.5%로, 소형교회 3곳 중 1곳은 외부 지원이 줄어들고 있었다. '증가하고 있다'는 응답은 9.5%에 불과했다. 헌금·봉사 부담이 교회 이탈 요인 성도들의 교회 이탈 의향도 주목할 만한 수치를 보였다. 소형교회 성도 4명 중 1명(27.5%)은 교회 이탈 의향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탈을 고려하는 주요 이유로는 '설교에 대한 불만족'(24.6%)이 가장 높았고, 이어 '헌금에 대한 부담감'(22.0%), '봉사에 대한 부담감'(18.8%), '성도 간 관계에서의 소외감'(18.7%) 등이 꼽혔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이는 소형교회일수록 헌신과 재정 부담이 특정 개인에게 집중될 경우 이탈 위험이 커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헌금과 봉사가 자발적이지 않고 의무로 인식될 때 교회를 떠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목회자의 자책감과 경제적 빈곤 심각 소형교회 목회자들이 겪는 어려움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목회자의 개인적 어려움으로 '나의 역량 부족'이 48.3%로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교회에 불만족을 느끼는 이유로는 '교회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아서'가 40.5%를 차지했다. 이는 소형교회 목회자가 느끼는 패배감과 무기력감이 목회 지속에 심각한 장애 요인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 심각했다. 소형교회 목회자 중 29.0%는 사례비를 비정기적으로 받거나 아예 받지 못하고 있었으며, 사례비를 받는 목회자의 연 평균 사례비는 2,093만원에 불과했다. 특히 15명 미만 교회 목회자의 평균 사례비는 1,230만원으로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운 수준이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제공 이로 인해 소형교회 목회자의 23.7%, 사모의 49.2%가 목회 외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목회 외 겸직이 선택이 아닌 생계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강소교회는 한국교회의 현실적 대안" 이날 포럼에서는 통계 발표와 함께 어울림교회(임원빈 목사)와 사귐의교회(강정규 목사)의 실제 개척 및 성장 사례가 소개됐다. 김선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종합 분석을 통해 "작은 규모 자체가 약점이 아니라, 소형교회에서만 가능한 긴밀한 관계성과 공동체적 역동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강소교회의 핵심"이라며 "강소교회는 한국교회의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 지용근 대표는 "이번 조사를 통해 소형교회가 직면한 현실과 가능성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며 "명확한 비전, 좋은 설교, 가족 같은 관계를 중심으로 한 목회 전략이 강소교회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번 조사 결과 발표는 추후 목회데이터연구소 유튜브 채널(youtube.com/@mhdataTV)에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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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얕은 인맥은 옛말”... 대한민국, ‘관계 가성비’와 ‘소수 정예’에 빠지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의 인간관계 지형도가 급격히 변하고 있다. 과거의 인맥 관리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의 논리에 따라 인맥의 넓이를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면, 2026년을 앞둔 현재의 트렌드는 ‘관계의 효율화’와 ‘선택과 집중’으로 요약된다. 무분별한 인간관계 확장보다는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소수의 핵심 관계에 쏟아붓는 이른바 ‘관계 가성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지인 수’ 줄었는데 ‘행복지수’는 올랐다... 역설적 지표의 의미 한국리서치가 발표한 ‘2025 인간관계인식조사’에 따르면, 지난 4년간 우리 국민이 인지하는 ‘평소 친밀한 지인 수’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2022년 평균 6.4명이었던 지인 수는 2023년과 2024년을 거쳐 2025년 현재 4.1명으로 집계되며 조사 이래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흥미로운 지점은 관계의 양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계 만족도’는 오히려 상승했다는 점이다. 2025년 관계 만족도는 6.4점(10점 만점 기준)으로 2022년 조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는 현대인들이 불필요한 인맥을 걷어내고 내실 있는 관계에 집중함으로써 정서적 포만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음을 시사한다. 연령별로는 70세 이상의 만족도가 7.0점으로 가장 높았고, 18~29세 청년층이 6.7점으로 뒤를 이었다. 특히 가장 젊은 세대와 가장 고령 세대가 전년 대비 만족도 상승폭(각 0.5점)이 가장 컸다는 점은, 두 세대가 각자의 방식대로 관계의 질을 높이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 “다수보다 소수, 다양성보다 동질성”... 유유상종형 관계 선호 조사 결과, 우리 국민의 89%는 ‘다수와 얕은 관계’보다 ‘소수와 깊은 관계’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특히 여성(37%)과 2030 청년세대(20대 46%, 30대 40%)에서 이러한 경향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 관계의 대상에 있어서도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은 사람’을 선호하는 비율이 72%에 달했다. 이러한 ‘유유상종형’ 선호 현상은 남성(63%)보다 여성(80%)에서, 그리고 60대 이상 고령층(80~82%)에서 압도적이었다. 이는 사회적 경험이 쌓일수록 성격이나 가치관의 ‘다름’에서 오는 갈등과 에너지 소모를 피하고, 공감대 형성이 쉬운 안정적인 관계를 추구하려는 경향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이러한 데이터는 교회 소그룹이나 커뮤니티 활동 전략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구성원 간의 다양성을 강요하기보다는 관심사나 연령대가 비슷한 이들을 그룹화하여 초기 정착의 문턱을 낮추고 공감대를 극대화하는 편성이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관계에도 도입된 ‘가성비’ 논리... 75%가 “부담되는 인맥 정리했다”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임계점에 달하면서, 이제는 관계 맺기에도 ‘효율성’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응답자의 58%는 한정된 시간과 감정을 고려해 인간관계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려는 ‘관계 가성비’ 중심의 태도를 보였다. 65%는 의미 없는 상대에게 들이는 ‘감정노동’에 고통을 느낀다고 답했다. 실제로 국민 4명 중 3명(75%)은 부담스러운 인간관계를 직접 정리한 경험이 있었다. 정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정서적 피로감(46%)’이었다. 만남 후에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거나 에너지가 방전되는 관계라면 과감히 단절을 택하는 ‘관계 다이어트’가 보편화된 것이다. 덕분에 2023년 58%에 달했던 인간관계 피로감 경험률은 2025년 48%로 떨어지며 조사 이래 처음으로 40%대에 진입했다. ■ 세대별 온도 차... ‘축소’에 힘주는 30대 vs ‘확장’ 열망하는 70대 인간관계를 대하는 태도는 세대별로 확연히 달랐다. 30대는 관계 확장에 가장 소극적(34%)인 반면, 관계 축소 및 정리에는 가장 적극적(51%)인 모습을 보였다. 이는 직장 내 경쟁, 육아, 경제적 자립 등으로 인해 에너지 소모가 극심한 30대가 새로운 관계를 ‘부담’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반면 70세 이상 고령층은 관계 유지(92%)와 확장(54%) 모두에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은 의지를 보였다. 이는 노년기 고립과 소외에 대한 두려움이 연결에 대한 강한 욕구로 이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디지털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만남에 대한 열망은 전 세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국민 86%가 온라인보다는 오프라인 공간에서의 친구 맺기를 선호했으며, 특히 2030 세대에서 오프라인을 ‘매우 선호’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나 대면 접촉을 통한 실질적 정서 교감의 가치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주었다. ■ 스트레스 1위는 ‘불통’... 지인 많으면 ‘감정 기복’, 적으면 ‘소외감’ 인간관계 스트레스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숙제다. 국민 63%가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으며, 주된 발원지는 ‘일터(직장 동료 66%, 상사 65%)’였다. 특히 3040 세대는 직장 내 갈등, 20대는 친구 관계, 40대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레스 유발의 핵심 요인은 ‘대화와 소통의 부재(54%)’였다. 이어 ‘반복되는 갈등(47%)’, ‘상대방의 감정 기복(37%)’ 순이었다. 특이한 점은 지인 수에 따라 스트레스의 종류가 달랐다는 점이다. 지인이 10명 이상인 응답자는 ‘상대방의 감정 기복’으로 힘들어한 반면, 지인이 전혀 없는 응답자는 ‘소외감과 거리감’을 주된 고통으로 꼽았다. 결국 너무 넓지도, 너무 좁지도 않은 ‘적정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현대인의 심리 방역에 핵심 과제임을 알 수 있다. 이번 조사를 진행한 전문가들은 “현대인의 인간관계가 ‘양적 팽창’에서 ‘질적 심화’로 옮겨가고 있다”며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과 결이 맞는 사람들과 깊게 교류하는 것은 개인의 정신 건강을 위한 중요한 생존 전략이 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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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진단] ‘사이비 규제’의 국제적 이면: 종교의 자유인가, 권위주의적 통제인가
유튜브 영상 갈무리 1. 서론: '사이비 규제'라는 이름의 국가 검열 최근 이재명 대통령과 기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오간 '사이비 종교 규제' 발언은 단순히 사회적 병폐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넘어, 국가 권력이 신념의 영역에 개입하려는 위험한 신호로 읽힌다. 특히 중국의 종교 통제 방식인 '삼자교회' 모델과 최근 국내의 정치적 상황을 대조해 볼 때,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로서 지켜온 종교의 자유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2. 중국의 사례: '삼자교회'를 통한 종교의 국유화 중국은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국가가 공인한 기관을 통해서만 종교 활동을 허용합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삼자애국운동위원회(삼자교회)'이다. 국가 통제의 도구:삼자교회는 '자치, 자양, 자전'을 원칙으로 내세우지만, 본질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 종교를 두는 것이다. 당의 정책에 반하는 설교는 금지되며, 이를 거부하는 목회자와 신자들은 '불법 종교 활동'이나 '사회 질서 교란' 혐의로 가차 없이 체포·구금된다. 지하교회 탄압의 명분:최근 중국 당국은 정부에 등록되지 않은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대거 체포하고 있다. 특히 시온교회의 진밍르(김명일) 목사 등 수십 명의 지도자를 구금한 사례는 국가가 '사이비'나 '불법'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어떻게 종교 비판 세력을 거세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3. 3. 해외 선진국의 사례: '반사이비법'의 명암 종교적 갈등이 심한 유럽과 일본에서도 사이비 규제는 언제나 '종교의 자유 침해'라는 논란을 동반한다. 국가 주요 사례 및 정책 법적 논란 및 비판 프랑스 아부-피카르법 (반사이비법)제정 '종파적 일탈'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소수 종교를 탄압한다는 비판. 최근 신천지 등 한국계 종교에 대한 감시 보고서 발간으로 논란 재점화. 일본 통일교 해산 청구 및 종교법인법 개정 아베 전 총리 피살 사건 이후 급격히 추진됨. UN 인권이사회 등은 "모호한 법 개념에 근거해 국제 인권 규범을 위반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 미국 레몬 테스트 (Lemon Test)원칙 준수 정부의 행위가 특정 종교를 우대하거나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 고수. 일본의 정치적 배경:일본 정부의 통일교 해산 청구는 '사회적 분노'를 정치적 지지율 회복으로 연결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는 이재명 정부가 기독교계의 반정부 인사를 구속하면서 '사이비 규제'를 언급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4. 법적 진단: 왜 '사이비 규제'는 위헌적인가? 국가가 '사이비'를 규정하고 처벌하려는 시도는 대한민국 법치의 근간을 흔든다. 자기결정권과 신앙의 자유:성인이 자신의 의지로 특정 단체에 헌금하거나 봉사하는 행위를 국가가 '그릇된 신앙'이라며 금지하는 것은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 정치적 오용의 위험성:이재명 대통령이 비판 세력인 손현보, 전광훈 목사 등을 구속하고, "이재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발언을 왜곡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행위는 '정의로운 규제'가 아닌 '정치적 보복'의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법 전문가의 견해:"이미 형법상 사기, 감금 등의 조항이 존재함에도 특정 종교를 타겟으로 한 특별법을 만드는 것은 국가가 종교재판관이 되겠다는 선언이다. 이는 중국식 종교 통제로 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5. 결론: 법치국가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긍정적 답변'은 피해자 보호라는 허울 좋은 명분 뒤에 숨은 '비판 세력 말살'의 칼날일 수 있다. 중국이 삼자교회를 통해 종교를 당의 하부 조직으로 만들었듯, 우리 정부가 '사이비 규제'라는 명목으로 종교를 등급화하고 통제하려 든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종말을 고할 것이다. 국가는 종교의 내부 교리에 간섭할 권한이 없다. 오직 발생한 '범죄 행위'에 대해서만 보편적인 법의 잣대를 들이대야 합니다. 그것이 대한민국 헌법이 명령하는 정교분리의 엄중한 원칙이다. 관련 기사 : 지형은 목사의 윤대통령 계엄에대한 설교 및 발언은 신학적 절제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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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은 목사의 윤대통령 계엄에대한 설교 및 발언은 신학적 절제를 넘었다
국대떡볶이 김상현 대표는 유튜브 영상에서 지형은 목사를 두고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목사라고 비판했다. 유튜브 영상 갈무리. 독일 경건주의 전문가인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서의 윤석렬 대통령이 계엄과 관련해서 매우 비판적인 설교와 발언을 해서 교계에 주목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좌편의 논지에 가깝고 또한 균형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본지는 그의 학문적 뿌리인 경건주의 신학이 어떻게 사회윤리와 조우하는지, 그리고 왜 그의 발언이 신학적 절제를 상실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는지를 심층 분석한다. 1. 문제 제기의 출발점: 경건주의 학자가 마주한 정치적 현실 지형은 목사는 한국 교계에서 보기 드문 정통 학자 출신 목회자다. 독일 보훔대학교(Ruhr-Universität Bochum)에서 교회사와 교리사를 전공한 그는 독일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필립 야코프 스페너(Philipp Jakob Spener)의 저술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명확하게 ‘경건주의 신학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둘러싼 지 목사의 설교와 사회적 발언은 그를 향한 시선을 학문적 영역에서 정치적 논쟁의 한복판으로 옮겨놓았다. 핵심은 단순하지만 묵직하다. “그의 발언이 과연 경건주의 신학이 견지해야 할 신학적·법적·정치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본 분석 기사에서는 지형은 목사의 발언을 통해 경건주의 신학이 기독교 사회윤리와 만나는 지점을 고찰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신학적 단절과 권력 인식의 오류를 추적하고자 한다. 2. 경건주의의 본질: 내면적 경건에서 사회적 책임으로 흔히 경건주의라고 하면 개인의 내밀한 회심이나 신비주의적 성화에만 집중하는 소극적 신학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스페너가 주창한 독일 경건주의의 원형은 결코 사회와 단절된 섬이 아니었다. 스페너의 『경건한 열망』이 제시하는 핵심 원리는 다음과 같다. 교회의 본질적 변화: 교회는 단순히 교리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화석화된 기관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이끄는 역동적 공동체여야 한다. 성화를 통한 사회적 확장: 개인의 거룩함(성화)은 내면에 머물지 않고 타인을 향한 사랑과 사회적 책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국가에 대한 감시: 국가는 그 자체로 절대선이 될 수 없으며, 교회는 국가의 도덕적 타락을 경계하고 감시할 영적 의무가 있다. 이 지점에서 경건주의는 이후 기독교 사회윤리, 더 나아가 19세기 기독교 사회주의적 전통과 일정 부분 접점을 형성한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결정적인 경계선이 있다. 경건주의는 ‘복음이 사회에 윤리적 책임을 요청한다’고 가르쳤을 뿐, ‘특정 정치 이념이나 진영 논리가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등치 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구분이 무너질 때 경건주의는 도덕적 절대주의 혹은 이념화된 신앙의 도구로 변질될 위험에 처한다. 3. 경건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 접점과 단절의 경계 지형은 목사의 발언이 소위 ‘좌익 시민사회 담론’과 유사하게 읽히는 이유는 그가 강조하는 기독교 사회윤리가 기독교 사회주의적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양측은 가난한 자와 약자에 대한 책임, 구조적 불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한다. 그러나 위 도표에서 볼 수 있듯, 경건주의와 기독교 사회주의는 ‘인간과 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차를 보인다. 구분 경건주의 (Pietism) 기독교 사회주의 (Christian Socialism) 인간 이해 철저히 타락한 존재 (부패성 강조) 구조가 개선되면 선해질 수 있는 존재 권력 인식 권력은 항상 죄성에 노출됨 (불신) ‘정의로운 권력’의 실현 가능성 낙관 하나님 나라 종말론적이며 초월적인 실재 역사 안에서 점진적으로 실현 가능 국가의 역할 필요하지만 언제든 괴물이 될 수 있음 정의 구현을 위한 적극적 수단 경건주의의 진정한 강점은 ‘인간과 권력에 대한 냉철한 불신’에 있다. 반면 기독교 사회주의의 위험은 특정 권력을 정의의 편으로 설정하는 ‘권력에 대한 낙관’에 있다. 지형은 목사의 최근 발언에서 우려되는 지점은, 그가 견지해 온 경건주의적 비판 정신이 특정 정치적 상황 앞에서 기독교 사회주의적 낙관 혹은 이념적 편향성으로 선회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4. 법치와 신학의 관계: 신학이 사법적 판단을 앞지를 수 있는가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에 대해 지 목사는 이를 “헌법을 짓밟은 행위”, 나아가“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행위”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했다. 여기에는 중대한 신학적·법리적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대한민국 헌법상 계엄 선포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으로 명시되어 있다. 선포의 절차나 동기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나, 그것이 곧바로 ‘내란’ 혹은 ‘헌법 파괴’로 성립되는지는 사법적 판단의 영역이다. 둘째, 위증 논란과 정치적 재판에 대한 우려가 상존하는 상황에서 목회자가 법적 판단을 선행하여 종교적·신학적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은 경건주의 전통이 강조해 온 ‘겸손’과 ‘자기 제한’의 원리에 어긋난다. 경건주의의 거장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권력의 오만함을 비판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심판을 대리 집행하는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 지 목사의 발언은 예언자적 외침이라는 명분 하에, 신학적 겸비함이라는 선을 넘어선 것으로 비춰질 소지가 다분하다. 5.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국가 권력의 죄성 가장 심각한 신학적 쟁점은 ‘하나님 나라와 국가 권력의 죄성’에 대한 구분이 흐려졌다는 점이다. 정통 신학적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는 그 어떤 지상 정치 체제와도 동일시될 수 없다.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보수주의든 모든 정치 시스템은 인간의 죄성 아래 놓여 있다. 지 목사의 발언에서는 국가 권력 전반에 대한 구조적 불신보다는, 특정 행위에 대한 도덕적 절대주의가 도드라진다. 이는 경건주의의 언어를 빌려왔을 뿐, 실제로는 특정 진영의 정치적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시민종교적 담론’에 가깝다. 권력이 좌측에 있든 우측에 있든, 교회가 특정 정치적 해석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순간 신학은 이데올로기의 시녀로 전락하게 된다. 6. 결론: 문제는 ‘이념’이 아닌 ‘신학적 절제의 상실’이다 지형은 목사를 향한 비판의 본질은 그가 공산주의자라거나 좌익이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경건주의 신학이라는 탁월한 도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치적 격동기 앞에서 경건주의가 마땅히 지켜야 할 ‘판단 유보의 미덕’을 상실했다는 점에 있다. 경건주의는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를 남겼다.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권력도 반드시 타락한다. 정의를 부르짖는 다수의 목소리 또한 언제든 폭력으로 돌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상의 어느 편에도 완전히 서지 않음으로써만 진정한 비판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 기준에서 볼 때, 지형은 목사의 발언은 신학적 균형을 잃은 상태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시대를 향해 발언하는 것은 마땅한 사명이다. 그러나 그 발언이 세속 정치의 확성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엄격한 절제와 깊은 신학적 분별이 전제되어야 한다. “의로운 분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끝까지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기다리는 신앙이다.” 이 시대적 교훈 앞에서 지 목사의 발언은 한국 교계가 권력과 신앙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에 대한 뼈아픈 신학적 사례 연구(Case Study)로 남게 될 것이다.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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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2)
1. 내가 감동받은 찬양들이 모두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하신 찬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감동받았던 찬양들을 꼭 예배 때 콘티로 구성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찬양을 준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평소 이런 노력이 찬양을 인도하는 실전에서 빛을 발합니다. 찬양 인도가 목적이라서 평소 성령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 가운데 많은 은혜 끼치고 싶어서가 목적이 아닙니다. 2. 다시 말씀드리지만 친밀하게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나도 순수하게 사랑해서 존중해드리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찬양 사역에서도 성령님께서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준비가 이뤄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이런 순수함과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는 태도, 감동 주실 때 메모하며 기록하는 습관들이 어우러져 비로소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긴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찬양 인도를 잘하는 것보다 동기의 점검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동기는 평소 삶의 태도에서 점검됩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찬양들이 모이면 다시금 성령님께 여쭤봅니다. 3. “성령님, 어떤 순서로 찬양드리기 원하세요? 가르쳐 주시겠어요?” 여쭤보고 기도드리며 잠잠히 기다리고 있으면 결코 늦지 않게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감동 가운데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그 순서대로 정리하고 준비합니다. 찬양 인도할 때는 내 안에 계시며 이 장소에 계신 성령님을 친밀하게 느끼고 인식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높여드리는 찬양을 드리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또한 목소리에도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기름부으시기를 끊임없이 간구합니다. 4.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 인도를 위해 성령님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사랑해서 성령님을 찾으려는 영적인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심을 점검하며 강대상 앞에서 좀 더 집중하여 조용히 성령님을 생각합니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며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함께 찬양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드립니다.” 5. 조용히 마음 가운데 이런 고백을 드리며 첫 찬양을 살펴봅니다.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부를 수 있는 영적 상태인지 또 점검한다는 겁니다. 내면에 성령님 함께하심으로 인한 안정감과 평안함, 설레임과 기대감, 나의 진심이 담겨질 수 있겠다는 확신 속에 조용히 입을 엽니다. 찬양을 시작합니다. 찬양 인도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쉬운 사역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평상시에 순수하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며 살아간다면 사역 현장에서도 성령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도우심 받는 것이 자연스러우리라 믿습니다. 6. 우리 모두 찬양 인도자로 살지 말고 평소 찬양 드림을 기뻐하는 자로 사시길 소망합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 드리는 찬양”도 인도할 때가 아니라 평소 개인적인 찬양에서 먼저 성공적으로 사용하시길 소망합니다. 순수하게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쁨 드리는 찬양을 합시다. 그러다 보면 찬양 인도의 현장에서도 성령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심을 자연스레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 드리시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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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1)
1. 성령님께서는 찬양 인도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찬양 인도의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노래와 찬양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항상 합창단과 성가대에 들어가 활동했어요. 더군다나 제 목소리는 정말 고음이 잘 나오는 미성이었고 발성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여성합창단에서 청일점처럼 활동하기도 했고, 노래에 있어서는 항상 칭찬받았습니다. 2.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와서 보니 저만 크게 기도를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크게 소리 지르면서 기도하면 목이 쉴 것이 뻔하고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목소리가 바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걱정되어 크게 소리 높여 기도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후에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재발견하고는 그런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던 목소리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했기 때문이죠. 그다음부터는 그 누구보다 크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3. 당연히 목은 금방 쉬기도 하고 점점 변했습니다. 목소리의 변화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목소리에 성령님의 임재가 담겨지기를 사모하며 날마다 성령님께 부탁드렸어요. 그러면서 점점 성령님께서 제 목소리를 책임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전의 미성은 사라졌지만 지금은 목소리에 은혜를 주셨음을 압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며 찬양 인도할 때마다 큰 은혜를 더해 주심을 봅니다. 하지만 찬양 인도하시는 분들이 일부러 목소리를 포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다른 분들에게는 기도할 때도 목이 상하지 않는 발성을 추천드립니다. 4. 목회자들은 찬양 인도를 자주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찬양 인도할 때 어떻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면서 준비하고 인도할까요? 핵심을 먼저 나누자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긴다.” 말은 쉽지만 첫 음을 맡기는 마음 상태,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평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는 삶이 가능해야 쉬워집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기는 찬양은 평상시 삶에서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가령 찬양 인도 날짜가 정해지면 성령님께 여쭤보며 삶을 삽니다. 5. “성령님, 어떤 찬양을 드리기 원하세요? 어떤 찬양으로 함께 찬양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나요? 어떤 찬양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지 너무나 잘 아시는 성령님!!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세요.” 이렇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면서 삶을 살다 보면 다양한 채널들로 감동을 주시는 찬양이 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콘티 구성할 찬양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하루에 한 곡, 혹은 두세 곡씩, 혹은 전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6. 기도드리는 가운데 생각나게도 하시고, 내가 먼저 부르지 않았는데 길을 걸어가다가 내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찬양도 있습니다. 때로는 잠에서 깼는데 내 속에서 울려 퍼지거나, 비몽사몽 중에도 입술을 열고 찬양을 부르고 있음을 깨닫는 찬양이 있습니다. 어떤 분의 글을 읽다가 그분이 은혜받으셨다며 소개해주시는 찬양이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7. 하루는 페이스북에 제가 올린 글을 읽으신 분께서 찬양이 생각난다시며 댓글로 올려주셨는데 감동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방송이나 유튜브로 평소 즐겨듣는 찬양들 가운데 그날따라 더욱 은혜가 되는 찬양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찬양들을 꼭 메모하고 기록해둡니다. 물론 감동받은 찬양들이 모두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하신 찬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감동받았던 찬양들을 꼭 예배 때 콘티로 구성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찬양을 준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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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우선순위 세 가지
AI이미지 그림 1. 개척 3년차 즈음 연말이었습니다. 감동을 주시는 듯해서 한 달 정도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머무를 때였어요. 제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기 원하시는지 여쭤보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삶과 신앙, 목회 가운데 본질적인 우선순위를 자주 점검하도록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해주신 내용들이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2. <첫째, 친구의 정체성을 기억하기> 나 자신이 목사이기 전에 자녀요, 친구의 정체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라보실 때 사역 성공했다는 사람들 칭찬 많이 받는지의 여부로 판단하시기보다, 하나님 자녀요 친구로서 성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가장 행복할 때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목사인 제가 진정 예수님만으로 인하여 행복할 때, 저를 통해 예수님을 보게 되는 성도님들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성령님께서는 수시로 제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3. “태성아, 교회 갈 때 목사의 정체성으로 먼저 가지 말자. 너 역시 다른 성도들처럼 먼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친구로서 교회에 가자. 성도로 교회에 가자.” 그래서 집에서 교회로 출발해서 이동하면서 계속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 나누면서 의식합니다. 목사가 아니라 성도로 교회 간다는 인식을 체크합니다. 목사인 제가 먼저 아들이요 친구로서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젖어 들어서 행복해야 합니다.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에서 행복을 누리고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4. <둘째, 가정에 충실하기> 가장 먼저 세우신 공동체인 가정에 충실한 목회자여야 합니다.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를 잘 이끌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시금석으로 삼아야 합니다(반대로 가정이, 자녀가 우상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목사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사랑하고, 행복한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강단에 섰을 때 가족부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제 아내가 가장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는 간증을 하곤 하는데 주님께서 격려해주시는 음성처럼 느껴집니다. 5. 만약 제가 인도하는 예배에서 가족이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사역의 성공도 사람들의 칭찬도 예수님 보실 때 실패입니다. 다행히도 아내부터 아이들도 나름 좋게 평가해줘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목회자 가정이 행복한 모습을 볼 때 성도님들 가정도 주님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소망을 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자 본받기를 힘쓸 것입니다. 저도 가정이 행복하신 선배님들의 강의나 책, 개인적 교제를 통해 본받고자 노력 중입니다. 6. <셋째, 하나님 앞에 머물기> 목사가 교회에 머물며 하나님과의 접촉과 만남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목사로서 이 정체성을 풍성하게 누려야 할 장소가 바로 섬기는 교회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도 심방이나 성도의 교제, 부흥회, 긴급한 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교회에 아들이요 친구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 머물기를 즐깁니다. 7. 아버지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사랑하며 사랑받고, 교제 나누는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고자 개척 목회의 우선순위로 두고 있습니다. 그럴 때 목사가 교회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혼의 기쁨을 성도님들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하늘 아버지 앞에 자녀요, 친구로 나아가 말씀과 기도의 즐거움을 풍성하게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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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말씀, 창조주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다
유듀브 동영상 갈무리 1.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 비웃음 속에 찾아온 낯선 초대 저는 대구에서 나고 자란 뼛속까지 불교 집안의 자녀였습니다. 제게 교회란 그저 ‘천국과 지옥’이라는 보이지 않는 담보로 사람들을 현혹해 장사를 하는 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저 또한 평생을 교회를 욕하며 지냈습니다. 서른다섯 되던 해, 서울에서 사업에 매진하던 제게 뜻밖의 제안이 찾아왔습니다. 평소 신앙이 깊어 보이지 않던 한 지인이 ‘크리스천 CEO 스쿨’을 추천한 것이지요. "저 형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습니다. 이전에도 친구를 따라 새벽기도에 가본 적은 있었으나,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기겁하여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기억뿐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CEO 스쿨의 ‘섬김의 리더십’ 강의는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비록 속으로는 "나중에 저들도 뒤에서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기도하겠지"라고 비웃었지만, 그들의 삶에 배어있는 진정성은 제 차가운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녹여갔습니다. 2. 창조의 확증: 원숭이의 후예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여름 방학 중 떠난 ‘미국 창조과학 탐사’ 비전트립이었습니다. 그저 휴가나 다녀오자는 마음으로 신청한 그곳에서 지질학자 출신의 한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본래 철저한 진화론자였던 그분이 어떻게 성경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강의를 듣는 동안, 제 평생을 지탱해온 진화론의 허구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사실이다. 이것은 팩트다.” 그 외침이 제 심장에 박혔습니다. 제가 우연히 생겨난 원숭이의 후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 속에 지어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 그분이 바로 제가 그토록 욕했던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자 세상 모든 만물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옆에 앉은 장로님부터 어린아이 한 명까지 모두가 너무나 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였고, 그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제 안에서 솟구쳤습니다. 3. 주인이 바뀌는 회개: 내 삶의 보좌를 내어드리다 예수님을 창조주로 영접하고 나니 비로소 제가 지은 ‘진짜 죄’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저는 제가 꽤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열심은 결국 나를 주인 삼고 내 영광을 위해 살아온 교만일 뿐이었습니다. 진짜 죄는 살인이나 강도가 아니라, 내 생명의 주인인 창조주를 거부하고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고집했던 바로 그 마음이었습니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감했습니다. 제 생명보다 귀한 자식의 생명인데, 하늘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사랑의 확증은 없었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나니 과거에 함부로 대했던 인연들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관계가 끊겼던 친구들과 퇴사한 직원들에게까지 일일이 전화를 걸어 "당신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형상인지 몰랐다"고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며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해 나갔습니다. 4. 팩트를 외치는 사명: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다 이제 제 삶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팩트’를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진화론과 공산주의라는 거짓 사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가리고 성경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귀의 전략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 현장이나 대형 교회 앞에서도 이 복음을 타협 없이 전합니다. 때로는 과격하다는 소리를 듣고 불편해하는 시선도 마주하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보다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 더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으나, 영원한 내일인 ‘천국과 지옥’ 중 어디로 갈 것인지는 반드시 정해야 합니다. 믿음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전적인 선물입니다. 저처럼 평생 교회를 욕하던 완악한 사람도 창조주를 만나 새 생명을 얻었듯,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삶의 주인을 바꾸는 참된 회개를 경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간증 출처 : 간증. 풀버전. 국대떡볶이 김상현 대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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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인생의 오후, 길을 잃은 당신에게 건네는 따뜻한 이정표: 『인생 오후의 질문』
청춘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그렇다고 늙었다고 인정하기에는 아직 서운한 나이. 우리는 이 시기를 '중년'이라 부른다. 인생의 오전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시절에도 수많은 질문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인생의 오후에 마주하는 질문은 훨씬 더 진지하고 절박하다. 곧 해가 질 것만 같은 유한한 시간과 삶의 무거운 무게를 비로소 실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잘 살아온 걸까?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심리학적 통찰과 깊은 신앙의 언어를 결합한 황정회 저자의 신간『인생 오후의 질문』(아르카)이 출간되었다. 중년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역자의 시선 저자 황정회는 분당우리교회와 사랑의교회에서 오랜 세월 상담가이자 교구 전도사로 사역하며, 교회 안의 수많은 중년 성도를 가까이에서 돌봐왔다. 그는 사역 현장에서 성도들의 기도 제목을 들을 때면 그가 중년인지 아닌지 금세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중년의 삶에는 자녀와 부모를 위한 기도는 넘치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기도’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볼 틈 없이 달려온 중년들은 어느 순간, 자신이 원하던 모습과는 멀리 떨어진 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저자는 이런 이들을 위해 심리학자 다니엘 레빈슨이 말한 ‘인생의 가을’이라는 개념과 논어의 ‘지천명(知天命)’을 연결한다. 중년은 단순한 쇠퇴의 시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사명을 새롭게 자각하는 진중한 전환기라는 것이다. 중년의 뇌가 가진 놀라운 강점: "다르게 생각하는 힘" 흔히 중년이 되면 기억력이 감퇴하고 뇌 기능이 쇠퇴한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현대 뇌과학의 성과를 빌려 이러한 오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중년의 뇌는 청년기의 뇌처럼 '빠르게' 생각하지는 못할지라도, 훨씬 안정되고 성숙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 통찰과 노련함 : 중년의 뇌는 정보를 단순히 처리하는 것을 넘어,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더 넓고 깊은 답을 내놓는다. • 감정적 안정성 : 젊은 시절의 감정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문제를 다각도로 조망하며 여유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극대화된다. • 사회적 자산 : 이러한 중년의 지혜와 통찰은 사회와 다음 세대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된다. 저자는 인류가 진화 과정에서 생식 활동이 끝난 뒤에도 수십 년을 더 살게 된 것은 ‘중년 유전자’ 덕분이며, 이 시기는 인류에게 허락된 ‘축복의 구간’이자 진정한 자아 성취의 시간이라고 강조한다 . 상실의 파도를 넘어서는 '애도의 여정' 중년의 삶에서 가장 주된 이슈 중 하나는 ‘상실’이다. 이전과 같지 않은 건강, 변해가는 외모, 사회적 역할의 축소,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까지, 중년은 원치 않는 수많은 이별과 적응을 강요받는다. 저자는 상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실 이후를 어떻게 살아가느냐'라고 말한다. 책에서는 상실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한 성경적이고 심리학적인 ‘애도의 과정’을 중요하게 다룬다. 1. 비움과 수용 : 과거의 익숙했던 것들을 보내주는 것은 새로운 인생의 국면을 맞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상실을 삶의 그림자로 받아들이고, 억지로 거부하기보다 그 아픔을 충분히 헤아려야 한다 . 2. 동반과 위로 : 홀로 견디기 힘든 상실의 계절에는 조용히 곁을 지켜주는 동반자가 필요하다. 저자는 교회 공동체가 신앙 안에서 서로의 희로애락을 공유하고 배울 수 있는 특별한 체험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 3. 의미의 재발견 : 상실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전환점이다 . "이제 무엇을 붙들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남은 날들을 더 가치 있게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 실천적인 관계 회복과 자아 찾기 저자는 상담 사례를 통해 중년의 4대 인간관계(자녀, 부모, 배우자, 나 자신)를 회복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를 제시한다. • 자녀와의 관계 : 중년 부모가 배워야 할 사랑은 자녀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자유롭게 놓아주는 '축복의 사랑'이다. 부모가 당당하게 자기 자신으로 설 때 자녀도 비로소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 배우자와의 관계 : 사랑은 젊은 부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년의 부부관계 역시 확장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세월 따라 함께 걷는 지혜가 필요하다. • 나 자신과의 관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감정적 반응에 갇힌 미분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오롯이 자신을 대면하며 잃어버린 자율성을 찾는 시간은 중년에게 필수적이다. 중년은 다음 소절로 넘어가는 시간 이 책은 출간과 동시에 교계 지도자들의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이찬수 목사(분당우리교회)는 "의무감으로 점철된 중년의 삶을 이해하고 인생 오후의 의미와 소망을 찾게 해줄 것"이라고 추천했다. 하진호 목사 또한 "중년은 노래가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소절로 넘어가는 시간"이라며 이 책이 성숙의 계기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 황정회 저자는 "천년을 버티는 집을 지으려면 천년을 견딘 소나무가 필요하듯, 우리 인생도 견딘 만큼 쓰이게 된다"라고 한다. 삶의 고갯마루에서 지쳐 있는 당신에게, 『인생 오후의 질문』은 다시 일어설 용기와 함께 하나님이 예비하신 인생 후반전의 찬란한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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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다시 깨어나는 신앙
『중간사 수업』(샘솟는 기쁨/박양규 지음) 고요 속에 숨겨진 거대한 움직임 역사는 늘 요란하게만 흐르지 않는다. 때로는 긴 침묵 속에서 더 깊은 변화를 준비한다. 박양규 저자의 『중간사 수업』은 바로 그 고요한 400년, 구약과 신약 사이의 시대를 향해 귀를 기울이게 한다. 흔히 ‘성경의 공백기’라 불리는 이 시기를 저자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준비기로 재조명한다. 이 책은 세종대학교에서 15주간 진행된 강의를 바탕으로 집약된 결과물이다. 지성(로고스), 정서(파토스), 인품(에토스)이 어우러진 강의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단순한 학문적 분석을 넘어, 역사와 신앙을 긴밀히 연결하며 오늘의 독자에게 살아 있는 질문을 던진다. 학문을 넘어 현실을 깨우는 역사서 저자는 중간사를 흔히 쓰이는 ‘제2성전기’라는 학술 용어로 규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라,신앙과 현실을 연결하는 역사적 해석서이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연구자로 살아온 저자는 단순한 용어 정리를 넘어, 실제 사건들의 의미를 오늘의 독자가 체감할 수 있도록 재구성한다. 마카비 전쟁과 유대 전쟁을 신약 시대의 형성과 연결하며, 그 시대 성도들의 질문을 오늘 우리의 질문과 겹쳐 읽는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지킬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택할 것인가?” 이 물음은 과거의 성도들만의 고민이 아니다. 오늘의 교회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초대교회의 회복된 정체성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정체성이다. 저자는 우리가 2천 년 전 그들과 같은 성경,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감성적 고백이 아니라, 신앙이 역사성을 지닌다는 강력한 선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본질을 되찾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방식임을 깨달은 이들이었다. 그들이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문명 속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삶의 기준이 분명했다 :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도덕적 규범이 아닌 존재의 중심으로 삼았다. 가치의 숭고함을 추구했다 : 권력이나 질서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삶으로 구현했다. 삶 자체가 증언이었다 : 복음을 말하는 것보다 복음으로 존재하는 것을 더 중시했다. 오늘 교회가 초대교회의 본질로 돌아간다면, 세상 속에서 다시금 소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문자에 갇힌 신앙은 소멸한다 책의 또 다른 날카로운 통찰은 “성경과 시대의 접점을 찾으려는 고민을 하지 않고 문자에 갇힌다면 결국 소멸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태어난 언어임을 강조한다. ‘복음’, ‘교회’, ‘소망’이라는 단어조차 당시 정치·사회·종교적 갈등 속에서 만들어진 말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단순히 말씀을 읽은 것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적 장면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삶으로 살아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는 문자적 정지 상태로 읽어서는 안 된다. 말씀의 역사적 온도, 사람들의 질문, 사회의 긴장까지 함께 읽어내야 한다. 바리새파의 변혁과 유대교의 생존 저자는 유대교가 어떻게 ‘랍비 유대교’로 전환되어 명맥을 이어 왔는지 주목한다. 사두개인은 문자만을 고집하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사라졌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적용을 고민하며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아내려 했다. 이 점은 오늘 교회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문자주의에 머무는 신앙은 쇠퇴한다. 해석과 적용의 고민을 멈춘 공동체는 현실을 잃고, 결국 미래도 잃는다. 초대교회와 유대교의 변화를 함께 보아야 오늘 교회의 길이 선명해진다. 지금 우리의 시대가 또 하나의 중간사 오늘 한국 사회는 정치·종교·문화의 충돌 속에 서 있다. 가치의 붕괴, 정체성의 혼란, 교회의 위상 약화, 급격한 사회 변화… 이 모든 모습은 중간사가 보여준 시대적 긴장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저자는 말한다. “중간사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읽는 해석학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마카비 전쟁’은 무엇일까? 신앙을 압박하는 문화적 힘은 어디서 오는가? 초대교회가 보여준 회복의 정체성은 오늘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중간사 수업』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신앙의 본질과 역사의 흐름을 다시 읽어내는 눈을 회복하게 한다. 『중간사 수업』은 단순히 성경 사이의 400년을 해석하는 책이 아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을 깨우는 신앙의 교과서이다. 하나님 나라가 새 질서를 준비하던 격변기를 새롭게 비추며, 오늘의 교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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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와 신앙의 통합: 이념 아닌 '실제적 연결'의 새로운 마음 지도 그려라
11월 4일 오후 3시 신촌 품는교회(김영한 목사)에서 열린 권요셉 목사의 신간 《변화의 반복》 (샘솟는기쁨) 북토크가 진행되었다. 이날 북토크에서 권 목사는 자신의 목회 현장과 임상 현장을 오가며 길어 올린 사유를 차분히 풀어냈다. ▲11월 4일 오후 3시 신촌 품는교회에서 진행된 권요셉 목사의 북토크. 오른쪽은 진행을 맡은 김영한 목사 강연은 한 편의 증언록처럼 시작했다. 전도사 시절 새벽 두 시, 드물게 교회에 오던 여학생의 전화에 “내일 얘기하자”고 답했던 그날. 불과 2주 뒤 그는 학생의 자살 소식과 함께 유가족을 통해 학생의 일기를 받았다. 그리고 그 일기 속에서 자신의 설교 기록과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에 대한 감상이 빼곡히 채워진 페이지를 마주했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울먹였던 권 목사는 “내가 살릴 수도 있었겠다.”라는 자책은 곧 관점의 전환이 되었다. 교회 앞에서 쫓겨나던 경계청소년들을 찾아 교회 청소년부실을 밤 쉼터로 열었고, 인근 분식집에 선결제해 “김밥은 언제든”이라는 최소한의 안전망을 깔았다. 이 경험은 훗날 선교지의 전쟁과 맞물리며 ‘트라우마’라는 언어로 재명명된다. 외국인이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부족에서 교회가 600명 규모로 성장하던 무렵 내전이 터졌다. 밤이면 총성이, 낮이면 시신 수습이 일상이었다. 대사관의 도움으로 탈출했으나, 귀국 후 낙관적 성격을 가졌던 아내는 우울·무감동·대인부정에 시달렸다. 정작 권 목사에게는 아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권 목사에게는 지연성 증상 —얼굴 피부에서 벌레가 기어 나오는 듯한 환촉, 붉은 음식에서 피 냄새가 나는 과각성— 이 몰려왔다. 그는 “환시가 왔으면 쉽게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아직 그 단계까지 가지 않고 감각적인 확촉을 통해 얼굴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느낌이 와서 거울을 보며 확인하는 병식 덕에 정신증으로 넘어가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 기존 상담이 하나의 원인을 찾아내려는 경향에 의문이 생겼고, 들레즈·가타리의 ‘분열분석’(schizoanalysis)에 눈을 떴다. 욕망·무의식·사회구조의 다층 연결을 전제하고, 몰입과 집착을 쪼개 분산·개체화·재조합하는 방식이 자신의 경험을 더 정확히 포착해 준다는 것이다. 국내 전문가가 드물던 시절 해외 분열분석 전문가들에게 슈퍼비전을 받으며 국내에서 경험하지 못한 전문성을 다졌다. 강연의 중반부는 트라우마 이론의 갱신을 점검하는 자리였다. 그는 “전쟁·재난 같은 빅 트라우마만 중요하다는 통념이 흔들리고 있다”며 “촘촘한 스몰 트라우마의 축적이 언어·기억 처리 영역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설명했다. 빅 트라우마의 표지는 ‘침투적 재경험’ — 의도와 무관하게 과거가 현재를 덮치는 현상 — 이지만, 스몰 트라우마는 자각이 어렵고 성격과 감정의 밑결을 묵묵히 변형시킨다는 점을 지적했다. 몰입과 집착, 애착 왜곡, 편집적 해석, 중독 등은 그 표현형일 수 있다. 이론 비교도 간명했다. 프로이트는 억압된 개인사로서의 무의식을, 라캉은 “언어처럼 구조화된” 사회적 무의식을 보았다. 들레즈·가타리는 분자적 흐름들의 연결망을 전제해, 보편/개인의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나의 생성’을 지향한다. ‘가족 세우기’ 같은 구조주의적 기법은 “정해진 해답 범주 안에서 문제를 배치”한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라캉 사이의 중간 단계로 읽힐 수 있다고 했다. 반면 분열분석은 개인의 욕구들을 쪼개고(분열) 흩어(분산) 다시 새로 엮어(재조합) 집착의 에너지를 다중의 건강한 접속으로 분배한다. 그렇다면 신앙은 어디에 서 있는가. 권 목사는 상담·뇌과학·사회이론을 “하나님이 지으신 질서가 일반은총 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해한다. 기도와 성령, 영적 돌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 협력이 가능하며, 경계의 분별이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교회가 학문을 배척하면 현장의 언어와 데이터를 잃고 공적 담론에서 소외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배우고, 선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청중의 질문에 그는 “세상의 이론을 맹신하지도, 배타적으로 잠그지도 말라. 분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강연 말미, 그는 ‘이념’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선교사·목사·신자에게 부과된 당위적 모델이 죄책과 경직을 낳을 때, 사람은 모델을 위해 소모된다.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이상적 목회자상’이든 모두 이념이 될 수 있다. 그 이념을 잘게 쪼개 하나님과의 실제적 연결, 먹고 자고 일하는 소박한 일상 속 은총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넥타이를 풀고 설교하려다 다시 매고 올라간 소소한 고백은, ‘형식’이 아닌 ‘관계’로의 회복을 상징적으로 비췄다. 진행을 맡았던 김영한 목사는 “교회 안팎에 불안과 중독, 트라우마가 만연한 시대에 실천 언어와 신학적 분별을 겸비한 안내서”라며 후속 강좌를 제안했다. 권요셉 목사는 한 문장으로 책의 주제를 가려냈다. “충격보다 우리를 더 옭아매는 것은 이념입니다. 이념 대신, 하나님과의 실제적 연결로.” 그의 북토크는 거창한 해법보다, 그 연결을 가능케 하는 태도 — 즉, 곁에 머무는 시간·열린 공간·작은 예산·지속적 배움 — 이야말로 교회가 지금 당장 선택할 수 있는 길임을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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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 속에서 과감한 행동을 이끄는 5가지 전략
하버드비즈니스리뷰(Harvard Business Review, 2025년 9–10월호)에 실린 란제이 굴라티(Ranjay Gulati) 교수의 「불확실성 속에서 과감한 행동을 이끄는 5가지 전략」(Five Strategies for Acting Boldly in Uncertain Times) 의 주요 내용이다. ● 핵심 주제 “용기(Courage)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리더십 역량이다.” 란제이 굴라티 교수는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리더들이 ‘두려움의 마비’를 극복하고 과감하게 행동하기 위한 다섯 가지 전략을 제시합니다. 1. 두려움을 인식하고 다루기 불확실성 상황에서 사람들은 위험보다 두려움 자체에 지배당한다. 리더는 두려움을 억누르기보다 직시하고 이해해야 한다.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팀 안에서 두려움에 대해 공개적으로 대화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두려움을 인정할 때 오히려 통제할 수 있게 된다. 2. 자신감 키우기 (Self-Efficacy) 자신의 역량을 신뢰하는 힘이 과감한 행동의 기반이다. 단,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작은 성공 경험을 축적하여 생기는 실질적 자신감이어야 한다. 실패 경험도 “학습 자산”으로 삼아 점진적으로 자신감을 키우는 과정이 중요하다. 즉, 용기는 성공한 결과보다 시도한 경험에서 자란다. 3. 명확한 목적과 의미 찾기 불확실한 시기일수록 ‘왜 이것을 하는가?’라는 질문이 리더를 붙잡아 준다. 개인적 이익보다 조직의 사명·가치와 연결된 의미 있는 목표를 분명히 할 때, 두려움을 넘어 행동할 수 있다. 목적의식은 불안정한 외부 상황 속에서도 방향 감각을 유지하게 해 준다. 4. 관계와 신뢰를 기반으로 협력 강화 용기는 개인의 덕목이 아니라 공동체적 역량이다. 리더가 관계 속에서 신뢰를 구축하면, 팀원들도 더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상호의존적 용기(Interdependent Courage) 가 필요하다 — 즉, “함께 도전하고, 함께 책임지는 문화.” 신뢰가 강한 팀일수록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5. 반복적 학습과 행동 실험 용기는 단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다. 불확실한 환경에서는 ‘완벽한 계획’보다 작은 실험을 반복하며 배우는 자세가 중요하다. “시도 → 학습 → 조정”의 사이클을 통해 행동력과 자신감을 동시에 키운다. 리더는 실패를 처벌하지 않고, 시도를 장려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결론: “용기 있는 조직은 학습하는 조직이다.” 용기는 리더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조직 문화적 자산이다. 리더가 솔직히 두려움을 인정하고, 의미 있는 목적을 공유하며, 관계 속 신뢰를 키울 때 조직 전체가 불확실성 속에서도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즉, “용기는 배워서 성장시킬 수 있는 리더십의 핵심 근육”이다. ※ 참고 정보 원문 : Ranjay Gulati, “Five Strategies for Acting Boldly in Uncertain Times,” Harvard Business Review, Sept–Oct 2025. 관련 저서 : 『How to Be Bold: The Surprising Science of Everyday Courage』 (Harper Business, 2025).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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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 “선교는 결국 사람이 남는다” “선교는 사람이다.” 이현국 목사는 이 말을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내뱉었다. ▲선교 사역의 핵심은 사람이라고 밝힌 이현국 목사(운화교회) 그의 목소리에는 30여 년의 목회와 선교 여정이 응축된 단단한 울림이 배어 있었다. “교회를 세우는 것도, 신학교를 운영하는 것도 결국 사람이 남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건물이 크고, 프로그램이 많고, 헌금이 많아도 제자가 세워지지 않으면 그건 잠깐의 열매일 뿐이죠.” 그는 “선교란 사람을 세우는 일이며,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그가 쓴 책 『사람을 세우는 선교』(쿰란출판사)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책 속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도 결국 사람을 통해 완성된다.” 이현국 목사는 경기도 성남의 온화교회 담임목사로, 1990년대 초부터 인도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선교 여정은 ‘성공 스토리’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그 안에는 ‘실패’와 ‘절망’, 그리고 ‘회복’을 통한 진정한 선교의 본질 발견이 담겨 있다. ■ “열정과 재정으로 시작했지만… 실패를 통해 배웠다” 그의 인도 선교는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같은 노회의 한 목사로부터 인도 마니푸르 지역의 소식을 들었다. “그곳 인구의 40퍼센트가 기독교인이라 들었어요. 그래서 그곳을 중심으로 선교 거점을 세우면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등으로 복음이 확산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는 곧바로 한 인도인 신학생(D)을 소개받았다. 그는 신학교 건립을 요청했고, 온화교회는 열정적으로 응답했다. “기도하고 헌금하면 하나님이 하시겠지요. 그렇게만 믿었습니다.” 교회는 매월 50만 원으로 시작해 점차 후원 규모를 늘렸다. 2008년 이후에는 1억 원 가까이 지원하기도 했다. 신학교 건물 건축, 운영비, 교회당 건축까지 합쳐 약 10억 원에 달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그 재정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보니 현지인 리더의 사생활 문제, 재정 부정, 관리 실패가 연이어 드러났습니다. 결국 신학교는 무너졌죠.” 그는 “그때 선교의 본질을 몰랐다”며 회고했다. “열정만 있었지, 선교가 뭔지 몰랐어요. 사람을 세우지 않고 돈만 보냈죠. 그게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 “선교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현국 목사는 그 실패를 통해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는 겁니다.” 그는 한동안 인도 사역을 중단했다. 그러나 ‘왜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이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깊은 고민 끝에 선교의 본질을 다시 성경에서 찾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그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를 세웠지요. 그게 바로 선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는 ‘제자 삼는 제자’라는 원리를 붙잡았다. 그제야 그가 말하는 ‘사람을 세우는 선교’의 뿌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 피터 티우마이와의 만남 — “한 사람으로 다시 시작하다” 그런 전환의 시기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만나게 하셨다. 그가 바로 인도 나갈랜드 출신의 피터 티우마이(Peter Thiumai) 교수였다. ▲이현국 목사는 선교의 동역자 피터 티우마이(Peter Thiumai) 교수를 통해 선교자의 사람을 세우는 일을 사역하고 있다. “그는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40대 젊은 교수였습니다. 신앙이 진실하고, 제자 양육에 열정이 있었어요.” 피터 교수는 기존 신학교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자, 디마푸르 지역의 작은 월세집에서 학생들과 함께 합숙하며 복음 전도를 시작했다. 이 목사는 그에게 재정적 후원을 약속하는 대신, 단 하나의 원칙을 제시했다. “먼저 교회를 개척하고, 제자를 세워 자립하시오.” 그것이 멘토링의 출발점이었다. 피터는 곧 집을 떠나 한 교단의 수양관을 빌려 신학교를 열었고, 교회를 개척했다. 몇 년 후 그 교회는 스스로 자립했다. “그는 매년 충실하게 보고서를 보내왔고, 사역의 결실이 보였어요. 저는 매년 그를 만나 함께 멘토링을 했습니다.” ■ “제자를 세우는 신학교, 1,000개의 교회를 낳다” 10년이 지난 지금, 피터 티우마이의 신학교는 인도 동북부 6개 지역에 ‘제자훈련센터(DTC)’를 운영하며 1,000개 이상의 교회를 개척했다. “처음엔 믿기 어려웠죠. 하지만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다시 제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더군요. 바로 이것이 ‘제자 삼는 제자’의 선교였습니다.” 그는 “이 신학교는 단순한 학문 기관이 아니라, ‘제자를 세우는 제자를 양성하는 학교’”라며 “피터의 신실함과 헌신은 ‘사람 중심 선교’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 저서 『사람을 세우는 선교』 ― 선교의 본질로 돌아가다 ▲현지인 한 사람을 멘토링하여 10년만에 천교회를 세운 이야기를 수록한 책 이현국 목사는 이러한 여정과 깨달음을 담아 책 『사람을 세우는 선교』(쿰란출판사)를 펴냈다. 그는 책에서 선교의 실패와 성공을 가감 없이 기록했다. “하나님은 실패를 통해 본질을 가르치십니다. 건물을 세우는 선교에서 사람을 세우는 선교로 돌아올 때 비로소 복음의 생명이 살아납니다.” 책은 4부 구성으로 되어 있다. 1장은 “멘토링을 통한 제자 양육”을, 2장은 “피터 선교사의 제자 세우기”, 3장은 “제자의 제자가 세운 교회들”, 4장은 “신학교와 훈련센터 운영의 실제”를 다룬다. 그는 각 장에서 ‘사람 중심의 선교’가 어떻게 교회 자립과 선교 확장을 이끌어냈는지를 실제 사례로 보여준다. 책의 부제처럼, “선교는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사람을 통해 진행되며, 결국 사람이 남는다.” ■ “실패의 뿌리는 무지였다” 이 목사는 자신의 실패를 이렇게 분석했다. “그때 저는 선교를 잘 몰랐습니다. 후원금을 보내면, 현지인이 알아서 잘 하겠지 생각했죠. 하지만 그건 선교가 아니라 송금이었습니다.” 그는 “선교는 감정이 아니라 구조”라며 “감동으로 시작해도 체계적 훈련과 평가가 없다면 오래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선교사도, 현지인도, 후원 교회도 모두 ‘사람 세우기’ 원리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세우면 재정은 따라옵니다. 반대로 돈으로 사람을 세우려 하면, 결국 둘 다 잃습니다.” 그는 자립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선교의 목적은 현지의 자립입니다. 하지만 자립은 건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제자 삼는 제자가 세워질 때 자연스럽게 자립이 옵니다.” 그는 현지 교회들이 스스로 땅과 물질을 헌신하며 교회를 세우는 모습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현지 성도들이 제자로 성장하면 그들은 주체가 됩니다. 스스로 목회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죠. 그게 진짜 선교입니다.” ■ “한국 교회 선교, 이제 바뀌어야 한다” 그는 오늘날 한국 교회의 선교 패러다임에도 경종을 울린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보내는 선교’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세우는 선교’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는 ‘후원금 중심 구조’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교회가 돈만 보내면 선교사가 알아서 할 것이라 믿는 구조는 이제 끝내야 합니다. 그건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세우지 않으면 그 사역은 반드시 멈춥니다.” 그는 선교사를 의료인 훈련 과정에 비유했다. “의사는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야 전문의가 되잖아요.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훈련, 멘토링, 실제 사역 경험을 거쳐야 진짜 현장에서 설 수 있습니다.” ▲재정과 선물 중심에서 현지인 사람을 먼저 세우는 것을 우선하는 선교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이현국 목사 “선교사를 세우는 목회자, 교회를 세우는 선교사” 이것은 이 목사의 선교의 경험에서 오는 모토이다. 그는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을 넘어서 ‘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목사로 2~3년 함께 사역하며 전도와 제자 양육, 지역 섬김을 실제로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 개척 과정을 지켜보며 훈련받으면, 선교지에서도 동일한 원리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온화교회가 실제로 그렇게 해왔음을 밝혔다. “우리 교회 부목사님들 중 몇 분은 그렇게 훈련받고 국내 지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지금은 자립해서 잘하고 있죠. 저는 이걸 ‘국내 선교의 모델’이라 부릅니다.” ■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선교하지 말라” 이현국 목사는 선교의 시작점은 언제나 ‘사람’임을 강조한다. “돈이 있다고 바로 시작하면 안 됩니다. 먼저 준비된 사람을 찾으세요. 제자가 된 사람, 신실한 사람과 함께 하세요.”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준비가 안 된 사람을 세우면 나중에 두 배의 고통이 옵니다. 차라리 시간을 두고 기다리십시오. 준비된 한 사람이 천 명의 미숙한 사역자보다 낫습니다.” ■ “인도는 지금,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 이현국 목사는 여전히 인도를 향한 열정을 멈추지 않는다. “인도는 14억 인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중 기독교인은 3퍼센트도 안 돼요.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영혼이 너무 많습니다.” 그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전했다. “거리마다, 시장마다, 힌두 사원 주변마다 수많은 영혼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 일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선교는 재정보다 사람입니다. 사람을 세우면 재정은 따라옵니다. 사람을 세우지 않으면, 아무리 건물을 세워도 금세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선교의 핵심은 ‘사람을 세우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인도의 미종족전도의 현황 ■ 실패에서 성공으로, 그리고 다시 ‘사람으로’ 이현국 목사의 선교 이야기는 ‘실패에서 출발한 성공’이다. 그는 실패를 통해 진리를 배웠고, 진리를 통해 사람을 세웠으며, 그 사람이 다시 사람을 세우는 순환을 만들어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요약된다. “선교는 제자 삼는 제자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불타는 확신이 있었다. “교회가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미소 지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끝까지 사람을 세우는 선교를 하겠습니다. 그게 복음의 길이니까요.” <책 정보> 『사람을 세우는 선교』 | 저자: 이현국 | 출판: 쿰란출판사 | “선교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제자 삼는 제자를 세워라.” 실패에서 시작된 참된 선교의 길, 그리고 ‘사람 중심 복음’의 회복. 목회자와 선교사 모두에게 길잡이가 되는 실제적 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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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화로 싸우는 독립군”
▲문화를 통한 진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장이레 감독 이름에 담긴 사명, 신앙으로 열리다 장이레 감독의 본명은 장석봉이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서 널리 알려진 이름은 ‘장이레’다. 이 별명은 단순한 예명이 아니었다. 청년 시절 그를 만난 고(故) 하용조 목사가 “장은 짱이다”라는 유쾌한 격려와 함께 ‘이레’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하나님의 때”를 뜻하는 히브리어적 어감을 품은 이 이름은 장 감독의 이후 여정과 사명을 예고하는 듯했다. 불교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어린 시절 우연히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10살 무렵 처음 발을 들인 교회는 그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였다. 어린 장석봉에게 신앙은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지만, 이후 연예계 아역 활동을 하며 자연스레 문화예술의 현장을 경험했고, 신앙은 그의 내면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깊이는 30대 초반 한차례의 극적인 체험을 통해 열리게 된다. 그는 당시 폐 질환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밥 잘 먹어야지 무슨 금식이냐”라는 자신의 생각을 뒤엎고, 한 목사의 권유로 10일간의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는 금식 중 배고픔을 전혀 느끼지 않았고, 봉사와 설거지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10일이 지나 의사의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어떻게 이렇게 폐가 깨끗할 수 있느냐”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폐에 남아 있던 병의 흔적은 미미하게 사라져 있었다. 장 감독은 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가슴으로 신뢰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때부터 신앙은 그에게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생생한 삶의 실체가 되었다. 우연에서 시작된 역사 탐험 이후 그의 삶은 점차 “복음을 문화로 전하는 길”로 나아갔다. 요한계시록을 주제로 한 뮤지컬 제작, CGN TV 시절 ‘꿈꾸는 요셉’ 같은 작품을 통해 그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예술로 구현하는 일에 전념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는 6·25 전쟁 당시 ‘춘천대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춘천대첩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춘천역 앞에서 열린 승전기념 행사를 마주친 것이 시작이었다. 민·관·군·경이 하나 되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했다는 이야기는 처음엔 그에게 과장된 전설처럼 들렸다. 그는 “이게 과연 진짜일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고, 오히려 그 의심이 발걸음을 역사 속으로 깊이 이끌었다. 자료를 뒤지고 현장을 찾으며 만난 것은 놀라운 사실의 연속이었다. 공장 여공들이 주먹밥을 쥐고, 학도병과 대한청년들이 폭탄을 나르며, 민초들이 단 한 시간을 버텨 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던 실체적 기록들이 쏟아졌다. “이건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라는 확신이 생긴 그는 3일간 금식 기도를 드린 끝에,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이 역사를 먼저 증언하기로 결심했다. ▲2024년에 개봉되었던 <춘천대첩 72시간>다큐멘터리 영화 다큐멘터리 「춘천대첩」의 탄생 그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데 쏟아부은 시간은 6년. 처음엔 영화 「작전명 폭풍」을 구상했지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계획’처럼 다큐·영화·뮤지컬 세 가지 형식으로 역사적 진실을 전하겠다는 비전을 품게 됐다. 그는 100명이 넘는 증언자를 만나며 사실 고증을 거듭했고, 국회·CGV·롯데시네마 등에서 시사회를 열며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하지만 완성까지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계엄 선포로 인해 극장 상영이 갑자기 중단됐고,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려는 진보 진영의 조직적 방해가 이어졌다. 동시에 보수 진영의 무관심은 그를 더욱 깊은 실망에 빠뜨렸다. 춘천시의 지원도 끝내 받지 못한 그는 결국 “집을 팔았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좌우 진영 모두에게 외면받았지만, 그는 “나는 좌우를 떠나 사실을 밝히려 한다”는 신념으로 버텼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그의 열망은 신앙적 확신과 맞닿아 있었다. “장이레 감독이 역사와 문화에 천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예술적 취향이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무력보다 더 무서운 방식으로, 문화 속에 사상을 스며들게 한다”고 경고한다.” 문화는 곧 전쟁터 장이레 감독이 역사와 문화에 천착하는 이유는 단순한 예술적 취향이 아니다. 그는 공산주의가 “무력보다 더 무서운 방식으로, 문화 속에 사상을 스며들게 한다”고 경고한다. 히틀러, 김일성, 소련이 문화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온 역사를 예로 들며, “우리는 너무 모른다. 문화가 곧 전쟁의 최전선”이라고 강조했다. 그에게 춘천대첩의 의미는 단순히 과거의 한 전투가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전, 민초들이 보여준 결집과 희생은 대한민국 건국의 분수령이었다. “역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그는 춘천대첩이 낙동강 방어선과 UN군의 개입,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존속을 가능케 한 결정적 사건임을 대중에게 알리고자 했다. 그의 시각에서, 그날 나라를 지킨 진정한 영웅은 위정자가 아니라 민초들이었다. ▲역사적 인식은 물론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르게 세워야 국가의 미래가 밝다고 말하는 장이레 감독 진보의 공격, 보수의 안일 하지만 그는 좌우 어느 쪽에서도 완전히 환영받지 못했다. 진보 진영은 그의 작업을 방해하거나 왜곡하려 했고, 보수 진영 역시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다. “우리 진영은 돈을 투자하지 않고, 진보는 (자신의 입맛에 낮게) 조금만 고치라며 미혹한다”는 그의 말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이 정작 문화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진보 진영의 치밀한 문화 전략에 밀리고 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는 한국 사회가 “겉으로는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공산주의적 사고가 깊이 침투했다”고 진단한다.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거짓과 카르텔적 구조, 그리고 교회마저도 세속적 권력 다툼에 휩쓸린 현실을 그는 성경적 관점에서 통렬히 비판했다. 장 감독은 “공산주의의 첫 번째 작전은 거짓말”이라며, 진영 논리에 갇혀 스스로를 속이는 시대를 향해 “회개와 고백 없이는 진정한 자유도 없다”고 경고했다. 다큐에서 영화, 그리고 뮤지컬로 「춘천대첩」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장 감독은 현재 영화 「작전명 폭풍」을 준비하고 있다. 북한이 6·25 남침 작전명을 ‘폭풍’으로 명명했던 것에서 따온 이 제목은, 그가 3일 금식기도 중에 받은 영감을 담고 있다. 그는 홍천전투까지 포함해 “한국전쟁의 전모”를 영화로 완결 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뮤지컬 제작을 통해 젊은 세대가 역사적 진실을 더 깊이 체험하도록 하는 꿈도 품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제작비 조달을 위해 국내외 투자자를 찾고 있지만, 그는 “나는 월세에 살며 집을 팔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열정은 단순히 흥행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운다”는 그의 신앙적 사명감이 이 모든 노력을 지탱한다. ▲춘천대첩을 영화와 뮤지컬로 만들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장 감독은 재정적인 투자가 필요하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다고 밝혔다. 신앙이 삶을 이끌다 장이레 감독에게 작품 활동은 곧 신앙의 연장이다. 그는 “예수님이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치셨다”고 말한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믿을 자유와 믿지 않을 자유”를 발견하며, 이를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뿌리로 본다. 정치적 좌우를 넘어, 인간의 죄성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것이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복음이 단순한 종교적 교리나 사상이 아니라, 역사를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힘임을 믿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다큐나 공연을 넘어, ‘문화 독립 운동’이라는 이름의 영적 전쟁으로 자리 잡는다. 장 감독이 말하는 “문화 독립군”이란 표현에는, 복음을 드러내는 문화가 곧 시대와 사상을 변혁하는 힘이라는 신념이 담겨 있다. “문화는 전쟁터다. 우리는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민초들이 나라를 지켰다” – 후대를 향한 메시지 그가 「춘천대첩」을 통해 가장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나라를 지킨 것은 위정자가 아니라 평범한 민초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민초들이야말로 진정한 주권자이며, 그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자유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매년 이들을 위한 진정한 예배와 감사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 감독은 이 메시지를 단순한 과거의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젊은 세대가 직접 느끼고 고민하도록 만들고자 한다. 그는 학교와 교회에서 자비를 들여 상영회를 열며 학생들과 교인들이 “공산주의의 위협과 자유의 가치를 뼈아프게 깨닫는다”고 증언한다. “우리가 역사를 잊으면 미래는 없다”는 그의 호소는 단순한 경고를 넘어, 다음 세대가 스스로의 자유를 지켜내야 한다는 간절한 부탁이다. 장이레 감독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이자 신앙의 증언이다. 어린 시절 불교 가정에서 출발해, 금식 기도를 통해 신앙의 깊이에 들어서고, 역사 속 숨겨진 진실을 문화로 드러내기까지—그의 여정은 단순히 한 감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도전이자 초대다. ▲ 정치적 좌우를 넘어, 인간의 죄성과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것이 장 이레 감독의 작품 세계의 중심이다. 그는 말한다. “문화는 전쟁터다. 우리는 문화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한다.” 그의 발걸음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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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부자 되기" - 철강공학자가 말하는 신앙과 투자의 품위
주식회사의 시대, 우리는 왜 '주주가 되는 길'을 외면하는가? "이상하게도 나는 기업의 R&D를 총괄하며 수많은 자문과 보고를 받았으면서도, 정작 자본주의의 꽃인 '주식회사'의 혜택을 절반만 누려왔다." ▲ <천천히 부자되기>저자 이덕락 집사 포스코에서 부사장과 기술연구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포스코 고문으로 일하는 이덕락 저자(남서울은혜교회 안수집사)의 솔직한 고백이다. 은퇴를 바라보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평생 월급을 받는 '근로자'로만 살았지, 기업의 성과를 함께 나누는 '주주'로는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단순한 개인적 반성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포항공대(POSTECH)의 교수·교직원·대학원생을 시작으로 인근 연구소·대학·기업을 다니며 '천천히 부자 되기'의 핵심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알아야 할 상식"이라는 확신 끝에 강의안을 책으로 묶었다. 제목은 단호하다. 《천천히 부자 되기》. 철강 분야에서 평생을 보낸 공학자가 왜 갑자기 투자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것이 단순한 재테크 조언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오히려 그는 신앙과 일, 그리고 돈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제시하고 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탐욕의 회로를 끊는 투자 원칙 이덕락의 출발점은 역설적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성경의 명령을 투자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그는 답을 '방식의 전환'에서 찾는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택하는 길—개별종목 선택과 단기매매—은 변동성이 커서 마음을 빼앗기기 쉽고, 일상과 직무를 흔든다"고 그는 말한다. 모델을 맞추려는 강박, 호가창과 차트를 붙드는 불안, 저점·고점에 대한 집착이 신자의 내면을 소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반면 시장 전체를 사는 장기·분산·적립은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그는 이를 "탐욕의 회로를 끊는 신앙적 기율"이라고 표현한다. 투자 방식 자체가 신앙적 삶을 도울 수 있다는 발상이다. 그의 투자 원칙은 명확하다: - 무엇을 살 것인가? 개별종목이 아니라 주가지수 추종 ETF(국내·미국·글로벌 시장). 즉, '전체 경제의 흐름'에 참여하라. -언제 살 것인가? 타이밍을 재지 말고 매달 급여일에 10~30%를 기계적으로 적립하라(정액·정기 매수). - 얼마나 오래? 평생. 최소 20~30년의 복리를 전제로 한다. - 어떻게 흔들림을 견딜 것인가? 시세 확인을 습관에서 지워라. "처음엔 6개월쯤 궁금하지만 곧 일상이 된다." 그는 강연에서 미국 지수의 장기수익률 같은 수치를 예시로 들곤 하지만, 더 강조하는 것은 숫자 자체가 아니라 리듬이다. "복리는 시간을 친구로 삼는 훈련이다." '빨리'가 아니라 '꾸준히'가 핵심이라는 뜻이다. ▣ 워런 버핏의 지혜, 신자의 생활 기율 "아무도 천천히 부자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그 유혹을 이기는 법 이덕락은 워런 버핏의 유명한 일화를 자주 인용한다. "사람들이 내 방식대로 투자하지 않는 이유? 아무도 천천히 부자 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단순한 투자 격언이 아니라, 현대인의 심리를 꿰뚫는 통찰이다. 특히 그는 '빨리'의 유혹이 신자에게 더욱 위험하다고 본다. 빠른 시세차익과 일확천금의 서사는 탐욕을 정당화하고, 결국 돈에 마음을 빼앗기는 구조를 강화한다. 반대로 ETF·장기·적립은 '느림'을 제도화하여 마음을 지켜 준다. 그는 이를 "신앙의 절제와 금융의 규율을 결합한 생활 기율"이라 부른다. "주가는 우리 통제 밖에 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매수의 규칙성과 기간뿐이다. 신앙생활이 매일의 기도와 예배 루틴에 기대듯, 재정도 규칙과 기간에 기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투자법은 단순한 재테크를 넘어선다. 그것은 일종의 '영성 수련'이다. 욕망을 통제하고, 시간을 존중하며, 규칙을 통해 자유를 얻는 훈련이다. 마치 수도사가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듯,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금액을 투자하는 것이다. ▣ '코인'이 아닌 '회사'에 투자하라 "밤새 시세가 출렁이면 삶이 무너진다" 그는 암호화폐 투자에 대해서는 명확한 선을 긋는다. 한 증권사 지점장의 경험담을 전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분이 코인에 투자했더니 3일을 잠을 못 잤다고 하더군요." 이덕락의 평가는 간명하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회사'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본질적이다. 회사는 생산·연구·고용을 통해 사회와 상호작용한다. 그들은 제품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며, 사람을 고용하고, 세금을 납부한다. 신자가 장기 주주로 남을 때 기업은 안정적 자본으로 성장하고, 주주는 그 과실을 나눈다. "내가 속한 소사이어티의 성장에 동참하면서 과실을 나누는 선순환"—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투자 윤리다. 반면 암호화폐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생산적 활동과는 거리가 멀고, 순전히 투기적 성격이 강하다. 무엇보다 변동성이 극심해서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밤새 시세가 출렁이면 삶이 무너집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데, 코인 차트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은퇴자의 포트폴리오: '가격'보다 '현금흐름' 배당 위주, 생활비의 '두 번째 월급'을 만들라 은퇴가 가까워질수록 현금흐름의 중요성이 커진다. 이덕락은 자신의 사례를 솔직하게 밝힌다. 고문 재직의 마지막 해를 지나며 매달 들어오는 급여가 끊길 것을 알기에, 배당이 꾸준한 종목·ETF의 비중을 높여 국민연금 + 배당금으로 생활비 체계를 설계 중이라고 한다. 그는 한때 연금형 상품만으로 노후를 설계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20년 받으면 원금이 사라지는 구조보다, 배당으로 현금흐름을 만들면서 원금을 보전하는 구조가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는 은퇴 설계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젊을 때는 주가 상승에 초점을 맞출 수 있지만, 은퇴 후에는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더 중요하다. 주가가 오르내리는 것보다 매달 일정한 배당금이 들어오는 것이 실질적으로 더 도움이 된다. "은퇴자의 핵심은 가격 변동이 아니라 현금흐름의 안정"이라는 그의 조언은 많은 예비 은퇴자들에게 실용적인 지침이 될 것이다. 특히 그는 국내 배당주뿐만 아니라 해외 배당 ETF도 적극 활용할 것을 권한다. 미국의 우량 기업들은 수십 년간 꾸준히 배당을 지급해왔고, 일부는 매년 배당을 늘려왔다. 이런 기업들에 분산 투자하면 환율 변동 위험은 있지만,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달러 배당금을 받을 수 있다. ▲돈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라 지혜롭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덕락 저자 ▣ '몰빵'의 심리학을 경계하라 목돈의 일시투자보다, '시간에 나눠 사기' 이덕락은 "목돈이 생겼을 때 일시에 투입하는 몰빵 투자는 심리적으로 버티기 어렵다"고 강조한다. 고점에서 사면 회복까지 몇 년을 견뎌야 하고, 그 시간은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이는 많은 투자자들이 겪는 전형적인 실수다. 퇴직금이나 상속받은 돈, 사업 매각 대금 등 목돈이 생기면 '한 번에' 투자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타이밍 리스크를 극대화한다. 대안은 간단하다. "목돈을 열 등분해 수개월~1년에 걸쳐 분할 매수하라." 그는 이 원칙을 자신에게도 엄격히 적용한다. "타이밍은 완전히 불가능합니다. 타이밍과 종목 선택이라는 불가능한 숙제를 포기하는 순간, 투자는 삶을 방해하지 않는 일상이 됩니다." 실제로 그는 강의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1억 원의 목돈이 생겼다면, 한 번에 투자하지 말고 매월 1천만 원씩 10개월에 걸쳐 투자하라는 것이다. 혹은 더 보수적으로 2천만 원씩 5개월, 아니면 5천만 원씩 2개월에 나눠서 투자하는 방법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한 번에'라는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죠." ▣ 직장에서의 '승리' : 일의 탁월함이 신자의 명함 "존경받는 동료가 먼저다. 돈 이야기는 그 다음이다" 흥미롭게도 이덕락의 책은 앞부분에 직장 생활의 원칙을 배치한다. 투자 이야기보다 일의 품위를 먼저 다루는 것이다. 그는 카이스트 김영길 총장을 멘토로 떠올리며 "자기 분야에서 탁월함을 이루어 타인의 신뢰와 존경을 얻는 것"을 신자의 첫 소명으로 제시한다. "믿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회식이나 소통에서 스스로 담을 쌓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존경받는 동료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한국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직격하는 조언이다. 일부 신자들은 '세상과 구별된다'는 명목 하에 동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 업무에서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덕락의 생각은 다르다. "신앙은 일을 도피하는 수단이 아니라, 일을 더 잘하게 만드는 동력이어야 합니다." 투자 원칙 역시 이 맥락에서 제시된다. 개별종목 단타는 업무 집중을 해치고 '월급 루팡'이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반면 지수·장기·적립은 직무의 탁월함을 보존하면서 재정을 꾸리는 길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차트부터 보고, 점심시간에 매매하고, 퇴근 전에 또 확인하면서 어떻게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모습을 동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그의 투자 철학은 결국 '일 잘하는 신자'가 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투자 때문에 일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 교회와 기금 운용: 쉬쉬할 문제가 아니다 "이미 대형 교단은 ETF로 연금을 운용한다—공개적 토론을" 취재와 강의를 다니다 보니, 교회 안에는 여전히 투자를 꺼리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이덕락은 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힌다. "진리는 변하지 않지만, 제도와 문화는 변합니다. 우리는 민주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그 핵심 제도는 주식회사입니다. 물속의 물고기가 물을 외면할 수는 없어요." 실제로 이미 대형 교단들은 목회자 연금을 주식 등에 투자해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교회 내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는 특히 목회자 연금과 같은 제도적 재정은 공개적 토론과 원칙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ETF가 수익이 적다는 통념은 오해입니다. 복리 10~15%의 장기 성과가 기금 운용의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직접투자를 통한 고수익 집착이 아니라, 규칙·분산·기간으로 제도를 설계하는 일이다. 교회 기금을 특정 부동산이나 개별 종목에 몰빵하기보다는, 분산된 지수 상품을 통해 안정적으로 운용하자는 제안이다. "교회도 하나의 조직입니다. 미래의 목회자들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합리적인 재정 운용이 필요합니다. 이를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특히 그는 젊은 목회자들의 현실을 언급한다. "요즘 젊은 목회자들은 학자금 대출도 있고, 집값도 비싸고, 아이 교육비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청빈'만 강조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에요." 주식을 비판적인 시각이 아니라 삶을 자유롭게 하는데 사용하면 된자는 저자 ▣ FIRE 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돈이 많아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삶은 허물어졌다"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운동에 대해서도 그는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그가 들려준 지인의 사례는 강렬하다.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벌어 조기 은퇴했으나, 일상의 구조가 무너지고 소비와 방황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경제적 자유가 곧 삶의 의미인가요?" 그의 대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먹고사는 걱정이 없어도, 보람과 공동선에 기여하는 일이 없으면 삶은 쉽게 무너집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자아실현을 하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의 '자유'는 일에서 도망치는 자유가 아니라, 탐욕과 불안으로부터의 자유다. 그 자유는 규칙적인 투자와 성실한 직무가 함께 만든다. "진정한 자유는 일하지 않는 자유가 아니라,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아니라,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투자법은 FIRE와는 방향이 다르다. 빨리 많은 돈을 벌어서 일을 그만두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돈에 대한 걱정 없이 의미 있는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 그리스도인과 부(富): '깨끗한 부자'의 윤리 "부 자체는 죄가 아니다—문제는 방식과 마음" 이덕락은 "아브라함도 부자였다"는 성경적 상식을 조용히 상기한다. 부의 문제는 존재론이 아니라 윤리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는 김동호 목사의 표현을 빌려 '깨끗한 부자'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깨끗한 부자'의 윤리는 세 가지 층위로 나뉜다: 방식의 윤리 : 투기는 배제하고,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회사에 장기 참여한다. 이는 돈을 버는 방법 자체에 관한 것이다. 남의 손실을 전제로 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포지티브섬 게임에 참여하자는 것이다. 주식 투자가 도박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의 윤리 : 탐욕을 부채질하는 단타·레버리지·코인에 거리를 둔다. 이는 투자하는 과정에서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투자라도 마음을 빼앗기면 신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투자 방식 자체가 마음의 평정을 해치지 않도록 설계해야 한다. 사용의 윤리 : 나중에 남에게 짐이 되지 않는 재정, 이웃의 짐을 덜어 주는 자원을 준비한다. 이는 모은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자녀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나아가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을 갖추자는 것이다. 그는 "투자는 신앙의 본질 문제가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다만 한다면 방식이 신앙을 도와야 합니다"라고 못 박는다.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투자 자체를 신앙의 필수 요소로 만들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금기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다면 올바른 방식으로, 신앙적 가치와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하자는 것이다. ▣ 강의 현장에서 들려온 실제 변화들 "월급의 10~30%를 기계적으로"—대학원생·교수들의 반응 그의 강의를 들은 대학원생들은 "장래가 걱정되던 마음이 정리됐다"며 소액 적립투자를 시작했다고 한다. 월 20~30만 원이지만 꾸준히 시작한 것이다. 교수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무엇을 사야 하나, 언제 사야 하나'의 고민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한 포스텍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에는 주식 뉴스가 나올 때마다 신경이 쓰였는데, 이제는 그냥 넘어가게 됩니다. 어차피 매달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금액만 투자하면 되니까요." 실제로 이것이 핵심이다. 투자 결정의 부담을 없애는 것이다. 매일 매일 '사야 하나, 팔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원칙을 정하면 그 이후에는 기계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다. 물론 부정적 반응도 있다. 개별종목 발굴로 높은 수익을 노리는 이들에게 그의 메시지는 "단조롭고 재미없어" 보인다. 하지만 성과를 비교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단조롭지만 지속 가능한 길이 결국 삶을 지킵니다." 그의 확신이다. 재미는 없을지 몰라도, 생활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 신앙·일·투자의 삼중주 '느림'의 미학, '복리'의 언어, '품위'의 직업윤리 이덕락이 말하는 '천천히 부자 되기'는 단순한 재정 테크닉을 넘어 삶의 태도다. 그의 철학은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신앙의 축 : 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규칙과 절제로 탐욕의 회로를 끊는다. 이는 투자를 영성 훈련의 일부로 보는 관점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기도를 하듯,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투자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투 자 : 시장 전체·장기·적립·분할로 삶을 안정시키고, 은퇴에는 현금흐름(배당)을 더한다. 그는 말한다. “빠름의 욕망을 이기는 길은, 느림을 습관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매달 정해진 날, 정해진 비율로, 정해진 상품을, 평생 사는 것. 신앙의 일상처럼.” 철강 연구의 오랜 시간 끝에, 그는 이제 사람의 마음과 돈의 시간을 연구한다. 그 연구의 결론은 간명하다. “천천히”는 재정의 전략이자, 신앙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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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들려준 소리, 믿음으로 빚어낸 빛의 기록
“꽃은 어두운 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언제나 빛을 향해 자라죠. 마침내 향기로운 꽃잎을 열고 세상을 향기로 채우는 것처럼요.” 한정희 작가의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곧 그의 삶이며, 그림이며, 신앙의 고백이자, 회복을 향한 내밀한 서사이다. 2025년 봄, 뉴욕과 스톡홀름을 오가며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온 서양화가 한정희가 8년 만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연다. 〈자연의 소리 – 전개〉, 경기도 안산 ‘꿈의 교회’ 내 더갤러리에서 4월 3일부터 13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는 단지 작가의 귀국전이 아니다. 이것은 오랜 시간 예술과 신앙, 봉사와 회복의 길을 걸어온 작가의 진실된 내면의 기록이자, 관람객과 영적으로 호흡하고자 하는 그의 가장 깊은 기도에 가깝다. ■예술은 그에게 신앙의 통로 한정희 작가는 1953년생, 화가인 한봉덕 화백의 딸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예술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고교 시절 첫 개인전을 열며 미술계의 이목을 끈 그는 24살이던 1978년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유학을 떠나며 본격적인 작가의 삶을 시작했다. 그의 예술 여정은 이후 프랑스 파리, 미국 뉴욕, 스웨덴 스톡홀름 등 세계 각지에서 100회가 넘는 전시를 이어가며 활발히 펼쳐졌다. 그러나 그에게 예술은 단순한 작업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을 체현하는 삶의 도구이자, 이웃과 연결되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봄의 환희> 한정희 작가는 모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삶의 시련과 함께 깊어졌다. 결혼과 이혼, 홀로 아들을 키우는 고단한 시간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고백한다. “‘내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듣는데, 그 순간 마음속에 울림이 왔어요. '너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죠.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이웃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진리를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후, 자신의 그림이 하나님과의 만남과 깨달음을 고백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랐고, 자연을 주제로 작품을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자연은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누가 만들었는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죠. 저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소개하고 싶었어요.” 한정희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인사동 인사이트 전시관 풍경 ■한 시대의 그림자 속에서 ‘색’을 금식하다 그의 삶과 예술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뉴욕에 머물던 시절, 그는 도시에 만연한 마약과 음란, 물질주의의 이면을 뼈저리게 목격했다. 그때 만난 한국계 마약 중독 청소년들, 고통과 방황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해 그는 예술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색을 금식'했다. “10년 넘게 흑백으로만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이들의 어둠 속 고통을 더 진실하게 담고 싶었거든요.” 그는 그렇게 ‘빛’을 내려놓았다. 그가 말하는 흑백은 단지 색상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과 절망의 실체였다. 그러나 이 깊은 동참의 시간은 그의 몸과 정신을 점점 병들게 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산토리니에 갔을 때였습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바다를 마주하며 마음속으로 외쳤죠. ‘나는 다시 색을 그려야 한다. 이것이 진리다.’” 그 순간부터 그의 작품은 부활의 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고통에서 소생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흑백에서 다시 원색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은 마치 십자가를 지나 부활로 향하는 신앙의 순례길 같았다. ■ 그림, 그 이상의 실천… 예술은 '살아있는 사랑' 한정희 작가의 삶은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실천가로서도 빛난다. 그는 스웨덴 유학 시절, 8000여 명의 한국 입양아를 위해 15년간 한글학교에서 봉사했고, 미국 LA에서는 마약에 빠진 청소년들을 위한 사역에 헌신했다. 그는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직접 체험했다”며, “단순히 물질적 지원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이 회복되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의 길”이라고 말한다. 작품 활동의 수익도 봉사와 선교로 이어졌다. 그에게 예술은 물질이 아니라 도구였고, 명성이 아니라 통로였다. “예술은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 세계가 그대로 드러나죠. 그 세계가 진실하고 따뜻해야 관람자에게도 위로가 됩니다.” 그는 지금도 뉴욕에서 권사로 활동하며, 신앙과 예술을 결합한 나눔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림이 곧 예배이고, 전시가 곧 설교이며, 색채 하나하나가 곧 기도이자 사랑인 셈이다. ■‘자연의 소리’, 그리고 ‘전개’ 이번 전시 〈자연의 소리 – 전개〉는 그의 지난 시간들을 아우르는 예술적 신앙 여정의 연속선상에 있다. ‘전개’라는 부제는 그가 경험한 자연 속 하나님의 메시지를, 화폭 위에 차곡차곡 펼쳐나간다는 뜻이 담겨 있다. 한정희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추운 겨울을 이겨낸 꽃처럼, 고난을 견디고 믿음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삶의 기쁨”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한다. 전시작들 속 자연은 생명력 그 자체로 피어오른다. 바람 속에서 꺾이지 않는 가지들, 눈 속에서도 피어나는 꽃잎들, 광야에서 솟아오르는 푸른 싹은 모두 그의 내면에서 피어난 영혼의 풍경이다. 작품의 색채 또한 의미가 뚜렷하다. 붉은색은 성령의 열매, 노란색은 예수의 영광, 파란색은 평안, 하얀색은 정결, 검은색은 고난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전하는 것은 단순한 신학적 상징을 넘어선다. 그것은 결국 ‘감사’와 ‘기쁨’이라는 깊은 정서, 다시 살아갈 힘을 관람자에게 전하는 조용한 감동이다. ■ 귀향, 그리고 새봄처럼 다시 피어난 이야기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익숙하지만, 제 마음속 밑바닥엔 언제나 한국이 있었습니다. 이 땅의 분들에게 저의 그림이 위안이 되었으면 했습니다.” 한정희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땅에 '신앙적 감성'을 뿌리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인의 정서를 품고, 다시금 이곳의 공기와 눈빛을 마주하며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되묻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는 젊은 작가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한다. “진실한 자기 색깔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술은 결국 자신을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가 필요하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정희 작가의 삶과 그림은 이 성경 구절을 증명하는 여정이었다. 그는 진리를 좇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림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고,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했다. 그의 이번 전시는 단순한 ‘작품 전시’가 아니라, 삶의 고백이고, 신앙의 찬송이며, 사랑의 전도다. 그는 말한다. “제가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누워 있고 싶진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나누며 살다 가고 싶습니다.” 그 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안산의 더갤러리 한편에서 새처럼 날아와, 조용히 우리 가슴 어딘가에 내려앉고 있을 것이다. [전시 정보] 전시명: 자연의 소리 – 전개 기 간: 2025년 4월 3일 ~ 13일 장 소: 경기도 안산시 꿈의교회 ‘더 갤러리’ 작 가: 서양화가 한정희 특 징: 자연을 주제로 한 영적 회복, 동서양 융합의 색채 표현, 신앙과 예술의 조화
미술/음악/영화/연극/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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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영적 기류 바꾼다... 성극 ‘리턴’, 3년 연속 공연 대장정 돌입
▲출범식 후에 기념사진 대학로 기독교 성극의 자존심, 연극 ‘리턴(Return)’이 2026년 시즌의 화려한 시작 알렸다. 연극 ‘리턴’ 제작팀은 11일 오전 일산광림교회에서 출범식을 갖고, 오는 4월부터 시작될 8개월간의 장기 공연 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행사에는 제작자인 김성한 전도사(YDP하나교회 담임)와 제작·후원을 맡은 코리아 투게더 대표 박동찬 목사(일산광림교회), 그리고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2026년 시즌 배우들이 참석했다. ▲문화를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김성한 전도사 김성한 전도사 “수익 앞둔 현실의 벽,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넘었다” 제작과 극본을 맡은 김성한 전도사는 인사말을 통해 문화 현장의 치열함과 제작 과정의 비화를 가감 없이 전했다. 김 전도사는 “문화의 힘은 사람의 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든 뒤 저변에서부터 가치관을 바꿔놓는 무서운 요소”라며, “사단이 문화를 도구로 쓰듯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 도구를 사용해 하나님 나라를 되찾아올 사명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사실 대학로에서 1년 넘게 무대를 지키는 것은 수익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라 2025년 마지막 공연 때는 이제 그만두려 마음을 정리했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날 박동찬 목사님이 공연을 보러 오셨고, ‘더 해야 한다’는 격려 한마디에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는 확신을 얻었다”며 “2026년 멤버들과 함께 대학로의 영적 기류를 바꾸기 위해 다시 사명감을 갖고 무대에 들어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빛은 반드시 어둠을 이기든, 교회는 문화를 통해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밝힌 박동찬 목사 박동찬 목사 “세상의 밤 문화, 빛의 자녀들이 기독교 방식으로 이겨내야” 이어 설교를 맡은 박동찬 목사는 문화 사역의 중요성과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 여섯 문장의 핵심 메시지를 전했다. 박 목사는 “오늘날 세상의 밤 문화가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 빛의 자녀들이 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고 진단하며, “하지만 캄캄한 밤하늘 위 비행기에서도 담뱃불 같은 작은 빛이 보이듯 어둠 속에서 빛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독려했다. 또한 “우리는 세상적인 힘을 가져야 이길 수 있다는 오해를 버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방식대로 세상과 싸워야 한다”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기력한 패배자처럼 보였으나 결국 그 사랑으로 전 세계를 바꾼 것처럼 우리도 거룩함과 사랑을 무기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세상의 계략 앞에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시며 비웃으신다는 시편의 말씀처럼,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며 “대학로에서 여러분이 서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될 것”이라고 축복했다. ▲출범식에서는 뮤자콜터닝포인트팀의 시연공연도 가졌다. 공연모습 3년 연속 공연의 기적...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던지는 경종 연극 ‘리턴’은 2024년과 2025년에 이어 올해까지 3년 연속 대학로 무대에 오른다. 이는 기독교 성극이 상업 연극의 메카인 대학로에서 거둔 보기 드문 성과다. 이번 시즌부터는 사단법인 ‘코리아 투게더’가 제작과 후원에 본격 참여하며 기독교 문화의 지평을 일반 대중으로까지 넓힌다는 계획이다. 이번 공연은 대학로 ‘시윤아트홀’에서 2026년 4월 2일부터 12월 31일까지 진행된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주 1회 정기 공연을 통해 8개월간의 대장정을 이어갈 예정이다. [공연 개요] 공연명: 연극 ‘리턴 (Return)’ 공연기간: 2026년 4월 2일 ~ 12월 31일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공연장소: 대학로 시윤아트홀 제작/후원: 코리아 투게더, YDP컬쳐베이스 문의: YDP하나교회(02-2636-7447) 또는 김성한 전도사(010-3136-4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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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하나 드실래요?
時의 초대/이원좌 얼마 전 아파트 옆동에 사시는 강 이모님이 카톡을 넣었다 오후에 차 한잔 하면 좋겠다고~ 장소가 어디가 좋겠냐고 하시길레 스타벅스에서 보자했더니 메가커피가 어떠냐 하신다 장소가 어둡다고 했더니 그러면 뚜레쥬르빵집으로 하자고 또 바꾼다 아! 커피값에 신경쓰시는구나 하고 커피는 제가 살께요 ~ 했다 몇년전 아파트 노인정에서 요청이 와서 회계를 봐준 적이 있다 회계라 봐야 장본 거 영수증 확인하고 잔고 정리해주는 게 전부인데 외부인이 확인해야 하는 란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노인정회장과 회원인 강이모님이 사소한 일때문에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노인정회장이 몸이 아프게 되었는데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앓게 되어 노회장을 모시고 병원을 다니게 된거다 소식을 들은 강이모님은 아픈 거 같지 않은데 뭘그렇게 친절하게 하냐면서 나에게까지 언짢은 표현을 했다 그 때 강이모님은 연세든 분 같지 않게 한 번 말한 것을 누그러뜨리는 거 없이 강경하게 난처한 상황으로 몰아갔었다 그렇게 뜸하게 시간이 가고 해가 바뀌고 이년 가까이 지났을 때 연락이 온 것이다 길 건너 커피와 빵을 함께 파는 뚜레쥬르빵집에 들어가니 안쪽의 자리에서 손짓하는 강이모와 마주하게 되었다 수척해진 얼굴에 그래도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는 내 손을 잡으며 반가워 한다 무슨 일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얼굴이나 한 번 보고싶었다고 하면서 그렇게 앙숙이었던 노인회장에게도 차마 못할짓을 했다고 후회를 하며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고 하는 거다 이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나? 그렇게 못잡아먹어서 난리이더니 해가 지나가려하니 아쉬움이 생긴건가? 속으로 혼잣말을 하게 되었는데 ᆢ 몇달 전에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고 전하며 눈시울을 적신다 팔십이 되는 적지않은 나이에도 그렇게 꼿꼿하게 자기주장을 내던 분이 가족이 쓰러지니 이렇게 심신이 무너지는가 보다 노인회장을 만나 진정으로 사과하고 싶다고 제차 이야기를 하는 거 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데 문제는 사과받아야 할 노인회장이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나올 수가 없다 이제는 만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거 그 좋은 시간을 억하심정으로 보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래도 늦게나마 사과를 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주위에는 잘못을 하고도 시간에 맡기고 뭉개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지않은가 저녁시간이 되어 식사를 사드리고 다음에 연락을 하기로 하고 집에 왔는데 문 앞에 뭔가 놓여져 있다 견과류 다과가 들어 있는 쇼핑백 메모에는 안녕하세요 옆집 501호입니다 ):: 올한 해 이래저래 마음 많이 써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남은 연말 평안하게 보내시고 2026년 더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되세요 ps 저희집 아기는 어제부터 조금씩 걷기 시작했습니다 ???? 돌이 언제지? 옷이라도 한 벌 ㅋ 지난 해 이사간 아기는 잘 자라고 있을까? 에이~ 눈에보이는 아기한테나 마음써야겠다 이사간 그곳에서 좋은 이웃을 만났겠지ㅎ 나의 모토는 손끝에 닿는 인연들과 잘지내는 거다 그래서 그런가? 외로움이 적다 정말 안된사람 생각하면 나의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기현상이다 이제 두 밤이지나면 올해도 안녕이다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말로 하는 사과 한 알씩 돌리는 거다 살아가면서 느낀다 사과한다는 것은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 효과는 가성비가 대단하다고 할 수있다 진정한 사과는 문제를 회복시키고 그의 마음을 다 갖을 수가 있어 남는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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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재능 모여… ‘리틀산타 재능마켓’ 12월 13일 개최
아이들이 가진 작은 재능이 한데 모여 누군가의 하루를 살며시 밝히는 특별한 기부 문화가 펼쳐진다. 패브릭토리는 오는 13일 서울 서대문구 원유로프로젝트 북가좌점에서 ‘제1회 리틀산타 재능마켓’을 개최한다. 리틀산타 재능마켓은 아이들이 직접 ‘리틀산타’가 되어 그림·음악·응원·마사지·디저트·네일아트·스포츠 등 자신만의 재능을 ‘선물’로 시민들에게 나누는 행사다. 전국에서 모인 70명의 키즈셀러가 참여하며, 대관비를 제외한 모든 수익금은 소아암을 이겨내는 어린이들을 위해 전액 기부된다. 이번 행사는 한 가족의 조용한 마음 나눔에서 출발해 전국의 아이들이 참여하는 사회적 프로젝트로 성장한 ‘리틀산타’가 처음으로 오프라인 마켓 형태로 구현되는 자리다. 패브릭토리는 “아이들이 받은 선물을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며 기쁨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행사는 1부(11:00~13:00), 2부(15:00~17:00)로 나뉘어 운영되며, 관람객은 1만원 티켓으로 리틀산타 5명의 재능 선물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행사 공간은 1·2층 전체를 활용해 응원존, 마사지존, 네일아트존, 플라워존, 크리스마스존, 디저트가게, 다방존, 과일가게, 스포츠존 등 총 9개 체험 존(zone)으로 구성된다. 아이들만에 순수함이 담긴 창작물과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정성이 이번 마켓의 중심이 된다. 패브릭토리는 이번 재능마켓을 단순한 플리마켓이 아닌, 알파세대가 오프라인에서 세대와 세대를 만나는 새로운 지역문화 실험으로 바라보고 있다. 온라인 세대의 아이들이 청년·어른과 자연스럽게 섞이며 만들어낼 작은 교류의 장면들이 행사 곳곳에서 발견될 것으로 기대된다. 패브릭토리 관계자는 “아이들의 순수한 재능이 또 다른 아이의 삶을 밝히는 기부로 이어지는 매우 선명한 순환 구조가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이라며 “리틀산타 재능마켓이 시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말의 따뜻한 문화행사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행사 장소인 원유로프로젝트 북가좌점은 주차가 불가해 대중교통 이용이 권장된다. 행사와 관련한 문의는 인스타그램 @fabrictory를 통해 가능하다. 행사 문의: 패브릭토리(임한나 대표, 010-4262-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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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성탄절 말씀그라피전, 말씀으로 다시 세우는 성탄의 본질
청현재이 말씀그라피선교회가 12월 한 달간 서울 청현재이 아트센터와 부산 극동방송에서 ‘제6회 성탄절 말씀그라피전 – 예수그리스도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말씀선교사 50여 명이 참여해, 성탄의 기쁜 소식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다양한 말씀그라피 작품을 선보인다. 성탄 전시, ‘기독교 절기 문화’로 자리 잡다 선교회는 매년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의 탄생을 오직 ‘말씀’으로 기념하는 전시를 이어왔다. 올해로 6회째를 맞으면서 전시는 단순한 작품 전시를 넘어, 성탄의 본질을 회복하고 말씀 안에서 예배하는 새로운 절기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많은 성도들은 “성탄의 본질을 다시 붙드는 시간”, “말씀 앞에서 마음이 회복된다”는 간증을 전하며 매년 성탄절을 기다리는 주요 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양한 재료·기법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중심, ‘말씀’ 올해 전시는 전통 먹선, 나무·석고·아크릴·종이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또한 금색 포인트와 조명 효과를 더해 성탄의 빛을 표현하는 작품들도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그러나 표현 방식이 다양해도 모든 작품의 중심에는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복하는 말씀이 자리한다. 말씀선교사들은 작품 준비 과정에서 “먼저 기도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을 묵상한 뒤 말씀을 썼다”고 고백했다. 그 고백처럼 모든 작품에는 묵상과 기도가 녹아 있으며, 관람객들에게 성탄의 영적 깊이를 경험하도록 돕고 있다. 성탄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시대, 말씀으로 다시 중심을 세우다 세속적 문화가 성탄의 본질을 흐리고 캐럴 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인 오늘, 이번 전시는 ‘말씀으로 성탄을 회복하는 자리’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특히 성탄절을 단순한 연말 행사로 여기는 이들에게, 말씀그라피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가진 구속사적 의미를 다시 묵상하는 계기가 된다. 전시 안내 글에는 이사야 9장 6절의 말씀이 소개되며 성탄의 메시지를 다시 일깨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이사야 9:6 말씀을 선물하는 ‘연말연시 말씀그라피 나눔 이벤트’ 전시 기간 동안 방문객에게는 말씀선교사들이 직접 성경 말씀을 써서 선물하는 말씀그라피 나눔 행사도 진행된다. 매년 큰 감동을 전해온 이 나눔은 올해도 많은 이들의 성탄을 따뜻하게 비출 것으로 기대된다. <전시 안내> 서울 전시 기간: 2025년 12월 2일(화) ~ 12월 27일(토) 장소: 청현재이 아트센터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삼막로 39번길 25) 문의: 070-7118-6161 부산 전시 1차 전시: 12월 2일(화) ~ 12월 12일(금), 부산 극동방송 2차 전시: 12월 14일(주일) ~ 12월 31일(수), 부전교회 홈페이지 : www.cjcm.co.kr
선교와 교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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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대규모 복음 집회서 청년 2000명 결단
이번 행사는 미국 애틀랜타의 2819교회(2819 Church)와 필립 앤서니 미첼(Philip Anthony Mitchell) 목사가 주도했으며, 집회장인 런던 엑셀에 7000명 이상이 모였다. 참석자 대부분은 젊은이들로, 최근 몇 년 사이 런던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 공개 신앙 결단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이 매체는 소개했다. 2819교회는 이번 집회를 단발성 행사로 끝내지 않고, 런던 전역에서 거리 전도와 지역사회 봉사 활동을 진행했다. 또한 미첼 목사는 약 60명의 영국 목회자들과 함께하는 집중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지역 교회가 결단자들을 책임 있게 양육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췄다. 2819교회는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대위임령을 의미하는 복음주의 성향의 선교적 교회로, 지역 전도와 세계 선교를 동시에 추구하는 교회로 알려지고 있다. 집회 당일 행사 시작 전부터 행사장 주변에는 긴 줄이 이어졌다. 입장을 기다리던 참가자 마이클은 “감옥 독방에서 예수님께 ‘예’라고 대답했다”며 “오늘은 더 깊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싶어 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참석자 로레나(Lorena)와 이사벨라(Isabella)는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며 집회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냈다. 집회 현장에서 미첼 목사는 유다서를 본문으로 설교하며, 편안함과 안일함에 길들여진 신앙을 경계하고 헌신을 촉구했다. 그는 “나는 여기에 장남삼아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명으로 보내셨다”며, “여러분은 이 방에 들어올 때와 같은 모습으로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설교 이후 수천 명이 결단했고, 이들을 위해 현장에서 기도팀이 중보했다. 예배가 계속되는 가운데 많은 이들이 반응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집회에서 나타난 반응은 최근 보고서들이 보여주는 영국 내 신앙 변화의 흐름과도 맞물린다. 2025년 스튜어드십 기부 보고서(Stewardship Generosity Report)는 향후 영국의 자선 기부자의 80%가 18~34세 연령대에서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2025년 한 해 동안 영국에서 성경 판매량이 증가했으며, 출판사들은 특히 처음 성경을 구매하는 젊은 층의 수요가 늘었다고 밝혔다. ‘조용한 부흥(Quiet Revival)’ 보고서 역시 대학 캠퍼스와 직장에서 청년들이 주도하는 기도 모임과 성경 공부, 신앙적인 대화가 늘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첼 목사는 이번 집회에서 “사람들이 복음을 갈망하고 있으며, 추수할 밭은 준비됐다”며 “교회가 타협 없이 일어나 이 순간에 응답할 것인지가 남은 질문”이라고 말했다. 2819교회는 다음 대규모 집회를 미국 뉴욕에서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복음기도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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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광장, 다시 기도의 불길로”... ‘여의도광장기도회 & 국민광장학교’ 2월 7일 개막
한국교회의 영적 회복을 향한 뜨거운 기도의 불길이 2026년 새해,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인 여의도 한복판에서 다시 타오릅니다. 오는 2월 7일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여의도 한국산업은행 본점 앞 광장에서 ‘여의도광장기도회 & 국민광장학교’가 정기 집회를 시작한다. ‘이 나라 진리가 만나는 예배’와 ‘인애와 진리가 만나는 예배’를 주제로 내건 이번 기도회는 단순한 집회를 넘어 한국교회의 본질 회복과 다음 세대 부흥을 위한 영적 각성 운동을 표방하고 있다. 정치색 배제하고 ‘오직 말씀과 기도’로 본질 회복 이번 여의도광장기도회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의 정치적 성향이 짙었던 광장 집회들과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준비위원회 측은 이번 기도회가 정치적 집회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로지 기도와 말씀으로 한국교회의 회복과 대한민국 살리기에 전념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도회의 대표를 맡은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는 “이 나라의 명운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광장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붙잡고 부르짖을 때, 이 땅에 영적 각성과 참된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며 “의인의 기도를 통해 역사를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광장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준비위원장 홍호수 목사 역시 지금의 한국교회가 신뢰도 추락과 세대 단절, 영적 침체라는 ‘3중의 위기’ 앞에 서 있다고 진단하며, 화려한 건물이나 제도가 아닌 ‘기도와 말씀, 복음에 헌신한 믿음’이라는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홍 목사는 여의도가 세속과 정치, 이념의 중심지로 상징되는 만큼, 그 한복판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회개의 기도를 회복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임을 분명히 했다. 교단·교파 초월한 젊은 목회자들의 4주간 릴레이 메시지 광장기도회는 2월 한 달 동안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젊은 목회자들이 강사진으로 참여해 릴레이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할 예정이다. 2월 7일(1주차): 킹덤처치교회 담임 염보연 목사가 첫 포문을 연다. 2월 14일(2주차): 더글로벌처치 담임 이동훈 목사가 말씀을 전한다. 2월 21일(3주차): 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이태희 목사가 강단에 선다. 2월 28일(4주차): 예수비전교회 담임 안희환 목사가 마지막 주차를 맡았다. 집회는 찬양과 말씀, 중보기도, 그리고 나라와 교회를 위한 합심 기도를 중심으로 한 예배 형식으로 진행된다. 단순히 구호를 외치는 자리가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 마음을 찢는 회개와 간구가 이어지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신앙 교육의 현장 ‘국민광장학교’... 지성과 영성의 조화 이번 사역의 또 다른 핵심 축은 ‘국민광장학교’입니다. 이는 단순한 일회성 집회를 넘어 그리스도인의 공적 책임과 시대 분별력을 훈련하기 위한 전략적 시도다. 국민광장학교는 신앙과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한국교회가 직면한 현실을 분석하고 복음적 해법을 모색하는 공개 강의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참가자들은 각 주차별 강사들이 제시하는 실천적 대안을 듣고, 현장에서 직접 질문과 나눔을 통해 신앙적 고민을 공유하게 된다. 홍호수 목사는 이를 두고 “교회 안의 신앙을 사회와 광장으로 확장해 시민의식을 함께 세우는 새로운 형태의 공공 신앙 교육”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3주차인 2월 21일에는 이태희 목사의 저서 사인회와 함께하는 ‘리바이벌 북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다. 독서와 상담, 예배가 결합된 ‘리딩 테라피’ 형식을 통해 참가자들에게 정서적 회복과 치유의 시간도 제공할 계획이다. 광장에서 시작되는 ‘리바이벌 코리아’ 운동의 불씨 ‘리바이벌 준비위원회’와 ‘리바이벌 코리아’가 주최하는 이번 여의도 광장 집회는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를 새롭게 그리려는 ‘리바이벌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주최 측은 유튜브 채널(@revivalkorea2025)과 공식 이메일을 통해 집회 소식을 전하며 성도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소통을 독려하고 있다. 초대교회가 거리에서 복음을 외쳤고 역사적인 부흥의 시기마다 광장이 회개의 무대가 되었던 것처럼, 여의도 한복판에서 시작되는 이 작은 예배가 한국교회와 이 나라의 영적 방향을 바로 세우는 강력한 불씨가 될 수 있을지 교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태희 목사는 마지막으로 이번 기도회가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지성을 동시에 훈련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며, 대한민국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는 이 대장정에 많은 성도의 동참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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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방파제 세워 성혁명 파고 막아내자"… 한국교회 대규모 결집
22대 국회에서 논의 중인 반성경적 입법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교회와 시민단체가 본격적인 연합 행동에 나섰다. 거룩한방파제 통합국민대회와 진정한 평등을 바라는 나쁜 차별금지법반대 전국연합(진평연)은 지난 19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서울·경기·인천·강원 지역 '22대 국회 악법 저지를 위한 전국 목회자·시민단체 대표자 간담회'를 개최하고, 성혁명 악법 저지를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했다. "창조적 소수가 역사의 물줄기 바꾼다"… 영적 각성 촉구 이날 간담회는 차별금지법, 생활동반자법, 성별정정 입법, 학생인권조례 등 이른바 '성혁명 악법'의 실체와 위험성을 공유하고 전국 단위의 대응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기획됐다. ▲환영사를 하는 신용백 목사 환영사를 전한 신용백 목사(악대본 공동회장)는 성경 출애굽기 23장 2절을 인용하며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목사는 "하나님은 언제나 진리를 붙든 소수를 통해 역사를 움직이셨다"며 "우리는 단순히 악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창조적 소수로서 다음 세대를 이끌 책임을 붙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격려사에 나선 박인용 목사(악대본 공동회장)는 "현재 우리는 결코 편안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지만, 역사를 떠받치는 기둥은 언제나 깨어 있는 소수였다"며 영국 노예제 폐지에 앞장선 윌리엄 윌버포스의 사례를 들어 참석자들을 독려했다. 젠더 이데올로기의 '용어 전술' 폭로… "성평등은 젠더평등" 본격적인 강연에서는 젠더 이데올로기가 사용하는 교묘한 용어 전술에 대한 분석이 이어졌다. 이용희 교수(거룩한방파제 준비위원장)는 "성평등(Gender Equality)은 남녀평등인 양성평등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며 "젠더는 생물학적 성(Sex)을 파괴하고 사회적·문화적으로 형성된 가변적 성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용희 교수 이 교수는 특히 최근 발의된 차별금지법안에 대해 "남녀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포함하고, 자신의 주관적 인식에 따라 성별을 결정하는 '성별 정체성' 개념을 도입해 창조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날 간담회의 핵심 화두는 '교회의 본질 회복'과 '시대적 사명'이었다. 박한수 목사는 발언을 통해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짚었다. 그는 "오늘날 성도들은 화려한 건물이나 세련된 프로그램을 찾아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 위에 바로 서 있는 교회를 찾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 목사는 특히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의식해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침묵하는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목회자가 교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진리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방치하는 것"이라며 "왜곡된 가치관이 홍수처럼 밀려오는 이 시대에 성경적 세계관으로 성도들을 깨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선교"라고 강조했다. ▲박한수 목사 30년간 준비된 조직적 흐름… "교회만 몰랐다" 박 목사는 현재 국회에서 발의되고 있는 차별금지법, 생활동반자법, 학생인권조례 등이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님을 지적했다. 그는 "언론, 학계, 법조, 정치 영역에서 지난 30년간 조직적인 흐름이 체계적으로 준비되어 왔다"며 "한국교회가 이를 간과하고 있는 사이 성혁명의 파고는 이미 교회 문턱까지 차올랐다"고 경고했다. 특히 "개념이 모호한 '혐오'나 '모욕'이라는 잣대로 처벌이 이뤄지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강단과 공적 발언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결국 이것은 복음 전파의 통로를 막고 교회를 폐쇄로 몰아넣는 치명적인 독소 조항이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독소 조항의 위험성… "교회 폐쇄로 몰아넣을 수도" 간담회에서는 현재 발의된 법안들이 실제로 교회를 위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도 공유됐다. 이용희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시정명령 불응 시 부과되는 '이행강제금'은 교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나 그 지지자가 교회 시설 대관 거부 등을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경우, 위원회는 사과나 재발 방지 약속 등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이를 거부할 시 회당 최대 3천만 원의 이행강제금이 반복 부과될 수 있으며, 이는 연간 수십억 원에 달해 결국 교회를 경제적 파탄과 폐쇄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악의적 차별'로 간주될 경우 손해액의 3~5배를 배상해야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국가가 소송 비용을 지원하는 조항 등 독소 조항의 실체가 낱낱이 공개됐다. "지역구 의원 압박이 핵심"… 전국적 거룩한방파제 구축 참석자들은 이번 간담회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대응 조직인 '거룩한방파제' 구축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전략의 핵심은 '지역구 국회의원 밀착 대응'이다. 길원평 교수는 "자신의 지역구 의원이 어느 상임위에 속했는지 확인하고, 법안 중단과 수정을 요구하는 조직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활동 방안으로는 ▲지역별 목회자 및 시민단체 간담회 개최 ▲25개 자치구별 거룩한방파제 구축 가속화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성경적 세계관 교육 및 사례 공유 등이 제시됐다. 특히 국회의원을 직접 만나 축복 기도를 해주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도, 악법의 문제점을 명확히 전달하여 입법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술이 논의됐다. 주최 측은 이번 수도권 간담회를 시작으로 1월 22일 광주(전라권), 23일 부산(경상권) 등 전국 4개 권역에서 순차적으로 간담회를 이어가며 교계의 역량을 결집할 계획이다. 이번 간담회에 참석한 대표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성혁명의 쓰나미로부터 교회와 가정, 다음 세대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연대할 것"을 다짐하며, 전국에 거룩한 방파제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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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신학교, 현장을 살리다”
한국교회의 목회 현장에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해 온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고든콘웰신학대학원)가 2026학년도 한국어 목회학 박사(DMin) 과정 신입생을 모집한다. 한국어 DMin 과정은 올해로 5기생을 맞이하며, 지난 4년간 목회 현장과 신학을 통합하는 교육 모델로 주목을 받아왔다. 이번 모집은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산하 Gordon-Conwell Institute Korea(GCI)가 주관하며, ‘찾아가는 신학교, 감동을 주는 교육’이라는 비전 아래 현직 목회자와 사역자들의 현실을 깊이 고려한 과정으로 설계됐다. 특히 사역과 학업을 병행해야 하는 목회자의 삶을 반영해, 이동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학문적 깊이를 유지하는 교육 구조가 강점으로 평가된다. 목회 현장을 중심에 둔 3단계 교육 과정 한국어 DMin 과정은 총 세 단계로 운영된다. 1년 차에는 GCI 사역 역량 개발 프로그램을 통해 신학적 토대와 사역적 성찰을 다진다. 고든콘웰신학대학원 총장과 핵심 교수진의 비대면 강의가 제공되며, 온라인 자기주도 학습과 멘토링이 병행된다. 또한 어드바이저의 지도 아래 1박 2일 대면 공동학습이 진행되고, 학생 개별 상황에 맞춘 맞춤형 방문 지도도 이루어진다 .2~3년 차에는 연 2회의 집중 대면 강의와 함께 특강, 세미나, 실습 중심의 학습이 이어진다. 이 과정은 단순한 이론 전달이 아니라, 실제 목회 현장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함께 토론하고 성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지막 논문 프로젝트 단계에서는 지도교수와의 일대일 지도를 통해, 각자의 사역 현장에서 도출된 실제적 문제를 연구 주제로 삼아 깊이 있는 목회학적 성과를 도출하게 된다. “학위보다 중요한 것은 목회의 회복” 현재까지 이 과정에는 84명의 목회자가 참여했으며, 높은 학습 만족도와 가시적인 사역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단순히 학위 취득을 넘어, 목회자의 정체성과 사명의식을 재점검하고 목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 본 과정이 기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원 자격은 정규 신학대학원 졸업 후 3년 이상의 목회 또는 사역 경험이 있는 자로, 모집 기간은 2026년 1월 15일부터 4월 15일까지다. 모집 정원은 선착순 30명이며, 모든 교육 과정은 한국에서 진행된다. 자세한 지원 안내와 세부 내용은 공식 홈페이지(www.gctskdmin.org)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방향 감각을 잃어가고 있다는 우려 속에서, 이번 고든콘웰신학대학원의 한국어 DMin 과정은 ‘더 많이 배우는 목회’가 아니라 ‘더 깊이 책임지는 목회’를 향한 하나의 진지한 제안으로 읽힌다. 신학과 현장, 학문과 영성을 분리하지 않으려는 이 시도가 한국교회에 어떤 울림을 남길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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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18세 난민 소녀, 예수 영접 이후 가족에게 쫓겨나
pexels의 aboodi vesakaran 남수단 북부 접경 지역의 아종 톡(Ajoung Thok) 난민촌에서 거주하던 수단 출신 18세의 난민 소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됐다는 이유로 지난 8일 무슬림 가족에게서 쫓겨났다고 모닝스타뉴스가 다음날 보도했다. 추방당한 소녀는 수단 누바산맥(Nuba Mountains) 지역 출신의 난민 아모나 이브라힘 카키(Amona Ibrahim Kaki)로, 몰래 성경을 읽기 시작한 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다. 그녀의 개종 사실은 크리스마스 당일 가족에게 알려졌으며, 이후 가족은 그녀의 처분을 오빠의 결정에 맡기고 기다려왔다. 8일, 한 친척이 전화로 오빠에게 그녀를 집에 남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오빠는 “우리 가문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집을 떠나지 않으면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라며 분노 속에 이를 거절했다. 그날 저녁, 그녀는 결국 집에서 쫓겨났다. 카키는 지난해 12월 25일 아종 톡에 위치한 글로리아 침례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그녀를 감시하던 이웃들이 이를 가족에게 알렸고, 부모는 왜 교회 예배에 참석했느냐고 책망했다. 이에 카키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으며 이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밝혔다. 부모는 이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고, 기독교 공동체와의 접촉을 막기 위해 휴대전화를 압수했다. 가족은 그녀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이슬람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가족과의 관계를 끊고, 집에서 내쫓으며, 가문의 이름도 쓰지 못하게 하겠다고 위협했다. 위협 속에서 지내던 그녀는 지역 기독교인들에게 연락해 기도를 요청하고 긴급한 도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현재 어떤 구호 단체도 그녀의 상황을 공식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키는 지난해 오빠의 방에서 성경을 발견한 뒤 매일 읽기 시작했다. 시험 기간에는 학교에 가기 전 하루에 한 절씩 읽으며 삶의 변화를 경험했다. 이후 병으로 고통받던 중 기독교인들의 기도를 통해 회복을 경험했고, 그때부터 가족은 그녀가 귀신 들렸다고 의심했다. 지난해 11월, 그녀는 이슬람 기도에 대한 관심을 잃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다. 나쁜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1월 30일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으며, 성탄절 무렵 자신의 신앙을 공개했다. 조슈아 프로젝트에 따르면, 수단 인구의 93%는 무슬림이며, 전통 종교 신봉자는 4.3%, 기독교인은 2.3%에 불과하다. 수단은 오픈도어 선교회가 발표한 ‘2025 세계 기독교 박해 순위(World Watch List)’에서 기독교인이 살기 가장 어려운 50개국 가운데 5위로 평가됐다. 이는 전년도 8위에서 상승한 순위다. 수단은 2021년 13위를 기록하며 6년 만에 처음으로 상위 10위권에서 벗어난 바 있다. 미 국무부는 2019년 수단을 종교의 자유를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침해하는 국가로 분류되는 ‘특별우려국(CPC)’ 명단에서 제외하고 감시 대상국으로 조정했다. 수단은 1999년부터 2018년까지 CPC로 지정돼 있었다. 이후 2020년 12월, 미 국무부는 수단을 특별 감시 대상국 명단에서도 제외했다. 기사제공 : [복음기도신문]
길과생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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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붕괴 위험, 지정학을 넘어 영적 전환할 때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격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 체제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고 진단한다. 경제는 마비되고 사회는 분열되었으며, 주민들은 기근과 질병에 노출돼 있다. 무엇보다 북한을 지탱해온 중국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를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나 군사 전략의 변화로만 본다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를 하나님께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하시는 과정, 그리고 어둠의 체제가 스스로 무너지는 영적 질서의 드러남으로 해석해야 한다. 산사태처럼 오는 통일 많은 이들은 통일이 단계적 대화와 협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역사와 국제정치의 현실은 다르다. 독일, 예멘, 작은 국가들의 병합 사례까지도 모두 ‘붕괴’가 먼저 찾아온 뒤에야 가능했다. 성경은 “빛과 어둠은 섞일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와 전체주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통일은 이상적일 수 있으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결국 통일은 대화로 설계되는 구조물이 아니라, 내부 붕괴가 외부 질서와 맞물리는 순간 갑작스럽게 열리는 문과 같다.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체제의 한계 북한의 붕괴는 단순한 경제 실패가 아니다. 그 뿌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체제 유지의 도구로 취급한 데 있다. 농부는 생산 수치로, 아이들은 행사 도구로, 노인은 인구 숫자로만 계산되었다. 예배와 성경은 금지되었고, 생각은 통제되었다. 인간 존엄이 철저히 무너진 체제는 결국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이는 죄로 세워진 권력과 우상화된 통치가 역사 속에서 무너지는 과정이다. 중국의 흔들림, 북한의 비틀거림 북한의 변화보다 더 중요한 신호는 중국의 흔들림이다. 북한의 생명줄은 중국이었고, 그 그림자 권력 역시 중국이었다. 그러나 중국도 성장의 한계에 봉착했다. 개방하면 경제가 살아도 정권은 무너지고, 닫으면 정권은 유지되지만 국민 경제가 붕괴한다. 이는 북한과 동일한 딜레마다. 결국 진리를 억압하고 자유를 통제하는 체제는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다. 미국과 북한, 평행선의 대화 최근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 가능성은 사라졌다. 표면적으로는 핵 문제 때문이지만, 본질은 세계관의 충돌이다. 미국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북한은 통제와 국가 우선을 말한다. 겉으로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둠이 교제할 수 없듯, 이 구조에서는 대화가 평행선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체성,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 북한과 중국의 흔들림은 한국이 체제 정체성을 더욱 분명히 해야 할 때라는 신호다. 북한 체제를 존중하거나 ‘두 국가 인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헌법뿐 아니라 기독교적 가치와도 충돌한다. 현 정권의 북한 체제를 존중한다는 태도는 곧 인간 존엄을 무너뜨린 폭정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유와 양심, 예배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를 승인하는 것이다. 한국이 체제의 본질을 흐리면 역사의 전환기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붕괴의 영적 의미: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북한의 붕괴는 단순히 냉전의 마지막 불씨가 꺼지는 사건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억눌린 백성들을 향해 열어가시는 해방의 시간이며,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는 순간이다. 북한 붕괴는 비극이 아니라, 정의와 진리가 어둠을 깨뜨리는 영적 승리의 순간이다. 북한의 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올 가능성이 크다. 산사태가 오랜 균열 끝에 무너지고, 빛이 한순간에 어둠을 몰아내듯, 역사의 전환도 그렇게 온다. 그 순간을 준비하는 길은 두 가지다. 첫째는 한국의 체제 정체성을 분명히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북한 주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북한의 붕괴는 한 시대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때, 기독교인들, 특별히 한국교회는 그 빛 아래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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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평화·책임’의 key는 교회에 있다
▲경주 APEC에 참석한 트럼프 미국대통령은 한반도는 아직 전쟁중이라고 밝혔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1. 역사적 진단: ‘정전 상태’는 미완의 역사, 동시에 은혜의 시간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외교적으로는 사실 확인이지만, 신학적으로는 “미완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언어입니다. 6·25전쟁 이후 한반도는 전쟁을 멈췄을 뿐, 평화를 얻지 못한 땅입니다. 그 사이 70년이 넘는 정전의 시간은 인간의 정치 실패이자,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유예의 시간(grace period) 이기도 합니다. “전쟁을 그치게 하시며, 땅 끝까지 창을 꺾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 (시편 46:9) 한반도의 정전은 단순히 외교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남과 북 모두를 멸절하지 않으신 역사적 간섭의 흔적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공식 전쟁 상태”라는 말은 심판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리는 언어입니다. 2. 정치적 진단: ‘종전 선언’의 정치화와 영적 공백 한국의 진보 정권들이 지속적으로 종전을 주장한 배경에는 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통해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계산, ② 미군 주둔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의도, ③ 북한 체제와의 상호인정(normalization)을 통한 긴장 완화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접근은 ‘평화의 구조’보다 ‘정치적 선언’에 집중한 한계를 가집니다. 평화는 서명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진정한 평화는 정의와 진실의 토대 위에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평화롭다, 평화롭다 하나 평화가 없도다.” (렘 6:14) 즉, 하나님 없는 평화는 언제나 거짓 평화입니다. 한반도의 종전 선언이 진정한 평화가 되려면, 그 안에 회개와 정의, 그리고 진리의 영(요 16:13) 이 깃들어야 합니다. 3. 신학적 진단: 국가의 주권인가, 하나님의 주권인가 트럼프의 발언은 “한반도 전쟁의 법적 상태”를 언급했지만, 신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주권의 문제입니다. 누가 이 땅의 역사를 다스리는가? 남한도 북한도, 미국도 중국도 아닙니다. 이 땅의 주권은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께 속하였으며, 그가 열방을 다스리시리로다.” (시편 22:28) 남북의 체제, 미국의 패권, 중국의 영향력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아래 한정된 도구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하나님은 아시리아와 바벨론을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셨지만, 그들이 교만해졌을 때 심판하셨습니다(사 10:5-12). ▲한반도는 휴전이지 전쟁이 종식된 것은 아니다. 사진은 APEC의 한미정산회담 모습(연합뉴스 제공) 오늘의 한반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대국의 외교전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은 결코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교회가 이 주권의 시각을 잃고, 정치 이념의 시각으로만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4. 영적 진단: 이념보다 깊은 분열의 영 남북의 분단은 단순한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와 교만이 만든 영적 분열입니다. 좌·우의 이념 대립은 마치 바벨탑의 언어혼잡처럼,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영적 현상입니다. “너희가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갈 5:15) 이념의 이름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진영의 이름으로 복음을 왜곡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적 통일성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교회는 어느 진영의 대변인이 아니라, 양쪽을 향해 회개를 외치는 선지자적 존재여야 합니다. 5. 윤리적 진단: 정의 없는 평화는 불의, 평화 없는 정의는 폭력 하나님의 평화(shalom)는 단지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צֶדֶק, tsedeq)가 강같이 흐르는 상태입니다(암 5:24). 그러나 오늘의 한반도는 정의와 평화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정의 없는 평화를 말하고, 남한의 일부는 평화 없는 정의를 말합니다. 둘 다 복음의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정의와 자비의 입맞춤(시 85:10)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어느 편의 언어를 반복하기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언어로 발언해야 합니다. 6. 구속사적 관점: 하나님은 분단의 역사 속에서도 일하신다 한반도의 분단은 비극이지만, 하나님은 그 안에서도 구속의 서사를 이어가십니다. 70년의 분단 속에서도 복음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지하에서 하늘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전쟁을 심판으로 쓰시지만, 그 심판의 끝에는 언제나 회복의 약속을 두십니다. “내가 너희를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4) 트럼프의 발언은 외교적 발언처럼 들리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일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역사적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7. 교회의 사명: ‘평화의 중보자’로 서라 이제 교회는 정치적 중재자가 아니라, 영적 중보자로 서야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교회가 할 일은 좌·우를 향한 회개의 메시지, 복음 안에서의 화해의 증언, 정의롭고 온유한 그리스도의 통치의 증언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마 5:9) 한국 교회가 이 사명을 외면한다면, 하나님은 돌들로도 외치게 하실 것입니다(눅 19:40). 8. ‘전쟁 상태’의 의미: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에서 평화를 준비하신다 트럼프의 말은 정치적 현실의 진단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를 재확인하는 경고이자 초대입니다. 한반도는 아직 전쟁 상태이지만, 그것은 “평화를 향한 마지막 여정의 진통기”일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정치의 언어 대신 복음의 언어로, 이념의 대결 대신 진리의 사랑으로, 민족의 상처 위에 하나님의 평화의 깃발을 세워야 합니다. “그가 우리로 화평하게 하셨고, 원수 된 것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 하나님은 남한의 성도들의 통일에 대한 기도를 잊지 않고 계십니다. 또한 북한에는 당신의 백성이 계십니다. 여전히 전쟁 중인 한반도의 통일은 열쇠는 교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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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괄적 차별금지법,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
■ 또다른 차별을 위한 서곡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다.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대명제에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구체적인 법안의 내용과 적용 방식을 놓고는 여전히 첨예한 의견 대립이 존재한다. 특히 종교계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우려들은 단순히 보수적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사회의 근간인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와 맞닿아 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기독교계의 우려를 중심으로, 법안이 가진 잠재적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차별금지라는 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안의 구체적 조항들이 야기할 수 있는 부작용과 사회적 갈등 요소들을 냉정히 분석하여, 보다 균형 잡힌 법제화 방향을 모색해보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 vs 차별금지, 경계선은 어디인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표현의 자유와 차별금지 사이의 경계선 설정 문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교회 내에서의 설교나 교육이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목회자가 설교 중에 "성경은 동성애를 죄라고 본다"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종교적 신념 문제를 넘어서, 종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교리와 신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와 직결된다. 문제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법안들이 이러한 종교적 표현에 대한 예외 조항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그 범위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법조문의 해석은 결국 법원의 판단에 맡겨지게 되는데, 판사의 가치관이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동일한 발언도 다르게 판단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해외 사례를 보면 이러한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일부 국가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종교적 비판이 법적 분쟁의 대상이 된 사례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물론 각국의 법제도와 사회문화적 맥락이 다르긴 하지만, 이러한 선례들이 한국의 종교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 개념 정의의 모호성과 확대 해석의 위험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또 다른 문제점은 핵심 개념들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특히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과 같은 용어들은 그 범위와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자의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성적 지향'이라는 개념 하나만 봐도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불분명하다. 전통적인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성적 지향이 포함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면 법 적용 과정에서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성별 정체성'의 경우에도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 그리고 개인이 인식하는 성별 간의 복잡한 관계를 어떻게 법적으로 규정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이러한 개념적 모호성은 법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리고, 시민들로 하여금 어떤 행위나 표현이 법에 저촉되는지를 사전에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특히 종교인들이나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자신들의 신념 표현이 언제든 차별로 해석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게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법안의 일부 조항들이 너무 포괄적이고 광범위하게 규정되어 있어, 본래 의도하지 않았던 영역까지도 법의 적용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법의 과잉 금지 원칙에 위배될 소지가 있으며, 사회 구성원들의 기본권 행사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 ■ 역차별 논란과 다수의 권리 침해 가능성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또 다른 쟁점은 소위 '역차별' 문제다.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선의의 목적이 오히려 다수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권리를 부당하게 제약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다. 구체적으로,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때, 그것이 소수자에 대한 차별로 해석되어 법적 제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교사가 수업 중에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을 때, 이것이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차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근본 가치와 충돌하는 문제다. 민주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과 가치관이 자유롭게 표현되고 토론될 수 있어야 하는데, 특정한 관점의 표현이 법적으로 금지된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훼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법적 제재의 가능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 수 있다.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진솔한 생각을 표현하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의 담론이 위축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법과 교육과정에 따라 이와 다른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 교육 현장에서의 혼란과 갈등 교육 분야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을 영역 중 하나다. 공교육 기관에서는 국가 정책과 법률에 따라 교육과정이 운영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관련 내용이 교육과정에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과 관련된 교육을 실시할 때,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학부모나 교사들과의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서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교육하면서 동성 부모 가정을 소개한다면, 이에 반대하는 학부모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또한 이러한 교육에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차별로 간주될 수 있다면, 학부모의 교육권은 어떻게 보장될 것인가? 교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만, 법과 교육과정에 따라 이와 다른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이는 교사의 양심의 자유와 교육의 자유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더 나아가, 사립학교나 종교계 학교의 경우에는 더욱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들 학교는 고유한 교육 철학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설립된 것인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이러한 학교들의 교육 자율성을 제약할 가능성이 있다. ■ 종교 자유와의 충돌 가능성 종교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중 하나다. 이는 단순히 개인이 종교를 믿을 자유뿐만 아니라, 종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교리와 신앙을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한다. 그런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경우, 종교 공동체의 신앙 실천이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가르치거나, 동성애자의 교회 직분 취임을 거부하는 것이 차별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종교의 자유도 무제한적인 것은 아니며, 다른 기본권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하지만 종교 공동체 내부의 교리나 신앙 실천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율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문제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법안들이 종교 자유에 대한 예외 조항을 충분히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적 행위나 표현에 대한 예외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가 모호하다면 여전히 갈등의 소지는 남아있게 된다. ■ 사회적 갈등 증폭의 우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란은 이미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찬성 측과 반대 측 간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고 있으며, 상호 이해와 대화보다는 감정적 대립이 앞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법이 제정된 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법이 적용되는 과정에서 구체적인 분쟁 사례들이 발생하면, 이를 둘러싸고 또 다른 사회적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 특히 언론과 SNS를 통해 사례들이 확산되면서 여론이 극단화될 위험도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갈등이 사회 통합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집단들이 법적 다툼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할 때, 사회 전체의 화합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또한 법 제정 과정에서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법의 정당성과 실효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될 수 있다. 민주사회에서 법은 사회 구성원들의 광범위한 동의를 바탕으로 할 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해외 사례의 교훈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유사한 법률들이 이미 시행되고 있는 해외 사례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들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차별금지와 관련된 법률들이 종교 자유와 충돌하는 사례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동성 결혼 케이크 제작을 거부한 베이커리 업주가 법적 분쟁에 휘말린 사건이나, 동성애에 대한 종교적 견해를 표명한 목회자들이 사회적 비난을 받은 사례들이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차별금지법이 종교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와 어떻게 충돌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영국에서도 유사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공공기관이나 교육기관에서 전통적인 가치관을 표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일부 경우에는 법적 제재나 사회적 압박을 받는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물론 각국의 법제도와 사회문화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해외 사례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선례들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때는 다양한 기본권 간의 균형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하며, 특히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충분한 보장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의 창조는 남자와 여자이지 제3의 성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 대안적 접근 방법의 모색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신중하고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먼저 법안의 핵심 개념들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이뤄져야 한다.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의 용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범위까지 포함하는지를 법조문에 명시해야 한다. 둘째,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예외 조항을 명확하고 강력하게 규정해야 한다. 종교 공동체 내부의 교리나 신앙 실천, 그리고 종교적 신념에 기초한 표현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셋째, 법의 적용 범위를 신중하게 설정해야 한다. 모든 영역에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보다는, 영역별 특성을 고려한 차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교육 분야의 경우, 학부모의 교육권과 교사의 교육 자유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넷째, 법 제정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해야 한다. 찬성 측과 반대 측 모두의 우려를 진솔하게 듣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법 시행 후에도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 실제 적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필요시 법 개정을 통해 보완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 기본권에 충돌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검토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숭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법의 구체적 내용과 적용 방식을 놓고는 여전히 많은 쟁점들이 존재한다. 특히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다른 기본권과의 충돌 가능성은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우려들을 단순히 보수적 시각이나 기득권 옹호로 치부하지 않는 것이다. 민주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과 관점이 존중되어야 하며, 특히 기본권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차별금지라는 목표와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지혜롭고 균형 잡힌 법 제정을 통해 두 가치를 모두 보장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많은 대화와 토론, 그리고 상호 이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진정한 포용 사회는 소수자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 구성원의 기본권이 조화롭게 보장될 때 가능하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의가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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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정권, 대화가 불가능한 이유
서론: 북한 문제의 근본적 딜레마 한반도 통일 문제를 논할 때, 우리는 종종 북한을 일반적인 국가로 취급하며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을 기대한다. 그러나 70여 년간 지속된 남북 대화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며, 그들과의 대화가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는 단순히 정책적 미숙함이나 상호 불신 때문만이 아니다. 성경은 "거짓 선지자를 그의 열매로 알리라"(마태복음 7:16)고 가르친다. 북한 정권의 70여 년 역사는 바로 그 '열매'를 통해 그들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준다. 북한 정권은 태생적으로 거짓 위에 세워졌으며, 허구적 이데올로기로 유지되고, 진리를 대표하는 기독교를 본능적으로 적대시하는 체제이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북한과의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하며,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통일 정책은 계속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1. 거짓된 출발: 김성주에서 김일성으로의 변신 역사적 사기극의 시작 북한 정권의 근본적 문제는 그 출발점에 있다. 1945년 해방 후 북한 지역에 등장한 김일성은 진짜 항일 영웅이 아니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실제 김일성은 1920년대 활동한 항일 무장투쟁 지도자였으나, 북한 정권을 세운 인물은 전혀 다른 김성주였다. 소련은 자신들의 괴뢰 정권을 세우기 위해 젊은 김성주를 전설적 영웅 김일성으로 둔갑시켜 내세웠다. 이는 단순한 개명이 아니라 역사적 사기극이었다. 하나님께서 "거짓 증거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잠언 14:5)라고 경고하신 바와 같이, 북한 정권은 근본적으로 거짓 위에 세워진 체제였다. 정통성 없는 권력은 반드시 거짓과 속임수로 자신을 포장해야 한다. 역사학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북한의 출발은 거짓된 영웅을 앞세운 정치적 연극이었다"고 평했다(Andrei Lankov, The Real North Korea, 2013). 소련 문서고에서 발견된 자료들은 김성주가 김일성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며, 이는 북한 정권의 허구적 본질을 명확히 드러낸다. 신화 창조의 필요성 정통성이 없는 권력은 반드시 신화를 필요로 한다. 성경에서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이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세기 11:4)고 했듯이, 북한 역시 허구적 권위를 세우기 위해 김일성을 신격화했다. '혁명의 태양', '민족의 수령', '위대한 령도자'라는 호칭들은 모두 김성주라는 평범한 인간을 초인적 존재로 포장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이러한 우상화 작업은 성경이 금하는 우상숭배의 전형적 사례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출애굽기 20:3)는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 바로 북한의 수령 숭배 체계였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지도자를 앉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체제의 허구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2. 주체사상: 민족 사상이 아닌 왕조 유지 장치 주체사상의 기만적 성격 북한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주체사상은 '자주', '자립', '자위'를 강조하며 민족 자주성을 추구하는 사상인 듯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민족을 위한 사상이 아니라 김일성 일가의 권력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 주체사상의 핵심인 '수령론'을 살펴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주체사상에 따르면 인민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수령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는 객체일 뿐이다. 사회주의의 기본 원리인 인민 주권과 평등 사상은 완전히 왜곡되었고, 대신 수령의 절대 권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는 마치 "사람의 아들들아 너희가 어느 때까지 내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겠는가"(시편 4:2)라는 성경 말씀이 경고하는 인간의 우상숭배와 정확히 일치한다. 정치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주체사상은 철학적 일관성이 없는 변주곡에 불과하며, 김일성 개인 숭배를 영속화하기 위한 교리"라고 분석했다(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2005). 실제로 주체사상은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변했으며, 일관성 있는 철학 체계라기보다는 권력 유지에 필요한 논리를 그때그때 제공하는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 세습 정당화의 논리적 모순 사회주의는 본래 계급 철폐와 평등을 추구하며, 혈통에 의한 권력 세습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나 북한은 '혁명 혈통'이라는 허구적 개념을 창조해 이를 정당화했다. 김일성의 혈통만이 혁명 정신을 계승할 수 있다는 논리는 사회주의 원리와 완전히 배치되는 봉건적 발상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세기 1:27)라는 말씀처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동등한 존재이다. 특정 혈통만을 절대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철학자 한희주는 "주체사상은 철학이 아니라, 세습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권력 신학"이라 지적했다(『주체사상 연구』, 2001). 이는 정확한 분석이다. 주체사상은 학문적 철학이 아니라 김씨 일가의 권력을 신성화하는 종교적 교리의 성격을 띠고 있다. 3. 기독교 탄압의 심층적 이유 절대 권위의 근본적 충돌 북한 정권이 다른 종교보다 기독교를 더욱 혹독하게 탄압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본질적 신앙 고백이 주체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사도행전 4:12)고 고백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와 구주이시며, 그분만이 절대적 권위를 가지신다. 그러나 북한의 주체사상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이 유일한 수령이자 절대적 권위자임을 강요한다. 수령에 대한 절대 충성과 숭배를 요구하는 북한 체제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곧바로 반체제 사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마땅하니라"(사도행전 5:29)는 사도들의 고백은 북한 정권에게 가장 위험한 선언이 된다. 보편적 진리와 배타적 혈통주의의 대립 기독교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하나이니라"(갈라디아서 3:28)고 가르친다. 이는 인종, 계급, 성별을 초월한 인류의 평등과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론적 동등성을 의미한다. 반면 북한은 '백두혈통'이라는 신화적 개념으로 김씨 일가만을 절대화한다. 오직 김일성의 혈통만이 특별하고 고귀하며, 다른 모든 인간은 그들을 받들어야 할 존재로 규정한다. 이는 기독교의 보편성과 평등 사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극단적 혈통주의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사도행전 10:34)고 말씀하셨다. 특정 혈통을 신성시하는 북한의 사상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반하는 우상숭배적 발상이다. 자유와 양심 해방의 위험성 기독교 신앙의 본질 중 하나는 인간을 죄와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참된 신앙은 인간의 영혼을 속박에서 해방시킨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주민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감시해야만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 사상, 언론, 이동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상황에서만 허구적 체제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체제의 거짓을 꿰뚫어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을 갖게 되므로, 북한 당국에게는 '위험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탈북자들의 증언을 담은 『북한의 증언』(안찬일 엮음, 2019)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점은 "북한 당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진짜로 기독교를 믿는 자"라는 사실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갖는 체제 전복적 성격을 북한 정권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 탄압의 실상과 본질 북한은 헌법상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인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자행해왔다. 지하교회 신자들이 발각되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공개 처형되는 사례가 끊이지 않는다. 국제 인권 단체 오픈 도어즈(Open Doors)는 매년 북한을 기독교 박해 1위 국가로 선정하고 있으며, 약 30만 명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극심한 탄압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탄압은 단순한 종교 탄압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북한 정권에게 기독교는 체제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대안 세계관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김씨 왕조의 허구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4. 개방 거부의 구조적 이유 진리 노출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 북한이 개방을 거부하는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개방은 곧 외부 세계의 진리와 자유에 노출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체제의 허구성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기독교 문명의 자유와 진리는 북한 주민들에게 가장 강력한 각성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5)는 성경 말씀처럼, 진리의 빛은 거짓의 어두움을 자연스럽게 물러가게 한다. 북한 정권은 이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형태의 진정한 개방도 허용할 수 없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북한이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이지만 개인 숭배나 세습 체제는 아니었다. 반면 북한은 개인 숭배와 세습이 체제의 핵심이므로, 개방은 곧 체제 붕괴를 의미한다. 정보 통제의 생존적 필요성 북한 정권에게 정보 통제는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다. 바깥 세상의 정보, 특히 기독교 문화와 가치관이 유입되면 주민들의 의식이 각성될 위험이 있다. 실제로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 드라마나 기독교 방송을 몰래 시청한 경험이 체제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성경은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과 같아서, 북한과 같은 어두운 체제에 진리의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북한 정권이 기독교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5. 세습 체제가 낳은 구조적 모순 사회주의 원리와 세습의 모순 김일성에서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진 3대 세습은 사회주의 원리에 근본적으로 위배된다. 사회주의는 계급 철폐와 평등을 추구하며, 특정 집안의 권력 세습을 거부한다. 그러나 북한은 '혁명 혈통'이라는 허구적 논리로 이를 합리화하려 했다. 이는 성경적 관점에서도 잘못된 것이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왕정에서도 하나님은 불의한 왕들을 심판하셨으며, 혈통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혈통이나 외적 조건보다 내면의 마음을 보신다. 수령 숭배의 종교적 성격 북한의 수령 숭배는 단순한 정치적 충성을 넘어서는 종교적 차원을 갖고 있다. 김일성 일가에 대한 숭배 의식, 우상 숭배, 절대 복종은 사실상 기독교적 신앙 고백의 구조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자리에 인간 지도자를 앉힌 왜곡된 종교였다. 이는 성경이 경고하는 우상숭배의 전형적 사례이다. "그들의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시편 115:4)는 말씀처럼, 인간이 만든 우상은 결국 허무한 것이다. 김씨 일가에 대한 우상숭배 역시 궁극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허상이다. 철학자 한희주의 지적처럼, 주체사상은 "철학이 아니라 세습 체제를 영속화하기 위한 권력 신학"이다. 이는 참된 신학이 아닌 거짓 신학으로, 인간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는 신성모독적 발상이다. 6. 남한 대북 정책의 구조적 실패 진보 정권의 반복적 오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부터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진보 정권들은 일관되게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한 변화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20여 년간의 경험은 이러한 접근법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북한은 남한의 경제 지원과 정치적 양보를 받아내면서도,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을 계속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북한의 본질적 변화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국제 제재 완화와 경제 지원을 얻어내려는 전략적 행동이었을 뿐이다. 성경은 "그 행하는 일로 그를 알리라"(마태복음 7:20)고 가르친다. 북한의 지난 70년 행적을 보면, 그들이 진정한 변화를 원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화는 체제 유지를 위한 시간벌기 전술일 뿐이었다. 현 정부의 동일한 착각 이재명 정부 역시 이전 진보 정권들과 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평화 정착을 추구하지만, 북한의 본질적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본질적으로 개방할 수 없는 체제이며, 기독교와 같은 대안적 진리를 절대 허용할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경제 지원과 정치적 양보를 해도 북한의 근본적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정책은 북한 정권의 생명력을 연장시켜 주는 역할만 할 뿐이다. 정치학자 니콜라스 에버스타트는 "북한은 결코 변하지 않을 정권이며, 변화하는 척하면서 대가를 요구하는 체제"라고 지적한다(Nicholas Eberstadt, The End of North Korea, 1999). 이는 정확한 분석이다. 북한의 기만적 협상 전략 북한은 협상을 통해 체제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 체제를 보존하려 한다.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해지면 대화 의지를 보이며 지원을 받아내고, 체제가 안정되면 다시 도발을 재개하는 패턴을 반복해왔다. 이는 "뱀같이 지혜로우라"(마태복음 10:16)는 예수님의 말씀을 악용한 사례이다. 북한은 외교적 지혜를 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으며, 남한의 선의를 이용해 체제 생존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7.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북한 문제의 본질 영적 전쟁의 차원 북한 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넘어서는 영적 전쟁의 성격을 갖고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에베소서 6:12)는 말씀처럼, 북한 체제는 영적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는 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김씨 일가에 대한 우상숭배, 기독교에 대한 극단적 적대감, 진리에 대한 본능적 거부는 모두 영적 어둠의 특징들이다. 이는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적 차원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역사 섭리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모든 것을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가신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물 줄기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언 21:1)는 말씀처럼, 북한의 독재자들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붕괴, 소련의 해체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체제 변화도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마가복음 10:27). 기도와 영적 준비의 필요성 따라서 북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정치적, 군사적 접근보다는 영적 접근에 있다. 북한 땅에 복음이 전해지고, 북한 주민들이 참된 자유와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한국교회는 북한을 위한 기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야고보서 5:16)는 말씀을 믿고, 북한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8. 통일의 참된 의미와 준비 체제 통일이 아닌 가치 통일 진정한 통일은 단순히 두 체제를 합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하나 되는 것이다. 북한의 허구적 이데올로기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를 절충하는 것이 통일이 아니라, 진리에 기초한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것이 참된 통일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통일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한반도 전체에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흘릴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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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증편향과 집단정체성을 통한 한국 및 교회의 사회주의화
1. 이단 구조를 닮은 의식화 체계 이단에 빠진 이들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자신들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신하며, 자신들과 다른 견해는 모두 오류거나 악의적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이러한 폐쇄적 신념 구조는 단순한 종교 현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단들의 신격화 프레임의 구조는 사회주의 의식과 프레임의 구조와 동일하다 오늘날 우리는 유사한 구조가 사회 전반, 특히 정치, 교육, 언론, 문화, 종교 영역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어 가는 것을 목도한다. 특히 한국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이념적 진영 논리가 심화되면서, ‘진보=정의’, ‘보수=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뿌리내렸고, 특정 진영에 속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열등하거나 무지하다고 간주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곧 사회주의적 의식화 전략의 일환으로 작동한다. 사회주의는 단지 경제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구조적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평등과 연대라는 명분을 앞세우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자유, 자율성, 양심, 신앙,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강제적인 ‘올바름’의 기준을 설정한다. 그 결과, 반대 의견은 곧 ‘혐오’나 ‘차별’로 낙인찍히고, 진영 내부의 도덕적 정당성은 절대적 신념처럼 기능한다. 이는 집단 내부에서의 자기 정당화와 외부에 대한 적대감 고조로 이어지며, 마치 이단 집단이 외부 세계를 사탄화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이단적 구조’가 정치, 교육, 언론, 문화, 종교, 경제 전반에 어떻게 침투했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중심 개념으로는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가 말한 ‘집단사고(groupthink)’와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을 활용할 것이다. 집단사고는 비판적 사고가 억압되고, 구성원들이 의견 일치를 위해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는 심리적 구조이며, 이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의 심리적 기반이 된다. 또한 확증편향은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이는 이념적으로 고립된 정보 소비와 여론 분열을 촉진시킨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점점 자유민주주의의 건강한 공론장보다는, 폐쇄적 이념 집단들이 각축하는 ‘체제 전환의 장’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이 의식화 전략의 실체를 직시하고, 진정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사상적 방어와 영적 분별을 다시 회복해야 할 시점이다. 1) 참고문헌: Irving L. Janis, Groupthink (1982). 2. 심리적 기반: 확증편향과 집단 정체성의 이념화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심리학적 개념 중 하나는 바로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확증편향은 인간이 자신의 기존 신념이나 가치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그에 반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비합리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이는 특정 정치 성향이나 이념적 진영에 속한 사람들일수록 더욱 강하게 작용하며, 자신이 믿는 진영의 정보는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반대 진영의 정보는 ‘가짜뉴스’로 치부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나타난다. 이러한 심리 작용은 단지 개인의 오류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확산될 경우 사회 전체의 인식과 판단 구조를 왜곡하는 위험 요소가 된다. 이와 함께 작동하는 것이 바로 ‘집단 정체성(group identity)’이다. 집단 정체성은 개인이 특정 집단에 속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을 찾는 심리적 기제이며, 이는 정치 진영, 이념 공동체, 종교, 직장, 학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작동한다. #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과 종북주의를 국회에서 실천하고 있는 민주당 의원들 문제는 이러한 집단 정체성이 절대화될 경우, 집단 외부를 향한 배타성과 적대감을 낳는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수도권과 비수도권, 남성과 여성, 시민단체와 기업 등 다양한 대립 구도가 이처럼 절대적 자기정당성과 타자 혐오로 연결되고 있으며, 이는 사회적 갈등을 극단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특히 한국의 586 운동권 세대와 그 후예들은 이러한 확증편향과 집단 정체성에 기반하여, 특정 정치 세력을 ‘민중의 대변자’, 반대 진영을 ‘적폐세력’으로 규정짓는 인식틀을 고착화해 왔다. 이로 인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다양성과 비판적 토론은 사라지고, 이념적 진영논리가 절대적 윤리 기준으로 대체되었다. 이처럼 정치적·사회적 사안에 대해 이분법적 태도와 감정적 선동이 앞서는 구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념의 전장’으로서 공론장을 왜곡하고 마비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이러한 심리 구조는 SNS와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더욱 강화된다. 알고리즘은 이용자가 선호하는 정보만을 반복적으로 노출시키며, 이념적으로 균형 잡힌 사고를 가로막는다.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등은 ‘확증편향의 생태계’를 형성하며, 사용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에 쉽게 노출되지 않고, 점점 더 강한 주장만을 접하게 된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합리적 중재와 타협의 가능성을 사라지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확증편향과 집단 정체성은 한국 사회를 논리보다 감정, 사실보다 신념, 토론보다 배제의 장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심리 구조 위에 사회주의적 담론과 의식화 전략이 덧입혀질 경우, 비판적 사유는 억제되고, 전체주의적 문화가 대중의 일상 속에 스며들 수 있게 된다. 2) 참고문헌: Jonathan Haidt, The Righteous Mind: Why Good People Are Divided by Politics and Religion (New York: Pantheon Books, 2012). 3. 종북주의와 주사파: 이념 집단의 교리화 1980년대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민주화 열망과 더불어 극단적인 이념 분화가 동시에 일어난 시기였다. 그 중심에는 주사파로 불리는 김일성 주체사상 신봉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북한의 정치체제를 단순한 독재 국가로 보지 않고, 오히려 식민지적 억압을 이겨낸 자주적 국가로 이상화하며, 대한민국의 체제는 친미·친일 세력이 세운 가짜 국가로 간주하였다. 주사파는 단지 북한을 동경하는 정치 집단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전복하고자 했던 교리화된 이념 집단이었다. # 주사파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하여 자신들의 이념을 법제화하고 있다 이들은 '의식화'라는 방법론을 통해 대중에게 접근했다. 의식화란 사람들의 일상적 현실을 계급 구조 속에 위치시켜 설명하며, '억압받는 민중'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주입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주사파는 대학가의 학생운동, 지역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점차 그 세력을 넓혀갔다. 특히 대학 총학생회를 장악하고, 학내 동아리, 출판물, 교지 등을 통해 체계적인 사상 교육을 시도했다. ‘남한은 식민지, 북한은 자주국가’, ‘미제 타도’, ‘계급 해방’ 등의 구호는 단지 정치적 문구가 아니라, 정체성 재편과 감정적 동원 장치였다. 이러한 주사파 이념은 민주화 이후 지하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며 586세대를 통해 국회, 언론, 교육계, 시민단체, 법조계, 심지어 종교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라는 명분 아래 비판이 불가능한 도덕적 권위를 확보하고, 이후 대중의 인식 속에서 자신들의 이념을 ‘정의’와 ‘민주’로 재포장하였다. 예컨대, 2000년대 중반 이후 각종 교과서에서 북한 체제에 대한 긍정적 서술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이 역사적 진실로 둔갑되었다. 이들의 전략은 언어 장악과 역사 재해석, 그리고 감성적 피해자 담론 형성에 있다. 과거 군사정권의 탄압 경험은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며, 현재 자유민주주의적 반대자에 대한 공격 명분으로 활용된다. 동시에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외면하며, 북핵 문제는 미국 책임이라는 ‘전가 논리’로 회피한다. 이들은 대중의 분노를 체제 부정의 동력으로 전환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내부로부터 갉아먹는 전술을 전개해왔다. 결국 주사파는 단순한 과거의 반미운동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집단 정체성과 확증편향, 패거리 윤리로 무장한 이념 교리 집단이며, 현재도 문화·언론·교육·종교를 통해 사회주의적 의식화를 실현하고 있다. 이들의 핵심 전략은 '의심 없는 믿음'을 전제하고, 반대자를 '악'으로 규정하여 이성적 대화가 불가능한 공론장을 만든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은 단순한 정치적 반대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수호하는 본질적 투쟁이 되어야 한다. 3) 참고문헌: 이정훈, 『자유를 위한 투쟁』 (2021). 4. 전교조: 반자유민주주의적 교육의 기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단순한 교원 노동조합을 넘어선 이념적 교육운동 조직으로서, 교육 현장에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약화시키고 사회주의적 가치 체계를 내면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1989년 출범 이후 전교조는 일제 잔재 청산, 민주화, 노동운동 연대 등을 주장하며 사회적 지지를 얻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화된 이념을 앞세운 교육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특히 전교조는 민중 중심의 역사관, 해방신학과 유사한 구조적 억압 서사를 학생 교육에 체계적으로 주입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건국 정신, 시장경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켰다. #전교조는 반미와 사회주의 이념교육, 남침이 아닌 북침의 역사왜곡을 서슴치 않고 교육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일부 전교조 교사는 6·25 전쟁을 ‘북침’ 가능성이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거나, 이승만 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박정희 시대를 단순 독재로만 평가하는 교육 자료를 제공하였다. 제주 4·3 사건, 여순 사건, 광주 민주화운동 등은 맥락 없이 국가 폭력의 상징으로만 다뤄지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태생적으로 부정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러한 역사 교육은 학생들에게 체제 거부감, 국가 불신, 반자본주의 정서를 심어주며, 그들의 정체성을 '억눌린 민중'으로 각인시킨다. 또한 통일교육에서는 북한 체제에 대한 실상보다는 민족 감정과 평화 이데올로기에 집중하며, 주체사상적 사유 구조와 유사한 접근법을 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교조는 이러한 교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학생 인권’과 ‘교육의 중립성’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특정 정치 이념의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편향적 교육을 이어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개인의 자유와 책임, 비판적 사고와 다양성의 존중보다는, 구조적 억압과 계급 해방, 피해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교육 내용이 조직된다. 이는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유 구조로 학생들을 사전 정의하고 의식화하는 ‘교실의 이념화’이며, 그 자체로 교사 권력의 정치화이다. 더 나아가 전교조는 교과서 집필, 교육부 정책 압박, 교육청 장악 등을 통해 교육 행정 전반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2015년 국정교과서 논란 당시, 전교조는 ‘역사 왜곡 반대’라는 명분을 앞세워 좌편향 교육의 기득권을 고수하려 했고, 이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서는 교육의 정치 중립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결국 전교조는 단지 교사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노조가 아니라, 교육이라는 공적 영역을 이용해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확산시키는 전방위적 의식화 기지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4) 참고문헌: 김용삼, 『교과서에 숨은 좌익의 음모』 (2017). 5. 민노총: 계급투쟁적 패거리 윤리의 조직화 민주노총(민노총)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순수한 노동조합을 넘어, 정치적 이념 실현을 위한 강력한 전위조직으로 변모하였다. 1995년 출범 이래 민노총은 각종 산업 현장에서 노동자의 임금과 근로조건 개선을 외치며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지만, 점차 좌파 정치 세력과 결합하면서 그 활동 방향은 노동운동을 넘어 계급혁명론에 근거한 정치 투쟁으로 이행하였다. 단순한 권익 요구를 넘어, 정부의 정책과 체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전복하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투쟁’을 절대화하고 불법적 방식도 정당화하는 집단 윤리가 작동하고 있다. #민노총은 정치권까지 진출하여 자신들의 사상적 투쟁을 하고 있다. 특히 민노총은 노사 갈등을 조정하거나 대화로 해결하기보다는, 총파업, 점거, 물리적 충돌 등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한다. 이는 2023년 화물연대 파업 사례에서도 확인되었는데, 주요 산업 물류망이 마비되고 국가 경제에 막대한 손실이 초래된 상황에서도 민노총은 이를 ‘정의로운 저항’으로 포장하며 사회적 지지를 요청했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조합원이나 비조합원에 대한 폭력, 협박, 물류 차량 방화 등도 보고되었지만, 민노총은 조직 내부에서 이를 제어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성 투쟁 노선을 강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는 노동운동의 정당한 권리를 넘어서 폭력과 강압에 기반한 정치 행동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민노총의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이 구축한 ‘패거리 윤리’이다. 패거리 윤리란 도덕의 기준이 보편적 정의가 아니라, 집단 내 충성도와 이념의 동일성에 따라 결정되는 윤리 체계이다. 민노총은 스스로를 ‘약자’ 또는 ‘민중’의 대변자로 규정하면서, 반대 진영은 곧 ‘기득권’과 ‘적폐’로 낙인찍고 대화와 타협을 거부한다. 이러한 구도는 사회 갈등을 구조화하고, 노동과 자본 간의 협력적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나아가 정치 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국회 입법이나 행정 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노동자’라는 명분으로 실질적인 특권화와 권력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민노총은 정부 정책에도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법안에는 즉각적인 반발과 투쟁을 예고한다. 교육청,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인사에도 관여하며, 조직적으로 정무적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자유민주주의 질서 속에서 보장된 시민단체 활동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평가되며, 오히려 체제 전복을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적 행동방식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민노총은 전교조와 함께 정치적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교육과 노동을 이념적으로 재편하는 데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 사회의 공공성을 좌파 이념으로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결국 민노총은 노동자의 권익이라는 명분 아래 사회 전반을 ‘투쟁과 계급 전쟁’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있으며, 자유와 다양성, 합의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적 가치 대신, 강압과 선동, 이념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조직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바로잡지 않으면, 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의 주체가 아니라,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이념적 행동주의 집단으로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5) 참고문헌: 조전혁,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실체』 (2020). 6. 언론과 미디어의 장악: 이념 확산의 확성기 한국 사회의 언론과 미디어는 원래 권력을 감시하고 공론장을 형성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축으로 기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주요 언론과 방송은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특정 정치 세력과 이념에 경도된 편향된 보도로 인해 ‘이념 확산의 확성기’로 전락하고 있다. 특히 공영방송(KBS, MBC), 지상파 채널, 대형 일간지 등은 ‘진보적 가치’라는 이름 아래 사실 보도보다는 해석과 선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으며,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자유민주주의 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진다. #광우병 선동을 언론들이 앞장서서 보도 왜곡하였음에도 어떤 반성도 없다 언론 편향은 보수 세력에 대해선 ‘가짜뉴스’, ‘적폐’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진보 성향의 세력에 대해서는 실책과 부도덕함마저도 묵인하거나 축소 보도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광우병 사태, 세월호 보도, 조국 사태, 윤미향 논란 등 수많은 사건에서 언론은 동일한 사실을 보도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프레임을 적용했고, 결과적으로 국민 여론을 이념적 감정선에 따라 분열시켜왔다. 특히 일부 언론은 북한 관련 문제나 북핵 위협, 인권 탄압에 대해서는 고의적으로 침묵하거나 미화하는 경향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종북적 관점을 사회적 정당성으로 포장하는 데 일조해왔다. 미디어의 정치화는 기자 개인의 성향 문제가 아니라, 조직 차원에서 특정 정치세력과 연계된 구조적 문제이다. 예컨대 민주당 정부 시절 공영방송 이사진과 사장단 인선 과정에서 친정권 성향 인사들이 대거 임명되었으며, 이후 정치적 논조의 급격한 변화가 관찰되었다. 이러한 보도 편향은 단지 여론 왜곡 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정보 주권과 판단 능력을 훼손하는 중대한 자유 침해로 이어진다. 국민은 이제 뉴스를 소비하면서도 ‘이게 진짜일까?’를 먼저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으며, 언론은 신뢰보다 불신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디지털 플랫폼 시대에 접어들면서,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는 이념적 정보 소비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알고리즘은 이용자가 선호하는 정치 성향의 콘텐츠만을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가 정보의 ‘버블’ 속에 갇히게 만든다. 이 같은 정보의 편향성은 단지 개인의 오해를 넘어, 사회 구성원 간의 상호 신뢰를 무너뜨리고 민주적 합의를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 결국 언론과 미디어는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 중 하나지만, 현재 한국의 언론은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언론은 ‘언론 자유’라는 이름으로 특정 이념의 확산 도구가 되었으며, 다양한 목소리와 균형 잡힌 시각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퇴행을 의미하며, 사회주의적 이념이 감성의 언어와 뉴스 프레임을 통해 대중에게 내면화되는 통로로 기능하고 있다. 언론이 본연의 사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회의 건강한 공론장은 회복될 수 없다. 6) 참고문헌: 정규재, 『언론 권력과 이념의 포획』 (2019). 7. 민주당·진보당과 정치의 좌경화 민주당과 진보당 등 좌파 성향 정당은 단순히 진보적 정책을 지향하는 정당이라기보다, 지난 수십 년간 전교조, 민노총,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 좌파 시민단체 및 이념 세력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정치권력을 통한 체제 전환을 추진해 왔다. 이들의 전략은 대중적 정당성을 얻는 동시에 제도 내 입법력을 활용하여 점진적이고 체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 이는 ‘진보’라는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유시장경제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국가의 개입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대표적으로 이들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차별금지법은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 등을 법적 보호 대상으로 포함시켜 종교·양심·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반대 의견 자체를 범죄시하는 전체주의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부동산 보유세 및 거래세의 급격한 인상, 종부세 강화 정책은 사유재산권을 사실상 제한하며, 자산을 통한 계층 이동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탈원전 정책 또한 비과학적 여론에 기초해 추진되었으며, 한국의 에너지 주권과 산업 경쟁력에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이러한 좌경화 흐름은 단순한 정책 오류라기보다, 민주주의를 외피로 한 '이념 혁명'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정당들은 좌파 시민단체의 요구를 대의제 정치 시스템 안으로 이식하고, 사법부·언론·교육·문화 전반에 좌파 이념을 제도화했다. 국회 입법, 행정부 지침, 지방자치단체 정책을 통해 이념적 담론이 곧 법제도로 전환되며, 이는 체제 변환의 실질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이러한 흐름을 비판하는 세력은 '적폐', '반인권', '극우'라는 프레임으로 낙인찍히며, 공론장 접근 자체가 차단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민주당과 진보당은 정치 영역에서 사회주의적 가치와 의제를 제도권 안에서 구현해낸 정치 기획자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이들이 만들어낸 정책 틀과 담론 구조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7) 참고문헌: 남성일, 『대한민국의 좌경화와 그 해법』 (2020). 8. 문화예술계의 의식화와 반전통성 문화예술계는 본래 자유와 상상력의 공간이며, 다양한 가치와 사유가 공존해야 할 공론의 장이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한국의 문화예술계는 특정 이념, 특히 사회주의적 가치와 급진적 진보 담론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왔다. 영화, 드라마, 연극, 대중음악, 미술, 출판 등 거의 모든 문화 산업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메시지는 '기득권은 악하다', '국가는 억압자다', '민중은 순결한 피해자다'라는 도식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서사는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체제에 대한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게 만든다.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그릇된 시각을 영화를 통해 국민들에게 구가 권력을 왜곡하였다. 특히 영화 <1987>, <변호인>, <택시운전사> 등은 민주화 서사를 통해 국민 감정을 자극하면서, 국가 권력과 보수 진영을 구조적으로 악마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 작품은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지만, 반복되는 서사 구조는 젊은 세대에게 '보수=권위주의=적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동시에 가족, 전통, 신앙, 국가와 같은 보수적 가치는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고, 젠더 해체, 정체성 다원화, 탈국가 담론이 미학적으로 치장되어 확산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현상이 단순한 창작 경향이 아니라, 공적 자금과 제도적 지원을 통해 더욱 제도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예기금과 공공 지원사업이 ‘사회적 소수자’, ‘민주화운동’, ‘혐오 반대’ 등의 키워드를 우선적으로 반영하며, 창작 방향이 자유로운 사유보다 ‘정치적 정당성’에 종속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보수적 주제나 국가 정체성을 긍정하는 콘텐츠는 제작 자체가 어렵고, 배급과 상영에서도 불이익을 겪는 경우가 많다. 결국 문화예술은 자유의 공간이 아니라, 특정 이념을 미학적으로 정당화하는 훈육의 장이 되고 있다. 이처럼 문화는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시민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정치적 판단을 유도하는 ‘의식화의 도구’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지켜야 할 문화적 다양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문화계 수상작과 공공 전시, 연극제, 영화제 등을 보면, 대부분의 작품들이 구조적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 젠더와 인종, 약자 보호 담론을 반복적으로 변주하며, 이는 예술을 통한 사회주의 감성의 이념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 결과, 문화예술계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서적으로 해체하는 전위 부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9) 참고문헌: 이우연, 『문화전쟁과 이념투쟁』 (2018). 9. 한국교회와 기독교 내 사회주의 침투 한국교회는 전통적으로 복음 중심, 성경 권위, 반공 이념에 뿌리를 둔 공동체로서, 국가 발전과 시민 의식 향상에 중대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해방신학, 민중신학, 퀴어신학 등 사회주의 성향의 급진 신학이 신학교 및 교회 내에 침투하면서, 점차 그 정체성과 방향성을 상실하고 있다. 이들 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구조적 억압론을 성경 해석에 도입하여, 죄의 개념을 계급 억압이나 구조 불평등으로 환원시키고, 구원의 개념을 사회적 해방과 평등 실현으로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중심으로 제도화되었으며, NCCK는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도, 반미·반자본·반보수 담론을 적극 전파하고 있다. ‘평화 통일’, ‘소수자 인권’, ‘기후 정의’라는 이름 아래 사회운동과의 결합을 추구하며, 복음은 점점 '사회적 정의의 구호'로 바뀌고 있다. 특히 동성애와 젠더 이슈를 중심으로 한 퀴어신학은 성경의 남녀 창조 질서를 부정하고, 차별금지법 지지로까지 나아가고 있으며, 많은 목회자와 교회들이 이에 동조하거나 침묵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형교회는 '성소수자 인권 주일'을 선포하고 이를 예배에서 다루었으며, 일부 신학교에서는 퀴어신학 강의를 정규과정에 포함시켰다. 설교에서는 ‘구원’보다 ‘억압받는 민중의 연대’가 더 강조되고, 교회의 선교는 ‘정의 구현’과 ‘사회 변혁’이라는 수사로 포장된다. 이러한 전환은 신학의 진화가 아니라, 성경적 복음이 사회주의 이념에 종속되는 사상적 전복이며, 교회의 존재 목적을 왜곡시키는 심각한 오류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급진 신학은 포스트모던 문화와 결합하여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상대화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한 구주이기보다는, 로마제국에 저항한 급진적 혁명가로 묘사되며, 회개와 믿음은 억압 구조에 대한 저항과 해방의 은유로 대체된다. 결국 교회는 죄인을 구원하는 복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정치 담론과 윤리적 행동주의의 장이 되어가고 있으며, 복음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다. 이러한 흐름은 단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교회가 본질을 상실하고 시대정신에 휘둘리는 깊은 영적 위기의 징후다. 성경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죄와 구원에 대한 참된 복음을 회복하지 않는 한, 교회는 진리의 등대가 아닌 시대 정신의 앵무새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 사회정의와 문화현상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다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서부터만이 진정한 교회의 개혁과 부흥이 가능하다. 9) 참고문헌: 이승구, 『해방신학 비판』 (2009). 10. 경제 영역에서의 국가주의 강화 한국 사회의 경제정책은 자유시장 원칙을 기반으로 발전해왔으나, 최근 몇 년 사이 이러한 기조는 점점 후퇴하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 시기를 기점으로 정책 기조는 시장 자율성과 민간 중심 성장에서 국가 주도와 분배 중심 정책으로 급격히 선회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정책의 방향 전환이 아니라, 체제의 성격을 바꾸려는 이념적 기획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국가는 점차 ‘계획자’와 ‘통제자’의 위치로 이동하고 있으며, 개인의 자율성과 재산권, 시장의 경쟁 원리는 위협받고 있다. 부동산 정책을 예로 들면, 임대차 3법, 종합부동산세 인상, 거래세 강화 등은 사유재산권을 제한하고 부의 이전을 강제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시장의 공급과 수요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가격은 정부 규제에 의해 왜곡되었고, 그 결과 전세 대란, 매물 잠김, 공급 부족이라는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부동산을 통한 자산 형성은 죄악시되었고, 다주택자는 '투기 세력'으로 낙인찍혀 정서적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적 경제관의 재현이라 할 수 있으며, 부의 축적은 불의, 평등한 분배는 정의라는 도식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았다. # 원자력을 핵으로 표현하여 의도적 프레임을 만든 환경단체의 포스터 또한 탈원전 정책 역시 시장 원칙과 과학적 판단보다는 이념적 선호에 의해 추진되었다. 신재생 에너지 확대라는 취지 자체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충분한 준비와 산업적 대안을 갖추지 않은 채 원전을 조기 폐쇄하고 신규 건설을 중단함으로써 전력 수급의 불안정성과 산업 경쟁력 저하라는 문제를 초래했다. 전기요금 인상, 전력 수출 감소, 에너지 안보 악화는 불가피한 결과였으며, 이는 국가의 에너지 주권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욱이 해당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과학자, 산업계, 국제사회의 우려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과 공공일자리 확대도 유사한 흐름을 보여준다. 최저임금 인상은 도덕적 명분 아래 추진되었지만, 생산성 대비 임금 상승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고용 여력을 악화시켰고, 결과적으로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역효과를 낳았다. 정부는 이를 보완한다며 단기 알바성 공공일자리를 양산하였지만, 이는 지속 가능한 고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국가는 고용시장에 직접 개입하면서 민간의 활력을 억제하고, 국민의 삶을 국가에 의존시키는 구조를 강화시켰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통제 경제의 전형이다. 더 나아가, ‘소득 주도 성장’이라는 경제 정책은 소비를 촉진해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선의에서 출발했지만, 실질적인 소득이 생산성과 연계되지 않는 이상 성장의 기반은 취약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투자 위축, 외국인 자본 이탈, 고용 감소 등의 부작용이 이어졌고, 중산층은 세금 부담으로 인해 몰락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실험적 정책 실패가 아니라, 체제 전환을 위한 구조적 기획으로 읽혀야 한다. 결국 경제 영역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국가주의 강화는 단순한 복지 확대나 불평등 해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유경제 질서의 해체이며, 민간보다 국가가 중심이 되는 사회주의적 통제 시스템의 확장이다. 국민의 재산권과 자율성이 위협받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경제정책의 이념적 함의를 직시하고 체제 수호를 위한 깊은 사유와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10) 참고문헌: 김대호, 『포퓰리즘 국가의 몰락』 (2021). 11. 결론: 체제 전환의 시대, 깨어 있는 시민 의식의 회복 한국 사회는 지금 단순한 정책 실패나 일시적 혼란을 넘어, 체제 전환의 흐름 한복판에 서 있다. 정치, 교육, 언론, 문화, 종교, 경제 등 사회 전 영역에서 확증편향과 집단 정체성, 도덕적 이분법과 패거리 윤리로 무장한 사회주의적 이념이 점진적으로 구조화되어 왔다. 이러한 흐름은 소리 없이, 그러나 매우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핵심 전략은 특정 이념을 ‘정의’로 포장하고, 반대 의견을 ‘악’으로 낙인찍는 데 있다. 이는 이단 종교의 교리화된 폐쇄성, 내부 결속, 외부 악마화 구조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의식화 전략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단지 경제 체제나 정치 제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의 모든 가치와 규범, 언어와 정서를 통제하고, 개인의 자율성과 신앙, 표현과 소유의 자유를 체계적으로 억압하는 이념적 장치다. 문제는 그것이 매우 '도덕적' 언어로 위장된 채, ‘인권’, ‘평등’, ‘정의’, ‘민주’라는 말로 대중을 무장해제시킨다는 데 있다. 특히 교회와 신앙 공동체조차도 이러한 사회주의 담론의 침투를 경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프레임 안에서 신학을 변형시키고, 복음을 사회 개혁과 정의 구현으로 축소시키는 오류를 범해왔다. 교회는 시대정신을 추종하는 ‘운동의 플랫폼’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세워진 공동체여야 한다. 다시 말해, 교회는 세상을 바꾸는 조직이기 이전에,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자유를 수호하는 사상적·영적 분별력을 회복해야 한다. 교육은 다시 진실을 가르쳐야 하고, 언론은 감시자 역할로 복귀해야 하며, 문화는 상상력의 자유로 되돌아가야 하며, 교회는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정치와 경제는 체제 전환이 아닌 자유의 질서를 지키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 글이 제안한 진단이 오직 절망이 아닌, 분별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자유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지켜내는 자의 몫이다. <참고문헌> 1. Irving L. Janis, Groupthink (1982). 2. Jonathan Haidt, The Righteous Mind (2012). 3. 이정훈, 『자유를 위한 투쟁』 (2021). 4. 김용삼, 『교과서에 숨은 좌익의 음모』 (2017). 5. 조전혁,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실체』 (2020). 6. 정규재, 『언론 권력과 이념의 포획』 (2019). 7. 남성일, 『대한민국의 좌경화와 그 해법』 (2020). 8. 이우연, 『문화전쟁과 이념투쟁』 (2018). 9. 이승구, 『해방신학 비판』 (2009). 10. 김대호, 『포퓰리즘 국가의 몰락』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