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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의가 곧 나의 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영광스러운 신분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인생의 근원적 갈망: 하나님 앞에 설 자격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심장이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 놀라운 진리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에 관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사탄의 본성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태를 가리켜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라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었으며, 마치 교도소에 수감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선포합니다. 우리가 도달할 수 없었던 그 ‘의’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고, 이제 그 하나님의 의가 바로 우리의 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감격적인 속량의 드라마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속의 신비: 죄가 되신 예수님과 의가 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방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는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반을 둡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법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절인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 안에는 우주적인 교환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치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분이 실제로 ‘죄’ 자체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불의로 인해 그분은 실제로 불의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들과 우리 자신을 떠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육체를 떠난 후, 공의의 요구가 모두 만족될 때까지 고통의 장소에 머무르셨습니다. 인류를 위해 고통당하신 분은 다름 아닌 ‘신성(Deity)’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온 인류의 처벌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이제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공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켰다!”라고 선포하셨을 때, 비로소 예수님은 다시 의롭다 함을 얻으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은 이 사실을 못 박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의로우시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분을 믿는 우리가 이제 합법적으로 의로워졌다는 영광스러운 영수증과 같습니다. 덮는 죄에서 씻는 의로: 속죄와 재창조의 능력 우리는 구약 시대의 ‘속죄’와 신약의 ‘의’를 구별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속죄(Atonement)’라는 단어는 죄를 ‘덮는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담 이후 예수님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 인간의 죄를 잠시 덮어두셨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17장 11절이 말하는 피의 제사는 죄를 깨끗하게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죄가 잠시 가려질 뿐, 인간의 본성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결부되어 ‘속죄(덮음)’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덮는 수준을 넘어, 죄를 완전히 씻어내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의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법정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너는 죄가 없다, 의롭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창조가 그랬듯이, 우리를 향한 그분이 선언은 곧 그 선언 그대로입니다. 둘째, 실제적인 재창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Divine Nature)에 참여한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선포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상 의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로 삼으신 것이 확실한 만큼,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를 의가 되게 하셨음도 확실합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즉시 일어나는 영적 실재입니다. 회복된 통치권과 담대한 교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왜 하나뿐인 아들을 죄로 만드시면서까지 우리를 의롭게 하셨을까요? 그 목적은 단 하나, 바로 ‘교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 교제를 끊어버렸고, 인간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잃어버린 그 의와 교제의 특권,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돌려주길 원하셨습니다. 만약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 구원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회복한 우리에게는 놀라운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첫째, 정죄함이 없는 평강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제 우리 마음에는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이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했으니,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담력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담대히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두려움 없이, 열등감 없이 아버지의 임재 안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친밀히 대화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입니다. 셋째, 예수 이름의 권세입니다. 우리의 의가 회복되는 순간, 잃어버린 통치권 역시 회복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인입니다! 이 의가 우리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늘의 법정은 움직이고 기적은 일어나게 합니다. 엘리야가 누렸던 그 기도의 능력이 이제 하나님의 의가 된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복음의 열쇠를 쥐고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타락한 인간을 합법적으로 회복시켜 당신과 똑같이 의로운 존재로 만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고, 그 아들의 생명을 통해 우리를 재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에 어떤 이의나 의문도 품지 마십시오. "내가 과연 의로울까? 내가 이런 실수를 했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이런 질문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행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완전한 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롬 1:17). 이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과거에 얼마나 사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주님이라 고백하는 그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의 그 자체가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행위에 집착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소환하고 정죄하는 일에 익숙하지만 하나님은 현재에 의로운 새로운 피조물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과거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오늘의 새로운 본성을 집중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삶, 그것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신분을 가지고 세상으로 당당히 나아가십시오. 정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아버지가 주시는 화평을 누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스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생생한 실재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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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6
  • 율법의 의와 하나님의 의: 죄의식의 종에서 의의 통치자로
    양봉식 목사(길과생명연구소 소장) AI 이미지 그림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서 겪는가장 큰 내적 갈등은 "분명 구원받았는데, 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를 때 더 마음이 편한가?"라는 의문입니다. 많은 성도가 "나는 의롭다"라고 말하는 것을 교만으로 여기고, "나는 비천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겸손이라 오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거듭난 당신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의'그 자체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사탄의 참소와 환경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이 글을 통해 율법의 의를 넘어 하나님의 의로 옷 입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삶에 적용하는 구체적인 훈련법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율법의 의: 인간의 한계와 정죄의 법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의 의(The Righteousness of the Law)'는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행위와 노력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려는 모든 시도를 뜻합니다. 행위의 완전성 요구 :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율법은 99%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함을 요구하기에,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이 법으로 결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폭로하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판결문 : 하나님의 법은 거룩하지만, 죄인에게는 자비 없는 심판을 선언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은 아무리 선하게 살려 노력해도 결국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판결 아래 갇히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대전환 율법이 우리의 무능함을 증명했다면, 복음은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낸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선물합니다. ① 법정적 전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이것은 영적 교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 '죄 자체'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의를 넘겨받아 '의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과거가 아닌, 우리가 입고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보십니다. ② 생명의 기원: 조에(Zoe)의 소유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Zoe)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7) 그리스도인의 의는 단순히 '죄가 없다'는 상태를 넘어,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인 '조에'를 소유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태어났기에, 그분의 본성인 의로움을 본질적으로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③ 존재론적 재창조: 의로 지어진 새 사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새 사람은 행동이 고쳐진 사람이 아니라, 존재가 다시 창조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은 이제 죄를 지을 수 없는 의로운 본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AI 이미지 그림 3. 의의 회복이 가져오는 5가지 권세 우리가 하나님의 의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이 누리셨던 것과 동일한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당당한 위치(Standing):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더 이상 정죄감에 눌려 고개를 숙이지 않고,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아가 대화할 권리를 가집니다. 친밀한 교제(Fellowship):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종의 두려움이 아닌 자녀의 친밀함으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환경을 다스리는 믿음: 예수님이 폭풍을 꾸짖으시고 죽은 나사로를 부르셨던 것처럼, 의의 의식을 가진 자는 환경 앞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명령하여 다스립니다. 사탄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사탄의 참소는 의의 방패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왕의 통치: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질병, 가난, 저주를 다스리는 왕의 신분을 가집니다. 4. 실전 훈련 가이드: '의의 의식'을 세우는 4단계 의로운 신분을 가졌더라도 오랫동안 길들여진 '죄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음의 구체적인 훈련을 통해 당신의 생각을 새롭게 하십시오. 1단계: 매일 아침 '신분 선포' (Affirmation) 눈을 뜨자마자 거울을 보고 자신의 이름을 넣어 선포하십시오. 이것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진리의 선포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 합법적인 권리가 있다!" "나는 오늘 죄의식에 휘둘리지 않고 의의 본성으로 행한다!“ 2단계: '죄의식'의 언어 삭제하기 자신의 언어 습관에서 '영적 열등감'이 담긴 표현을 지워버리십시오. 수정 전 : "하나님, 이 비천한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수정 후 : "아버지, 저를 의롭게 하시고 아들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나의 공급자이시며 나의 승리이십니다!“ 주의 :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백하되, 그 죄가 당신의 '의인'이라는 신분을 파괴할 수 없음을 믿고 즉시 의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3단계: 말씀 묵상과 동화 (Identification) 다음 세 구절을 매일 3번씩 소리 내어 읽고, 그것이 당신의 현재 모습임을 받아들이십시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내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음을 묵상) 로마서 8:1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요한일서 4:17 :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4단계: 즉각적인 대적 훈련 정죄감이나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즉시 반응하십시오. 상황:과거의 실수나 죄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질 때. 대응 : "사탄아, 너는 거짓말쟁이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는 그 안에서 이미 의로워졌다. 나는 이 정죄감을 거절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 지배자로 사십시오 의(Righteousness)는 단순히 천국 가는 티켓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의 교제를 나누고, 사탄과 질병과 환경을 발아래 두는 지배자의 자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는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보며 "내 의로운 아들아,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이제 그 음성에 화답하십시오. 당신의 의의 의식이 견고해질 때, 당신의 삶에는 기적과 승리가 일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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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1
  • 하나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죽음
    양봉식 목사(길과생명 연구소 소장)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로마서 6:1–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생명으로 가는 길에 놓인 역설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 진리의 깊은 역설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복된 소식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얻는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복된 소식에는 언제나 함께 따라오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은, 반드시 죽음을 통과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생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본질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그 죽음은 영적 죽음,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 영적 죽음이 결국 육신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과 함께 인류에게 들어온 죽음은 바로 이 영적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건이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는 이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로마서 5:19) 비록 육신은 살아 있으나 영으로는 죽은 상태, 곧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이상 영적인 존재로 살지 못하고, 육신 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으며, 그 삶의 열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절망과 어둠, 비참함과 슬픔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말합니다. 죽음이 유익하다고 말입니다. 물론 아무 죽음이나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세상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죽음의 비밀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살려고 애쓰는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는 구약의 모형이 실체로 드러난 삶이었습니다. 구약의 약속이 성취된 삶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의 삶,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왕 노릇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삶은 통치와 다스림의 삶이었고, 동시에 섬김과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부요할 수 있고, 왕이면서도 종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단절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하십니다. 그분 안에 충만하셨던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는 경험을 하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죄가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연합해 계셨던 독생자께서, 죄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처절한 기도였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님과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버림받으셨고, 참으로 죄가 되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셨을 때는 우리와 같지 않으셨지만, 십자가에서는 우리와 완전히 같아지셨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종말 죄 없는 분이 죄가 되어 죽으셨을 때, 그분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로마서 6:6–7) 예수님이 죄인으로 우리와 동일시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여 동일시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의 종말이며,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완전한 해방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결정적 분기점입니다. 이 죽음은 세상이 주는 모든 생명을 폐합니다. 자랑도, 채무도, 얽매임도 함께 끝납니다. 우리는 악한 것뿐 아니라, 선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분별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로새서 2:14) 이제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해방이며 자유입니다. 십자가의 현재성, 그리고 믿음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의 현재성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현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지” 하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것은 완료된 사실입니다. 죽음 안에 있는 생명 예수님과 연합한 온전한 죽음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그분이 내 안에 사실 때, 이전의 나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이 펼쳐집니다. 연합된 죽음은 삶의 자리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내가 애써서 죽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자아를 꺾으려 할 때는 언제나 억울함과 자기 의가 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에는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생명으로 충만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관념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구체적인 삶의 십자가 자리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십시오. 그곳에서 죽고, 그곳에서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관련기사 :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 부르는가? 관련기사 :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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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4
  •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가?
    양봉식 목사(길과 생명연구소) 1. 신적 존재인가, 아버지인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대개 초월적인 신적 존재로 인식된다. 엄중하고 근엄하며,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예배 속에서, 기도 속에서, 관계의 언어로 하나님을 대한다. 문제는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명확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은 틀리지 않지만 충분하지 않다. 신앙의 고백에는 언제나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 2. 성경은 우리를 ‘입양된 자녀’라 말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존재라고 설명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본래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그 관계는 회복되었다. 바울이 ‘양자(입양)’라는 개념을 사용한 이유는 분명하다. 혈연이 아닌 자가 법적 절차를 통해 자녀의 권리를 획득한 상태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비유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언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라 선언하신다(롬 8:16–17). 3. 그러나 ‘아버지’는 법적 개념만이 아니다 입양은 법적으로 보장된 신분이지만, 혈연적 출생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해외 입양아들이 성인이 되어 자신의 생물학적 부모를 찾으려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본다. 법적 신분과 생명의 근원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는 단지 ‘입양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생명적 근거 때문이다. 4.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신 이유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직접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아바’는 당시 아람어로,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가장 친밀한 표현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이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었고, 이제 그 생명이 믿는 자들 안에도 동일하게 주어졌다. 5. 기도의 시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게 하셨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처음에는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지만 부활 이후에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제자들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왔고, 예수님이 누리던 부자(父子) 관계로 그들도 초대되었음을 의미한다. 6. 거듭남: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는가? 성경은 이것을 거듭남(Born Again)이라 부른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곧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생명(Zoe)을 받는 사건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것은 육신의 출생이 아니라 영적 출생이다. 인간의 유한한 생명(Bios)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Zoe)이 주입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만드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낳으신 분이 된다. 7. 같은 근원, 같은 생명, 같은 아버지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신 분이며, 믿는 자들은 그분을 통해 같은 영적 근원을 갖게 되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나 제자가 아니라 형제라 부르신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아버지의 생명을 나눈 하늘의 가족이다. 8. ‘아버지’라는 호칭의 신학적 무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결정적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곧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두는 것이며, 신성을 소유한 자란 말이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명백한 신성모독으로 여긴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믿는 자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존재가 되었다. 이 말은 믿는 자들도 신성을 소유한 자, 하나님의 성품, 생명을 소유한 신의 자녀라는 것이다. 9. 하나님의 씨, 하나님의 성품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안에 ‘하나님의 씨’가 거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요일 3:9)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 씨는 하나님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성품이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 1:4) 10. 육신의 아버지와 하늘 아버지 우리는 모두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 자란다. 육신의 아버지는 연약하고, 때로는 상처를 남긴다. 자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아버지를 닮아간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다르다. 그분은 영이시며, 상처를 전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거듭난 자 안에 당신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원하신다. 11. 마음의 새로움, 생명의 풍성함 하나님의 자녀는 새롭게 살아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출발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 옛사람은 죽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으로 부름받았다. 12.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이제 이렇게 고백해 보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여기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라. 울림이 다를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필요를 아시고, 우리의 삶을 생각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아빠 아버지이시다.
    • 다시 읽는 복음
    • 하나님나라 복음
    2026-01-28
  •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양봉식 목사(길과 생명연구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담의 자손들을 다시 회복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획을 실행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 전에,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그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을 때, 성령님으로 잉태하셨으며,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 수많은 얻게 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들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죽음이며, 그 죽음을 통해 비로소 인류 가운데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6)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이 생명은 오직 하늘에서 오는 것으로 믿는 자는 땅에서 태어난 육신의 출생과 다른 하늘에서 오는 새로운 출생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태어나신 것처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늘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며, 그 생명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성품, 혹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 자라고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소식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사함이 아닌 하니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 새로운 피조물에 관한 것입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마귀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어둠에서 빛의 존재가 된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복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 제칩니다. 현실에 있으면서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낯설면서도 가장 친밀한 삶, 현실의 시간을 넘어서 경이로운 세계를 들어가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실상의 세계, 즉 살아 계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셰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이 경이로운 세계와 보이는 현실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입니다. 이 생명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태초부터 예정하신 계획이 분명해질 뿐만 아니라 삶에 의미가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실 때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고 다가올 미래의 일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그 생명을 간절히 원하고 믿는다고 예수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주셨음을 고백하는 자는 누리기 시작합니다. 삶의 유일한 기적은 바로 이 생명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똑같은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아무런 대가 없이 오직 믿기만 하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생명(조에, ζωὴ)은 단순히 “죽지 않는 생명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인간 안에 들어와 작동하는 실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이미 이 생명을 받았습니다(요 5:24).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이 말씀은 왜 이미 받은 생명이 더 풍성해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 생명이 실제 삶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를 묻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1. 왜 하나님의 생명은 ‘소유’가 아니라 ‘충만’이어야 하는가 첫 번째, 생명은 씨앗이 아니라 ‘통치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날 때 하나님의 생명은 씨앗처럼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그러나 씨앗은 심어졌다고 자동으로 숲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은 “새로운 피조물”의 신분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10은 그 신분이 삶 전체를 지배하는 상태로 확장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즉, 조에는 단순한 ‘출생 사건’이 아니라 ‘삶을 지배하는 생명 질서’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왜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하지 않으면 ‘구원받은 옛 사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은 받았지만, 사고방식은 여전히 육신 중심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육신이 중심이 되면 육신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명을 따르지 않게 되면 삶에서 나타나는 반응은 두려움과 분노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리고 삶의 결정은 세상 논리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는 생명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명이 통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골 2:6) 받은 생명으로 ‘행하지 않으면’, 생명은 잠재력에 머물 뿐입니다. 2.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질 때 그리스도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일까요? 먼저는 하나님의 생명은 ‘죄를 참는 힘’이 아니라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작동합니다 로마서 8장은 조에의 작동 방식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롬 8:2)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감정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 원리입니다. 죄를 참는 윤리가 아니라 죄를 넘어서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이 생명이 풍성해질수록 그리스도인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게 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생명의 풍성함을 의미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말씀의 지배가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가득할 때, 그 말씀은 생명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생명은 정체성을 ‘증명’이 아니라 ‘표현’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부족할수록 사람은 인정받으려 애쓰고, 자기 의를 세우고 비교와 경쟁 속에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지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아들은 증명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드러날 뿐입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존재는 변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하고 착하게 살아도 죄인이자 마귀 자녀입니다. 노력해도 그 정체성은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천상에서 빛나는 존재입니다. 흰 옷을 입은 의롭고 거룩한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찮아 보이고, 성공하지 못하고, 잘 못살아도 영의 세계에서는 빛나는 존재입니다. 숨어있어도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냥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 마귀도 알고 천사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즉 아들이면 이렇게 해 봐 라고 미혹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진짜 아들이다”라고 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성령님이 보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뭐래도 유일하신 독생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처럼 생각하고 아들처럼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인을 ‘애써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품을 흘려보내는 존재’로 만듭니다. 네 번째, 하나님의 생명은 고난의 의미를 바꿉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세력이 약해지면 고난은 항상 질문이 됩니다. “왜 나에게?” “왜 하나님이 허락하셨지?” 그러나 생명이 풍성해질수록 고난은 차단막이 아니라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나님의 생명은 고난을 제거하기보다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내게 합니다. 다섯 번째, 하나님의 생명의 풍성함은 교회를 ‘조직’이 아니라 ‘몸’으로 작동하게 합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이 많은 이유는 대부분 조직 논리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풍성해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몸의 조직인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유연하게 서로를 위해 헌신합니다. “온 몸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16) 조에는 교회를 규칙으로 유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명이 흐르며 자라는 몸으로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은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 새사람입니다. 그런데 새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계속 변화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하게 되어 있고 변화하는 것만이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 또한 이 초점에 맞추어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율법적인 완전함을 하나님의 온전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또 자기 생각의 틀에 갇혀 생명의 욕구를 제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온전함은 '생명의 성장'입니다. 매일매일 생명의 영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 새사람의 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실 때 생명의 언약을 주십니다. 그 뜻이 주어지는 것은 10년, 20년, 후은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씨는 아무리 작아도 생명이기에 반드시 자라고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비밀에 속한 영역은 알 수 없기에. 그 언약이 실현되는 동안 매일 깨어나는 새로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뜻은 단순히 일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기경하고 영적 실상을 바라보는 눈이 깨어나야 합니다. Already, but Not Yet(이미와 아직) 어둠의 진영은 끊임없이 이 단순한 믿음을 반대하고 박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실현되는 것을 결코 방해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박히셨을 때 드디어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승리를 믿고 나갈 때 우리의 옛사람, 자아가 깨지면서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점점 알게 됩니다.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중요한 일이 함께 따라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옛사람의 영역을 다루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고 하나님께 생명을 받아 새사람으로 거듭났을지라도, 옛사람으로 살아오며 무의식적으로 고집했던 지-정-의의 삶의 방식들까지 모두 정복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 믿음은 '이미(already)' 이루어졌지만 '아직(not yet)' 이루어지지 않은 긴장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망의 옛 영역을 완전히 정복하고 새로운 생명의 영역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짧은 기도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하나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또 하나의 산고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 길은 목자되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가야 하는 길입니다. 3. 결국, 왜 하나님의 생명은 풍성해야 하는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존재의 신분이 아니라 삶의 통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풍성하지 않으면 구원받았어도 여전히 육신의 방식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죄, 두려움, 죽음, 고난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이 풍성해질 때,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 증거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천국행 티켓”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넣으셨고, 그 생명이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로새서 1:27)
    • 다시 읽는 복음
    • 하나님나라 복음
    2026-01-21
  • 삼위일체적으로 지어진 사람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나 이성적 피조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체가 온전히 조화를 이루는 삼위일체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창세기 1장의 말씀에서 가장 근본적인 실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의 통치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늘과 땅을 동시에 접촉하는 중보적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1. 인간의 영과 혼: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된 자리 창세기 2장 7절은 인간의 영적 기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נֶפֶשׁ חַיָּה, nephesh chayyah, 생혼)이 되니라.” 여기서 말하는 ‘생기’(히브리어 nĕshāmāh)는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적 본질의 부여, 곧 Zoe(요 1:4)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동물들과 구별되는 영적 존재가 되었고, 영은 하나님의 생명과 교통하는 기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타락 전 아담의 영은 하나님과 끊김 없이 연결된 통로였습니다. 그 안에는 정죄도, 분리도, 자아적 욕망도 없었으며, 오직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는 그릇이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되었습니다. 또한 영(생명) 안에 혼이 함께 했습니다. ‘생령’은 “살아있는 혼”이라는 뜻입니다. 즉 생명과 연합된 혼으로 혼은 몸과 연합하지 않고 생명(영)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2. 인간의 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해석하고 적용하는 중개자 혼(히브리어 nephesh, 헬라어 psyche)은 생각하고 느끼며 선택하는 인격의 자리입니다. 아담의 혼은 타락 이전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왜곡하지 않았고, 오로지 영을 통해 공급되는 하나님의 생명과 지혜에 순복하였습니다. 혼은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육체를 통해 땅 위에 구현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감정은 왜곡되지 않았고, 의지는 거역하지 않았으며, 지성은 어둠에 덮이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혼은 하나님을 닮은 인격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자유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 안에서 자유로운 것이었습니다. 3. 인간의 육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도구이자 성전 사도 바울은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고전 6:19). 타락 이전의 아담의 육체는 영과 혼이 드러나는 순결한 통로였습니다. 몸은 죄의 도구가 아니었고, 오히려 이 땅을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로 다스리기 위한 사역의 현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몸을 통해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만물을 관리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실제화하는 대리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 몸은 영과 혼이 조화를 이루어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조율된 도구였습니다. 삼위일체적 인간 존재: 조화와 섬김의 구조 인간은 영과 혼과 몸이 서로 충돌하거나 갈등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일치하는 삼위일체적 구조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영은 하늘의 계시를 받고, 혼은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육체는 그것을 이 땅에 실현했습니다. 이 구조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성령의 삼위일체 구조를 닮은 질서입니다.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본질과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랑과 연합의 질서입니다. 이처럼 아담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영적 유기체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몸소 드러낼 수 있는 신적 위임을 받은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은 말씀을 혼이 중심이 되어 해석하고, 그것을 육체에 반영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사단은 미혹을 통해 사람의 혼을 공략했습니다. 혼은 사단의 미혹의 말을 따라, 선악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에서 “죽을까 하노라”로 자기 방식으로 해석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와의 말에 사단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며 하나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말을 마음에 받아들였습니다. 즉 생명 말씀(하나님의 생명)을 거절하고 죽음의 말(사단의 본성)을 마음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말은 영입니다. 아담 하과와는 하나님의 영인 말씀을 마음에 두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영인 거짓의 말을 마음에 두게 된 것입니다. 타락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 단절되고, 인간의 영과 혼과 육체의 삼위일체의 연합이 깨지고 서로 충돌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결이 끊어졌고,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자 영의 죽음이 왔습니다. 영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영은 존재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는 사단에 대해 살았으며, 그 본성은 악해졌습니다. 영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는 기능적 상실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타락의 결과-육신이 된 인간 영 안에서 있던 혼이 하나님의 생명을 떠나버리자, 자율성과 탐욕에 빠졌습니다. 혼은 육체와 연합해서 육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신을 통해 보이는 세계, 이 세대를 따라 지식을 만들었습니다. 아담 이후 인류는 계시 지식이 아닌 감각의 지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이 지식은 구원을 가르치거나,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육체는 정욕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의 지식을 받을 수 없는 혼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오직 육체와 연합하며 지식을 스스로 만드는 육신이 되었습니다. 육은 썩을 것이 되었으며 감각에 초점을 맞추며 살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적 조화는 깨어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된 상태로 드러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연합된 삼위일체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지면, 영은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되지 못하였으며, 혼은 육체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 영역은 타락으로 인해 삼위일체의 삶을 구현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세 영역 모두를 다시금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영은 새롭게 되었으며, 마음은 혼과 육체 역시 십자가에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새롭게 된 영을 따라 마음(혼)을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육체 역시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삼위일체의 연합을 경험하게 됩니다. 관련 동영상 : 삼위일체로 창조된 사람
    • 다시 읽는 복음
    • 하나님나라 복음
    2025-05-12

실시간 하나님나라 복음 기사

  • 하나님의 의가 곧 나의 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영광스러운 신분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인생의 근원적 갈망: 하나님 앞에 설 자격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심장이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는 놀라운 진리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에 관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이 가진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어떻게 하면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었고, 사탄의 본성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상태를 가리켜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라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었으며, 마치 교도소에 수감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선포합니다. 우리가 도달할 수 없었던 그 ‘의’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고, 이제 그 하나님의 의가 바로 우리의 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감격적인 속량의 드라마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속의 신비: 죄가 되신 예수님과 의가 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방법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위치는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반을 둡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법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요절인 고린도후서 5장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절 안에는 우주적인 교환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위해 제물을 바치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분이 실제로 ‘죄’ 자체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불의로 인해 그분은 실제로 불의하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의 대속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들과 우리 자신을 떠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육체를 떠난 후, 공의의 요구가 모두 만족될 때까지 고통의 장소에 머무르셨습니다. 인류를 위해 고통당하신 분은 다름 아닌 ‘신성(Deity)’이셨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온 인류의 처벌을 능히 감당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이제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공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켰다!”라고 선포하셨을 때, 비로소 예수님은 다시 의롭다 함을 얻으셨습니다. 로마서 4장 25절은 이 사실을 못 박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이 의로우시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분을 믿는 우리가 이제 합법적으로 의로워졌다는 영광스러운 영수증과 같습니다. 덮는 죄에서 씻는 의로: 속죄와 재창조의 능력 우리는 구약 시대의 ‘속죄’와 신약의 ‘의’를 구별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속죄(Atonement)’라는 단어는 죄를 ‘덮는다’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담 이후 예수님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황소와 염소의 피로 인간의 죄를 잠시 덮어두셨습니다. 하지만 레위기 17장 11절이 말하는 피의 제사는 죄를 깨끗하게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죄가 잠시 가려질 뿐, 인간의 본성 자체가 변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결부되어 ‘속죄(덮음)’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는 죄를 덮는 수준을 넘어, 죄를 완전히 씻어내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의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법정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너는 죄가 없다, 의롭다!”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창조가 그랬듯이, 우리를 향한 그분이 선언은 곧 그 선언 그대로입니다. 둘째, 실제적인 재창조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Divine Nature)에 참여한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선포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단순히 ‘용서받은 죄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상 의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로 삼으신 것이 확실한 만큼,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순간 우리를 의가 되게 하셨음도 확실합니다. 이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즉시 일어나는 영적 실재입니다. 회복된 통치권과 담대한 교제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왜 하나뿐인 아들을 죄로 만드시면서까지 우리를 의롭게 하셨을까요? 그 목적은 단 하나, 바로 ‘교제’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 교제를 끊어버렸고, 인간에게서 통치권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잃어버린 그 의와 교제의 특권, 그리고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돌려주길 원하셨습니다. 만약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 구원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회복한 우리에게는 놀라운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첫째, 정죄함이 없는 평강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이제 우리 마음에는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최고 법정이 우리를 의롭다고 판결했으니,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둘째,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담력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담대히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두려움 없이, 열등감 없이 아버지의 임재 안으로 발을 내딛습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 친밀히 대화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입니다. 셋째, 예수 이름의 권세입니다. 우리의 의가 회복되는 순간, 잃어버린 통치권 역시 회복되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 곧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인입니다! 이 의가 우리에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늘의 법정은 움직이고 기적은 일어나게 합니다. 엘리야가 누렸던 그 기도의 능력이 이제 하나님의 의가 된 그리스도인의 것입니다. 복음의 열쇠를 쥐고 세상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타락한 인간을 합법적으로 회복시켜 당신과 똑같이 의로운 존재로 만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고, 그 아들의 생명을 통해 우리를 재창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생각에 어떤 이의나 의문도 품지 마십시오. "내가 과연 의로울까? 내가 이런 실수를 했는데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이런 질문은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의 행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완전한 의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롬 1:17). 이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과거에 얼마나 사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영접하고 주님이라 고백하는 그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의 그 자체가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행위에 집착합니다 우리는 과거를 소환하고 정죄하는 일에 익숙하지만 하나님은 현재에 의로운 새로운 피조물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과거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오늘의 새로운 본성을 집중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타내는 삶, 그것이 의롭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놀라운 신분을 가지고 세상으로 당당히 나아가십시오. 정죄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아버지가 주시는 화평을 누리며,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스리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생생한 실재가 되어,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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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나라 복음
    2026-02-16
  • 율법의 의와 하나님의 의: 죄의식의 종에서 의의 통치자로
    양봉식 목사(길과생명연구소 소장) AI 이미지 그림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에서 겪는가장 큰 내적 갈등은 "분명 구원받았는데, 왜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를 때 더 마음이 편한가?"라는 의문입니다. 많은 성도가 "나는 의롭다"라고 말하는 것을 교만으로 여기고, "나는 비천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겸손이라 오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거듭난 당신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의'그 자체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사탄의 참소와 환경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이 글을 통해 율법의 의를 넘어 하나님의 의로 옷 입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삶에 적용하는 구체적인 훈련법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율법의 의: 인간의 한계와 정죄의 법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의 의(The Righteousness of the Law)'는 인간이 자신의 도덕적 행위와 노력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서려는 모든 시도를 뜻합니다. 행위의 완전성 요구 :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율법은 99%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함을 요구하기에,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이 법으로 결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는 거울 :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폭로하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판결문 : 하나님의 법은 거룩하지만, 죄인에게는 자비 없는 심판을 선언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은 아무리 선하게 살려 노력해도 결국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는 판결 아래 갇히게 됩니다. 2.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대전환 율법이 우리의 무능함을 증명했다면, 복음은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낸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선물합니다. ① 법정적 전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이것은 영적 교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가져가 '죄 자체'가 되셨고, 우리는 그분의 의를 넘겨받아 '의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과거가 아닌, 우리가 입고 있는 '그리스도의 의'를 보십니다. ② 생명의 기원: 조에(Zoe)의 소유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Zoe)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7) 그리스도인의 의는 단순히 '죄가 없다'는 상태를 넘어,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인 '조에'를 소유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태어났기에, 그분의 본성인 의로움을 본질적으로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③ 존재론적 재창조: 의로 지어진 새 사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4) 새 사람은 행동이 고쳐진 사람이 아니라, 존재가 다시 창조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은 이제 죄를 지을 수 없는 의로운 본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AI 이미지 그림 3. 의의 회복이 가져오는 5가지 권세 우리가 하나님의 의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이 누리셨던 것과 동일한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당당한 위치(Standing):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더 이상 정죄감에 눌려 고개를 숙이지 않고,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아가 대화할 권리를 가집니다. 친밀한 교제(Fellowship):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종의 두려움이 아닌 자녀의 친밀함으로 하나님과 소통합니다. 환경을 다스리는 믿음: 예수님이 폭풍을 꾸짖으시고 죽은 나사로를 부르셨던 것처럼, 의의 의식을 가진 자는 환경 앞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명령하여 다스립니다. 사탄으로부터의 자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사탄의 참소는 의의 방패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왕의 통치: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질병, 가난, 저주를 다스리는 왕의 신분을 가집니다. 4. 실전 훈련 가이드: '의의 의식'을 세우는 4단계 의로운 신분을 가졌더라도 오랫동안 길들여진 '죄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음의 구체적인 훈련을 통해 당신의 생각을 새롭게 하십시오. 1단계: 매일 아침 '신분 선포' (Affirmation) 눈을 뜨자마자 거울을 보고 자신의 이름을 넣어 선포하십시오. 이것은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진리의 선포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설 합법적인 권리가 있다!" "나는 오늘 죄의식에 휘둘리지 않고 의의 본성으로 행한다!“ 2단계: '죄의식'의 언어 삭제하기 자신의 언어 습관에서 '영적 열등감'이 담긴 표현을 지워버리십시오. 수정 전 : "하나님, 이 비천한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세요..." 수정 후 : "아버지, 저를 의롭게 하시고 아들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나의 공급자이시며 나의 승리이십니다!“ 주의 :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백하되, 그 죄가 당신의 '의인'이라는 신분을 파괴할 수 없음을 믿고 즉시 의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3단계: 말씀 묵상과 동화 (Identification) 다음 세 구절을 매일 3번씩 소리 내어 읽고, 그것이 당신의 현재 모습임을 받아들이십시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내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음을 묵상) 로마서 8:1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요한일서 4:17 :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4단계: 즉각적인 대적 훈련 정죄감이나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즉시 반응하십시오. 상황:과거의 실수나 죄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질 때. 대응 : "사탄아, 너는 거짓말쟁이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나는 그 안에서 이미 의로워졌다. 나는 이 정죄감을 거절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다!" 지배자로 사십시오 의(Righteousness)는 단순히 천국 가는 티켓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의 교제를 나누고, 사탄과 질병과 환경을 발아래 두는 지배자의 자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는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보며 "내 의로운 아들아, 딸아"라고 부르십니다. 이제 그 음성에 화답하십시오. 당신의 의의 의식이 견고해질 때, 당신의 삶에는 기적과 승리가 일상이 될 것입니다.
    • 다시 읽는 복음
    • 하나님나라 복음
    2026-02-11
  • 하나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죽음
    양봉식 목사(길과생명 연구소 소장)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로마서 6:1–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생명으로 가는 길에 놓인 역설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것, 이것이 기독교 진리의 깊은 역설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복된 소식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생명을 얻는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기쁨입니다. 그러나 이 복된 소식에는 언제나 함께 따라오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은, 반드시 죽음을 통과한 생명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생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본질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죽음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반드시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그 죽음은 영적 죽음, 곧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 영적 죽음이 결국 육신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과 함께 인류에게 들어온 죽음은 바로 이 영적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건이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류는 이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로마서 5:19) 비록 육신은 살아 있으나 영으로는 죽은 상태, 곧 하나님과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이상 영적인 존재로 살지 못하고, 육신 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으며, 그 삶의 열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비밀 죽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은 절망과 어둠, 비참함과 슬픔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말합니다. 죽음이 유익하다고 말입니다. 물론 아무 죽음이나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세상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죽음의 비밀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살려고 애쓰는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는 구약의 모형이 실체로 드러난 삶이었습니다. 구약의 약속이 성취된 삶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의 삶,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왕 노릇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삶은 통치와 다스림의 삶이었고, 동시에 섬김과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부요할 수 있고, 왕이면서도 종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경험하신 단절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전혀 다른 경험을 하십니다. 그분 안에 충만하셨던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는 경험을 하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죄가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연합해 계셨던 독생자께서, 죄가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처절한 기도였습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님과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버림받으셨고, 참으로 죄가 되셨습니다. 육신을 입으셨을 때는 우리와 같지 않으셨지만, 십자가에서는 우리와 완전히 같아지셨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종말 죄 없는 분이 죄가 되어 죽으셨을 때, 그분은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로마서 6:6–7) 예수님이 죄인으로 우리와 동일시되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여 동일시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의 종말이며,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완전한 해방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결정적 분기점입니다. 이 죽음은 세상이 주는 모든 생명을 폐합니다. 자랑도, 채무도, 얽매임도 함께 끝납니다. 우리는 악한 것뿐 아니라, 선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죽습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분별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로새서 2:14) 이제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해방이며 자유입니다. 십자가의 현재성, 그리고 믿음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의 현재성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현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지” 하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것은 완료된 사실입니다. 죽음 안에 있는 생명 예수님과 연합한 온전한 죽음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그분이 내 안에 사실 때, 이전의 나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이 펼쳐집니다. 연합된 죽음은 삶의 자리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 이유는, 여전히 ‘내가 애써서 죽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자아를 꺾으려 할 때는 언제나 억울함과 자기 의가 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에는 시체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생명으로 충만한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관념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구체적인 삶의 십자가 자리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십시오. 그곳에서 죽고, 그곳에서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관련기사 : 하나님을 왜 아버지라 부르는가? 관련기사 :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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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4
  •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가?
    양봉식 목사(길과 생명연구소) 1. 신적 존재인가, 아버지인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대개 초월적인 신적 존재로 인식된다. 엄중하고 근엄하며,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예배 속에서, 기도 속에서, 관계의 언어로 하나님을 대한다. 문제는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명확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은 틀리지 않지만 충분하지 않다. 신앙의 고백에는 언제나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 2. 성경은 우리를 ‘입양된 자녀’라 말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된 존재라고 설명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본래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그 관계는 회복되었다. 바울이 ‘양자(입양)’라는 개념을 사용한 이유는 분명하다. 혈연이 아닌 자가 법적 절차를 통해 자녀의 권리를 획득한 상태를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비유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언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라 선언하신다(롬 8:16–17). 3. 그러나 ‘아버지’는 법적 개념만이 아니다 입양은 법적으로 보장된 신분이지만, 혈연적 출생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해외 입양아들이 성인이 되어 자신의 생물학적 부모를 찾으려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본다. 법적 신분과 생명의 근원은 다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는 단지 ‘입양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생명적 근거 때문이다. 4.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신 이유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직접 “아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아바’는 당시 아람어로,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가장 친밀한 표현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부르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이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었고, 이제 그 생명이 믿는 자들 안에도 동일하게 주어졌다. 5. 기도의 시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게 하셨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처음에는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지만 부활 이후에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제자들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왔고, 예수님이 누리던 부자(父子) 관계로 그들도 초대되었음을 의미한다. 6. 거듭남: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는가? 성경은 이것을 거듭남(Born Again)이라 부른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곧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생명(Zoe)을 받는 사건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것은 육신의 출생이 아니라 영적 출생이다. 인간의 유한한 생명(Bios)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Zoe)이 주입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만드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낳으신 분이 된다. 7. 같은 근원, 같은 생명, 같은 아버지 예수님은 하늘에서 나신 분이며, 믿는 자들은 그분을 통해 같은 영적 근원을 갖게 되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나 제자가 아니라 형제라 부르신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아버지의 생명을 나눈 하늘의 가족이다. 8. ‘아버지’라는 호칭의 신학적 무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결정적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그분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곧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로 두는 것이며, 신성을 소유한 자란 말이다. 유대인들은 '아버지'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명백한 신성모독으로 여긴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물러서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믿는 자들 또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존재가 되었다. 이 말은 믿는 자들도 신성을 소유한 자, 하나님의 성품, 생명을 소유한 신의 자녀라는 것이다. 9. 하나님의 씨, 하나님의 성품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안에 ‘하나님의 씨’가 거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요일 3:9)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 씨는 하나님의 생명이요, 하나님의 성품이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 1:4) 10. 육신의 아버지와 하늘 아버지 우리는 모두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 자란다. 육신의 아버지는 연약하고, 때로는 상처를 남긴다. 자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아버지를 닮아간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다르다. 그분은 영이시며, 상처를 전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거듭난 자 안에 당신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원하신다. 11. 마음의 새로움, 생명의 풍성함 하나님의 자녀는 새롭게 살아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출발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 옛사람은 죽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삶으로 부름받았다. 12.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이제 이렇게 고백해 보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여기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라. 울림이 다를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필요를 아시고, 우리의 삶을 생각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아빠 아버지이시다.
    • 다시 읽는 복음
    • 하나님나라 복음
    2026-01-28
  •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양봉식 목사(길과 생명연구소)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담의 자손들을 다시 회복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분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획을 실행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 전에,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그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태어나셨을 때, 성령님으로 잉태하셨으며,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 수많은 얻게 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들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죽음이며, 그 죽음을 통해 비로소 인류 가운데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4-16)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이 생명은 오직 하늘에서 오는 것으로 믿는 자는 땅에서 태어난 육신의 출생과 다른 하늘에서 오는 새로운 출생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태어나신 것처럼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늘로부터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며, 그 생명을 가진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성품, 혹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 자라고 말합니다. 정말 놀라운 소식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사함이 아닌 하니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 새로운 피조물에 관한 것입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마귀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어둠에서 빛의 존재가 된 이야기가 복음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복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열어 제칩니다. 현실에 있으면서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낯설면서도 가장 친밀한 삶, 현실의 시간을 넘어서 경이로운 세계를 들어가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실상의 세계, 즉 살아 계신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셰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이 경이로운 세계와 보이는 현실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입니다. 이 생명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태초부터 예정하신 계획이 분명해질 뿐만 아니라 삶에 의미가 살아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실 때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과거의 일이 아니고 다가올 미래의 일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그 생명을 간절히 원하고 믿는다고 예수님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주셨음을 고백하는 자는 누리기 시작합니다. 삶의 유일한 기적은 바로 이 생명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똑같은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아무런 대가 없이 오직 믿기만 하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생명(조에, ζωὴ)은 단순히 “죽지 않는 생명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 인간 안에 들어와 작동하는 실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이미 이 생명을 받았습니다(요 5:24).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 10:10) 이 말씀은 왜 이미 받은 생명이 더 풍성해져야 하는가, 그리고 그 생명이 실제 삶에서 어떤 일을 하는가를 묻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1. 왜 하나님의 생명은 ‘소유’가 아니라 ‘충만’이어야 하는가 첫 번째, 생명은 씨앗이 아니라 ‘통치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날 때 하나님의 생명은 씨앗처럼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그러나 씨앗은 심어졌다고 자동으로 숲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은 “새로운 피조물”의 신분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10은 그 신분이 삶 전체를 지배하는 상태로 확장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즉, 조에는 단순한 ‘출생 사건’이 아니라 ‘삶을 지배하는 생명 질서’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왜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하지 않으면 ‘구원받은 옛 사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은 받았지만, 사고방식은 여전히 육신 중심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육신이 중심이 되면 육신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명을 따르지 않게 되면 삶에서 나타나는 반응은 두려움과 분노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리고 삶의 결정은 세상 논리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는 생명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명이 통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골 2:6) 받은 생명으로 ‘행하지 않으면’, 생명은 잠재력에 머물 뿐입니다. 2.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질 때 그리스도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일까요? 먼저는 하나님의 생명은 ‘죄를 참는 힘’이 아니라 ‘죄를 이기는 능력’으로 작동합니다 로마서 8장은 조에의 작동 방식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롬 8:2)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감정이 아니라 새로운 지배 원리입니다. 죄를 참는 윤리가 아니라 죄를 넘어서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이 생명이 풍성해질수록 그리스도인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게 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생명의 풍성함을 의미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말씀의 지배가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마음에 가득할 때, 그 말씀은 생명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생명은 정체성을 ‘증명’이 아니라 ‘표현’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부족할수록 사람은 인정받으려 애쓰고, 자기 의를 세우고 비교와 경쟁 속에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해지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아들은 증명하지 않습니다. 아들은 드러날 뿐입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존재는 변하지 않습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하고 착하게 살아도 죄인이자 마귀 자녀입니다. 노력해도 그 정체성은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는 천상에서 빛나는 존재입니다. 흰 옷을 입은 의롭고 거룩한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찮아 보이고, 성공하지 못하고, 잘 못살아도 영의 세계에서는 빛나는 존재입니다. 숨어있어도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냥 드러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 마귀도 알고 천사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즉 아들이면 이렇게 해 봐 라고 미혹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진짜 아들이다”라고 외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성령님이 보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뭐래도 유일하신 독생자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처럼 생각하고 아들처럼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리스도인을 ‘애써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품을 흘려보내는 존재’로 만듭니다. 네 번째, 하나님의 생명은 고난의 의미를 바꿉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세력이 약해지면 고난은 항상 질문이 됩니다. “왜 나에게?” “왜 하나님이 허락하셨지?” 그러나 생명이 풍성해질수록 고난은 차단막이 아니라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지극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하나님의 생명은 고난을 제거하기보다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드러내게 합니다. 다섯 번째, 하나님의 생명의 풍성함은 교회를 ‘조직’이 아니라 ‘몸’으로 작동하게 합니다.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이 많은 이유는 대부분 조직 논리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풍성해지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몸의 조직인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유연하게 서로를 위해 헌신합니다. “온 몸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16) 조에는 교회를 규칙으로 유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생명이 흐르며 자라는 몸으로 만듭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은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 새사람입니다. 그런데 새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계속 변화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변화하게 되어 있고 변화하는 것만이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 또한 이 초점에 맞추어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율법적인 완전함을 하나님의 온전으로 착각하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또 자기 생각의 틀에 갇혀 생명의 욕구를 제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온전함은 '생명의 성장'입니다. 매일매일 생명의 영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 새사람의 완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실 때 생명의 언약을 주십니다. 그 뜻이 주어지는 것은 10년, 20년, 후은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씨는 아무리 작아도 생명이기에 반드시 자라고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도 영원한 생명의 비밀에 속한 영역은 알 수 없기에. 그 언약이 실현되는 동안 매일 깨어나는 새로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뜻은 단순히 일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기경하고 영적 실상을 바라보는 눈이 깨어나야 합니다. Already, but Not Yet(이미와 아직) 어둠의 진영은 끊임없이 이 단순한 믿음을 반대하고 박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실현되는 것을 결코 방해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못박히셨을 때 드디어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승리를 믿고 나갈 때 우리의 옛사람, 자아가 깨지면서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점점 알게 됩니다.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중요한 일이 함께 따라옵니다. 바로 우리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옛사람의 영역을 다루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고 하나님께 생명을 받아 새사람으로 거듭났을지라도, 옛사람으로 살아오며 무의식적으로 고집했던 지-정-의의 삶의 방식들까지 모두 정복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 믿음은 '이미(already)' 이루어졌지만 '아직(not yet)' 이루어지지 않은 긴장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망의 옛 영역을 완전히 정복하고 새로운 생명의 영역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짧은 기도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하나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또 하나의 산고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 길은 목자되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가야 하는 길입니다. 3. 결국, 왜 하나님의 생명은 풍성해야 하는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존재의 신분이 아니라 삶의 통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풍성하지 않으면 구원받았어도 여전히 육신의 방식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죄, 두려움, 죽음, 고난을 다루는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이 풍성해질 때,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 증거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천국행 티켓”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넣으셨고, 그 생명이 우리 삶 전체를 지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로새서 1:27)
    • 다시 읽는 복음
    • 하나님나라 복음
    2026-01-21
  • 삼위일체적으로 지어진 사람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나 이성적 피조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영과 혼과 육체가 온전히 조화를 이루는 삼위일체적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창세기 1장의 말씀에서 가장 근본적인 실체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의 통치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늘과 땅을 동시에 접촉하는 중보적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1. 인간의 영과 혼: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된 자리 창세기 2장 7절은 인간의 영적 기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נֶפֶשׁ חַיָּה, nephesh chayyah, 생혼)이 되니라.” 여기서 말하는 ‘생기’(히브리어 nĕshāmāh)는 단순한 호흡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적 본질의 부여, 곧 Zoe(요 1:4)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동물들과 구별되는 영적 존재가 되었고, 영은 하나님의 생명과 교통하는 기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타락 전 아담의 영은 하나님과 끊김 없이 연결된 통로였습니다. 그 안에는 정죄도, 분리도, 자아적 욕망도 없었으며, 오직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는 그릇이었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되었습니다. 또한 영(생명) 안에 혼이 함께 했습니다. ‘생령’은 “살아있는 혼”이라는 뜻입니다. 즉 생명과 연합된 혼으로 혼은 몸과 연합하지 않고 생명(영)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2. 인간의 혼: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해석하고 적용하는 중개자 혼(히브리어 nephesh, 헬라어 psyche)은 생각하고 느끼며 선택하는 인격의 자리입니다. 아담의 혼은 타락 이전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왜곡하지 않았고, 오로지 영을 통해 공급되는 하나님의 생명과 지혜에 순복하였습니다. 혼은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을 육체를 통해 땅 위에 구현하는 중재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감정은 왜곡되지 않았고, 의지는 거역하지 않았으며, 지성은 어둠에 덮이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혼은 하나님을 닮은 인격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자유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 안에서 자유로운 것이었습니다. 3. 인간의 육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도구이자 성전 사도 바울은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고전 6:19). 타락 이전의 아담의 육체는 영과 혼이 드러나는 순결한 통로였습니다. 몸은 죄의 도구가 아니었고, 오히려 이 땅을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로 다스리기 위한 사역의 현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몸을 통해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만물을 관리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실제화하는 대리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 몸은 영과 혼이 조화를 이루어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도록 조율된 도구였습니다. 삼위일체적 인간 존재: 조화와 섬김의 구조 인간은 영과 혼과 몸이 서로 충돌하거나 갈등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일치하는 삼위일체적 구조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영은 하늘의 계시를 받고, 혼은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육체는 그것을 이 땅에 실현했습니다. 이 구조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 성령의 삼위일체 구조를 닮은 질서입니다.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의 본질과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랑과 연합의 질서입니다. 이처럼 아담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영적 유기체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몸소 드러낼 수 있는 신적 위임을 받은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은 말씀을 혼이 중심이 되어 해석하고, 그것을 육체에 반영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사단은 미혹을 통해 사람의 혼을 공략했습니다. 혼은 사단의 미혹의 말을 따라, 선악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에서 “죽을까 하노라”로 자기 방식으로 해석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하와의 말에 사단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며 하나님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단의 말을 마음에 받아들였습니다. 즉 생명 말씀(하나님의 생명)을 거절하고 죽음의 말(사단의 본성)을 마음에 받아들인 것입니다. 말은 영입니다. 아담 하과와는 하나님의 영인 말씀을 마음에 두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영인 거짓의 말을 마음에 두게 된 것입니다. 타락 이후의 인간은 하나님 단절되고, 인간의 영과 혼과 육체의 삼위일체의 연합이 깨지고 서로 충돌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결이 끊어졌고,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자 영의 죽음이 왔습니다. 영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영은 존재하지만 하나님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는 사단에 대해 살았으며, 그 본성은 악해졌습니다. 영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는 기능적 상실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타락의 결과-육신이 된 인간 영 안에서 있던 혼이 하나님의 생명을 떠나버리자, 자율성과 탐욕에 빠졌습니다. 혼은 육체와 연합해서 육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육신을 통해 보이는 세계, 이 세대를 따라 지식을 만들었습니다. 아담 이후 인류는 계시 지식이 아닌 감각의 지식으로 살아왔습니다. 이 지식은 구원을 가르치거나,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육체는 정욕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의 지식을 받을 수 없는 혼은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오직 육체와 연합하며 지식을 스스로 만드는 육신이 되었습니다. 육은 썩을 것이 되었으며 감각에 초점을 맞추며 살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적 조화는 깨어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된 상태로 드러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지음을 받은 사람은 영과 혼과 육으로 연합된 삼위일체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지면, 영은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되지 못하였으며, 혼은 육체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세 영역은 타락으로 인해 삼위일체의 삶을 구현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세 영역 모두를 다시금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영은 새롭게 되었으며, 마음은 혼과 육체 역시 십자가에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새롭게 된 영을 따라 마음(혼)을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육체 역시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삼위일체의 연합을 경험하게 됩니다. 관련 동영상 : 삼위일체로 창조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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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12
  • 에스겔과 스가랴 선지자는 알렉산더 대왕의 두로 정복을 예언하였나?
    1) 에스겔과 스가랴는 누구인가 (1) 에스겔과 스가랴 두 선지자는 두로의 파멸을 예언한 선지자들이었다. (2) 에스겔(주전 593-570)이 시드기야와 바벨론 느브갓네살왕 당시의 선지자였던 반면 스가랴(사역 기간 주전 520~약 485)는 메데-파사의 다리오 1세 치하의 선지자였다. 2) 두 선지자가 소개하는 두로 (1) 에스겔은 성경 속 가장 많은 도시와 국가들이 소개되고 있는 에스겔 27장에서 두로를 세계 무역의 중심 도시로 소개하고 있다. (2) 스가랴 선지자도 두로와 그 이웃 도시 시돈을 은과 금이 넘쳐나는 부요한 도시로 소개하고 있다. (3) 에스겔은 두로에 대해 스스로 ‘온전히 아름다운 도시’라 했다고 했다(겔 27:3). (4) 성경은 두로가 아름다운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임을 분명히 한다(겔 27:4). (5) 스가랴도 오늘날 레바논 땅에 속해 있는 이 유명한 두 도시 두로와 시돈을 지혜가 뛰어나 돈을 잘 벌고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요새("보장"이라는 의미: 45미터 높이의 암벽으로 둘러쌓인 성에 자리잡고 있는 두로의 요새를 가리킴)를 만들고 은과 금이 넘쳐나는 부요한 나라라 했다. (6) 하지만 에스겔과 스가랴는 이 도시가 모든 소유를 빼앗기며 모든 것이 소용 없게 변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이들 두 선지자들이 예언한 두로 멸망 당시의 인물은 어느 시대 누구였을까? (1) 두로는 페니키아의 수도로 비록 작은 섬이었지만 공격하기 어려운 요새를 구축하여 앗수르의 살만에셀 왕이 5년 동안이나 공격하였어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2)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13년 동안이나 포위 공격하였으나 실패한 성이었다. (3) 결국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이 성읍 도시를 정복한다. (4) 해상 무역을 통하여 축적한 재물을 바탕으로 요새를 만들고 교만하게 살았으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다가 결국 알렉산더 대왕에게 영원히 패망하였다. 알렉산더 군대의 7개월 공격 끝에 결국 함락되어 1만명이 죽고 3만명이 노예로 끌려가게 된다! 이것들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5) 다만 본문이 이 알렉산더 대왕의 군사적인 원정의 정복 전쟁을 말하고 있는 지는 여전히 성경학자들의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성경 본문에 알렉산더라는 구체적 이름이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6) 보수적 성경학자들은 에스겔과 스가랴가 예언하는 두로에 대한 계시가 알렉산더에 대한 예언이라는 주장에 변함이 없다. (7) 하지만 성경 본문이 역사적 배경에 대한 뚜렷한 설명이나 계시가 없다는 점에서 정말 알렉산더 대왕인지 느부갓네살이나 앗수르의 어떤 왕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침략자에 대한 예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정복자가 과연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아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일 것이다. 알렉산더 조각상(데살로니키 고고학 박물관 전시물)©조덕영 박사 4) 알렉산더 대왕은 누구인가? (1)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주전 356-323)의 이름을 모르는 어른들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역사 속 유명한 인물이다. (2) 겨우 30 대 전반에 숨을 거둔 이 젊은이는 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의 제자이기도 했으며 짧은 기간 헬라 지역, 페르시아, 가나안, 애굽, 인도까지 평정하여 대제국을 이룬 인물이다. (3) 알렉산더는 주전 4세기에 활동한 인물이고 에스겔 선지자는 주전 6세기, 스가랴 선지자는 주전 5-6세기에 활동한 사람이다. 5) 하나님의 경고 (1) 스가랴 9장은 스가랴에게 임한 하나님의 경고로 한 정복자가 나와 이스라엘 주변국들(특별히 갈릴리 북부 수리아 땅의 성읍들)을 유린하게 되리라는 유명한 계시이다. (2) 이 정복자가 과연 알렉산더 대왕을 말하는 걸까? 스가랴는 (200년 후?) 가나안 땅에 나타날 한 인물로 인해 이스라엘 주변국들이 정복 당하게 될 것을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3) 스가랴 9장 예언이 말하는 정복자가 알렉산더 대왕을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어쩌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4)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성경 속 예언이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일어났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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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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