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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정죄의 돌팔매를 멈추고, 회복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라
AI이미지 그림 광장의 소음, 그 너머의 본질을 묻다 최근 한국 교계는 거대한 해일에 휩쓸린 듯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의 십수 년 전 과거 발언이 담긴 녹취가 공개되면서 시작된 이 파장은, 디지털 광장이라는 확성기를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습니다. 기독교 언론은 물론, 수많은 유튜브 채널과 SNS 공간은 연일 이 사건을 중계하듯 쏟아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흐르는 정서입니다. 사실을 전달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 상대의 인격 전체를 난도질하는 ‘감정적 해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자극적인 파편들은 어느덧 하나의 거대한 ‘정죄의 서사’가 되어 소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숨 가쁜 비난의 속도를 늦추고 복음의 본질을 직시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이 뜨거운 분노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향해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적 쾌락인가를 말입니다. ‘온유한 심령’이라는 이름의 거울 성경은 죄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지향하는 종착지는 언제나 ‘심판’ 그 자체가 아니라 ‘돌이킴과 회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던진 권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준엄한 울림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라디아서 6:1)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심령’은 단순히 성격이 부드러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허물 속에서 ‘나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겸손의 극치입니다. “나 또한 저 자리에 있었다면, 나 또한 저 상황이었다면 넘어졌을지 모른다”는 처절한 자기 인식이 전제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바로잡을’ 자격을 얻습니다. 자신을 살피지 않는 정죄는 독이 든 칼날과 같아서, 상대를 죽일 뿐만 아니라 정죄하는 자의 영혼마저 황폐하게 만듭니다. 내려놓음, 그 고통스러운 순종의 무게 사건의 본질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태도입니다. 김문훈 목사는 12년 전의 부적절한 언행이 수면 위로 떠 오르자, 구구절절한 변명 대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와 교단 신문을 통해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고, 상처 입은 이들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개척하여 척박한 땅에서 일군 대형 교회의 담임직을 사임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반추해 볼 때, 지도자의 허물이 드러났을 때 이토록 신속하고 단호하게 책임을 지는 모습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대개는 공소시효를 논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며 자리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더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사역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근간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 그가 선택한 사임은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처절한 순종이었습니다. 자신이 걸림돌이 되어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막으려는 그 무거운 결단을, 우리는 마땅히 복음적인 책임 의식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확인사살’이라는 이름의 잔인함을 경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와 교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 공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사과했고, 책임을 졌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나간 이를 향해 다시 돌을 던지는 행위는 무엇을 위함입니까? 이는 정의의 구현이 아니라 ‘확인사살’에 가깝습니다. 이미 엎드러진 자의 등 위에 다시 칼을 꽂는 행위는 십자가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범죄한 자를 징계한 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자 공동체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라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2:6-7) 바울은 ‘족하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책임을 물었으니 이제는 그의 영혼이 절망이라는 늪에 잠식되지 않도록 공동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한 지체가 병들었다고 해서 그 부위를 도려내 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어떻게든 피를 통하게 하고, 살려내어 다시 몸의 일부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 생명의 본능입니다. 십자가는 ‘대신 죽음’이지 ‘대신 죽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음한 여인을 대하신 방식을 떠올려 봅니다. 율법의 잣대로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광기 어린 군중의 양심을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긍정하지 않으셨지만, 죄인만큼은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죄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하나님이 직접 목숨을 내어놓으실 만큼 처절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회개한 형제를 향한 끝없는 정죄는, 사실상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무임승차가 아니라, 누군가의 처절한 대가 지불로 얻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는 머리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암덩어리도 아니며, 한몸에 일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령 손가락에 무좀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 손가락을 내 몸이 아니라고 잘라버리는 정신나간 짓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을 먹고 아픈 부분에 약을 발라 치료를 할 것입니다.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지체로써 치료를 위한 방편으로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길: 정죄의 문화에서 회복의 문화로 이번 사태는 김문훈 목사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한국 교회 전체의 성숙도를 묻는 시험대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세 가지 소중한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첫째, 지도자의 책임 있는 결단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완악함입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자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명예와 기도할 시간을 허락해야 합니다. 둘째, 공동체의 지체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비난의 화살을 쏘는 것은 쉽지만, 함께 울며 회복을 돕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 ‘비판하는 공동체’에서 ‘싸매어 주는 공동체’로 체질을 개선해야 합니다. 셋째, 복음적 공론장의 형성입니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자극적인 정보에 휩쓸리지 않고, 성경의 가치관으로 사건을 해석하며 말의 무게를 지키는 성도들의 절제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덮는다’는 것은 죄를 은폐하거나 거짓으로 감추는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와 책임 지불이 이루어진 후, 그 죄를 더 이상 비난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공동체적 합의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덮개입니다. 정죄의 문화는 교회를 강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차갑게 얼어붙게 만듭니다. 반면, 회복의 문화는 교회를 깊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김문훈 목사의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돌을 쥐고 있는가, 아니면 수건을 들고 있는가?” 죄는 단호히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회개한 이를 향해 격려와 회복의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야말로 십자가를 통과한 교회의 진짜 얼굴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난의 광장에서 내려와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한 목회자의 회복을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정죄의 독기를 빼내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 길을 선택한다면, 이 아픈 상처는 오히려 더 큰 성숙을 향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정죄가 아니라 은혜로, 확인사살이 아니라 회복으로. 그 좁고 험한 길 끝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환한 웃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련기사 ● 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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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고(AGI), 노동의 가치가 희석되며, 인간의 생존이 기본소득과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미래가 목전에 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거대한 변화를 단순한 ‘기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기술적 적응을 고민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변화는 명백히 ‘인간 이해의 문제’다. "인간은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진정한 자유와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기술에 의해 다시금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술은 인간의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AG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역할 자체를 흔드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최첨단 기술 대응 전략이 아니다.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신앙적 재정립이다. 1. 노동이 사라질 때, 소명은 더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쓸모와 존재 가치를 증명해 왔다. 그러나 노동의 총량이 줄어드는 미래에, 일에서 정체성을 찾던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가치를 노동의 유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Homo Faber)’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다. 그러므로 노동이 소멸해가는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소명이 곧 직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명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방식 그 자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살아가느냐"가 삶의 본질이 되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마주할 미래다. 2. 기본소득의 시대, 탐욕 대신 절제를 배워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스템적으로 해결되는 사회는 축복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거대한 위기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진 환경에서는 삶의 치열한 의미 또한 증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역사는 풍요가 종종 영적 타락과 궤를 같이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풍요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풍요를 절제 없이 향유하는 삶은 경계한다. 인간은 소비로 채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AGI 시대에 우리가 훈련해야 할 영성은 ‘더 많이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는 태도’다. 단순한 삶, 자발적인 절제, 그리고 일상에 대한 감사의 영성은 미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신앙의 형태가 될 것이다. 3. 통제받는 사회 속에서 자유의 의미를 지켜야 한다 고도로 발달한 AI는 인간을 해치기보다, 인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려 들 것이다. 건강을 위해, 사회적 안정을 위해, 더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알고리즘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도하고 통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위협받는 것은 ‘자유’다. 인간은 실수할 자유, 실패할 자유, 때로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자유를 가진 존재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변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을 가치 있게 여긴다.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는 안전할지 몰라도 인간다운 사회는 아니다. 편리함보다 자유를, 효율보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치다. 4. 인간이 잊게 될 질문을 교회가 붙잡아야 한다 AGI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의 조건이 완벽히 해결되면 존재의 이유를 묻는 질문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가장 깊은 공허가 들어선다. 교회는 세상이 잊어버릴 이 질문들을 끝까지 붙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왜 희생해야 하는가?" "왜 진리를 따라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기술은 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답이 주어진다. 5.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영성의 깊이로 결정된다 다가오는 시대는 인간이 더 똑똑해지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다움이 시험받는 시대다. 노동이 줄어들고 삶이 편리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은 더 쉽게 삶의 방향을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존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우고, 풍요 속에서도 절제를 배우며, 통제보다 자유를 선택하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기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어도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정교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이다. AGI 시대는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기회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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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AI 이미지 '심판의 돌과 생명의 펜' 언론의 칼날과 십자가의 사랑 사이 언론(言論)은 본래 날카롭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그 펜의 무게와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언론이 ‘팩트(Fact)’를 무기로 상대를 베어내는 데 주력한다면, 기독교 언론은 그 팩트 너머에 있는 ‘진실(Truth)’과 ‘생명(Life)’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교계 매체가 보도한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관련 기사는 기독교 언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빗나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을 들추어내어, 이미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로 봉합된 상처를 다시 찢어발기는 행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이며, 무엇을 위한 보도인가.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기독교 언론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문화인가, 생명의 문화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사형틀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살려낸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언론 또한 그 생명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일부 기독교 언론 행태는 생명이 아닌 ‘사회적 매장’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김문훈 목사에 대한 보도는 전형적인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래전 발생한 일이며, 목회자로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했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을 공개하고, 심지어 독자들이 그 자극적인 음성 파일을 직접 다운로드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언론의 공익적 기능을 넘어선 인격 살인에 가깝다. 이는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어치려 했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율법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팩트는 여인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팩트로 여인을 죽이지 않으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기독교 언론의 펜 끝에는 예수의 ‘용서’가 묻어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의 ‘살기’가 서려 있는가. ‘알 권리’라는 미명 하의 폭력성 해당 기사는 목회자의 리더십 검증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내세웠다. 물론 공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는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익(公益)이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공익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지, 공동체의 일원을 파괴하여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균형의 상실’과 ‘자극적 배포 방식’이다. 기사는 제3자의 증언과 녹취 등 공격 측의 자료는 방대하게 싣고 있으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김 목사의 현재 입장이나 과거 사과 과정에 대한 반론권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공정성을 훼손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녹취 파일의 다운로드 제공이다. 욕설이나 거친 언사가 담긴 파일을 대중에게 직접 유포하는 것은 사실 전달을 넘어선다. 이는 독자들에게 “이 사람을 함께 미워해 달라”고 선동하는 정서적 폭력이며, 클릭 수를 위한 선정주의적 상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허물을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기독교 언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죽음의 문화’다. 파괴가 아닌 ‘세움’을 향하여 세상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은 다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만일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바로잡다’라는 헬라어는 뼈가 부러졌을 때 다시 맞추는 의료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그를 공동체에서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건강한 지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김문훈 목사의 과거 언행이 목회자로서 부덕(不德)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허물을 딛고 회개하며 목양에 힘써왔다면, 그리고 당사자와의 화해가 있었다면, 언론은 그를 다시 과거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갱신된 지도자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감시하되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다. 교회와 성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비난이 더 치명적일 때가 많다. 기독교 언론이 ‘내부 총질’의 선봉장이 되어선 안 된다. 비판은 하되 비난하지 말고, 지적은 하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팩트(Fact)를 다루되 임팩트(Impact) 있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펜을 든 사명자들에게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세워주며 거룩한 방파제가 되는 것인가. 이번 보도 사태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언론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기사는 사람을 살리는가, 죽이는가?”, “나의 펜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인가, 아니면 형제를 찌르는 흉기인가?” 기독교 언론의 사명은 명확하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생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다.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덮어주고, 싸매주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치유의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김문훈 목사를 향한 이번 보도가 단순히 하나의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기독교 언론이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생명의 펜’을 다시 쥐는 거룩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만이 교회가 살고 언론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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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자유의 성벽 허무는 ‘정교분리’의 역설 : 종교의 심장을 겨눈 국가의 총구
時事칼럼/양봉식 국장 동영상 갈무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침묵의 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보이지 않는 성벽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는 선언은 국가가 국민의 영혼에 개입할 수 없음을 천명한 인류 지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터져 나온 발언들은 이 거룩한 성벽에 균열을 내고 있다.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목소리를 거세하려는 시도는, 보호의 언어가 아닌 섬뜩한 통제의 언어였다. 거룩한 강단에 가해진 ‘반란’의 낙인 이재명은 기자회견에서 특정 종교와 일부 개신교를 겨냥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비판하는 설교를 두고 “국민에게 총구를 겨냥하는 반란행위”라며 형사적·안보적 프레임을 씌웠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위험한 비유다. 종교인의 설교는 신앙적 가치에 기반한 양심의 표현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그 자체다. 설교 내용이 위정자의 입맛에 쓰다고 해서 그것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순간, 국가는 이미 신앙의 영역을 검열하는 심판자로 군림하게 된다.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권력이 종교의 입을 막기 위해 ‘정교분리’라는 칼을 빼 드는 것은, 이 원칙의 탄생 배경을 완전히 오독한 비극이다. ‘큰 돌부터 제거’라는 섬뜩한 단계론의 정체 가장 날카로운 우려는 “큰 돌부터 집어내고 그다음 자갈, 잔돌을 집어내겠다”는 그의 수사적 비유에서 정점을 찍는다. 법치국가에서 사법적 판단은 개별 범죄 혐의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단계적 제거’를 운운하는 이 언어는 법적 정의가 아니라 정책적 타도 대상을 설정하는 통치자의 서늘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문법이 아니다. 서구 유럽 국가에서 종교 단체나 비영리법인의 해체는 테러나 무장 폭력 같은 명백한 반국가적 범죄가 입증될 때만 사법부의 극히 보수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면, 종교를 ‘국가의 관리 대상’으로 보고 비판 세력을 ‘사회 해악’으로 몰아 해체하는 방식은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나 전체주의 체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적 종교 길들이기가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선택적 정의, 그리고 공적 신앙의 사멸 이재명의 분노는 지극히 선택적이다. 정치권에는 특정 정권을 지지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종교 세력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권력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종교적 행위에는 침묵하며, 오직 비판적인 목소리에만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것은 원칙의 수호가 아니라 권력의 편의를 위한 ‘선택적 정의’일 뿐이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사적 클럽’이 아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사회 정의를 외치고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갖는다. 정교분리를 이유로 교회를 침묵의 섬으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는, 결국 국가 권력을 견제할 마지막 정신적 보루를 무너뜨리겠다는 선언과 같다. 헌법의 족쇄를 풀지 마라 정교분리는 권력자가 종교를 휘두르기 위해 만든 회칙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국민의 신앙과 양심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채워둔 ‘헌법적 족쇄’다. 위정자가 이 족쇄를 스스로 풀고 “질서와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생사여탈권을 쥐려 할 때, 자유의 시대는 저물고 통제의 시대가 밝아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사와 해체의 위협이 아니다. 권력 앞에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 그리고 그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민주적 절제다. 영혼의 영역까지 국가의 발길질 아래 두려는 오만을 멈춰야 한다. 성벽이 무너진 뒤에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거대한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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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의 성명서가 던진 역설: 한국 교회는 지금 무엇을 파수(把守)하는가
데스크칼럼/양봉식 국장 AI이미지 낯선 풍경, 거꾸로 된 질문 최근 이단으로 규정된 집단인 신천지가 정부의 특정 종교 단체 해산 논의와 관련하여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며 묘한 불쾌감과 함께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교차함을 느꼈다. 정통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온 집단이 역설적이게도 ‘헌법상의 종교의 자유’를 역설하며 국가 권력의 향방에 문제를 제기하는 장면은 지극히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 장면을 단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목소리가 옳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던진 ‘종교 자유의 위기’라는 화두가 현재 한국 교회가 마주한 거대한 시대적 징후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은 무엇인가. 이단의 입에서 나온 정의(正義)가 오히려 잠자는 정통 교회의 죽비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픈 자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치를 넘어 체제와 가치의 영역으로 한국 사회의 모든 논쟁은 블랙홀처럼 정치적 구도로 수렴되곤 한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좌와 우라는 이분법적 틀은 복잡한 본질을 단순한 호불호의 문제로 치환해 버린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한 종교 단체 해산 논의와 그에 따른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공방의 소재가 아니다. 이는 국가의 체제와 자유의 근간, 그리고 신앙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토양에 관한 실존적 문제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혹은 대중적 지지율에 따라 특정 집단을 ‘해산’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정당화된다면, 그 칼날의 끝이 언제나 이단만을 향해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종교의 자유는 국가가 부여한 시혜적 권리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천부적 권리이자 국가 권력이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다. 이를 훼손하는 선례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신앙의 자유라는 가장 소중한 가치를 정치적 거래의 제물로 바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진리의 분별과 권력의 칼날 정통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단과 거짓 교리에 맞서 피 흘리는 싸움을 지속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거짓된 누룩을 경계하고 진리의 말씀을 수호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쳤다. 교회는 교리를 세우고 분별의 잣대를 엄격히 함으로써 공동체를 지켜왔다. 참된 진리를 붙드는 공동체는 이단의 존재 그 자체에 과도한 공포를 느끼거나 국가 권력을 빌려 그들을 멸절하려 들지 않는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고, 참이 서면 거짓은 스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교회의 힘은 공권력의 강제 집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생명력과 도덕적 우위에서 나온다. 그런데 지금의 형국은 묘하기 짝이 없다. 이단 집단이 ‘자유’를 외치며 방어막을 치는 동안, 정작 한국 교회는 이 문제를 ‘체제와 자유’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성찰하기보다 침묵하거나 방관하고 있다. 불편하고 혐오스러운 집단을 공권력이 대신 처리해 주는 것에 안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가진 영적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AI 이미지 종교의 자유, 그 헌법적 가치의 엄중함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적 핵심 가치로 삼는 국가다. 우리가 거리에서 찬양하고, 노방전도를 하며, 대규모 광장 집회를 통해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토양은 바로 이 자유의 보장에서 기인한다. 만약 현재 눈앞에 가시 같은 종교 집단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국가 권력의 종교 개입을 묵인하거나 당연시한다면, 훗날 그 '개입의 기준'이 정통 교회를 향할 때 우리는 어떤 명분으로 저항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반복된다. 권력에 의한 종교 억압은 대개 사회적 공감대가 낮고 소외된 집단을 제물 삼아 시작된다. 대중의 분노를 동력 삼아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그 칼날은 점차 예리해지고 범위는 넓어진다. 결국 국가가 '허용하는 신앙'과 '허용하지 않는 신앙'을 가르는 심판관의 자리에 앉게 될 때, 진정한 신앙의 공간은 사라지게 된다. 이는 이미 수많은 전체주의 국가와 역사 속에서 증명된 비극적인 공식이다. 말세의 징후와 깨어 있는 영성 성경은 마지막 때를 경고하며 예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 날이 올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막연한 종말론적 상상이 아니라, 역사적 실체로서 우리 앞에 다가오는 현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종교에 대한 적대감과 행정적 규제의 움직임이 어떤 영적 징후를 내포하고 있는지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음’이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조차 자신들의 존립을 위해 성명서를 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 현실 앞에서, 한국 교회의 평온함은 오히려 위태로워 보인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차원을 넘어, 복음이 선포되고 신앙이 호흡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 그 자체를 사수하는 일이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 사람의 세계관과 신념은 법이나 강압으로 바뀌지 않는다. 오랜 시간 성경을 가르치고 교리를 주입해도 인간의 내면은 완강한 성벽과 같다. 하물며 국가 권력이 물리적 힘으로 종교적 확신을 통제하거나 교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회심하게 하는 역사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명확하다. 파수꾼의 사명으로 질문을 던지고, 시대의 오류에 대해 경고하며, 성도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혐오에 편승하여 자유를 파괴하는 길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더라도 진리의 길을 묵묵히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파수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적 분노나 선동적 구호가 아니다. 무엇이 본질이며, 무엇이 체제의 문제인가를 차분히 짚어보는 지혜다. 또한 신앙의 자유를 지키는 길이 단순히 내 울타리를 지키는 것을 넘어,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지키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단의 성명서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 시대, 한국 교회는 과연 무엇을 파수하고 있는가. 눈앞의 편의인가, 아니면 영원한 자유의 가치인가. 이 무거운 질문 앞에 더 이상 외면이나 침묵으로 답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그 대답을 삶과 실천으로 증명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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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폐허 위에서 확인한 교회의 본질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베네수엘라의 현대사는 우리에게 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국가가 신이 되려 하고, 이념이 구원의 자리를 찬탈하며, 공포가 일상을 지배할 때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난 수년간 베네수엘라 교회가 걸어온 길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도 강력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총칼을 들고 거리에 서는 대신, 가장 낮은 곳에서 ‘예배’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독재가 결코 점령할 수 없었던 자유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국가라는 ‘거짓 신’에 맞서는 신앙의 언어 독재의 본질은 ‘전체주의’에 있습니다.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은 시민의 식탁부터 영혼까지 모든 영역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 했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구원자로, 지도자를 메시아로 포장하며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교회가 선택한 저항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국가보다 크시다”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근본적인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베네수엘라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인간의 존엄은 국가가 시혜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침해 불가능한 권리라는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체제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다”라는 내러티브는 독재가 요구하는 절대 복종의 논리를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렸습니다. 교회는 정권과 싸운 것이 아니라, 정권이 세운 ‘거짓된 세계관’과 싸웠던 것입니다. 예배, 공포를 해독하는 ‘영적 환기구’ 독재 치하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공포의 내면화’입니다. 이웃을 믿지 못하고, 말 한마디에 검열을 거치며,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규정하게 만드는 것. 베네수엘라의 예배 공동체는 이 독성 강한 공포를 씻어내는 환기구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감시를 피해 모인 거실, 낡은 기타 하나와 닳아버린 성경책이 전부였던 소그룹 모임들. 하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은 ‘탈(脫)공포’를 경험했습니다. 세상은 침묵을 강요했지만, 예배는 “너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속삭였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번호표 달린 배급 대상자로 보았지만, 예배는 그들을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환대했습니다. 찬양은 체제를 조롱하지 않았으나, 체제가 주입하는 절망의 서사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예배를 통해 내면의 자유를 회복한 사람들에게 독재자의 위협은 더 이상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빵의 나눔’과 ‘기억의 연대’ 베네수엘라 교회의 영성은 공중에 붕 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굶주린 이웃의 식탁 위로 내려앉았습니다. 국가의 배급 시스템이 붕괴하고 상점의 매대가 비어갈 때, 교회는 기꺼이 ‘빵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치 운동이 아니었으나, “국가만이 당신을 먹여 살린다”는 독재의 가장 큰 거짓말을 삶으로 반박하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교회는 ‘기억의 저장소’가 되었습니다. 수감과 고문, 가족의 실종을 겪고도 어디 하소연할 곳 없던 이들에게 교회는 “여기서는 말해도 된다”는 안전한 품이 되어주었습니다. 슬픔을 함께 울어주는 목회자들의 ‘동행’은, 국가가 지워버리려 했던 고통의 기록들을 생생한 역사의 증언으로 보존해냈습니다. 이 기억의 연대는 훗날 사회 재건의 가장 소중한 도덕적 자산이 될 것입니다. 독재 이후, ‘상처 입은 치유자’의 길 이제 베네수엘라는 긴 터널을 지나 새로운 아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800여 명의 정치범과 목회자들이 석방된 것은 그 서막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과제는 권력의 주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무너진 사회적 신뢰를 어떻게 다시 세우느냐에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교회는 지난 세월 동안 이미 ‘그다음 사회’의 미니어처를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복수 대신 회복을, 승리 대신 화해를 선택하는 예배 공동체의 질서는 독재 이후의 사회가 지향해야 할 나침반입니다. 권력은 지고 정권은 바뀌지만, 고통받는 이 곁을 지키며 인간의 품격을 사수했던 교회의 헌신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사람을 지키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사례는 우리에게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교회는 체제를 무너뜨리는 주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체제가 무너뜨리려 했던 ‘사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킨 그곳에서, 독재는 더 이상 발붙일 자리를 잃었습니다. 예배는 세상을 바꾸는 도구가 아닙니다. 예배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세워, 그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그 존엄을 깨달은 한 사람이 공포를 이겨낼 때, 세상은 비로소 변하기 시작합니다. 베네수엘라의 어두운 밤을 밝힌 것은 거창한 혁명의 횃불이 아니라, 어느 지하 거실에서 나지막이 불리던 찬양의 불빛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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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정죄의 돌팔매를 멈추고, 회복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라
- AI이미지 그림 광장의 소음, 그 너머의 본질을 묻다 최근 한국 교계는 거대한 해일에 휩쓸린 듯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의 십수 년 전 과거 발언이 담긴 녹취가 공개되면서 시작된 이 파장은, 디지털 광장이라는 확성기를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습니다. 기독교 언론은 물론, 수많은 유튜브 채널과 SNS 공간은 연일 이 사건을 중계하듯 쏟아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흐르는 정서입니다. 사실을 전달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 상대의 인격 전체를 난도질하는 ‘감정적 해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자극적인 파편들은 어느덧 하나의 거대한 ‘정죄의 서사’가 되어 소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숨 가쁜 비난의 속도를 늦추고 복음의 본질을 직시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이 뜨거운 분노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향해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적 쾌락인가를 말입니다. ‘온유한 심령’이라는 이름의 거울 성경은 죄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지향하는 종착지는 언제나 ‘심판’ 그 자체가 아니라 ‘돌이킴과 회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던진 권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준엄한 울림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라디아서 6:1)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심령’은 단순히 성격이 부드러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허물 속에서 ‘나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겸손의 극치입니다. “나 또한 저 자리에 있었다면, 나 또한 저 상황이었다면 넘어졌을지 모른다”는 처절한 자기 인식이 전제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바로잡을’ 자격을 얻습니다. 자신을 살피지 않는 정죄는 독이 든 칼날과 같아서, 상대를 죽일 뿐만 아니라 정죄하는 자의 영혼마저 황폐하게 만듭니다. 내려놓음, 그 고통스러운 순종의 무게 사건의 본질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태도입니다. 김문훈 목사는 12년 전의 부적절한 언행이 수면 위로 떠 오르자, 구구절절한 변명 대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와 교단 신문을 통해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고, 상처 입은 이들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개척하여 척박한 땅에서 일군 대형 교회의 담임직을 사임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반추해 볼 때, 지도자의 허물이 드러났을 때 이토록 신속하고 단호하게 책임을 지는 모습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대개는 공소시효를 논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며 자리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더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사역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근간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 그가 선택한 사임은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처절한 순종이었습니다. 자신이 걸림돌이 되어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막으려는 그 무거운 결단을, 우리는 마땅히 복음적인 책임 의식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확인사살’이라는 이름의 잔인함을 경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와 교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 공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사과했고, 책임을 졌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나간 이를 향해 다시 돌을 던지는 행위는 무엇을 위함입니까? 이는 정의의 구현이 아니라 ‘확인사살’에 가깝습니다. 이미 엎드러진 자의 등 위에 다시 칼을 꽂는 행위는 십자가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범죄한 자를 징계한 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자 공동체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라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2:6-7) 바울은 ‘족하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책임을 물었으니 이제는 그의 영혼이 절망이라는 늪에 잠식되지 않도록 공동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한 지체가 병들었다고 해서 그 부위를 도려내 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어떻게든 피를 통하게 하고, 살려내어 다시 몸의 일부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 생명의 본능입니다. 십자가는 ‘대신 죽음’이지 ‘대신 죽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음한 여인을 대하신 방식을 떠올려 봅니다. 율법의 잣대로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광기 어린 군중의 양심을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긍정하지 않으셨지만, 죄인만큼은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죄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하나님이 직접 목숨을 내어놓으실 만큼 처절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회개한 형제를 향한 끝없는 정죄는, 사실상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무임승차가 아니라, 누군가의 처절한 대가 지불로 얻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는 머리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암덩어리도 아니며, 한몸에 일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령 손가락에 무좀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 손가락을 내 몸이 아니라고 잘라버리는 정신나간 짓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을 먹고 아픈 부분에 약을 발라 치료를 할 것입니다.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지체로써 치료를 위한 방편으로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길: 정죄의 문화에서 회복의 문화로 이번 사태는 김문훈 목사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한국 교회 전체의 성숙도를 묻는 시험대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세 가지 소중한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첫째, 지도자의 책임 있는 결단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완악함입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자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명예와 기도할 시간을 허락해야 합니다. 둘째, 공동체의 지체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비난의 화살을 쏘는 것은 쉽지만, 함께 울며 회복을 돕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 ‘비판하는 공동체’에서 ‘싸매어 주는 공동체’로 체질을 개선해야 합니다. 셋째, 복음적 공론장의 형성입니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자극적인 정보에 휩쓸리지 않고, 성경의 가치관으로 사건을 해석하며 말의 무게를 지키는 성도들의 절제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덮는다’는 것은 죄를 은폐하거나 거짓으로 감추는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와 책임 지불이 이루어진 후, 그 죄를 더 이상 비난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공동체적 합의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덮개입니다. 정죄의 문화는 교회를 강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차갑게 얼어붙게 만듭니다. 반면, 회복의 문화는 교회를 깊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김문훈 목사의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돌을 쥐고 있는가, 아니면 수건을 들고 있는가?” 죄는 단호히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회개한 이를 향해 격려와 회복의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야말로 십자가를 통과한 교회의 진짜 얼굴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난의 광장에서 내려와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한 목회자의 회복을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정죄의 독기를 빼내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 길을 선택한다면, 이 아픈 상처는 오히려 더 큰 성숙을 향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정죄가 아니라 은혜로, 확인사살이 아니라 회복으로. 그 좁고 험한 길 끝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환한 웃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련기사 ● 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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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정죄의 돌팔매를 멈추고, 회복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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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고(AGI), 노동의 가치가 희석되며, 인간의 생존이 기본소득과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미래가 목전에 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거대한 변화를 단순한 ‘기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기술적 적응을 고민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변화는 명백히 ‘인간 이해의 문제’다. "인간은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진정한 자유와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기술에 의해 다시금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술은 인간의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AG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역할 자체를 흔드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최첨단 기술 대응 전략이 아니다.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신앙적 재정립이다. 1. 노동이 사라질 때, 소명은 더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쓸모와 존재 가치를 증명해 왔다. 그러나 노동의 총량이 줄어드는 미래에, 일에서 정체성을 찾던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가치를 노동의 유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Homo Faber)’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다. 그러므로 노동이 소멸해가는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소명이 곧 직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명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방식 그 자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살아가느냐"가 삶의 본질이 되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마주할 미래다. 2. 기본소득의 시대, 탐욕 대신 절제를 배워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스템적으로 해결되는 사회는 축복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거대한 위기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진 환경에서는 삶의 치열한 의미 또한 증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역사는 풍요가 종종 영적 타락과 궤를 같이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풍요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풍요를 절제 없이 향유하는 삶은 경계한다. 인간은 소비로 채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AGI 시대에 우리가 훈련해야 할 영성은 ‘더 많이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는 태도’다. 단순한 삶, 자발적인 절제, 그리고 일상에 대한 감사의 영성은 미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신앙의 형태가 될 것이다. 3. 통제받는 사회 속에서 자유의 의미를 지켜야 한다 고도로 발달한 AI는 인간을 해치기보다, 인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려 들 것이다. 건강을 위해, 사회적 안정을 위해, 더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알고리즘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도하고 통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위협받는 것은 ‘자유’다. 인간은 실수할 자유, 실패할 자유, 때로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자유를 가진 존재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변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을 가치 있게 여긴다.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는 안전할지 몰라도 인간다운 사회는 아니다. 편리함보다 자유를, 효율보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치다. 4. 인간이 잊게 될 질문을 교회가 붙잡아야 한다 AGI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의 조건이 완벽히 해결되면 존재의 이유를 묻는 질문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가장 깊은 공허가 들어선다. 교회는 세상이 잊어버릴 이 질문들을 끝까지 붙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왜 희생해야 하는가?" "왜 진리를 따라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기술은 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답이 주어진다. 5.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영성의 깊이로 결정된다 다가오는 시대는 인간이 더 똑똑해지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다움이 시험받는 시대다. 노동이 줄어들고 삶이 편리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은 더 쉽게 삶의 방향을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존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우고, 풍요 속에서도 절제를 배우며, 통제보다 자유를 선택하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기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어도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정교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이다. AGI 시대는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기회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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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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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AI 이미지 '심판의 돌과 생명의 펜' 언론의 칼날과 십자가의 사랑 사이 언론(言論)은 본래 날카롭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그 펜의 무게와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언론이 ‘팩트(Fact)’를 무기로 상대를 베어내는 데 주력한다면, 기독교 언론은 그 팩트 너머에 있는 ‘진실(Truth)’과 ‘생명(Life)’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교계 매체가 보도한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관련 기사는 기독교 언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빗나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을 들추어내어, 이미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로 봉합된 상처를 다시 찢어발기는 행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이며, 무엇을 위한 보도인가.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기독교 언론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문화인가, 생명의 문화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사형틀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살려낸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언론 또한 그 생명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일부 기독교 언론 행태는 생명이 아닌 ‘사회적 매장’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김문훈 목사에 대한 보도는 전형적인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래전 발생한 일이며, 목회자로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했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을 공개하고, 심지어 독자들이 그 자극적인 음성 파일을 직접 다운로드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언론의 공익적 기능을 넘어선 인격 살인에 가깝다. 이는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어치려 했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율법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팩트는 여인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팩트로 여인을 죽이지 않으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기독교 언론의 펜 끝에는 예수의 ‘용서’가 묻어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의 ‘살기’가 서려 있는가. ‘알 권리’라는 미명 하의 폭력성 해당 기사는 목회자의 리더십 검증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내세웠다. 물론 공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는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익(公益)이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공익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지, 공동체의 일원을 파괴하여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균형의 상실’과 ‘자극적 배포 방식’이다. 기사는 제3자의 증언과 녹취 등 공격 측의 자료는 방대하게 싣고 있으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김 목사의 현재 입장이나 과거 사과 과정에 대한 반론권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공정성을 훼손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녹취 파일의 다운로드 제공이다. 욕설이나 거친 언사가 담긴 파일을 대중에게 직접 유포하는 것은 사실 전달을 넘어선다. 이는 독자들에게 “이 사람을 함께 미워해 달라”고 선동하는 정서적 폭력이며, 클릭 수를 위한 선정주의적 상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허물을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기독교 언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죽음의 문화’다. 파괴가 아닌 ‘세움’을 향하여 세상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은 다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만일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바로잡다’라는 헬라어는 뼈가 부러졌을 때 다시 맞추는 의료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그를 공동체에서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건강한 지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김문훈 목사의 과거 언행이 목회자로서 부덕(不德)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허물을 딛고 회개하며 목양에 힘써왔다면, 그리고 당사자와의 화해가 있었다면, 언론은 그를 다시 과거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갱신된 지도자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감시하되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다. 교회와 성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비난이 더 치명적일 때가 많다. 기독교 언론이 ‘내부 총질’의 선봉장이 되어선 안 된다. 비판은 하되 비난하지 말고, 지적은 하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팩트(Fact)를 다루되 임팩트(Impact) 있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펜을 든 사명자들에게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세워주며 거룩한 방파제가 되는 것인가. 이번 보도 사태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언론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기사는 사람을 살리는가, 죽이는가?”, “나의 펜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인가, 아니면 형제를 찌르는 흉기인가?” 기독교 언론의 사명은 명확하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생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다.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덮어주고, 싸매주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치유의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김문훈 목사를 향한 이번 보도가 단순히 하나의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기독교 언론이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생명의 펜’을 다시 쥐는 거룩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만이 교회가 살고 언론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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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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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자유의 성벽 허무는 ‘정교분리’의 역설 : 종교의 심장을 겨눈 국가의 총구
- 時事칼럼/양봉식 국장 동영상 갈무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침묵의 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보이지 않는 성벽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는 선언은 국가가 국민의 영혼에 개입할 수 없음을 천명한 인류 지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터져 나온 발언들은 이 거룩한 성벽에 균열을 내고 있다.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목소리를 거세하려는 시도는, 보호의 언어가 아닌 섬뜩한 통제의 언어였다. 거룩한 강단에 가해진 ‘반란’의 낙인 이재명은 기자회견에서 특정 종교와 일부 개신교를 겨냥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비판하는 설교를 두고 “국민에게 총구를 겨냥하는 반란행위”라며 형사적·안보적 프레임을 씌웠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위험한 비유다. 종교인의 설교는 신앙적 가치에 기반한 양심의 표현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그 자체다. 설교 내용이 위정자의 입맛에 쓰다고 해서 그것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순간, 국가는 이미 신앙의 영역을 검열하는 심판자로 군림하게 된다.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권력이 종교의 입을 막기 위해 ‘정교분리’라는 칼을 빼 드는 것은, 이 원칙의 탄생 배경을 완전히 오독한 비극이다. ‘큰 돌부터 제거’라는 섬뜩한 단계론의 정체 가장 날카로운 우려는 “큰 돌부터 집어내고 그다음 자갈, 잔돌을 집어내겠다”는 그의 수사적 비유에서 정점을 찍는다. 법치국가에서 사법적 판단은 개별 범죄 혐의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단계적 제거’를 운운하는 이 언어는 법적 정의가 아니라 정책적 타도 대상을 설정하는 통치자의 서늘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문법이 아니다. 서구 유럽 국가에서 종교 단체나 비영리법인의 해체는 테러나 무장 폭력 같은 명백한 반국가적 범죄가 입증될 때만 사법부의 극히 보수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면, 종교를 ‘국가의 관리 대상’으로 보고 비판 세력을 ‘사회 해악’으로 몰아 해체하는 방식은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나 전체주의 체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적 종교 길들이기가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선택적 정의, 그리고 공적 신앙의 사멸 이재명의 분노는 지극히 선택적이다. 정치권에는 특정 정권을 지지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종교 세력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권력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종교적 행위에는 침묵하며, 오직 비판적인 목소리에만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것은 원칙의 수호가 아니라 권력의 편의를 위한 ‘선택적 정의’일 뿐이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사적 클럽’이 아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사회 정의를 외치고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갖는다. 정교분리를 이유로 교회를 침묵의 섬으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는, 결국 국가 권력을 견제할 마지막 정신적 보루를 무너뜨리겠다는 선언과 같다. 헌법의 족쇄를 풀지 마라 정교분리는 권력자가 종교를 휘두르기 위해 만든 회칙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국민의 신앙과 양심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채워둔 ‘헌법적 족쇄’다. 위정자가 이 족쇄를 스스로 풀고 “질서와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생사여탈권을 쥐려 할 때, 자유의 시대는 저물고 통제의 시대가 밝아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사와 해체의 위협이 아니다. 권력 앞에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 그리고 그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민주적 절제다. 영혼의 영역까지 국가의 발길질 아래 두려는 오만을 멈춰야 한다. 성벽이 무너진 뒤에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거대한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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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자유의 성벽 허무는 ‘정교분리’의 역설 : 종교의 심장을 겨눈 국가의 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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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의 성명서가 던진 역설: 한국 교회는 지금 무엇을 파수(把守)하는가
- 데스크칼럼/양봉식 국장 AI이미지 낯선 풍경, 거꾸로 된 질문 최근 이단으로 규정된 집단인 신천지가 정부의 특정 종교 단체 해산 논의와 관련하여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며 묘한 불쾌감과 함께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교차함을 느꼈다. 정통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온 집단이 역설적이게도 ‘헌법상의 종교의 자유’를 역설하며 국가 권력의 향방에 문제를 제기하는 장면은 지극히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 장면을 단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목소리가 옳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던진 ‘종교 자유의 위기’라는 화두가 현재 한국 교회가 마주한 거대한 시대적 징후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은 무엇인가. 이단의 입에서 나온 정의(正義)가 오히려 잠자는 정통 교회의 죽비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픈 자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치를 넘어 체제와 가치의 영역으로 한국 사회의 모든 논쟁은 블랙홀처럼 정치적 구도로 수렴되곤 한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좌와 우라는 이분법적 틀은 복잡한 본질을 단순한 호불호의 문제로 치환해 버린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한 종교 단체 해산 논의와 그에 따른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공방의 소재가 아니다. 이는 국가의 체제와 자유의 근간, 그리고 신앙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토양에 관한 실존적 문제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혹은 대중적 지지율에 따라 특정 집단을 ‘해산’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정당화된다면, 그 칼날의 끝이 언제나 이단만을 향해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종교의 자유는 국가가 부여한 시혜적 권리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천부적 권리이자 국가 권력이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다. 이를 훼손하는 선례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신앙의 자유라는 가장 소중한 가치를 정치적 거래의 제물로 바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진리의 분별과 권력의 칼날 정통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단과 거짓 교리에 맞서 피 흘리는 싸움을 지속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거짓된 누룩을 경계하고 진리의 말씀을 수호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쳤다. 교회는 교리를 세우고 분별의 잣대를 엄격히 함으로써 공동체를 지켜왔다. 참된 진리를 붙드는 공동체는 이단의 존재 그 자체에 과도한 공포를 느끼거나 국가 권력을 빌려 그들을 멸절하려 들지 않는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고, 참이 서면 거짓은 스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교회의 힘은 공권력의 강제 집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생명력과 도덕적 우위에서 나온다. 그런데 지금의 형국은 묘하기 짝이 없다. 이단 집단이 ‘자유’를 외치며 방어막을 치는 동안, 정작 한국 교회는 이 문제를 ‘체제와 자유’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성찰하기보다 침묵하거나 방관하고 있다. 불편하고 혐오스러운 집단을 공권력이 대신 처리해 주는 것에 안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가진 영적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AI 이미지 종교의 자유, 그 헌법적 가치의 엄중함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적 핵심 가치로 삼는 국가다. 우리가 거리에서 찬양하고, 노방전도를 하며, 대규모 광장 집회를 통해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토양은 바로 이 자유의 보장에서 기인한다. 만약 현재 눈앞에 가시 같은 종교 집단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국가 권력의 종교 개입을 묵인하거나 당연시한다면, 훗날 그 '개입의 기준'이 정통 교회를 향할 때 우리는 어떤 명분으로 저항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반복된다. 권력에 의한 종교 억압은 대개 사회적 공감대가 낮고 소외된 집단을 제물 삼아 시작된다. 대중의 분노를 동력 삼아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그 칼날은 점차 예리해지고 범위는 넓어진다. 결국 국가가 '허용하는 신앙'과 '허용하지 않는 신앙'을 가르는 심판관의 자리에 앉게 될 때, 진정한 신앙의 공간은 사라지게 된다. 이는 이미 수많은 전체주의 국가와 역사 속에서 증명된 비극적인 공식이다. 말세의 징후와 깨어 있는 영성 성경은 마지막 때를 경고하며 예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 날이 올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막연한 종말론적 상상이 아니라, 역사적 실체로서 우리 앞에 다가오는 현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종교에 대한 적대감과 행정적 규제의 움직임이 어떤 영적 징후를 내포하고 있는지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음’이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조차 자신들의 존립을 위해 성명서를 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 현실 앞에서, 한국 교회의 평온함은 오히려 위태로워 보인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차원을 넘어, 복음이 선포되고 신앙이 호흡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 그 자체를 사수하는 일이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 사람의 세계관과 신념은 법이나 강압으로 바뀌지 않는다. 오랜 시간 성경을 가르치고 교리를 주입해도 인간의 내면은 완강한 성벽과 같다. 하물며 국가 권력이 물리적 힘으로 종교적 확신을 통제하거나 교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회심하게 하는 역사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명확하다. 파수꾼의 사명으로 질문을 던지고, 시대의 오류에 대해 경고하며, 성도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혐오에 편승하여 자유를 파괴하는 길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더라도 진리의 길을 묵묵히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파수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적 분노나 선동적 구호가 아니다. 무엇이 본질이며, 무엇이 체제의 문제인가를 차분히 짚어보는 지혜다. 또한 신앙의 자유를 지키는 길이 단순히 내 울타리를 지키는 것을 넘어,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지키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단의 성명서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 시대, 한국 교회는 과연 무엇을 파수하고 있는가. 눈앞의 편의인가, 아니면 영원한 자유의 가치인가. 이 무거운 질문 앞에 더 이상 외면이나 침묵으로 답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그 대답을 삶과 실천으로 증명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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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의 성명서가 던진 역설: 한국 교회는 지금 무엇을 파수(把守)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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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폐허 위에서 확인한 교회의 본질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베네수엘라의 현대사는 우리에게 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국가가 신이 되려 하고, 이념이 구원의 자리를 찬탈하며, 공포가 일상을 지배할 때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난 수년간 베네수엘라 교회가 걸어온 길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도 강력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총칼을 들고 거리에 서는 대신, 가장 낮은 곳에서 ‘예배’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독재가 결코 점령할 수 없었던 자유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국가라는 ‘거짓 신’에 맞서는 신앙의 언어 독재의 본질은 ‘전체주의’에 있습니다.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은 시민의 식탁부터 영혼까지 모든 영역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 했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구원자로, 지도자를 메시아로 포장하며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교회가 선택한 저항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국가보다 크시다”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근본적인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베네수엘라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인간의 존엄은 국가가 시혜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침해 불가능한 권리라는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체제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다”라는 내러티브는 독재가 요구하는 절대 복종의 논리를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렸습니다. 교회는 정권과 싸운 것이 아니라, 정권이 세운 ‘거짓된 세계관’과 싸웠던 것입니다. 예배, 공포를 해독하는 ‘영적 환기구’ 독재 치하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공포의 내면화’입니다. 이웃을 믿지 못하고, 말 한마디에 검열을 거치며,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규정하게 만드는 것. 베네수엘라의 예배 공동체는 이 독성 강한 공포를 씻어내는 환기구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감시를 피해 모인 거실, 낡은 기타 하나와 닳아버린 성경책이 전부였던 소그룹 모임들. 하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은 ‘탈(脫)공포’를 경험했습니다. 세상은 침묵을 강요했지만, 예배는 “너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속삭였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번호표 달린 배급 대상자로 보았지만, 예배는 그들을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환대했습니다. 찬양은 체제를 조롱하지 않았으나, 체제가 주입하는 절망의 서사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예배를 통해 내면의 자유를 회복한 사람들에게 독재자의 위협은 더 이상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빵의 나눔’과 ‘기억의 연대’ 베네수엘라 교회의 영성은 공중에 붕 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굶주린 이웃의 식탁 위로 내려앉았습니다. 국가의 배급 시스템이 붕괴하고 상점의 매대가 비어갈 때, 교회는 기꺼이 ‘빵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치 운동이 아니었으나, “국가만이 당신을 먹여 살린다”는 독재의 가장 큰 거짓말을 삶으로 반박하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교회는 ‘기억의 저장소’가 되었습니다. 수감과 고문, 가족의 실종을 겪고도 어디 하소연할 곳 없던 이들에게 교회는 “여기서는 말해도 된다”는 안전한 품이 되어주었습니다. 슬픔을 함께 울어주는 목회자들의 ‘동행’은, 국가가 지워버리려 했던 고통의 기록들을 생생한 역사의 증언으로 보존해냈습니다. 이 기억의 연대는 훗날 사회 재건의 가장 소중한 도덕적 자산이 될 것입니다. 독재 이후, ‘상처 입은 치유자’의 길 이제 베네수엘라는 긴 터널을 지나 새로운 아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800여 명의 정치범과 목회자들이 석방된 것은 그 서막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과제는 권력의 주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무너진 사회적 신뢰를 어떻게 다시 세우느냐에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교회는 지난 세월 동안 이미 ‘그다음 사회’의 미니어처를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복수 대신 회복을, 승리 대신 화해를 선택하는 예배 공동체의 질서는 독재 이후의 사회가 지향해야 할 나침반입니다. 권력은 지고 정권은 바뀌지만, 고통받는 이 곁을 지키며 인간의 품격을 사수했던 교회의 헌신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사람을 지키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사례는 우리에게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교회는 체제를 무너뜨리는 주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체제가 무너뜨리려 했던 ‘사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킨 그곳에서, 독재는 더 이상 발붙일 자리를 잃었습니다. 예배는 세상을 바꾸는 도구가 아닙니다. 예배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세워, 그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그 존엄을 깨달은 한 사람이 공포를 이겨낼 때, 세상은 비로소 변하기 시작합니다. 베네수엘라의 어두운 밤을 밝힌 것은 거창한 혁명의 횃불이 아니라, 어느 지하 거실에서 나지막이 불리던 찬양의 불빛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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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폐허 위에서 확인한 교회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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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정죄의 돌팔매를 멈추고, 회복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라
- AI이미지 그림 광장의 소음, 그 너머의 본질을 묻다 최근 한국 교계는 거대한 해일에 휩쓸린 듯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의 십수 년 전 과거 발언이 담긴 녹취가 공개되면서 시작된 이 파장은, 디지털 광장이라는 확성기를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습니다. 기독교 언론은 물론, 수많은 유튜브 채널과 SNS 공간은 연일 이 사건을 중계하듯 쏟아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흐르는 정서입니다. 사실을 전달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 상대의 인격 전체를 난도질하는 ‘감정적 해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자극적인 파편들은 어느덧 하나의 거대한 ‘정죄의 서사’가 되어 소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숨 가쁜 비난의 속도를 늦추고 복음의 본질을 직시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이 뜨거운 분노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향해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적 쾌락인가를 말입니다. ‘온유한 심령’이라는 이름의 거울 성경은 죄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지향하는 종착지는 언제나 ‘심판’ 그 자체가 아니라 ‘돌이킴과 회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던진 권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준엄한 울림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라디아서 6:1)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심령’은 단순히 성격이 부드러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허물 속에서 ‘나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겸손의 극치입니다. “나 또한 저 자리에 있었다면, 나 또한 저 상황이었다면 넘어졌을지 모른다”는 처절한 자기 인식이 전제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바로잡을’ 자격을 얻습니다. 자신을 살피지 않는 정죄는 독이 든 칼날과 같아서, 상대를 죽일 뿐만 아니라 정죄하는 자의 영혼마저 황폐하게 만듭니다. 내려놓음, 그 고통스러운 순종의 무게 사건의 본질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태도입니다. 김문훈 목사는 12년 전의 부적절한 언행이 수면 위로 떠 오르자, 구구절절한 변명 대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와 교단 신문을 통해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고, 상처 입은 이들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개척하여 척박한 땅에서 일군 대형 교회의 담임직을 사임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반추해 볼 때, 지도자의 허물이 드러났을 때 이토록 신속하고 단호하게 책임을 지는 모습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대개는 공소시효를 논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며 자리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더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사역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근간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 그가 선택한 사임은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처절한 순종이었습니다. 자신이 걸림돌이 되어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막으려는 그 무거운 결단을, 우리는 마땅히 복음적인 책임 의식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확인사살’이라는 이름의 잔인함을 경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와 교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 공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사과했고, 책임을 졌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나간 이를 향해 다시 돌을 던지는 행위는 무엇을 위함입니까? 이는 정의의 구현이 아니라 ‘확인사살’에 가깝습니다. 이미 엎드러진 자의 등 위에 다시 칼을 꽂는 행위는 십자가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범죄한 자를 징계한 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자 공동체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라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2:6-7) 바울은 ‘족하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책임을 물었으니 이제는 그의 영혼이 절망이라는 늪에 잠식되지 않도록 공동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한 지체가 병들었다고 해서 그 부위를 도려내 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어떻게든 피를 통하게 하고, 살려내어 다시 몸의 일부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 생명의 본능입니다. 십자가는 ‘대신 죽음’이지 ‘대신 죽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음한 여인을 대하신 방식을 떠올려 봅니다. 율법의 잣대로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광기 어린 군중의 양심을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긍정하지 않으셨지만, 죄인만큼은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죄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하나님이 직접 목숨을 내어놓으실 만큼 처절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회개한 형제를 향한 끝없는 정죄는, 사실상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무임승차가 아니라, 누군가의 처절한 대가 지불로 얻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는 머리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암덩어리도 아니며, 한몸에 일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령 손가락에 무좀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 손가락을 내 몸이 아니라고 잘라버리는 정신나간 짓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을 먹고 아픈 부분에 약을 발라 치료를 할 것입니다.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지체로써 치료를 위한 방편으로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길: 정죄의 문화에서 회복의 문화로 이번 사태는 김문훈 목사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한국 교회 전체의 성숙도를 묻는 시험대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세 가지 소중한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첫째, 지도자의 책임 있는 결단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완악함입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자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명예와 기도할 시간을 허락해야 합니다. 둘째, 공동체의 지체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비난의 화살을 쏘는 것은 쉽지만, 함께 울며 회복을 돕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 ‘비판하는 공동체’에서 ‘싸매어 주는 공동체’로 체질을 개선해야 합니다. 셋째, 복음적 공론장의 형성입니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자극적인 정보에 휩쓸리지 않고, 성경의 가치관으로 사건을 해석하며 말의 무게를 지키는 성도들의 절제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덮는다’는 것은 죄를 은폐하거나 거짓으로 감추는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와 책임 지불이 이루어진 후, 그 죄를 더 이상 비난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공동체적 합의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덮개입니다. 정죄의 문화는 교회를 강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차갑게 얼어붙게 만듭니다. 반면, 회복의 문화는 교회를 깊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김문훈 목사의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돌을 쥐고 있는가, 아니면 수건을 들고 있는가?” 죄는 단호히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회개한 이를 향해 격려와 회복의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야말로 십자가를 통과한 교회의 진짜 얼굴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난의 광장에서 내려와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한 목회자의 회복을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정죄의 독기를 빼내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 길을 선택한다면, 이 아픈 상처는 오히려 더 큰 성숙을 향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정죄가 아니라 은혜로, 확인사살이 아니라 회복으로. 그 좁고 험한 길 끝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환한 웃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련기사 ● 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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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 정죄의 돌팔매를 멈추고, 회복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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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고(AGI), 노동의 가치가 희석되며, 인간의 생존이 기본소득과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미래가 목전에 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거대한 변화를 단순한 ‘기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기술적 적응을 고민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변화는 명백히 ‘인간 이해의 문제’다. "인간은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진정한 자유와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기술에 의해 다시금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술은 인간의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AG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역할 자체를 흔드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최첨단 기술 대응 전략이 아니다.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신앙적 재정립이다. 1. 노동이 사라질 때, 소명은 더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쓸모와 존재 가치를 증명해 왔다. 그러나 노동의 총량이 줄어드는 미래에, 일에서 정체성을 찾던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가치를 노동의 유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Homo Faber)’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다. 그러므로 노동이 소멸해가는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소명이 곧 직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명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방식 그 자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살아가느냐"가 삶의 본질이 되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마주할 미래다. 2. 기본소득의 시대, 탐욕 대신 절제를 배워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스템적으로 해결되는 사회는 축복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거대한 위기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진 환경에서는 삶의 치열한 의미 또한 증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역사는 풍요가 종종 영적 타락과 궤를 같이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풍요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풍요를 절제 없이 향유하는 삶은 경계한다. 인간은 소비로 채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AGI 시대에 우리가 훈련해야 할 영성은 ‘더 많이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는 태도’다. 단순한 삶, 자발적인 절제, 그리고 일상에 대한 감사의 영성은 미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신앙의 형태가 될 것이다. 3. 통제받는 사회 속에서 자유의 의미를 지켜야 한다 고도로 발달한 AI는 인간을 해치기보다, 인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려 들 것이다. 건강을 위해, 사회적 안정을 위해, 더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알고리즘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도하고 통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위협받는 것은 ‘자유’다. 인간은 실수할 자유, 실패할 자유, 때로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자유를 가진 존재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변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을 가치 있게 여긴다.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는 안전할지 몰라도 인간다운 사회는 아니다. 편리함보다 자유를, 효율보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치다. 4. 인간이 잊게 될 질문을 교회가 붙잡아야 한다 AGI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의 조건이 완벽히 해결되면 존재의 이유를 묻는 질문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가장 깊은 공허가 들어선다. 교회는 세상이 잊어버릴 이 질문들을 끝까지 붙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왜 희생해야 하는가?" "왜 진리를 따라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기술은 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답이 주어진다. 5.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영성의 깊이로 결정된다 다가오는 시대는 인간이 더 똑똑해지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다움이 시험받는 시대다. 노동이 줄어들고 삶이 편리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은 더 쉽게 삶의 방향을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존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우고, 풍요 속에서도 절제를 배우며, 통제보다 자유를 선택하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기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어도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정교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이다. AGI 시대는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기회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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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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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AI 이미지 '심판의 돌과 생명의 펜' 언론의 칼날과 십자가의 사랑 사이 언론(言論)은 본래 날카롭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그 펜의 무게와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언론이 ‘팩트(Fact)’를 무기로 상대를 베어내는 데 주력한다면, 기독교 언론은 그 팩트 너머에 있는 ‘진실(Truth)’과 ‘생명(Life)’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교계 매체가 보도한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관련 기사는 기독교 언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빗나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을 들추어내어, 이미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로 봉합된 상처를 다시 찢어발기는 행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이며, 무엇을 위한 보도인가.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기독교 언론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문화인가, 생명의 문화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사형틀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살려낸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언론 또한 그 생명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일부 기독교 언론 행태는 생명이 아닌 ‘사회적 매장’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김문훈 목사에 대한 보도는 전형적인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래전 발생한 일이며, 목회자로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했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을 공개하고, 심지어 독자들이 그 자극적인 음성 파일을 직접 다운로드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언론의 공익적 기능을 넘어선 인격 살인에 가깝다. 이는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어치려 했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율법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팩트는 여인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팩트로 여인을 죽이지 않으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기독교 언론의 펜 끝에는 예수의 ‘용서’가 묻어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의 ‘살기’가 서려 있는가. ‘알 권리’라는 미명 하의 폭력성 해당 기사는 목회자의 리더십 검증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내세웠다. 물론 공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는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익(公益)이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공익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지, 공동체의 일원을 파괴하여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균형의 상실’과 ‘자극적 배포 방식’이다. 기사는 제3자의 증언과 녹취 등 공격 측의 자료는 방대하게 싣고 있으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김 목사의 현재 입장이나 과거 사과 과정에 대한 반론권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공정성을 훼손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녹취 파일의 다운로드 제공이다. 욕설이나 거친 언사가 담긴 파일을 대중에게 직접 유포하는 것은 사실 전달을 넘어선다. 이는 독자들에게 “이 사람을 함께 미워해 달라”고 선동하는 정서적 폭력이며, 클릭 수를 위한 선정주의적 상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허물을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기독교 언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죽음의 문화’다. 파괴가 아닌 ‘세움’을 향하여 세상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은 다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만일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바로잡다’라는 헬라어는 뼈가 부러졌을 때 다시 맞추는 의료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그를 공동체에서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건강한 지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김문훈 목사의 과거 언행이 목회자로서 부덕(不德)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허물을 딛고 회개하며 목양에 힘써왔다면, 그리고 당사자와의 화해가 있었다면, 언론은 그를 다시 과거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갱신된 지도자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감시하되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다. 교회와 성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비난이 더 치명적일 때가 많다. 기독교 언론이 ‘내부 총질’의 선봉장이 되어선 안 된다. 비판은 하되 비난하지 말고, 지적은 하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팩트(Fact)를 다루되 임팩트(Impact) 있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펜을 든 사명자들에게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세워주며 거룩한 방파제가 되는 것인가. 이번 보도 사태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언론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기사는 사람을 살리는가, 죽이는가?”, “나의 펜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인가, 아니면 형제를 찌르는 흉기인가?” 기독교 언론의 사명은 명확하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생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다.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덮어주고, 싸매주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치유의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김문훈 목사를 향한 이번 보도가 단순히 하나의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기독교 언론이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생명의 펜’을 다시 쥐는 거룩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만이 교회가 살고 언론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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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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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자유의 성벽 허무는 ‘정교분리’의 역설 : 종교의 심장을 겨눈 국가의 총구
- 時事칼럼/양봉식 국장 동영상 갈무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침묵의 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보이지 않는 성벽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는 선언은 국가가 국민의 영혼에 개입할 수 없음을 천명한 인류 지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터져 나온 발언들은 이 거룩한 성벽에 균열을 내고 있다.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목소리를 거세하려는 시도는, 보호의 언어가 아닌 섬뜩한 통제의 언어였다. 거룩한 강단에 가해진 ‘반란’의 낙인 이재명은 기자회견에서 특정 종교와 일부 개신교를 겨냥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비판하는 설교를 두고 “국민에게 총구를 겨냥하는 반란행위”라며 형사적·안보적 프레임을 씌웠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위험한 비유다. 종교인의 설교는 신앙적 가치에 기반한 양심의 표현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그 자체다. 설교 내용이 위정자의 입맛에 쓰다고 해서 그것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순간, 국가는 이미 신앙의 영역을 검열하는 심판자로 군림하게 된다.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권력이 종교의 입을 막기 위해 ‘정교분리’라는 칼을 빼 드는 것은, 이 원칙의 탄생 배경을 완전히 오독한 비극이다. ‘큰 돌부터 제거’라는 섬뜩한 단계론의 정체 가장 날카로운 우려는 “큰 돌부터 집어내고 그다음 자갈, 잔돌을 집어내겠다”는 그의 수사적 비유에서 정점을 찍는다. 법치국가에서 사법적 판단은 개별 범죄 혐의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단계적 제거’를 운운하는 이 언어는 법적 정의가 아니라 정책적 타도 대상을 설정하는 통치자의 서늘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문법이 아니다. 서구 유럽 국가에서 종교 단체나 비영리법인의 해체는 테러나 무장 폭력 같은 명백한 반국가적 범죄가 입증될 때만 사법부의 극히 보수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면, 종교를 ‘국가의 관리 대상’으로 보고 비판 세력을 ‘사회 해악’으로 몰아 해체하는 방식은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나 전체주의 체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적 종교 길들이기가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선택적 정의, 그리고 공적 신앙의 사멸 이재명의 분노는 지극히 선택적이다. 정치권에는 특정 정권을 지지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종교 세력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권력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종교적 행위에는 침묵하며, 오직 비판적인 목소리에만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것은 원칙의 수호가 아니라 권력의 편의를 위한 ‘선택적 정의’일 뿐이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사적 클럽’이 아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사회 정의를 외치고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갖는다. 정교분리를 이유로 교회를 침묵의 섬으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는, 결국 국가 권력을 견제할 마지막 정신적 보루를 무너뜨리겠다는 선언과 같다. 헌법의 족쇄를 풀지 마라 정교분리는 권력자가 종교를 휘두르기 위해 만든 회칙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국민의 신앙과 양심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채워둔 ‘헌법적 족쇄’다. 위정자가 이 족쇄를 스스로 풀고 “질서와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생사여탈권을 쥐려 할 때, 자유의 시대는 저물고 통제의 시대가 밝아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사와 해체의 위협이 아니다. 권력 앞에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 그리고 그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민주적 절제다. 영혼의 영역까지 국가의 발길질 아래 두려는 오만을 멈춰야 한다. 성벽이 무너진 뒤에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거대한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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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자유의 성벽 허무는 ‘정교분리’의 역설 : 종교의 심장을 겨눈 국가의 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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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의 성명서가 던진 역설: 한국 교회는 지금 무엇을 파수(把守)하는가
- 데스크칼럼/양봉식 국장 AI이미지 낯선 풍경, 거꾸로 된 질문 최근 이단으로 규정된 집단인 신천지가 정부의 특정 종교 단체 해산 논의와 관련하여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며 묘한 불쾌감과 함께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교차함을 느꼈다. 정통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받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온 집단이 역설적이게도 ‘헌법상의 종교의 자유’를 역설하며 국가 권력의 향방에 문제를 제기하는 장면은 지극히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이 장면을 단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목소리가 옳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던진 ‘종교 자유의 위기’라는 화두가 현재 한국 교회가 마주한 거대한 시대적 징후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으며,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본질은 무엇인가. 이단의 입에서 나온 정의(正義)가 오히려 잠자는 정통 교회의 죽비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픈 자문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치를 넘어 체제와 가치의 영역으로 한국 사회의 모든 논쟁은 블랙홀처럼 정치적 구도로 수렴되곤 한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 좌와 우라는 이분법적 틀은 복잡한 본질을 단순한 호불호의 문제로 치환해 버린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한 종교 단체 해산 논의와 그에 따른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공방의 소재가 아니다. 이는 국가의 체제와 자유의 근간, 그리고 신앙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토양에 관한 실존적 문제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혹은 대중적 지지율에 따라 특정 집단을 ‘해산’하거나 ‘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정당화된다면, 그 칼날의 끝이 언제나 이단만을 향해 있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종교의 자유는 국가가 부여한 시혜적 권리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천부적 권리이자 국가 권력이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다. 이를 훼손하는 선례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신앙의 자유라는 가장 소중한 가치를 정치적 거래의 제물로 바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진리의 분별과 권력의 칼날 정통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단과 거짓 교리에 맞서 피 흘리는 싸움을 지속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거짓된 누룩을 경계하고 진리의 말씀을 수호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쳤다. 교회는 교리를 세우고 분별의 잣대를 엄격히 함으로써 공동체를 지켜왔다. 참된 진리를 붙드는 공동체는 이단의 존재 그 자체에 과도한 공포를 느끼거나 국가 권력을 빌려 그들을 멸절하려 들지 않는다.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가고, 참이 서면 거짓은 스스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교회의 힘은 공권력의 강제 집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생명력과 도덕적 우위에서 나온다. 그런데 지금의 형국은 묘하기 짝이 없다. 이단 집단이 ‘자유’를 외치며 방어막을 치는 동안, 정작 한국 교회는 이 문제를 ‘체제와 자유’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성찰하기보다 침묵하거나 방관하고 있다. 불편하고 혐오스러운 집단을 공권력이 대신 처리해 주는 것에 안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가진 영적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AI 이미지 종교의 자유, 그 헌법적 가치의 엄중함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헌법적 핵심 가치로 삼는 국가다. 우리가 거리에서 찬양하고, 노방전도를 하며, 대규모 광장 집회를 통해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토양은 바로 이 자유의 보장에서 기인한다. 만약 현재 눈앞에 가시 같은 종교 집단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국가 권력의 종교 개입을 묵인하거나 당연시한다면, 훗날 그 '개입의 기준'이 정통 교회를 향할 때 우리는 어떤 명분으로 저항할 수 있겠는가. 역사는 반복된다. 권력에 의한 종교 억압은 대개 사회적 공감대가 낮고 소외된 집단을 제물 삼아 시작된다. 대중의 분노를 동력 삼아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그 칼날은 점차 예리해지고 범위는 넓어진다. 결국 국가가 '허용하는 신앙'과 '허용하지 않는 신앙'을 가르는 심판관의 자리에 앉게 될 때, 진정한 신앙의 공간은 사라지게 된다. 이는 이미 수많은 전체주의 국가와 역사 속에서 증명된 비극적인 공식이다. 말세의 징후와 깨어 있는 영성 성경은 마지막 때를 경고하며 예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 날이 올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는 막연한 종말론적 상상이 아니라, 역사적 실체로서 우리 앞에 다가오는 현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종교에 대한 적대감과 행정적 규제의 움직임이 어떤 영적 징후를 내포하고 있는지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깨어 있음’이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조차 자신들의 존립을 위해 성명서를 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이 현실 앞에서, 한국 교회의 평온함은 오히려 위태로워 보인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차원을 넘어, 복음이 선포되고 신앙이 호흡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 그 자체를 사수하는 일이다.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 사람의 세계관과 신념은 법이나 강압으로 바뀌지 않는다. 오랜 시간 성경을 가르치고 교리를 주입해도 인간의 내면은 완강한 성벽과 같다. 하물며 국가 권력이 물리적 힘으로 종교적 확신을 통제하거나 교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회심하게 하는 역사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에 속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명확하다. 파수꾼의 사명으로 질문을 던지고, 시대의 오류에 대해 경고하며, 성도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혐오에 편승하여 자유를 파괴하는 길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더라도 진리의 길을 묵묵히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파수할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적 분노나 선동적 구호가 아니다. 무엇이 본질이며, 무엇이 체제의 문제인가를 차분히 짚어보는 지혜다. 또한 신앙의 자유를 지키는 길이 단순히 내 울타리를 지키는 것을 넘어,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지키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단의 성명서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이 시대, 한국 교회는 과연 무엇을 파수하고 있는가. 눈앞의 편의인가, 아니면 영원한 자유의 가치인가. 이 무거운 질문 앞에 더 이상 외면이나 침묵으로 답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한국 교회가 그 대답을 삶과 실천으로 증명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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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의 성명서가 던진 역설: 한국 교회는 지금 무엇을 파수(把守)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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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폐허 위에서 확인한 교회의 본질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베네수엘라의 현대사는 우리에게 아픈 질문을 던집니다. 국가가 신이 되려 하고, 이념이 구원의 자리를 찬탈하며, 공포가 일상을 지배할 때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난 수년간 베네수엘라 교회가 걸어온 길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도 강력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들은 총칼을 들고 거리에 서는 대신, 가장 낮은 곳에서 ‘예배’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독재가 결코 점령할 수 없었던 자유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국가라는 ‘거짓 신’에 맞서는 신앙의 언어 독재의 본질은 ‘전체주의’에 있습니다.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은 시민의 식탁부터 영혼까지 모든 영역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 했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구원자로, 지도자를 메시아로 포장하며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교회가 선택한 저항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국가보다 크시다”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근본적인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베네수엘라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인간의 존엄은 국가가 시혜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침해 불가능한 권리라는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체제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다”라는 내러티브는 독재가 요구하는 절대 복종의 논리를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렸습니다. 교회는 정권과 싸운 것이 아니라, 정권이 세운 ‘거짓된 세계관’과 싸웠던 것입니다. 예배, 공포를 해독하는 ‘영적 환기구’ 독재 치하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공포의 내면화’입니다. 이웃을 믿지 못하고, 말 한마디에 검열을 거치며,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규정하게 만드는 것. 베네수엘라의 예배 공동체는 이 독성 강한 공포를 씻어내는 환기구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감시를 피해 모인 거실, 낡은 기타 하나와 닳아버린 성경책이 전부였던 소그룹 모임들. 하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은 ‘탈(脫)공포’를 경험했습니다. 세상은 침묵을 강요했지만, 예배는 “너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속삭였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번호표 달린 배급 대상자로 보았지만, 예배는 그들을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환대했습니다. 찬양은 체제를 조롱하지 않았으나, 체제가 주입하는 절망의 서사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예배를 통해 내면의 자유를 회복한 사람들에게 독재자의 위협은 더 이상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빵의 나눔’과 ‘기억의 연대’ 베네수엘라 교회의 영성은 공중에 붕 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굶주린 이웃의 식탁 위로 내려앉았습니다. 국가의 배급 시스템이 붕괴하고 상점의 매대가 비어갈 때, 교회는 기꺼이 ‘빵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정치 운동이 아니었으나, “국가만이 당신을 먹여 살린다”는 독재의 가장 큰 거짓말을 삶으로 반박하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교회는 ‘기억의 저장소’가 되었습니다. 수감과 고문, 가족의 실종을 겪고도 어디 하소연할 곳 없던 이들에게 교회는 “여기서는 말해도 된다”는 안전한 품이 되어주었습니다. 슬픔을 함께 울어주는 목회자들의 ‘동행’은, 국가가 지워버리려 했던 고통의 기록들을 생생한 역사의 증언으로 보존해냈습니다. 이 기억의 연대는 훗날 사회 재건의 가장 소중한 도덕적 자산이 될 것입니다. 독재 이후, ‘상처 입은 치유자’의 길 이제 베네수엘라는 긴 터널을 지나 새로운 아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800여 명의 정치범과 목회자들이 석방된 것은 그 서막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과제는 권력의 주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무너진 사회적 신뢰를 어떻게 다시 세우느냐에 있습니다. 베네수엘라 교회는 지난 세월 동안 이미 ‘그다음 사회’의 미니어처를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복수 대신 회복을, 승리 대신 화해를 선택하는 예배 공동체의 질서는 독재 이후의 사회가 지향해야 할 나침반입니다. 권력은 지고 정권은 바뀌지만, 고통받는 이 곁을 지키며 인간의 품격을 사수했던 교회의 헌신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사람을 지키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사례는 우리에게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교회는 체제를 무너뜨리는 주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체제가 무너뜨리려 했던 ‘사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킨 그곳에서, 독재는 더 이상 발붙일 자리를 잃었습니다. 예배는 세상을 바꾸는 도구가 아닙니다. 예배는 인간을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세워, 그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확인시켜주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그 존엄을 깨달은 한 사람이 공포를 이겨낼 때, 세상은 비로소 변하기 시작합니다. 베네수엘라의 어두운 밤을 밝힌 것은 거창한 혁명의 횃불이 아니라, 어느 지하 거실에서 나지막이 불리던 찬양의 불빛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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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폐허 위에서 확인한 교회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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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신앙과 무례한 기독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 최근 정치권에서 불거진 한 유력 정치인의 언사(言辭)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던 이혜훈 전 의원이 과거 국회 인턴을 향해 쏟아낸 폭언과 고성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를 죽였으면 좋겠다"는 식의 극단적인 언어와 고압적인 태도는 공적 권력을 가진 자의 언어가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유독 기독교계 안팎에서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교회에서 간증하며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해온, 이른바 ‘독실한 기독교인’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간증에 은혜를 받았던 수많은 교인들은 이번 사태를 접하며 적잖은 충격과 자괴감을 토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한 개인에 대한 비난을 넘어, 한국 교회가 지향해온 ‘독실함’의 실체와 오늘날 기독교의 고질적인 병폐인 ‘무례함’에 대해 뼈아픈 자문을 던져야 합니다. 독실함의 기준: 종교적 열심인가, 인격적 성숙인가 우리는 흔히 주일 성수에 철저하고, 십일조를 거르지 않으며, 뜨겁게 기도하고, 교회 직분을 가진 이들을 향해 ‘독실하다’는 수식어를 붙입니다. 이혜훈 전 의원 역시 이러한 종교적 외피(外皮) 안에서 독실한 신앙인으로 추앙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열심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보증하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신앙이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앙은 본래 자신을 끊임없이 십자가 앞에 세우고 깎아내는 자기 부인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신앙적 열심이 사회적 성취나 권력과 결합할 때, 그것은 타인을 압박하는 ‘종교적 권위’로 변질되곤 합니다. 예수께서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대상이 당대 종교적으로 가장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참된 신앙은 영향력이 커질수록 더 조심하게 만들고, 높아질수록 더 낮은 곳을 향하게 만드는 힘이어야 합니다. 무례함, 복음이 사라진 자리에 돋아난 독버섯 리처드 마우(Richard Mouw)는 그의 저서 《무례한 기독교》에서 현대 기독교인들이 잃어버린 ‘시민적 예절(Civility)’을 통렬히 지적합니다. 그는 "우리는 진리를 말한다는 이유로 타인을 모욕할 권리를 부여받지 않았다"고 강조했습니다. 복음을 수호한다는 명분, 혹은 공의를 실현한다는 명분 아래 자행되는 공격적 언사와 무리한 태도는 오히려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어둠이 됩니다. 무례함은 단순히 말투나 예절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타인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나보다 약한 존재, 나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나와 동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지 않을 때 무례함은 고개를 듭니다. 이번에 드러난 ‘갑질’ 논란 역시 권력이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파산의 증거입니다. 사랑 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속성 중 하나로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를 꼽습니다. 성경의 어디에서도 무례한 진리를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진리가 무례함을 입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끝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과 같아서, 힘을 증명하려 애쓰는 ‘갑질’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의 무례한 이웃들 우리는 이 문제를 정치인 한 사람의 일탈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우리 주변의 교회 안에서도 무례한 목사, 장로, 권사들의 이야기들을 익숙하게 들어왔습니다. 직분이 계급이 되고, 신앙의 연륜이 텃세가 되어 연약한 교우들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세상은 기독교인의 실수를 기독교 전체의 모습으로 치환하여 바라봅니다. 한 사람의 무례함은 곧 '기독교는 무례하다'는 낙인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먼저 말과 태도에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획예산처 장관이라는 공직에 오르기 전에, 혹은 교회의 중직자가 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한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공손함’과 ‘겸손’을 갖추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숙한 기독교를 향한 제언: 사랑은 실력이다 진짜 독실한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도의 유창함이나 간증의 화려함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독실함은 상대방이 누구든, 특히 나보다 약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보여주는 배려와 존중, 그리고 품위에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배의 권위가 아닌 섬김의 권위로 사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 손길에는 무례함이 아닌 지극한 존중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독실함’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합니다. 말은 절제되고, 태도는 온유해야 합니다. 권력은 낮아지는 데 쓰여야 하며, 신앙은 자신을 성찰하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무례함의 반대인 ‘인격적 대함’이 기독교인의 가장 큰 영적 실력이 되어야 합니다. 이혜훈 전 의원의 사례는 한국 교회 전체를 향한 뼈아픈 경종입니다. 우리는 과연 세상 속에서 ‘친절한 이웃’입니까, 아니면 ‘무례한 신앙인’입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무례한 자를 통해 영광 받지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인은 진리를 소유했다는 오만함이 아니라, 진리에 붙들린 자다운 겸허함으로 세상을 대합니다. 무례함이 상식이 된 시대일수록, 기독교인의 공손함과 품격 있는 삶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전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복음이 살아 있다면, 우리의 언어는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부디 한국 교회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독실함’이라는 이름의 가면을 벗고, 타인의 인격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성숙한 신앙의 본질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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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신앙과 무례한 기독교: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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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파고를 넘어, 화해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
- 時論/양봉식 국장 다시 짙어지는 이념의 그림자 한국전쟁은 이념의 갈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어디까지 무너뜨릴 수 있는지 보여준 비극적인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동족상잔"의 참상은 단순한 정치적 실패를 넘어, 이념이라는 명분 아래 신앙과 도덕이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 잔혹한 현장이었습니다. 전쟁이 남긴 것은 승리도 패배도 아닌, 깊은 폐허와 상처뿐이었습니다. "이념이 인간을 도구로 삼을 때, 인간은 얼마나 쉽게 잔혹해질 수 있는가"라는 뼈아픈 질문만이 남겨졌습니다. 이후 우리 사회는 철학적 성찰을 시작했고, 문학은 인간의 내면을 살폈으며, 신학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와 폭력을 통곡하며 자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사회는 다시금 이념의 진창 속으로 미끄러지고 있습니다. 좌우의 진영 논리는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상대방을 대화의 파트너가 아닌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언어들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갈등은 해소되지 않은 채, 오히려 더욱 치열한 ‘보이지 않는 전쟁’이 우리 삶 전반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이념은 결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모든 이념은 겉으로 정의와 평등, 약자 보호를 외칩니다. 그러나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념은 종종 인간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이용하는 폭력의 체계로 변질되었습니다. 역사 속의 여러 사회주의 실험들이 그러했듯, 해방을 약속했던 목소리들은 결국 억압과 통제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민주화 이후 분출된 다양한 에너지가 일부 급진적 이념과 결합하며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이념 투쟁이 "우리는 선, 너희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고착화한다는 점입니다. 이념이 절대화될 때 사회는 폭발 직전의 긴장 상태를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념의 종교화’와 교회가 마주한 위기 이러한 갈등은 교회 담장 밖의 일만이 아닙니다. 신앙의 중심에 계셔야 할 하나님 대신, 그 자리를 이념이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보다 앞선 가치로 자리 잡은 정치적 담론들이 성도들의 사고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교회 안에서도 신앙적 진리보다 정치적 옳음을 우선시하며, 서로를 정죄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견해 차이를 넘어 교회가 이념의 전장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다는 위험한 징후입니다. 교회가 진영 논리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닌 또 하나의 이익 집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만이 유일한 생명의 길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이념이 절대화된 곳에는 반드시 파국과 폭력이 뒤따랐습니다. 이념은 구원을 약속하지만, 결국 인간을 비극으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그 어떤 정치 체제나 사상도 인간을 구원할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인간을 살리고, 그리스도만이 역사를 새롭게 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이 인간의 존엄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습니다. 화해와 화목을 위한 교회의 사명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상처를 덧내는 전투 부대가 아니라, 상처를 싸매는 ‘치유 공동체’입니다. 서로를 갈라놓는 구호가 아니라, 서로를 품게 하는 ‘화해의 다리’가 절실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후 5:18)을 맡기셨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실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회복합시다: 어떤 이념도 복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모든 정치적 정의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분별합시다: 세상이 말하는 정의가 하나님의 정의와 일치하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사상적 정의가 신앙의 자리를 대체하지 않도록 경계합시다. 화해의 언어를 사용합시다: ‘적’이 아닌 ‘형제’로, ‘정죄’가 아닌 ‘회복’의 언어로 대화를 시작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연합을 지킵시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함께 예배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포용의 공간을 지켜내야 합니다. 이념을 넘어 복음의 편으로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이 전쟁은 사람들을 나누고 교회마저 분열시키려 합니다. 이 상황에서 교회는 갈등의 한 축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이 전쟁을 멈추게 할 마지막 방파제가 되겠습니까? 역사가 증명하듯 이념의 끝은 파국이지만, 복음의 끝은 언제나 생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념의 편이 아닌 복음의 편에 서야 합니다. 편가르기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화해와 화목의 길을 선택합시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 한국 교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숭고한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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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파고를 넘어, 화해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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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문명 시대, 교회의 소명
- 우리는 지금 거대한 기술 문명의 변곡점 위에 서 있습니다. 인공지능(AI)은 더 이상 미래의 상상 속 기술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정보 검색을 넘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영상까지 만들며, 심지어 인간과 대화하고 위로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인간이 이 기술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 가느냐입니다. 한 강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AI 때문에 인생이 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AI를 먼저 이해하고 활용하는 경쟁자 때문에 뒤처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기술적 조언을 넘어 깊은 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그리고 무엇을 붙들어야 합니까? 다시 물어야 할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교회는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선언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고 생산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 맺고 이웃과 교제하며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AI는 지금 이 인간의 기능 일부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흉내 내고, 감정을 모방하고, 대화를 제공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앞으로 진지한 대화의 상당 부분이 인간이 아니라 AI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과 대화하려면 시간과 용기와 감정의 수고가 필요하지만, AI는 언제든 열고 닫을 수 있는 '편리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분명히 선언해야 합니다. AI는 관계를 흉내 낼 수 있지만 사랑할 수 없습니다. AI는 공감하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영혼을 품을 수 없습니다. 위로처럼 들리는 말을 할 수 있지만 책임 있는 타자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점점 사람과의 관계 대신 AI가 제공하는 '쉽고 안전한 위로'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기술의 승리가 아니라 인간성의 위기입니다. 그리고 만약 교회가 이러한 외로움의 시대에 참된 공동체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의 위기입니다. AI 시대에 교회가 제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닌 관계입니다. 편리함이 아닌 진정성입니다. 효율이 아닌 사랑입니다. 권능 앞에 선 윤리: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AI 시대의 윤리 문제 역시 교회가 깊이 성찰해야 할 지점입니다. AI는 엄청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육을 돕고, 의료를 발전시키며, 약자를 돕고, 선교와 복음 사역에도 유익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거짓 정보를 확대하고, 인간을 통제하며, 감정을 조작하고, 약자를 더 깊은 소외 속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권능 앞에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이냐?" 바벨탑의 교훈은 단순히 기술의 위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을 통해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인간의 마음이 파괴를 불러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교회는 이 시대에 기술 윤리의 영적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어떤 기술 사용이 하나님의 형상을 살리고, 어떤 사용이 그것을 훼손하는가? 어떤 활용이 공동체를 세우고, 어떤 활용이 공동체를 무너뜨리는가? 어떤 선택이 약자를 보호하고, 어떤 선택이 약자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히 기술적 판단이 아니라 신학적 분별을 요구합니다. 교회는 이 분별력을 키워주는 영적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AI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 영적 판단력 AI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능력은 '판단력'이라는 점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AI는 수백 개의 답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선택할지는 인간의 몫입니다. 결국 AI 시대에 더욱 필요한 것은 영적 분별력입니다. 무엇이 선입니까?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습니까? 무엇이 인간을 살리고 공동체를 세웁니까?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신앙적 기준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에게 기술 사용 능력보다 먼저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르쳐야 합니다. AI가 제공하는 정보는 많습니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고 해서 지혜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지가 많다고 해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택지가 많을수록 더 깊은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성경적 세계관과 기독교 가치관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기준이 있을 때, 사람들은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기준입니다. 한국 교회의 과제: 철학과 신학적 성찰 한국 사회가 특히 AI에 열광하고 빠르게 받아들이는 현실 역시 교회가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AI를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민족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술을 주도할 철학과 가치, 그리고 신학적 성찰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이지만, 그 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효율을 추구하지만, 그 효율이 어떤 가치를 희생시키는지는 묻지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좋은 것인지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합니까? 무조건적인 공포로 종말론적 해석 속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무비판적 낙관주의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기술과 인간성 사이에서, 진보와 가치 사이에서, 효율과 본질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AI 시대 속에서 인간 존엄을 지키는 최후의 영적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되어야 할 모습: 사랑이 치유하는 공동체 AI 시대에 교회가 제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외로운 이들이 AI 대신 사람을 찾도록 만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진정한 관계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AI가 아무리 위로의 말을 한다 해도, 그것은 진정한 위로가 아닙니다. 진정한 위로는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하며, 서로의 짐을 지는 공동체 안에서만 일어납니다. 둘째, 기술이 아닌 사랑을 통해 치유가 일어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습니다. 빠른 답을 원합니다. 편리한 관계를 원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상처는 효율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만 치유됩니다. 시간을 들여 함께하고,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품는 그 과정 속에서만 진정한 회복이 일어납니다. 셋째, 판단력과 분별력을 길러주는 영적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훈련시키는 곳입니다. AI 시대에 이러한 훈련은 더욱 절실합니다. 위기가 아닌 소명: 교회여, 일어나라 AI 시대는 교회에게 위기가 아니라 소명입니다.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를 잃어버리기 쉬운 이 시대에 교회는 더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AI는 위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크십니다. AI는 유능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AI는 대화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기술을 두려워하지 말되, 기술을 하나님보다 높이지 마십시오. AI를 사용하되, 인간을 잃지 마십시오.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 하나님의 형상을 붙드십시오. 이것이 AI 문명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신학적 과제이며, 윤리적 사명입니다. 교회는 이 시대의 기술 혁명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기술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기술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지혜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AI 시대는 교회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에게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외롭고 차가워질 때, 교회는 따뜻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변할 때, 교회는 느리지만 진실한 관계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점점 더 많은 정보 속에서 길을 잃을 때, 교회는 변하지 않는 진리의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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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어진 마음의 시대, 진리를 향한 귀를 다시 열어야 한다
- @ pixabay 한국 사회의 갈등은 단순한 이념의 충돌을 넘어, ‘마음의 상태’에서 비롯된 더 깊고 본질적인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갈등의 뿌리에는 좌우의 사상적 차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 안에 형성해온 ‘생각의 틀’ - 즉 인식 구조 - 을 결코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 태도가 자리하고 있다. 진실을 향한 열린 태도가 사라지고, 자신이 이미 가진 신념을 방어하는 데만 몰두하는 사회는 결국 진리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불신과 분열뿐이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로 자기만의 인식 구조를 만든다. 문제는 이 틀이 거의 종교처럼 신성시될 때 일어난다. 새로운 사실, 혹은 기존 전제를 무너뜨리는 증거가 제시되어도, 사람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꺼린다. 왜냐하면 그 사실이 자신의 세계관을 흔들고, 편안하게 구축된 심리적 안전지대를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을 부정하는 쪽을 선택하기도 하고, 기존 신념에 부합하도록 사실을 재조직하기도 한다. 이것을 성경은 ‘견고한 진(陣)’ 혹은 ‘생각의 요새’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생각의 진이 영적 싸움에서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이론과 생각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선언한다(고후 10:4–5). 이 견고한 진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사람 마음 안에서 자라난 완고함이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에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졌다고 반복해 기록되는 것은 상징적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적을 통해 수차례 경고하셨지만, 바로는 자신의 통치 욕망과 두려움, 고집에 따라 그 표적의 의미를 거부했다.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은 단순히 “듣기 싫어한다”는 정도가 아니다. 스스로 마음을 굳게 만들고, 그 굳어짐을 하나님께서 결국 내버려두셨다는 의미에 가깝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다. 현재 한국 사회는 좌우 진영이 각자의 ‘견고한 진’을 쌓아 올리고 있다. 동일한 사건과 자료가 제시돼도 완전히 서로 다른 해석으로 나뉘며, 상대가 제시한 사실은 무조건 가짜라고 단정한다. 법조계에서 드러나는 조작 증거, 특검·검찰 수사의 모순, 언론의 명백한 왜곡 보도조차 각 진영은 자기 서사에 맞게 조정한다. 사람들은 사실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이미 가진 신념의 틀에 맞추어 왜곡하거나 삭제한다. 이것이 바로 강퍅한 마음의 시대이다. 강퍅함의 본질은 진리를 거부하는 마음의 자세에 있다. 성경에서 강퍅함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진리로부터의 이탈, 그리고 공동체의 파괴로 이어졌다. 강퍅한 사람은 상대를 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리를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바로가 그랬고, 예레미야 시대 유다 백성이 그랬으며, 예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았던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한국 사회의 분열 또한 마찬가지이다. 좌우 어느 쪽이든, 진리 그 자체보다 자신의 세계관을 방어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진다면, 그 마음은 이미 강퍅함에 빠져 있다. 상대가 하는 말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고, 동시에 자신은 무조건 옳다는 착각 속에 갇힌다. 진리가 내게 무엇을 말하는지는 듣지 않고, 내가 이미 믿고 싶은 것만 듣는다. 이런 마음은 사회 전체를 불신의 늪으로 빠뜨린다. 성경은 이런 상황에 대해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말한다. 진리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며,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진리가 자유케 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를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강퍅한 마음을 가진 사회는 이 과정 자체를 거부한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강퍅한 마음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작은 고집이 굳어져 편견이 되고, 편견이 공격성으로 변하고, 공격성이 결국 자기 세계관을 절대화하는 교만에까지 이른다. 그 결과는 분명하다. 가정이 무너지고, 교회가 갈라지고, 사회가 분열된다. @ pixabay 지금의 한국 사회는 바로 이런 위험한 지점에 서 있다. 국가적 위기, 경제 불안, 정치적 불신이 겹쳐진 시대에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진영을 절대화하고 타인을 적대시한다. 진영이 곧 신앙처럼 되고, 이념이 곧 진리처럼 되는 오염된 문화가 우리 곁에 자리한다. 이념이 사람을 지배하면 사람은 반드시 진리를 잃는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진리는 인간의 판단 위에 있고, 인간의 신념보다 크며, 어떤 이념보다도 절대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영의 소리가 아니라 진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는 상대 진영을 무조건 비판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내 안에 있는 강퍅함을 먼저 살피라는 요청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내 생각의 진”을 무너뜨릴 때, 비로소 우리는 공동체의 회복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앞으로 한국 사회가 치유되기 위해서는 이념적 승리보다 먼저, 마음의 회복이 필요하다. 강퍅함을 내려놓고 진실을 받아들이는 용기,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정직함, 상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겸손이야말로 공동체를 새롭게 하는 힘이다. 성경이 말하는 변화는 언제나 먼저 마음에서 시작된다. 지금은 각자의 견고한 진을 세우는 시대가 아니라, 그 진을 무너뜨리고 진리가 길을 내도록 허락하는 시대이다. 강퍅한 마음을 내려놓고 진실을 향해 귀를 여는 민족만이 분열을 넘어 하나됨의 미래로 걸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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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어진 마음의 시대, 진리를 향한 귀를 다시 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