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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루틴을 지키라!
1.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6:4)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명 농구선수의 징크스와 루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시합 전에 청결을 점검해요. 목욕부터 집안 대청소까지 강박적으로 점검하는데, 그렇게 해야 경기에서 실수를 줄이고 시합에 집중이 잘 된다고 말합니다. 2. 그가 농구 시합 중에 자유투를 던질 때가 있는데요. 던지기 전 공을 바닥에 5번 튕깁니다. 그리고 던졌는데 들어가면 계속 5번씩 공을 튕기고 슛을 던져요. 자유투가 안 들어가면 횟수를 바꿔서 7회 혹은 10회 바닥에 공을 튕기죠. 슛이 성공하면 그 숫자를 기억하고 계속 그 횟수만큼 튕기고, 안 들어갈 때가 오면 다시 공 튕기는 횟수를 조정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야구 선수도 루틴이 있어요. 타석에 들어서면 꼭 야구 배트를 세 바퀴 돌리고 허리와 팔을 세 번 까딱거립니다. 그래야 자신감이 생기며 실수를 줄이게 된답니다. 이렇게 징크스는 이겨내고, 자신의 좋은 리듬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루틴이라고 하는데요. 3. 저도 신앙의 루틴이 있습니다. (목회자분들마다 영적 루틴이 다를 수 있는데요. 중심은 비슷하거나 같을 것입니다.) 신앙, 목회 본질을 지키는 힘과 삶이 자신만의 영적 루틴을 얼마나 잘 지켜내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7년 신학생 시절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재발견하였는데 삶과 신앙의 분기점이었어요. 그렇게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교제 나누는 삶을 추구하면서 영적 루틴이 생겼습니다. 충분히 성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삶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 바라보는 시간을 먼저 확보하는 겁니다. 영적 루틴이 발전을 거듭하며 현재 구체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4. 오전에는 가급적 활동하지 않아요. 성령님과 교제 나누며 외부적인 소음을 차단합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SNS를 내려놓고 가급적 약속도 잡지 않아요. 사도들의 고백처럼 말씀과 기도 시간으로 선포하고 영적, 정신적, 육체적 쉼과 회복의 시간을 가집니다. 물론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영적 루틴으로서 최대한 지키려고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으시면 또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지키는 방향성이 제게 유익해요. 5. 현재 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섬기는 교회가 생기기 전에는 참으로 집회 일정이 바빴어요. 매주 부흥회 초청이 있었고, 전국에 정기모임과 정기집회도 25곳이 넘었습니다. 바쁜 집회 일정도 영적 루틴을 지키면서 다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많은 일정 속에서도 일주일에 2일은 집에 가만히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가정에 먼저 충실하도록 이끄시며, 사역자가 아니라 아들이요 친구로서 성령님과 교제 나누는 삶에 집중하게 하셨는데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머물러 있는 시간입니다. 6. 어떤 시즌에는 한 달 이상 모든 집회를 거절하거나 1달 이후로 날짜를 조정했습니다. 5~6개월에 한 번씩은 집에서 두문불출했어요. 조용히 성령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멈춰 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영적인 루틴이 형성되었어요. 이제 제 영혼에 각인되었습니다.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배우게 하셨어요. 제가 좋아하는 찬양 가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그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7. 제 사역이 바빠지기보다, 제 이름이 알려지기보다, 우리 교회가 알려지기보다 예수님이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부족한 제 삶을 통해 예수님 알려지시려면 영적 루틴을 목숨같이 지켜야 해요.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부지런해야 하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분들 사역과도 비교할 필요 없어요. 누군가의 말처럼 오직 비교의 대상은 어제의 나 자신입니다. 오늘도 자신만의 영적 루틴을 지키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숫자에 속지 않고 성장과 성숙을 함께 추구하시는 분들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히 배움의 자세로 연합을 추구하시는 분들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시고 머물러 계시는 분들을 응원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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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고(AGI), 노동의 가치가 희석되며, 인간의 생존이 기본소득과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미래가 목전에 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거대한 변화를 단순한 ‘기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기술적 적응을 고민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변화는 명백히 ‘인간 이해의 문제’다. "인간은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진정한 자유와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기술에 의해 다시금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술은 인간의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AG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역할 자체를 흔드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최첨단 기술 대응 전략이 아니다.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신앙적 재정립이다. 1. 노동이 사라질 때, 소명은 더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쓸모와 존재 가치를 증명해 왔다. 그러나 노동의 총량이 줄어드는 미래에, 일에서 정체성을 찾던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가치를 노동의 유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Homo Faber)’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다. 그러므로 노동이 소멸해가는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소명이 곧 직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명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방식 그 자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살아가느냐"가 삶의 본질이 되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마주할 미래다. 2. 기본소득의 시대, 탐욕 대신 절제를 배워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스템적으로 해결되는 사회는 축복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거대한 위기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진 환경에서는 삶의 치열한 의미 또한 증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역사는 풍요가 종종 영적 타락과 궤를 같이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풍요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풍요를 절제 없이 향유하는 삶은 경계한다. 인간은 소비로 채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AGI 시대에 우리가 훈련해야 할 영성은 ‘더 많이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는 태도’다. 단순한 삶, 자발적인 절제, 그리고 일상에 대한 감사의 영성은 미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신앙의 형태가 될 것이다. 3. 통제받는 사회 속에서 자유의 의미를 지켜야 한다 고도로 발달한 AI는 인간을 해치기보다, 인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려 들 것이다. 건강을 위해, 사회적 안정을 위해, 더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알고리즘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도하고 통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위협받는 것은 ‘자유’다. 인간은 실수할 자유, 실패할 자유, 때로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자유를 가진 존재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변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을 가치 있게 여긴다.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는 안전할지 몰라도 인간다운 사회는 아니다. 편리함보다 자유를, 효율보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치다. 4. 인간이 잊게 될 질문을 교회가 붙잡아야 한다 AGI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의 조건이 완벽히 해결되면 존재의 이유를 묻는 질문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가장 깊은 공허가 들어선다. 교회는 세상이 잊어버릴 이 질문들을 끝까지 붙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왜 희생해야 하는가?" "왜 진리를 따라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기술은 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답이 주어진다. 5.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영성의 깊이로 결정된다 다가오는 시대는 인간이 더 똑똑해지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다움이 시험받는 시대다. 노동이 줄어들고 삶이 편리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은 더 쉽게 삶의 방향을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존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우고, 풍요 속에서도 절제를 배우며, 통제보다 자유를 선택하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기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어도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정교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이다. AGI 시대는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기회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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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2)
1. 내가 감동받은 찬양들이 모두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하신 찬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감동받았던 찬양들을 꼭 예배 때 콘티로 구성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찬양을 준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평소 이런 노력이 찬양을 인도하는 실전에서 빛을 발합니다. 찬양 인도가 목적이라서 평소 성령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 가운데 많은 은혜 끼치고 싶어서가 목적이 아닙니다. 2. 다시 말씀드리지만 친밀하게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나도 순수하게 사랑해서 존중해드리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찬양 사역에서도 성령님께서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준비가 이뤄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이런 순수함과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는 태도, 감동 주실 때 메모하며 기록하는 습관들이 어우러져 비로소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긴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찬양 인도를 잘하는 것보다 동기의 점검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동기는 평소 삶의 태도에서 점검됩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찬양들이 모이면 다시금 성령님께 여쭤봅니다. 3. “성령님, 어떤 순서로 찬양드리기 원하세요? 가르쳐 주시겠어요?” 여쭤보고 기도드리며 잠잠히 기다리고 있으면 결코 늦지 않게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감동 가운데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그 순서대로 정리하고 준비합니다. 찬양 인도할 때는 내 안에 계시며 이 장소에 계신 성령님을 친밀하게 느끼고 인식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높여드리는 찬양을 드리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또한 목소리에도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기름부으시기를 끊임없이 간구합니다. 4.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 인도를 위해 성령님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사랑해서 성령님을 찾으려는 영적인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심을 점검하며 강대상 앞에서 좀 더 집중하여 조용히 성령님을 생각합니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며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함께 찬양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드립니다.” 5. 조용히 마음 가운데 이런 고백을 드리며 첫 찬양을 살펴봅니다.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부를 수 있는 영적 상태인지 또 점검한다는 겁니다. 내면에 성령님 함께하심으로 인한 안정감과 평안함, 설레임과 기대감, 나의 진심이 담겨질 수 있겠다는 확신 속에 조용히 입을 엽니다. 찬양을 시작합니다. 찬양 인도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쉬운 사역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평상시에 순수하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며 살아간다면 사역 현장에서도 성령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도우심 받는 것이 자연스러우리라 믿습니다. 6. 우리 모두 찬양 인도자로 살지 말고 평소 찬양 드림을 기뻐하는 자로 사시길 소망합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 드리는 찬양”도 인도할 때가 아니라 평소 개인적인 찬양에서 먼저 성공적으로 사용하시길 소망합니다. 순수하게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쁨 드리는 찬양을 합시다. 그러다 보면 찬양 인도의 현장에서도 성령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심을 자연스레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 드리시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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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1)
1. 성령님께서는 찬양 인도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찬양 인도의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노래와 찬양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항상 합창단과 성가대에 들어가 활동했어요. 더군다나 제 목소리는 정말 고음이 잘 나오는 미성이었고 발성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여성합창단에서 청일점처럼 활동하기도 했고, 노래에 있어서는 항상 칭찬받았습니다. 2.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와서 보니 저만 크게 기도를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크게 소리 지르면서 기도하면 목이 쉴 것이 뻔하고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목소리가 바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걱정되어 크게 소리 높여 기도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후에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재발견하고는 그런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던 목소리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했기 때문이죠. 그다음부터는 그 누구보다 크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3. 당연히 목은 금방 쉬기도 하고 점점 변했습니다. 목소리의 변화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목소리에 성령님의 임재가 담겨지기를 사모하며 날마다 성령님께 부탁드렸어요. 그러면서 점점 성령님께서 제 목소리를 책임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전의 미성은 사라졌지만 지금은 목소리에 은혜를 주셨음을 압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며 찬양 인도할 때마다 큰 은혜를 더해 주심을 봅니다. 하지만 찬양 인도하시는 분들이 일부러 목소리를 포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다른 분들에게는 기도할 때도 목이 상하지 않는 발성을 추천드립니다. 4. 목회자들은 찬양 인도를 자주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찬양 인도할 때 어떻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면서 준비하고 인도할까요? 핵심을 먼저 나누자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긴다.” 말은 쉽지만 첫 음을 맡기는 마음 상태,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평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는 삶이 가능해야 쉬워집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기는 찬양은 평상시 삶에서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가령 찬양 인도 날짜가 정해지면 성령님께 여쭤보며 삶을 삽니다. 5. “성령님, 어떤 찬양을 드리기 원하세요? 어떤 찬양으로 함께 찬양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나요? 어떤 찬양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지 너무나 잘 아시는 성령님!!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세요.” 이렇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면서 삶을 살다 보면 다양한 채널들로 감동을 주시는 찬양이 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콘티 구성할 찬양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하루에 한 곡, 혹은 두세 곡씩, 혹은 전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6. 기도드리는 가운데 생각나게도 하시고, 내가 먼저 부르지 않았는데 길을 걸어가다가 내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찬양도 있습니다. 때로는 잠에서 깼는데 내 속에서 울려 퍼지거나, 비몽사몽 중에도 입술을 열고 찬양을 부르고 있음을 깨닫는 찬양이 있습니다. 어떤 분의 글을 읽다가 그분이 은혜받으셨다며 소개해주시는 찬양이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7. 하루는 페이스북에 제가 올린 글을 읽으신 분께서 찬양이 생각난다시며 댓글로 올려주셨는데 감동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방송이나 유튜브로 평소 즐겨듣는 찬양들 가운데 그날따라 더욱 은혜가 되는 찬양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찬양들을 꼭 메모하고 기록해둡니다. 물론 감동받은 찬양들이 모두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하신 찬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감동받았던 찬양들을 꼭 예배 때 콘티로 구성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찬양을 준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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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범의 눈을 뜬 아침, 사랑의 눈동자를 만나다
스스로를 닦던 고독한 구도자, 바나바를 연기하다 이탈리아의 연극배우 피에트로 사루비에게 삶은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한 고단한 수행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티베트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명상과 윤회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닦아내려 했던 고독한 구도자였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인류사의 위대한 스승 중 한 명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출연 제의가 찾아왔습니다. 그가 맡은 역은 민란을 주도하고 살인을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인 ‘바라바’였습니다. 사루비는 이 역할을 대단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저 직업적인 도전이라 생각하며 거친 분장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연기가 멈춘 찰나, 시선이 마주치다 빌라도의 법정, 따가운 햇살 아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사루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관중의 야유 속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채찍질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내, 예수(짐 카비즐 분)가 서 있었습니다. 대본대로라면 사루비는 자신을 대신해 죽으러 가는 예수를 비웃으며 광기 어린 표정으로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눈과 마주친 순간, 사루비의 연기는 그대로 얼어붙었습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눈은 나를 꿰뚫고 있었고, 동시에 나를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그 눈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죽음의 공포도 없었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깊은 침묵과 가늠할 수 없는 사랑만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사루비는 그 찰나의 시선 속에서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압도적인 진실과 마주했습니다. “내가 바로 그 바라바였습니다” 그 눈빛은 사루비의 영혼에 소리 없이 말을 건넸습니다. “내가 침묵하는 이유는 네가 소리치게 하기 위함이고, 내가 매를 맞는 이유는 네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함이며, 내가 죽는 이유는 네가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2,000년 전의 바라바는 먼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예수를 대신해 풀려나고 있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구원은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이 주어지는 ‘선물’임을 그는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시선이 바꾼 새로운 세계: 바라바 이후의 삶 1. 《바라바에서 예수에게로》: 눈빛으로 기록한 회심 사루비는 이후 자신의 회심 과정을 담은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구원이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바라바는 우리 인류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는 그의 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2.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한 ‘광대’가 되다 가장 아름다운 변화는 그가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광대(Clown)로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험악한 살인자 ‘바라바’의 얼굴을 했던 그가, 이제는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웃음을 선물합니다. 자신이 받은 자비로운 시선을 타인에게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성공이 아닌 ‘사랑’을 쫓는 삶 성공과 해탈에만 집중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그는 이제 헌신적인 남편과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 눈빛이 나를 귀하게 여겨주었듯, 나도 내 곁의 사람들을 가장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에필로그: 당신은 그 눈과 마주한 적이 있습니까? 사루비는 이제 의무감이 아니라 ‘그분’이 보고 싶어 성당에 갑니다. 그 눈빛이 여전히 자신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피에트로 사루비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 역시 저마다의 죄를 지은 채, 이유 없는 용서를 받고 풀려난 바라바들이 아니냐고.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꺼이 죽음의 길을 택하며 미소 짓던 그 눈과 마주한 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살인자의 눈을 가졌던 배우는, 이제 그 눈에 용서와 평안을 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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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우선순위 세 가지
AI이미지 그림 1. 개척 3년차 즈음 연말이었습니다. 감동을 주시는 듯해서 한 달 정도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머무를 때였어요. 제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기 원하시는지 여쭤보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삶과 신앙, 목회 가운데 본질적인 우선순위를 자주 점검하도록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해주신 내용들이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2. <첫째, 친구의 정체성을 기억하기> 나 자신이 목사이기 전에 자녀요, 친구의 정체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라보실 때 사역 성공했다는 사람들 칭찬 많이 받는지의 여부로 판단하시기보다, 하나님 자녀요 친구로서 성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가장 행복할 때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목사인 제가 진정 예수님만으로 인하여 행복할 때, 저를 통해 예수님을 보게 되는 성도님들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성령님께서는 수시로 제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3. “태성아, 교회 갈 때 목사의 정체성으로 먼저 가지 말자. 너 역시 다른 성도들처럼 먼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친구로서 교회에 가자. 성도로 교회에 가자.” 그래서 집에서 교회로 출발해서 이동하면서 계속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 나누면서 의식합니다. 목사가 아니라 성도로 교회 간다는 인식을 체크합니다. 목사인 제가 먼저 아들이요 친구로서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젖어 들어서 행복해야 합니다.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에서 행복을 누리고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4. <둘째, 가정에 충실하기> 가장 먼저 세우신 공동체인 가정에 충실한 목회자여야 합니다.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를 잘 이끌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시금석으로 삼아야 합니다(반대로 가정이, 자녀가 우상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목사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사랑하고, 행복한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강단에 섰을 때 가족부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제 아내가 가장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는 간증을 하곤 하는데 주님께서 격려해주시는 음성처럼 느껴집니다. 5. 만약 제가 인도하는 예배에서 가족이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사역의 성공도 사람들의 칭찬도 예수님 보실 때 실패입니다. 다행히도 아내부터 아이들도 나름 좋게 평가해줘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목회자 가정이 행복한 모습을 볼 때 성도님들 가정도 주님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소망을 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자 본받기를 힘쓸 것입니다. 저도 가정이 행복하신 선배님들의 강의나 책, 개인적 교제를 통해 본받고자 노력 중입니다. 6. <셋째, 하나님 앞에 머물기> 목사가 교회에 머물며 하나님과의 접촉과 만남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목사로서 이 정체성을 풍성하게 누려야 할 장소가 바로 섬기는 교회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도 심방이나 성도의 교제, 부흥회, 긴급한 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교회에 아들이요 친구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 머물기를 즐깁니다. 7. 아버지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사랑하며 사랑받고, 교제 나누는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고자 개척 목회의 우선순위로 두고 있습니다. 그럴 때 목사가 교회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혼의 기쁨을 성도님들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하늘 아버지 앞에 자녀요, 친구로 나아가 말씀과 기도의 즐거움을 풍성하게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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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루틴을 지키라!
- 1.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6:4)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명 농구선수의 징크스와 루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시합 전에 청결을 점검해요. 목욕부터 집안 대청소까지 강박적으로 점검하는데, 그렇게 해야 경기에서 실수를 줄이고 시합에 집중이 잘 된다고 말합니다. 2. 그가 농구 시합 중에 자유투를 던질 때가 있는데요. 던지기 전 공을 바닥에 5번 튕깁니다. 그리고 던졌는데 들어가면 계속 5번씩 공을 튕기고 슛을 던져요. 자유투가 안 들어가면 횟수를 바꿔서 7회 혹은 10회 바닥에 공을 튕기죠. 슛이 성공하면 그 숫자를 기억하고 계속 그 횟수만큼 튕기고, 안 들어갈 때가 오면 다시 공 튕기는 횟수를 조정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야구 선수도 루틴이 있어요. 타석에 들어서면 꼭 야구 배트를 세 바퀴 돌리고 허리와 팔을 세 번 까딱거립니다. 그래야 자신감이 생기며 실수를 줄이게 된답니다. 이렇게 징크스는 이겨내고, 자신의 좋은 리듬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루틴이라고 하는데요. 3. 저도 신앙의 루틴이 있습니다. (목회자분들마다 영적 루틴이 다를 수 있는데요. 중심은 비슷하거나 같을 것입니다.) 신앙, 목회 본질을 지키는 힘과 삶이 자신만의 영적 루틴을 얼마나 잘 지켜내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7년 신학생 시절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재발견하였는데 삶과 신앙의 분기점이었어요. 그렇게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교제 나누는 삶을 추구하면서 영적 루틴이 생겼습니다. 충분히 성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삶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 바라보는 시간을 먼저 확보하는 겁니다. 영적 루틴이 발전을 거듭하며 현재 구체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4. 오전에는 가급적 활동하지 않아요. 성령님과 교제 나누며 외부적인 소음을 차단합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SNS를 내려놓고 가급적 약속도 잡지 않아요. 사도들의 고백처럼 말씀과 기도 시간으로 선포하고 영적, 정신적, 육체적 쉼과 회복의 시간을 가집니다. 물론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영적 루틴으로서 최대한 지키려고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으시면 또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지키는 방향성이 제게 유익해요. 5. 현재 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섬기는 교회가 생기기 전에는 참으로 집회 일정이 바빴어요. 매주 부흥회 초청이 있었고, 전국에 정기모임과 정기집회도 25곳이 넘었습니다. 바쁜 집회 일정도 영적 루틴을 지키면서 다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많은 일정 속에서도 일주일에 2일은 집에 가만히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가정에 먼저 충실하도록 이끄시며, 사역자가 아니라 아들이요 친구로서 성령님과 교제 나누는 삶에 집중하게 하셨는데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머물러 있는 시간입니다. 6. 어떤 시즌에는 한 달 이상 모든 집회를 거절하거나 1달 이후로 날짜를 조정했습니다. 5~6개월에 한 번씩은 집에서 두문불출했어요. 조용히 성령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멈춰 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영적인 루틴이 형성되었어요. 이제 제 영혼에 각인되었습니다.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배우게 하셨어요. 제가 좋아하는 찬양 가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그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7. 제 사역이 바빠지기보다, 제 이름이 알려지기보다, 우리 교회가 알려지기보다 예수님이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부족한 제 삶을 통해 예수님 알려지시려면 영적 루틴을 목숨같이 지켜야 해요.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부지런해야 하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분들 사역과도 비교할 필요 없어요. 누군가의 말처럼 오직 비교의 대상은 어제의 나 자신입니다. 오늘도 자신만의 영적 루틴을 지키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숫자에 속지 않고 성장과 성숙을 함께 추구하시는 분들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히 배움의 자세로 연합을 추구하시는 분들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시고 머물러 계시는 분들을 응원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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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루틴을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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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고(AGI), 노동의 가치가 희석되며, 인간의 생존이 기본소득과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미래가 목전에 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거대한 변화를 단순한 ‘기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기술적 적응을 고민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변화는 명백히 ‘인간 이해의 문제’다. "인간은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진정한 자유와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기술에 의해 다시금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술은 인간의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AG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역할 자체를 흔드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최첨단 기술 대응 전략이 아니다.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신앙적 재정립이다. 1. 노동이 사라질 때, 소명은 더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쓸모와 존재 가치를 증명해 왔다. 그러나 노동의 총량이 줄어드는 미래에, 일에서 정체성을 찾던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가치를 노동의 유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Homo Faber)’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다. 그러므로 노동이 소멸해가는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소명이 곧 직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명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방식 그 자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살아가느냐"가 삶의 본질이 되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마주할 미래다. 2. 기본소득의 시대, 탐욕 대신 절제를 배워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스템적으로 해결되는 사회는 축복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거대한 위기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진 환경에서는 삶의 치열한 의미 또한 증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역사는 풍요가 종종 영적 타락과 궤를 같이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풍요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풍요를 절제 없이 향유하는 삶은 경계한다. 인간은 소비로 채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AGI 시대에 우리가 훈련해야 할 영성은 ‘더 많이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는 태도’다. 단순한 삶, 자발적인 절제, 그리고 일상에 대한 감사의 영성은 미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신앙의 형태가 될 것이다. 3. 통제받는 사회 속에서 자유의 의미를 지켜야 한다 고도로 발달한 AI는 인간을 해치기보다, 인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려 들 것이다. 건강을 위해, 사회적 안정을 위해, 더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알고리즘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도하고 통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위협받는 것은 ‘자유’다. 인간은 실수할 자유, 실패할 자유, 때로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자유를 가진 존재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변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을 가치 있게 여긴다.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는 안전할지 몰라도 인간다운 사회는 아니다. 편리함보다 자유를, 효율보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치다. 4. 인간이 잊게 될 질문을 교회가 붙잡아야 한다 AGI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의 조건이 완벽히 해결되면 존재의 이유를 묻는 질문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가장 깊은 공허가 들어선다. 교회는 세상이 잊어버릴 이 질문들을 끝까지 붙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왜 희생해야 하는가?" "왜 진리를 따라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기술은 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답이 주어진다. 5.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영성의 깊이로 결정된다 다가오는 시대는 인간이 더 똑똑해지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다움이 시험받는 시대다. 노동이 줄어들고 삶이 편리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은 더 쉽게 삶의 방향을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존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우고, 풍요 속에서도 절제를 배우며, 통제보다 자유를 선택하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기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어도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정교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이다. AGI 시대는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기회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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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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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2)
- 1. 내가 감동받은 찬양들이 모두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하신 찬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감동받았던 찬양들을 꼭 예배 때 콘티로 구성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찬양을 준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평소 이런 노력이 찬양을 인도하는 실전에서 빛을 발합니다. 찬양 인도가 목적이라서 평소 성령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 가운데 많은 은혜 끼치고 싶어서가 목적이 아닙니다. 2. 다시 말씀드리지만 친밀하게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나도 순수하게 사랑해서 존중해드리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찬양 사역에서도 성령님께서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준비가 이뤄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이런 순수함과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는 태도, 감동 주실 때 메모하며 기록하는 습관들이 어우러져 비로소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긴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찬양 인도를 잘하는 것보다 동기의 점검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동기는 평소 삶의 태도에서 점검됩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찬양들이 모이면 다시금 성령님께 여쭤봅니다. 3. “성령님, 어떤 순서로 찬양드리기 원하세요? 가르쳐 주시겠어요?” 여쭤보고 기도드리며 잠잠히 기다리고 있으면 결코 늦지 않게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감동 가운데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그 순서대로 정리하고 준비합니다. 찬양 인도할 때는 내 안에 계시며 이 장소에 계신 성령님을 친밀하게 느끼고 인식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높여드리는 찬양을 드리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또한 목소리에도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기름부으시기를 끊임없이 간구합니다. 4.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 인도를 위해 성령님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사랑해서 성령님을 찾으려는 영적인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심을 점검하며 강대상 앞에서 좀 더 집중하여 조용히 성령님을 생각합니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며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함께 찬양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드립니다.” 5. 조용히 마음 가운데 이런 고백을 드리며 첫 찬양을 살펴봅니다.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부를 수 있는 영적 상태인지 또 점검한다는 겁니다. 내면에 성령님 함께하심으로 인한 안정감과 평안함, 설레임과 기대감, 나의 진심이 담겨질 수 있겠다는 확신 속에 조용히 입을 엽니다. 찬양을 시작합니다. 찬양 인도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쉬운 사역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평상시에 순수하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며 살아간다면 사역 현장에서도 성령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도우심 받는 것이 자연스러우리라 믿습니다. 6. 우리 모두 찬양 인도자로 살지 말고 평소 찬양 드림을 기뻐하는 자로 사시길 소망합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 드리는 찬양”도 인도할 때가 아니라 평소 개인적인 찬양에서 먼저 성공적으로 사용하시길 소망합니다. 순수하게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쁨 드리는 찬양을 합시다. 그러다 보면 찬양 인도의 현장에서도 성령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심을 자연스레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 드리시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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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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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1)
- 1. 성령님께서는 찬양 인도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찬양 인도의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노래와 찬양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항상 합창단과 성가대에 들어가 활동했어요. 더군다나 제 목소리는 정말 고음이 잘 나오는 미성이었고 발성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여성합창단에서 청일점처럼 활동하기도 했고, 노래에 있어서는 항상 칭찬받았습니다. 2.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와서 보니 저만 크게 기도를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크게 소리 지르면서 기도하면 목이 쉴 것이 뻔하고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목소리가 바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걱정되어 크게 소리 높여 기도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후에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재발견하고는 그런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던 목소리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했기 때문이죠. 그다음부터는 그 누구보다 크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3. 당연히 목은 금방 쉬기도 하고 점점 변했습니다. 목소리의 변화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목소리에 성령님의 임재가 담겨지기를 사모하며 날마다 성령님께 부탁드렸어요. 그러면서 점점 성령님께서 제 목소리를 책임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전의 미성은 사라졌지만 지금은 목소리에 은혜를 주셨음을 압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며 찬양 인도할 때마다 큰 은혜를 더해 주심을 봅니다. 하지만 찬양 인도하시는 분들이 일부러 목소리를 포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다른 분들에게는 기도할 때도 목이 상하지 않는 발성을 추천드립니다. 4. 목회자들은 찬양 인도를 자주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찬양 인도할 때 어떻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면서 준비하고 인도할까요? 핵심을 먼저 나누자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긴다.” 말은 쉽지만 첫 음을 맡기는 마음 상태,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평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는 삶이 가능해야 쉬워집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기는 찬양은 평상시 삶에서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가령 찬양 인도 날짜가 정해지면 성령님께 여쭤보며 삶을 삽니다. 5. “성령님, 어떤 찬양을 드리기 원하세요? 어떤 찬양으로 함께 찬양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나요? 어떤 찬양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지 너무나 잘 아시는 성령님!!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세요.” 이렇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면서 삶을 살다 보면 다양한 채널들로 감동을 주시는 찬양이 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콘티 구성할 찬양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하루에 한 곡, 혹은 두세 곡씩, 혹은 전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6. 기도드리는 가운데 생각나게도 하시고, 내가 먼저 부르지 않았는데 길을 걸어가다가 내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찬양도 있습니다. 때로는 잠에서 깼는데 내 속에서 울려 퍼지거나, 비몽사몽 중에도 입술을 열고 찬양을 부르고 있음을 깨닫는 찬양이 있습니다. 어떤 분의 글을 읽다가 그분이 은혜받으셨다며 소개해주시는 찬양이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7. 하루는 페이스북에 제가 올린 글을 읽으신 분께서 찬양이 생각난다시며 댓글로 올려주셨는데 감동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방송이나 유튜브로 평소 즐겨듣는 찬양들 가운데 그날따라 더욱 은혜가 되는 찬양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찬양들을 꼭 메모하고 기록해둡니다. 물론 감동받은 찬양들이 모두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하신 찬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감동받았던 찬양들을 꼭 예배 때 콘티로 구성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찬양을 준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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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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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범의 눈을 뜬 아침, 사랑의 눈동자를 만나다
- 스스로를 닦던 고독한 구도자, 바나바를 연기하다 이탈리아의 연극배우 피에트로 사루비에게 삶은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한 고단한 수행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티베트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명상과 윤회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닦아내려 했던 고독한 구도자였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인류사의 위대한 스승 중 한 명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출연 제의가 찾아왔습니다. 그가 맡은 역은 민란을 주도하고 살인을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인 ‘바라바’였습니다. 사루비는 이 역할을 대단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저 직업적인 도전이라 생각하며 거친 분장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연기가 멈춘 찰나, 시선이 마주치다 빌라도의 법정, 따가운 햇살 아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사루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관중의 야유 속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채찍질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내, 예수(짐 카비즐 분)가 서 있었습니다. 대본대로라면 사루비는 자신을 대신해 죽으러 가는 예수를 비웃으며 광기 어린 표정으로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눈과 마주친 순간, 사루비의 연기는 그대로 얼어붙었습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눈은 나를 꿰뚫고 있었고, 동시에 나를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그 눈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죽음의 공포도 없었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깊은 침묵과 가늠할 수 없는 사랑만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사루비는 그 찰나의 시선 속에서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압도적인 진실과 마주했습니다. “내가 바로 그 바라바였습니다” 그 눈빛은 사루비의 영혼에 소리 없이 말을 건넸습니다. “내가 침묵하는 이유는 네가 소리치게 하기 위함이고, 내가 매를 맞는 이유는 네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함이며, 내가 죽는 이유는 네가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2,000년 전의 바라바는 먼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예수를 대신해 풀려나고 있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구원은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이 주어지는 ‘선물’임을 그는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시선이 바꾼 새로운 세계: 바라바 이후의 삶 1. 《바라바에서 예수에게로》: 눈빛으로 기록한 회심 사루비는 이후 자신의 회심 과정을 담은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구원이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바라바는 우리 인류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는 그의 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2.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한 ‘광대’가 되다 가장 아름다운 변화는 그가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광대(Clown)로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험악한 살인자 ‘바라바’의 얼굴을 했던 그가, 이제는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웃음을 선물합니다. 자신이 받은 자비로운 시선을 타인에게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성공이 아닌 ‘사랑’을 쫓는 삶 성공과 해탈에만 집중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그는 이제 헌신적인 남편과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 눈빛이 나를 귀하게 여겨주었듯, 나도 내 곁의 사람들을 가장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에필로그: 당신은 그 눈과 마주한 적이 있습니까? 사루비는 이제 의무감이 아니라 ‘그분’이 보고 싶어 성당에 갑니다. 그 눈빛이 여전히 자신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피에트로 사루비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 역시 저마다의 죄를 지은 채, 이유 없는 용서를 받고 풀려난 바라바들이 아니냐고.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꺼이 죽음의 길을 택하며 미소 짓던 그 눈과 마주한 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살인자의 눈을 가졌던 배우는, 이제 그 눈에 용서와 평안을 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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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범의 눈을 뜬 아침, 사랑의 눈동자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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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우선순위 세 가지
- AI이미지 그림 1. 개척 3년차 즈음 연말이었습니다. 감동을 주시는 듯해서 한 달 정도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머무를 때였어요. 제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기 원하시는지 여쭤보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삶과 신앙, 목회 가운데 본질적인 우선순위를 자주 점검하도록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해주신 내용들이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2. <첫째, 친구의 정체성을 기억하기> 나 자신이 목사이기 전에 자녀요, 친구의 정체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라보실 때 사역 성공했다는 사람들 칭찬 많이 받는지의 여부로 판단하시기보다, 하나님 자녀요 친구로서 성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가장 행복할 때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목사인 제가 진정 예수님만으로 인하여 행복할 때, 저를 통해 예수님을 보게 되는 성도님들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성령님께서는 수시로 제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3. “태성아, 교회 갈 때 목사의 정체성으로 먼저 가지 말자. 너 역시 다른 성도들처럼 먼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친구로서 교회에 가자. 성도로 교회에 가자.” 그래서 집에서 교회로 출발해서 이동하면서 계속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 나누면서 의식합니다. 목사가 아니라 성도로 교회 간다는 인식을 체크합니다. 목사인 제가 먼저 아들이요 친구로서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젖어 들어서 행복해야 합니다.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에서 행복을 누리고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4. <둘째, 가정에 충실하기> 가장 먼저 세우신 공동체인 가정에 충실한 목회자여야 합니다.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를 잘 이끌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시금석으로 삼아야 합니다(반대로 가정이, 자녀가 우상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목사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사랑하고, 행복한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강단에 섰을 때 가족부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제 아내가 가장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는 간증을 하곤 하는데 주님께서 격려해주시는 음성처럼 느껴집니다. 5. 만약 제가 인도하는 예배에서 가족이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사역의 성공도 사람들의 칭찬도 예수님 보실 때 실패입니다. 다행히도 아내부터 아이들도 나름 좋게 평가해줘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목회자 가정이 행복한 모습을 볼 때 성도님들 가정도 주님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소망을 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자 본받기를 힘쓸 것입니다. 저도 가정이 행복하신 선배님들의 강의나 책, 개인적 교제를 통해 본받고자 노력 중입니다. 6. <셋째, 하나님 앞에 머물기> 목사가 교회에 머물며 하나님과의 접촉과 만남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목사로서 이 정체성을 풍성하게 누려야 할 장소가 바로 섬기는 교회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도 심방이나 성도의 교제, 부흥회, 긴급한 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교회에 아들이요 친구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 머물기를 즐깁니다. 7. 아버지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사랑하며 사랑받고, 교제 나누는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고자 개척 목회의 우선순위로 두고 있습니다. 그럴 때 목사가 교회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혼의 기쁨을 성도님들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하늘 아버지 앞에 자녀요, 친구로 나아가 말씀과 기도의 즐거움을 풍성하게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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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기도는 노동이라고?” (1)
- 1.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기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저는 기도라는 표현보다 대화라는 표현이 더 좋습니다. 누군가는 “기도는 노동이다.”라고 했는데요. 저는 어떤 측면에서는 이 말이 싫은데요. 싫어도 너~~무 싫습니다. 기도가 노동이라는 개념이 꽉 들어찬 사람들은 하루 종일 힘들게 일(노동)하고 왔는데요. 또 자기 전에 기도라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질려버립니다. 아니면 출근해야 하는데 일어나자마자 노동이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피곤하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2. 종종 경험하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건 막상 기도를 하면 처음엔 힘든데 점점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보람되고 기쁩니다. 하지만 노동으로 인식한 기도 시간이 끝나고 다시 노동이라는 기도 시간이 다가올 때 즈음 부담감부터 올라옵니다. 기도가 노동이라는 생각에 기도를 떠올리면 부담부터 느끼게 만듭니다. 3. 물론 노동이라고 표현할 만큼 힘든 때가 있습니다. 잘 아시듯이 중보적 기도가 그렇습니다. 나라와 민족, 열방과 세계를 위한 기도는 씨름의 기도입니다. 남을 위한 중보적 기도도 고통의 기도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발생하면 더 힘든 씨름 기도가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 많은 경우 기도는 본질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감격과 감동의 시간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말입니다. 4.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기도의 행복을 많이 배웠어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많이 배웠습니다. 체험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말입니다. 딸내미들이 어릴 때였어요. 한별이, 은별이가 새벽에 반드시 화장실을 갑니다. 거실에서 기도하던 저는 딸내미가 사랑스러워서 제 옆을 지나갈 때 꼭 안아줍니다. 안아주면서 그녀들의 온기를 느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5. 한별이는 가볍게 안아주고 금방 들어갑니다. 은별이는 제가 안아준 팔을 풀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요. 피곤한 나머지 제게 기댑니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안겨 있습니다. 나도 딸내미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습니다. 순간 제 마음이 이상해집니다. 간질거려요. 부인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느껴지는 것입니다. 제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안고 있는 그 자체로 온 영혼과 마음, 생각이 사랑으로 소통되고 있음을 느끼며 전율이 일어납니다. 6. 딸내미는 들어가고 저는 사랑의 전율 속에서 다시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갑자기 성령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와 깊은 아버지 사랑이 느껴집니다. 십자가에서 생명 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눈물이 한 방울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 사랑에 제 영혼이 벅차오릅니다. 성령님의 친밀하심이 느껴집니다. 성령님의 임재로 내 몸을 감싸 안아주십니다. 이거구나 싶습니다. 그렇게 성삼위일체 하나님 마음에 잠겨있는 시간이 기도 시간입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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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기도는 노동이라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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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루틴을 지키라!
- 1.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6:4)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명 농구선수의 징크스와 루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시합 전에 청결을 점검해요. 목욕부터 집안 대청소까지 강박적으로 점검하는데, 그렇게 해야 경기에서 실수를 줄이고 시합에 집중이 잘 된다고 말합니다. 2. 그가 농구 시합 중에 자유투를 던질 때가 있는데요. 던지기 전 공을 바닥에 5번 튕깁니다. 그리고 던졌는데 들어가면 계속 5번씩 공을 튕기고 슛을 던져요. 자유투가 안 들어가면 횟수를 바꿔서 7회 혹은 10회 바닥에 공을 튕기죠. 슛이 성공하면 그 숫자를 기억하고 계속 그 횟수만큼 튕기고, 안 들어갈 때가 오면 다시 공 튕기는 횟수를 조정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야구 선수도 루틴이 있어요. 타석에 들어서면 꼭 야구 배트를 세 바퀴 돌리고 허리와 팔을 세 번 까딱거립니다. 그래야 자신감이 생기며 실수를 줄이게 된답니다. 이렇게 징크스는 이겨내고, 자신의 좋은 리듬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루틴이라고 하는데요. 3. 저도 신앙의 루틴이 있습니다. (목회자분들마다 영적 루틴이 다를 수 있는데요. 중심은 비슷하거나 같을 것입니다.) 신앙, 목회 본질을 지키는 힘과 삶이 자신만의 영적 루틴을 얼마나 잘 지켜내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7년 신학생 시절 성령님을 인격적인 분으로 재발견하였는데 삶과 신앙의 분기점이었어요. 그렇게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며 교제 나누는 삶을 추구하면서 영적 루틴이 생겼습니다. 충분히 성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삶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 바라보는 시간을 먼저 확보하는 겁니다. 영적 루틴이 발전을 거듭하며 현재 구체적으로 시간을 정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4. 오전에는 가급적 활동하지 않아요. 성령님과 교제 나누며 외부적인 소음을 차단합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SNS를 내려놓고 가급적 약속도 잡지 않아요. 사도들의 고백처럼 말씀과 기도 시간으로 선포하고 영적, 정신적, 육체적 쉼과 회복의 시간을 가집니다. 물론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영적 루틴으로서 최대한 지키려고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으시면 또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지키는 방향성이 제게 유익해요. 5. 현재 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섬기는 교회가 생기기 전에는 참으로 집회 일정이 바빴어요. 매주 부흥회 초청이 있었고, 전국에 정기모임과 정기집회도 25곳이 넘었습니다. 바쁜 집회 일정도 영적 루틴을 지키면서 다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많은 일정 속에서도 일주일에 2일은 집에 가만히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가정에 먼저 충실하도록 이끄시며, 사역자가 아니라 아들이요 친구로서 성령님과 교제 나누는 삶에 집중하게 하셨는데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씀과 기도로 머물러 있는 시간입니다. 6. 어떤 시즌에는 한 달 이상 모든 집회를 거절하거나 1달 이후로 날짜를 조정했습니다. 5~6개월에 한 번씩은 집에서 두문불출했어요. 조용히 성령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앞에 멈춰 있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과하면서 영적인 루틴이 형성되었어요. 이제 제 영혼에 각인되었습니다.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배우게 하셨어요. 제가 좋아하는 찬양 가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그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7. 제 사역이 바빠지기보다, 제 이름이 알려지기보다, 우리 교회가 알려지기보다 예수님이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부족한 제 삶을 통해 예수님 알려지시려면 영적 루틴을 목숨같이 지켜야 해요.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부지런해야 하지만 조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분들 사역과도 비교할 필요 없어요. 누군가의 말처럼 오직 비교의 대상은 어제의 나 자신입니다. 오늘도 자신만의 영적 루틴을 지키시는 분들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숫자에 속지 않고 성장과 성숙을 함께 추구하시는 분들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히 배움의 자세로 연합을 추구하시는 분들로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말씀과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시고 머물러 계시는 분들을 응원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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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루틴을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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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고(AGI), 노동의 가치가 희석되며, 인간의 생존이 기본소득과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미래가 목전에 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거대한 변화를 단순한 ‘기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기술적 적응을 고민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변화는 명백히 ‘인간 이해의 문제’다. "인간은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진정한 자유와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기술에 의해 다시금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술은 인간의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AG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역할 자체를 흔드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최첨단 기술 대응 전략이 아니다.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신앙적 재정립이다. 1. 노동이 사라질 때, 소명은 더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쓸모와 존재 가치를 증명해 왔다. 그러나 노동의 총량이 줄어드는 미래에, 일에서 정체성을 찾던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가치를 노동의 유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Homo Faber)’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다. 그러므로 노동이 소멸해가는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소명이 곧 직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명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방식 그 자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살아가느냐"가 삶의 본질이 되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마주할 미래다. 2. 기본소득의 시대, 탐욕 대신 절제를 배워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스템적으로 해결되는 사회는 축복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거대한 위기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진 환경에서는 삶의 치열한 의미 또한 증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역사는 풍요가 종종 영적 타락과 궤를 같이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풍요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풍요를 절제 없이 향유하는 삶은 경계한다. 인간은 소비로 채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AGI 시대에 우리가 훈련해야 할 영성은 ‘더 많이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는 태도’다. 단순한 삶, 자발적인 절제, 그리고 일상에 대한 감사의 영성은 미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신앙의 형태가 될 것이다. 3. 통제받는 사회 속에서 자유의 의미를 지켜야 한다 고도로 발달한 AI는 인간을 해치기보다, 인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려 들 것이다. 건강을 위해, 사회적 안정을 위해, 더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알고리즘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도하고 통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위협받는 것은 ‘자유’다. 인간은 실수할 자유, 실패할 자유, 때로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자유를 가진 존재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변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을 가치 있게 여긴다.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는 안전할지 몰라도 인간다운 사회는 아니다. 편리함보다 자유를, 효율보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치다. 4. 인간이 잊게 될 질문을 교회가 붙잡아야 한다 AGI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의 조건이 완벽히 해결되면 존재의 이유를 묻는 질문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가장 깊은 공허가 들어선다. 교회는 세상이 잊어버릴 이 질문들을 끝까지 붙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왜 희생해야 하는가?" "왜 진리를 따라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기술은 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답이 주어진다. 5.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영성의 깊이로 결정된다 다가오는 시대는 인간이 더 똑똑해지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다움이 시험받는 시대다. 노동이 줄어들고 삶이 편리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은 더 쉽게 삶의 방향을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존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우고, 풍요 속에서도 절제를 배우며, 통제보다 자유를 선택하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기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어도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정교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이다. AGI 시대는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기회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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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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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2)
- 1. 내가 감동받은 찬양들이 모두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하신 찬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감동받았던 찬양들을 꼭 예배 때 콘티로 구성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찬양을 준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평소 이런 노력이 찬양을 인도하는 실전에서 빛을 발합니다. 찬양 인도가 목적이라서 평소 성령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 가운데 많은 은혜 끼치고 싶어서가 목적이 아닙니다. 2. 다시 말씀드리지만 친밀하게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나도 순수하게 사랑해서 존중해드리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찬양 사역에서도 성령님께서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준비가 이뤄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이런 순수함과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는 태도, 감동 주실 때 메모하며 기록하는 습관들이 어우러져 비로소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긴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찬양 인도를 잘하는 것보다 동기의 점검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동기는 평소 삶의 태도에서 점검됩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찬양들이 모이면 다시금 성령님께 여쭤봅니다. 3. “성령님, 어떤 순서로 찬양드리기 원하세요? 가르쳐 주시겠어요?” 여쭤보고 기도드리며 잠잠히 기다리고 있으면 결코 늦지 않게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감동 가운데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그 순서대로 정리하고 준비합니다. 찬양 인도할 때는 내 안에 계시며 이 장소에 계신 성령님을 친밀하게 느끼고 인식하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음을 바라보며 하나님만을 높여드리는 찬양을 드리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또한 목소리에도 성령님께서 임재하시고 기름부으시기를 끊임없이 간구합니다. 4.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 인도를 위해 성령님을 먼저 찾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성령님을 사랑해서 성령님을 찾으려는 영적인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심을 점검하며 강대상 앞에서 좀 더 집중하여 조용히 성령님을 생각합니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며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령님, 함께 찬양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드립니다.” 5. 조용히 마음 가운데 이런 고백을 드리며 첫 찬양을 살펴봅니다. 마음으로 진심을 담아 부를 수 있는 영적 상태인지 또 점검한다는 겁니다. 내면에 성령님 함께하심으로 인한 안정감과 평안함, 설레임과 기대감, 나의 진심이 담겨질 수 있겠다는 확신 속에 조용히 입을 엽니다. 찬양을 시작합니다. 찬양 인도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쉬운 사역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평상시에 순수하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며 살아간다면 사역 현장에서도 성령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도우심 받는 것이 자연스러우리라 믿습니다. 6. 우리 모두 찬양 인도자로 살지 말고 평소 찬양 드림을 기뻐하는 자로 사시길 소망합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 드리는 찬양”도 인도할 때가 아니라 평소 개인적인 찬양에서 먼저 성공적으로 사용하시길 소망합니다. 순수하게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쁨 드리는 찬양을 합시다. 그러다 보면 찬양 인도의 현장에서도 성령님께서 친히 역사해 주심을 자연스레 보게 될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 “성령님께 첫 음을 맡겨” 드리시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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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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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1)
- 1. 성령님께서는 찬양 인도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찬양 인도의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솔직히 저는 노래와 찬양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항상 합창단과 성가대에 들어가 활동했어요. 더군다나 제 목소리는 정말 고음이 잘 나오는 미성이었고 발성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여성합창단에서 청일점처럼 활동하기도 했고, 노래에 있어서는 항상 칭찬받았습니다. 2.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와서 보니 저만 크게 기도를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크게 소리 지르면서 기도하면 목이 쉴 것이 뻔하고 이런 생활이 계속되면 목소리가 바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걱정되어 크게 소리 높여 기도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후에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재발견하고는 그런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던 목소리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단했기 때문이죠. 그다음부터는 그 누구보다 크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3. 당연히 목은 금방 쉬기도 하고 점점 변했습니다. 목소리의 변화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목소리에 성령님의 임재가 담겨지기를 사모하며 날마다 성령님께 부탁드렸어요. 그러면서 점점 성령님께서 제 목소리를 책임지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전의 미성은 사라졌지만 지금은 목소리에 은혜를 주셨음을 압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며 찬양 인도할 때마다 큰 은혜를 더해 주심을 봅니다. 하지만 찬양 인도하시는 분들이 일부러 목소리를 포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다른 분들에게는 기도할 때도 목이 상하지 않는 발성을 추천드립니다. 4. 목회자들은 찬양 인도를 자주 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제가 찬양 인도할 때 어떻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면서 준비하고 인도할까요? 핵심을 먼저 나누자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긴다.” 말은 쉽지만 첫 음을 맡기는 마음 상태, 영적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평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는 삶이 가능해야 쉬워집니다. 성령님께 첫 음을 맡기는 찬양은 평상시 삶에서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가령 찬양 인도 날짜가 정해지면 성령님께 여쭤보며 삶을 삽니다. 5. “성령님, 어떤 찬양을 드리기 원하세요? 어떤 찬양으로 함께 찬양 인도하시기를 원하시나요? 어떤 찬양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지 너무나 잘 아시는 성령님!!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세요.” 이렇게 성령님을 존중해드리면서 삶을 살다 보면 다양한 채널들로 감동을 주시는 찬양이 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콘티 구성할 찬양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하루에 한 곡, 혹은 두세 곡씩, 혹은 전체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6. 기도드리는 가운데 생각나게도 하시고, 내가 먼저 부르지 않았는데 길을 걸어가다가 내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찬양도 있습니다. 때로는 잠에서 깼는데 내 속에서 울려 퍼지거나, 비몽사몽 중에도 입술을 열고 찬양을 부르고 있음을 깨닫는 찬양이 있습니다. 어떤 분의 글을 읽다가 그분이 은혜받으셨다며 소개해주시는 찬양이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7. 하루는 페이스북에 제가 올린 글을 읽으신 분께서 찬양이 생각난다시며 댓글로 올려주셨는데 감동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방송이나 유튜브로 평소 즐겨듣는 찬양들 가운데 그날따라 더욱 은혜가 되는 찬양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찬양들을 꼭 메모하고 기록해둡니다. 물론 감동받은 찬양들이 모두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하신 찬양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감동받았던 찬양들을 꼭 예배 때 콘티로 구성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찬양을 준비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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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과 찬양 인도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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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범의 눈을 뜬 아침, 사랑의 눈동자를 만나다
- 스스로를 닦던 고독한 구도자, 바나바를 연기하다 이탈리아의 연극배우 피에트로 사루비에게 삶은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한 고단한 수행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티베트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명상과 윤회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닦아내려 했던 고독한 구도자였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인류사의 위대한 스승 중 한 명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출연 제의가 찾아왔습니다. 그가 맡은 역은 민란을 주도하고 살인을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인 ‘바라바’였습니다. 사루비는 이 역할을 대단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저 직업적인 도전이라 생각하며 거친 분장을 하고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연기가 멈춘 찰나, 시선이 마주치다 빌라도의 법정, 따가운 햇살 아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사루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관중의 야유 속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채찍질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내, 예수(짐 카비즐 분)가 서 있었습니다. 대본대로라면 사루비는 자신을 대신해 죽으러 가는 예수를 비웃으며 광기 어린 표정으로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눈과 마주친 순간, 사루비의 연기는 그대로 얼어붙었습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눈은 나를 꿰뚫고 있었고, 동시에 나를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그 눈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죽음의 공포도 없었습니다. 오직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깊은 침묵과 가늠할 수 없는 사랑만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사루비는 그 찰나의 시선 속에서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압도적인 진실과 마주했습니다. “내가 바로 그 바라바였습니다” 그 눈빛은 사루비의 영혼에 소리 없이 말을 건넸습니다. “내가 침묵하는 이유는 네가 소리치게 하기 위함이고, 내가 매를 맞는 이유는 네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함이며, 내가 죽는 이유는 네가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2,000년 전의 바라바는 먼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예수를 대신해 풀려나고 있는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구원은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이 주어지는 ‘선물’임을 그는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시선이 바꾼 새로운 세계: 바라바 이후의 삶 1. 《바라바에서 예수에게로》: 눈빛으로 기록한 회심 사루비는 이후 자신의 회심 과정을 담은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구원이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바라바는 우리 인류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는 그의 말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2.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한 ‘광대’가 되다 가장 아름다운 변화는 그가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광대(Clown)로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험악한 살인자 ‘바라바’의 얼굴을 했던 그가, 이제는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웃음을 선물합니다. 자신이 받은 자비로운 시선을 타인에게 나누는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성공이 아닌 ‘사랑’을 쫓는 삶 성공과 해탈에만 집중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그는 이제 헌신적인 남편과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 눈빛이 나를 귀하게 여겨주었듯, 나도 내 곁의 사람들을 가장 소중히 여기게 되었습니다.” 에필로그: 당신은 그 눈과 마주한 적이 있습니까? 사루비는 이제 의무감이 아니라 ‘그분’이 보고 싶어 성당에 갑니다. 그 눈빛이 여전히 자신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피에트로 사루비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 역시 저마다의 죄를 지은 채, 이유 없는 용서를 받고 풀려난 바라바들이 아니냐고.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꺼이 죽음의 길을 택하며 미소 짓던 그 눈과 마주한 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살인자의 눈을 가졌던 배우는, 이제 그 눈에 용서와 평안을 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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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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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범의 눈을 뜬 아침, 사랑의 눈동자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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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우선순위 세 가지
- AI이미지 그림 1. 개척 3년차 즈음 연말이었습니다. 감동을 주시는 듯해서 한 달 정도 하나님 앞에서 잠잠히 머무를 때였어요. 제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기 원하시는지 여쭤보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삶과 신앙, 목회 가운데 본질적인 우선순위를 자주 점검하도록 성령님의 감동으로 인도해주신 내용들이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입니다. 2. <첫째, 친구의 정체성을 기억하기> 나 자신이 목사이기 전에 자녀요, 친구의 정체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바라보실 때 사역 성공했다는 사람들 칭찬 많이 받는지의 여부로 판단하시기보다, 하나님 자녀요 친구로서 성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가장 행복할 때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목사인 제가 진정 예수님만으로 인하여 행복할 때, 저를 통해 예수님을 보게 되는 성도님들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성령님께서는 수시로 제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3. “태성아, 교회 갈 때 목사의 정체성으로 먼저 가지 말자. 너 역시 다른 성도들처럼 먼저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친구로서 교회에 가자. 성도로 교회에 가자.” 그래서 집에서 교회로 출발해서 이동하면서 계속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 나누면서 의식합니다. 목사가 아니라 성도로 교회 간다는 인식을 체크합니다. 목사인 제가 먼저 아들이요 친구로서 예수님의 크신 사랑에 젖어 들어서 행복해야 합니다.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에서 행복을 누리고 얻는 것이 필요합니다. 4. <둘째, 가정에 충실하기> 가장 먼저 세우신 공동체인 가정에 충실한 목회자여야 합니다.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를 잘 이끌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시금석으로 삼아야 합니다(반대로 가정이, 자녀가 우상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목사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사랑하고, 행복한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강단에 섰을 때 가족부터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제 아내가 가장 은혜를 많이 받고 있다는 간증을 하곤 하는데 주님께서 격려해주시는 음성처럼 느껴집니다. 5. 만약 제가 인도하는 예배에서 가족이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그 어떤 사역의 성공도 사람들의 칭찬도 예수님 보실 때 실패입니다. 다행히도 아내부터 아이들도 나름 좋게 평가해줘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목회자 가정이 행복한 모습을 볼 때 성도님들 가정도 주님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소망을 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자 본받기를 힘쓸 것입니다. 저도 가정이 행복하신 선배님들의 강의나 책, 개인적 교제를 통해 본받고자 노력 중입니다. 6. <셋째, 하나님 앞에 머물기> 목사가 교회에 머물며 하나님과의 접촉과 만남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목사로서 이 정체성을 풍성하게 누려야 할 장소가 바로 섬기는 교회입니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도 심방이나 성도의 교제, 부흥회, 긴급한 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교회에 아들이요 친구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 머물기를 즐깁니다. 7. 아버지 하나님을, 예수님을, 성령님을 사랑하며 사랑받고, 교제 나누는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고자 개척 목회의 우선순위로 두고 있습니다. 그럴 때 목사가 교회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혼의 기쁨을 성도님들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하늘 아버지 앞에 자녀요, 친구로 나아가 말씀과 기도의 즐거움을 풍성하게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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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우선순위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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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말씀, 창조주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다
- 유듀브 동영상 갈무리 1.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 비웃음 속에 찾아온 낯선 초대 저는 대구에서 나고 자란 뼛속까지 불교 집안의 자녀였습니다. 제게 교회란 그저 ‘천국과 지옥’이라는 보이지 않는 담보로 사람들을 현혹해 장사를 하는 집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저 또한 평생을 교회를 욕하며 지냈습니다. 서른다섯 되던 해, 서울에서 사업에 매진하던 제게 뜻밖의 제안이 찾아왔습니다. 평소 신앙이 깊어 보이지 않던 한 지인이 ‘크리스천 CEO 스쿨’을 추천한 것이지요. "저 형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을 찾았습니다. 이전에도 친구를 따라 새벽기도에 가본 적은 있었으나,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기겁하여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기억뿐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CEO 스쿨의 ‘섬김의 리더십’ 강의는 세상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비록 속으로는 "나중에 저들도 뒤에서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기도하겠지"라고 비웃었지만, 그들의 삶에 배어있는 진정성은 제 차가운 마음의 빗장을 조금씩 녹여갔습니다. 2. 창조의 확증: 원숭이의 후예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제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여름 방학 중 떠난 ‘미국 창조과학 탐사’ 비전트립이었습니다. 그저 휴가나 다녀오자는 마음으로 신청한 그곳에서 지질학자 출신의 한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본래 철저한 진화론자였던 그분이 어떻게 성경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강의를 듣는 동안, 제 평생을 지탱해온 진화론의 허구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사실이다. 이것은 팩트다.” 그 외침이 제 심장에 박혔습니다. 제가 우연히 생겨난 원숭이의 후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 속에 지어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 그분이 바로 제가 그토록 욕했던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자 세상 모든 만물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옆에 앉은 장로님부터 어린아이 한 명까지 모두가 너무나 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였고, 그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제 안에서 솟구쳤습니다. 3. 주인이 바뀌는 회개: 내 삶의 보좌를 내어드리다 예수님을 창조주로 영접하고 나니 비로소 제가 지은 ‘진짜 죄’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저는 제가 꽤 의롭고 도덕적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없는 열심은 결국 나를 주인 삼고 내 영광을 위해 살아온 교만일 뿐이었습니다. 진짜 죄는 살인이나 강도가 아니라, 내 생명의 주인인 창조주를 거부하고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고집했던 바로 그 마음이었습니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감했습니다. 제 생명보다 귀한 자식의 생명인데, 하늘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대속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사랑의 확증은 없었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나니 과거에 함부로 대했던 인연들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관계가 끊겼던 친구들과 퇴사한 직원들에게까지 일일이 전화를 걸어 "당신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형상인지 몰랐다"고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며 깨어진 관계들을 회복해 나갔습니다. 4. 팩트를 외치는 사명: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다 이제 제 삶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팩트’를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진화론과 공산주의라는 거짓 사상으로 하나님의 창조를 가리고 성경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마귀의 전략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 현장이나 대형 교회 앞에서도 이 복음을 타협 없이 전합니다. 때로는 과격하다는 소리를 듣고 불편해하는 시선도 마주하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내 생각과 감정보다 하나님의 ‘지상 명령’이 더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으나, 영원한 내일인 ‘천국과 지옥’ 중 어디로 갈 것인지는 반드시 정해야 합니다. 믿음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전적인 선물입니다. 저처럼 평생 교회를 욕하던 완악한 사람도 창조주를 만나 새 생명을 얻었듯,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삶의 주인을 바꾸는 참된 회개를 경험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간증 출처 : 간증. 풀버전. 국대떡볶이 김상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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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말씀, 창조주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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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
- 1. “매순간 하나님께 열려 있다면 당신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해 보라. 하나님의 사랑의 임재에 늘 주파수가 맞춰져 있어서 숨 쉴 때마다 하나님의 생명이 당신에게 흘러들고 당신을 통해 흘러 나간다면, 당신이 자신과 사람들과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이 얼마나 변할지 생각해 보라. 그런 삶은 그 자체가 기도일 것이다.” -<기도숨> 중에서 우리가 고통을 느끼고 지나치게 반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잊고 있어섭니다.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동행하시는 것이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임재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심에도 불구하고 그 임재를 놓치고 있어섭니다. 그 임재를 놓치는 만큼 외부의 충격에 반응하게 되는 겁니다. 2. 반대로 그분의 임재로 충만할수록 외부의 충격에는 점점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충격이 와도 덜 받고, 빨리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일상의 연습이 중요해요. 성령님과 친밀하게 교제 나누는 좋은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요? 첫째, 그분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이 진리이며 이미 성취되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반복 학습하며 공부, 묵상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이 진리가 마음과 생각에 각인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3. 둘째, 그분과 동행하는 삶의 훈련을 위해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기다리는 훈련을 추천드립니다. 규칙적인 훈련으로서 말씀과 기도, 영성일기가 도움이 됩니다. 셋째, 삶 속에서 그 어떤 훈련보다 단순한 방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주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계속 그분을 생각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프랭크 루박 목사님의 <1분 게임>, 로렌스 형제님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을 참고해주세요. 개인적으로 이 책들은 평생 반복해서 읽을 책 50권에 선정하여 읽고 또 읽으며 적용합니다. 4. 넷째, 그분께 자주 말을 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쭤보기도 중요해요. 여쭤보고 말을 걸면 종종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음성 듣기라고도 표현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 말을 걸거나 자주 여쭤보는 ‘이유’죠. 음성 듣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듣기에 목적을 두면 미혹당하기 쉽습니다. 이미 성경에 음성이 풍성해요. 우리의 목적은 그분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이 진리이므로 '존중해드린다는 의미'로 말을 거는 것입니다. 5. 성령님과 인격적이고도 친밀한 관계, 교제를 중요하게 여기며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열매들이 있습니다. 집필하게 하신 처음 책 <성령님의 임재를 연습하라>에서 간증했습니다. 하루는 택시를 탔어요. 기사님이 혼자 이야기를 하시더니 곧 우십니다. 내리기 전에 기도 받으시고 예수님을 영접하세요. 전도하러 술집에 들어갔습니다. 저를 보더니 갑자기 여자 사장님이 울기 시작해요. 가정집에 들어갔습니다. 복음을 숨죽이고 들으면서 울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십니다. 6. 지금의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많은 교회들 부흥회 인도하며 설교를 더 잘 하고, 사역을 더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하긴 하지만 우선순위는 다른 부분입니다. 바로 항상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의식하는 삶입니다. 존중해드리는 삶입니다. 그 의미로 말을 걸고 대화하며 여쭤보기를 노력해요. 그리고 제 삶 전체로 삶의 예배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의 눈빛, 말투와 언어, 행동에 그분의 임재가 담겨있기를 원합니다. 저를 성전 삼고 계신 그분의 임재로 충만하기를 원해요. 성령님을 놓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놓치지 않고 반응하기를 원합니다. 오직 그분의 임재를 원합니다. 7. 그래서 우리 교회의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주일예배도 모이는 사람의 숫자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서 혼자일지라도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는 그 사실로 충분함과 만족을 얻고, 성령님의 임재를 추구하며 머물러 있고자 합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예배자로 서 있는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부디 좀 더 성령님을 의지하고 찾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스스로 의식하든 못하든 그분의 임재가 자연스럽게 넘쳐흐르길 소망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을 통해 예수님께서 왕 되심이 이웃들에게 더 아름답게 드러나실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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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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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을 먼저 예비하신 뒤, 길을 여신다”
- 1997년, 아프리카 중서부 케냐에 들어가 27년 동안 한결같이 케냐를 사랑하고 온몸으로 사랑을 전하다가 2023년 7월 5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토록 사랑하던 그곳에서 하나님께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선교의 삶 가운데 일어났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간증을 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TWNt6PiiJg0)에서 발췌하여 싣습니다. -편집자 주- ▲ “제가 특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그다음에 저를 그 길로 밀어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케냐의 오지, 기독교인이 거의 없는 이슬람권 지역에서 사역해 온 이원철 선교사는 자신의 선교 여정에 대해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이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 고백은 추상적인 신학적 표현이 아니라, 한 아이의 생명이 꺼져가던 시간 속에서 ‘기가 막히게’ 준비되어 있던 사람들, 문, 돈, 그리고 결정을 통해 확인된 현실의 기록이다. 이 간증은 ‘믿으면 된다’는 단순한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왜 그 순간에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가’, ‘왜 그 문이 그때 열렸는가’, ‘왜 그 길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를 촘촘히 되짚으며, 한 선교사가 경험한 섭리의 디테일을 따라가게 만든다. 1. “예배 때마다 밀려오던 사랑”이 방향을 바꿨다 그가 처음 선교사의 길을 결심한 계기는 거창한 ‘소명 체험’의 장면이 아니라, 반복되는 예배의 시간이었다. 그는 “매주일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너를 구했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왔다”고 말한다. 그 사랑이 계속해서 그를 압박했다. “내가 나를 위해 살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보답하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결론은 단순했다.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길”이라는 확신. 그 확신은 그를 케냐의 오지로 데려갔다. 2. “현상금이 걸린 사역지”… 그러나 더 큰 전쟁은 ‘집 안’에서 시작됐다 사역지는 험했다. 그는 “무슬림들이 나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죽이면 얼마”라는 말을 담담히 꺼낸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담대한 믿음을 주셔서 두려움 없이 사역한다”고 했다. 그런데 선교지에서 가장 깊은 흔들림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가족의 위기’에서 왔다.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보딩스쿨)에 아이를 맡기고 사역하던 어느 때, 큰아이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밤에 잠을 못 자고, 화장실을 자주 가고, 먹지 못하고, 물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마셨다. 체중은 급속도로 줄어들어 마침내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내려갔다. 병원은 “이 아이가 이렇게 말라가면 죽는다”고 했다. 케냐에 있던 의료진, 미국에서 온 의료선교사 의사들까지 원인을 찾지 못했다. “이 방법도, 저 방법도” 다 해봤지만, 답은 없었다. 3. “회교 병원에 가라”는 권유 앞에서—그는 왜 ‘거절’했나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케냐 나이로비에 위장 전문의가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예약까지 잡혔다. 병원 이름도 있었다. 아가칸(Aga Khan) 병원.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이상할 만큼 결박되었다. 그는 그 병원을 “회교 병원”이라고 표현하며, 그 문턱을 넘는 순간을 상상했다. 병원 서류에 적힐 “부모 직업: 기독교 선교사”라는 한 줄.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올 것 같은 조롱—“네가 믿는 하나님으로는 아이를 못 살려서 여기 왔느냐.” 의료적 판단만 놓고 보면, ‘가야 한다’는 결론이 상식적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이 비난받을 수 있다”는 영적 문제로 받아들였다. 간호사 선교사가 격하게 반응할 만큼 그는 단호했다. “나는 이 아이를 회교 병원에 데려갈 수 없다.” 이 대목에서 그의 신앙은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고 싶어 하는 신앙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그 결정이야말로 이후의 모든 길을 여는 ‘첫 단추’였다고 회고한다. 4. “아내의 울음”… 그리고 한 줄기 균열 하지만 믿음의 고백은 흔들리지 않는 강철이 아니었다. 현실은 계속해서 ‘급박’으로 밀어붙였다. 어느 날, 사역 일정 중이던 그에게 아내의 전화가 걸려왔다. “제 아내는 잘 울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강단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내는 울고 있었다. 흐느끼는 목소리로 전해진 말은 단순했다. “아이(큰아들)가 화장실 갔다가 오면서 쓰러졌어요.” 그는 차를 세웠고, 마음 한가운데로 “이 아이가 죽는구나”라는 직감이 찔러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덮쳤다. “죽을 때 아빠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그는 남은 거리(약 한 시간 반)를 달리며 기도했다. “하나님, 우리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5. “응답은 받았는데… 왜 현실은 안 변하는가” 기도팀에서 연락이 왔다.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이 이 일을 고치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기뻤다. 아이에게 달려가 “하나님이 너를 고치셨다”고 말해주었다. 아이도 기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하루 이틀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토하고, 힘들어하고,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엔 낙심이 쌓였다. 그때 그가 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는 차를 닦고 있었다. 그 평범한 순간에 하나님이 “깨달음”을 주셨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살지만, 하나님은 이미 고치셨다. 그러나 그 고치신 ‘시점’이 우리에게 도달할 때, 우리는 그 치유를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 그는 이 깨달음을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믿음의 시간표’로 받아들였다. 아이에게 다시 말했다. “인정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너를 고치셨다. 그 시점까지 믿음을 잃지 말자.” 6. LA로 가라는 낯선 초대—“갈 형편이 아닌데, 길이 열렸다” 그때 또 하나의 의외의 통로가 등장한다. LA로 오라는 메시지. 그것도 넉넉해 보이지 않는 한 전도사에게서였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아이는 누워 있어야 했고, 선교지 사역은 진행 중이었다. 무엇보다 항공권 값이 문제였다. 그런데 그는 기도 중 “네가 LA 가서 할 일이 있다”는 마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곧, 마치 그 ‘마음’에 반응하듯 한 사람이 나타난다. 이미 고인이 된 한 목회자가 그에게 3천 불을 건네며 말했다. “병원 좀 데려가 봐.” 놀랍게도 그 돈은 “두 사람 비행기 값”과 거의 맞아떨어졌다. 그는 그 돈을 사역비로 쓰고 싶었지만, 마음에 주어진 ‘LA로 가야 한다’는 부르심을 따라 항공권으로 바꿨다. 여기서부터 ‘사람의 예비’가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필요한 순간,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말을, 필요한 액수로 가져온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보내게 하신 것”이라고 표현한다. 7. 비자도, 비행기도—“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통과되었다” LA행의 또 다른 벽은 비자였다. 아이는 대사관 인터뷰를 받을 상태가 아니었다. “의자에 앉으면 머리가 무거워서” 버티지 못했다. “거부당할 게 당연”해 보였다. 그는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아이를 대사관 밖에 두고, 아이의 여권만 들고 들어갔다. “아이 비자를 주십시오.” 영사는 당황하며 말했다. “아이 얼굴도 안 보고 비자를 줄 수 없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로 흘렀다. 영사는 결국 비자를 찍어주었다. 인터뷰도 없이. 아이는 비자를 받았다. 비행기에서도 길이 열렸다. 걷지 못하는 아이는 휠체어로 탑승했고, 승무원은 아이를 눕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심지어 그들이 안내한 자리는 “맨 앞자리(1등석)”였다. ‘상식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따라붙는 장면들이 연속된다. 그는 그 연속성 속에서 ‘우연’이 아니라 ‘인도’의 패턴을 읽어낸다. 8. “응급실에 안 가려 했다”… 그런데 ‘그 의사’가 왔다 미국 도착 후에도 그는 쉽게 응급실로 향하지 못했다. “선교사”라는 정체가 또 하나의 걸림돌이었다. “하나님이 비난받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그때, 링거를 놓아주려 찾아온 간호사와 단기팀에 예상치 못한 인물이 동행했다. 중국인 의사. 그것도 의대 교수. 그 의사는 아이를 보자마자 단정했다. “당장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 말은 단순한 의료 조언이 아니었다. 선교사의 마음을 굳게 잠근 ‘종교적 체면’의 문을 강제로 두드리는 선포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망설였지만, 그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가 살아서 미국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 그는 아이에게 직접 물었다. “병원에 가고 싶니?” 아이는 답했다. “아빠, 왜 이렇게 오래 토했는지 원인이라도 알고 싶어요.” 바로 이 ‘아이의 입’이, 아버지의 완강함을 무너뜨리는 열쇠가 되었다. 그가 문을 열자, 주변 사람들은 기뻐했다. 어떤 이는 “당신 마음이 바뀌도록 우리가 기도했다”고 나중에 말했다고 한다. 9. 응급실의 기적: “절차 없이 들어갔고, 곧바로 CT를 찍었다” 응급실은 피가 흐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전쟁터 같았다. 그런데 그 중국인 의사가 미리 전화한 덕분에 “아무 수속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인턴이 아이를 보더니 말했다. “뇌를 찍어야 합니다.” 곧바로 CT. 그리고 아이는 ICU(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때 선교사는 아이 곁을 떠나지 못해 복도 의자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새벽, 의료진이 환자 요약 파일을 복도에 두고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무심코 그것을 보게 된다. 거기에 적혀 있던 한 문장이 그를 멈춰 세웠다. “부모에게 알리지 말 것.” 그리고 이어진 내용. “뇌에 종양 2개(1cm, 2cm).” 이 장면이 이 간증의 독특한 역설을 만든다. 보통 ‘종양’은 절망의 단어다. 그런데 그는 “너무 기뻤다”고 말한다. 이유는 분명했다. 케냐에서도, 미국에서도 찾지 못했던 원인을 하나님이 드디어 “알게 하셨다.” “고칠 수 있는 병원에서 원인을 알게 하셨다.” 그는 아이에게 달려가 말했다. “드디어 원인을 알았다. 하나님이 너를 고치시려고 여기로 인도하셨다.” 10. “그때, 그 교수”… 그리고 또 하나의 예비 중환자실에서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키가 크고 머리가 희끗한 교수. 차트를 보더니 묻는다. “너 케냐에서 왔니? 우리 아버지가 케냐 의료선교사였다.” 그리고 그는 거의 ‘개인 담당’처럼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놀랄 정도의 관심. “돈도 없어 보이는 선교사 가족”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말이 뒤이어 나왔다. “네 아이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병원비를 무료로 하겠습니다.” 선교사는 당황했다. 아이와 “평생 갚자”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것이 무너졌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하나의 확신이 찾아왔다. “하나님이 이 아이를 고치시려고, 네가 돈이 없으니 하나님이 책임지시려고, 여기로 부르셨다.” 이쯤 되면 ‘사람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말은 상징이 아니라 실제가 된다. 케냐를 아는 교수, 케냐 선교사의 아들을 돕는 의료진, 비용을 감당하는 시스템, 그리고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하는 안내자들. 이들은 마치 “누군가가 미리 배치해 둔 것”처럼 움직인다. 11. “머리를 열지 않아도 되는 병원”으로—또 한 번 문이 열렸다 아이의 종양을 제거하려면 머리를 열어야 한다. 그런데 의료진은 “머리를 열지 않고 치료할 수 있는 더 좋은 병원”이 있다고 했다. 문제는 그곳이 사립병원이라는 점. 비용이 또 다른 벽이었다. 하지만 그 병원도 아이를 받아주기로 했다. 의료진은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기도 많이 했지? 기도 많이 해서 하나님이 길을 여신 거야.” 아이를 태운 앰뷸런스가 또 한 번 문을 통과했다. 새 병원에 도착하자 젊은 의사는 말했다. “이 아이는 케냐에 있었거나, 한국으로 갔으면 죽었을 겁니다.” 그는 그것을 “럭키”라고 표현했지만, 선교사는 그 ‘럭키’라는 말을 ‘인도’로 번역했다. 12. “우리는 둘 다 ‘사역자의 자녀’야”—마지막 열쇠 같은 한 마디 새 병원에서 또 한 사람이 들어온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성 의사. 차트를 쭉 보더니 묻는다. “너의 아버지가 케냐 선교사냐?”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우리 아버지는 목사다. 너와 나는 둘 다 미니스터의 자녀다.” 이 짧은 문장은, 선교사의 눈에 ‘우연히 만난 의료진’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한 사람’으로 그를 확정시켰다. 그 의사는 아이를 끝까지 치료했고, 아이는 회복했다.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마침내 케냐로 돌아와 “선교사로” 아버지를 돕고 있다. 13. “그때 병원에 갔으면 오히려 죽었을 것”—하나님이 ‘눈을 가리신’ 시간 그는 한 가지 섬뜩한 결론을 덧붙인다. “제가 (처음부터) 그 병원에 데려갔으면, 얘는 죽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초기에 의료진이 찾은 건 위장 문제가 아니었다. 뇌 문제였다. 케냐에서 섣불리 수술하거나, 준비되지 않은 곳에서 손을 댔다면 더 위험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나님이 ‘수술할 수 없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셨다. 원인을 못 찾게 하셨다. 그리고 ‘고칠 수 있는 곳’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원인을 보게 하셨다. 이 대목에서 그의 간증은 단순한 기적담을 넘어선다. 하나님이 “치유”만 행하신 것이 아니라, 치유가 가능한 “시간과 장소”를 먼저 준비하셨다는 서술이기 때문이다. 14. 선교 재정이 끊겼을 때도—“하나님이 돈은 안 주시고, 말씀을 주셨다” 아이의 치유가 ‘생명의 극적 인도’였다면, 재정의 사건은 ‘사역의 지속을 위한 인도’였다. 그는 한 교단 선교를 통해 파송을 받았고, 초기에는 교회가 생활비와 사역비를 약속했다. 그는 케냐에서 기독교 학교를 세웠다. 그 지역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학교가 되었고, 회교도든 기독교인이든 4년 동안 성경을 배우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러나 교회 내부 분쟁이 터졌다. 헌금이 ‘재판 비용’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헌금을 멈췄고, 결국 선교 후원이 끊기기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도저히 못 보낸다”는 통보가 왔다. 그는 현실적으로 ‘신입생을 받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건물을 더 지을 수 없으니, 확장을 멈추자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주신 것은 돈이 아니라 말씀이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는 “돈은 안 주시고 말씀만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씀이 그를 움직였다. 그는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을 택했다. 직접 땅을 파고, 가능한 만큼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나이로비로 돌아왔을 때, 은행 계좌에 돈이 들어와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는 돈. 그는 그 돈으로 건물을 올렸다. 또 필요가 생겼을 때 또 돈이 들어와 있었다. 결국 후원이 끊어진 해에 건물 두 개를 세우려 했던 계획은 더 커져, “보너스로 교회까지” 세웠다. 그는 결론을 이렇게 내린다. “중요한 건 ‘재정이 있느냐’가 아니라, ‘이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다. 그분의 뜻이면 재정은 따라온다.” 15. “하나님은 ‘길’을 예비하신다”—그의 간증이 남기는 한 가지 질문 이원철 선교사의 간증은 ‘나는 믿었더니 기적이 왔다’는 단순한 도식으로 닫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묻는다. 왜 그때 3천 불이 ‘항공권 값만큼’ 주어졌는가? 왜 아이는 인터뷰도 없이 비자를 받았는가? 왜 응급실에서 ‘절차 없이’ 들어갈 수 있었는가? 왜 케냐를 아는 교수, 사역자의 자녀임을 공유하는 의사가 연달아 나타났는가? 왜 ‘원인을 찾지 못하게’ 하셨다가, ‘고칠 수 있는 곳’에서 보게 하셨는가? 그는 이 모든 질문을 하나로 묶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나를 준비시키시고, 길을 준비시키신다.” 그리고 그 준비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도 계속되는 방식으로 그를 붙들었다. 맺으며: 케냐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 아들의 치유는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아들에게 말했다. “아빠와 같이 선교사 하지 않을래?” 아들은 “하겠다”고 답했다. 지금 그 아들은 케냐에서 선교사로 아버지를 돕고 있다. 선교사는 이 결말을 ‘내 아이를 살려보자’는 목적만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열매로 본다.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난 한 아이,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미리 배치된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비난받지 않게 해달라”고 울며 기도하던 한 아버지. 그가 말하는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은, 멀리 있는 교리가 아니라 현장 한복판에서 사람과 시간과 길을 정교하게 엮어내는 살아 있는 인도였다. ※ 故 이원철 선교사의 이들 이인 선교사와 그의 장모는 무슬림에 납치되어 2년째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기도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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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
-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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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을 먼저 예비하신 뒤, 길을 여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