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論] 정죄의 돌팔매를 멈추고, 회복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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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소음, 그 너머의 본질을 묻다
최근 한국 교계는 거대한 해일에 휩쓸린 듯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의 십수 년 전 과거 발언이 담긴 녹취가 공개되면서 시작된 이 파장은, 디지털 광장이라는 확성기를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습니다. 기독교 언론은 물론, 수많은 유튜브 채널과 SNS 공간은 연일 이 사건을 중계하듯 쏟아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흐르는 정서입니다. 사실을 전달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 상대의 인격 전체를 난도질하는 ‘감정적 해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자극적인 파편들은 어느덧 하나의 거대한 ‘정죄의 서사’가 되어 소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숨 가쁜 비난의 속도를 늦추고 복음의 본질을 직시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이 뜨거운 분노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향해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적 쾌락인가를 말입니다.
‘온유한 심령’이라는 이름의 거울
성경은 죄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지향하는 종착지는 언제나 ‘심판’ 그 자체가 아니라 ‘돌이킴과 회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던진 권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준엄한 울림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라디아서 6:1)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심령’은 단순히 성격이 부드러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허물 속에서 ‘나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겸손의 극치입니다. “나 또한 저 자리에 있었다면, 나 또한 저 상황이었다면 넘어졌을지 모른다”는 처절한 자기 인식이 전제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바로잡을’ 자격을 얻습니다. 자신을 살피지 않는 정죄는 독이 든 칼날과 같아서, 상대를 죽일 뿐만 아니라 정죄하는 자의 영혼마저 황폐하게 만듭니다.
내려놓음, 그 고통스러운 순종의 무게
사건의 본질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태도입니다. 김문훈 목사는 12년 전의 부적절한 언행이 수면 위로 떠 오르자, 구구절절한 변명 대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와 교단 신문을 통해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고, 상처 입은 이들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개척하여 척박한 땅에서 일군 대형 교회의 담임직을 사임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반추해 볼 때, 지도자의 허물이 드러났을 때 이토록 신속하고 단호하게 책임을 지는 모습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대개는 공소시효를 논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며 자리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더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사역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근간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
그가 선택한 사임은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처절한 순종이었습니다. 자신이 걸림돌이 되어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막으려는 그 무거운 결단을, 우리는 마땅히 복음적인 책임 의식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확인사살’이라는 이름의 잔인함을 경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와 교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 공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사과했고, 책임을 졌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나간 이를 향해 다시 돌을 던지는 행위는 무엇을 위함입니까? 이는 정의의 구현이 아니라 ‘확인사살’에 가깝습니다. 이미 엎드러진 자의 등 위에 다시 칼을 꽂는 행위는 십자가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범죄한 자를 징계한 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자 공동체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라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2:6-7)
바울은 ‘족하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책임을 물었으니 이제는 그의 영혼이 절망이라는 늪에 잠식되지 않도록 공동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한 지체가 병들었다고 해서 그 부위를 도려내 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어떻게든 피를 통하게 하고, 살려내어 다시 몸의 일부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 생명의 본능입니다.
십자가는 ‘대신 죽음’이지 ‘대신 죽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음한 여인을 대하신 방식을 떠올려 봅니다. 율법의 잣대로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광기 어린 군중의 양심을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긍정하지 않으셨지만, 죄인만큼은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죄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하나님이 직접 목숨을 내어놓으실 만큼 처절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회개한 형제를 향한 끝없는 정죄는, 사실상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무임승차가 아니라, 누군가의 처절한 대가 지불로 얻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는 머리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암덩어리도 아니며, 한몸에 일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령 손가락에 무좀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 손가락을 내 몸이 아니라고 잘라버리는 정신나간 짓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을 먹고 아픈 부분에 약을 발라 치료를 할 것입니다.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지체로써 치료를 위한 방편으로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길: 정죄의 문화에서 회복의 문화로
이번 사태는 김문훈 목사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한국 교회 전체의 성숙도를 묻는 시험대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세 가지 소중한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첫째, 지도자의 책임 있는 결단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완악함입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자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명예와 기도할 시간을 허락해야 합니다.
둘째, 공동체의 지체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비난의 화살을 쏘는 것은 쉽지만, 함께 울며 회복을 돕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 ‘비판하는 공동체’에서 ‘싸매어 주는 공동체’로 체질을 개선해야 합니다.
셋째, 복음적 공론장의 형성입니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자극적인 정보에 휩쓸리지 않고, 성경의 가치관으로 사건을 해석하며 말의 무게를 지키는 성도들의 절제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덮는다’는 것은 죄를 은폐하거나 거짓으로 감추는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와 책임 지불이 이루어진 후, 그 죄를 더 이상 비난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공동체적 합의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덮개입니다.
정죄의 문화는 교회를 강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차갑게 얼어붙게 만듭니다. 반면, 회복의 문화는 교회를 깊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김문훈 목사의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돌을 쥐고 있는가, 아니면 수건을 들고 있는가?”
죄는 단호히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회개한 이를 향해 격려와 회복의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야말로 십자가를 통과한 교회의 진짜 얼굴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난의 광장에서 내려와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한 목회자의 회복을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정죄의 독기를 빼내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 길을 선택한다면, 이 아픈 상처는 오히려 더 큰 성숙을 향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정죄가 아니라 은혜로, 확인사살이 아니라 회복으로. 그 좁고 험한 길 끝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환한 웃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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