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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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AI 이미지 인권을 말하는 자, 누구의 인권을 말하는가 인권이라는 단어만큼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남용되는 언어도 드물다. 누구나 인권을 말하고, 누구나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말해진 인권이 진정한 인권인지를 판별하는 가장 확실한 시험대는 하나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가, 아니면 선택적으로 사용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둘러싸고 쏟아낸 발언들은 그 시험대 위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히틀러에 비유하고,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을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하는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을 넘어, 그의 인권 사상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 발언의 대담함에 있지 않다. 문제는 침묵에 있다. 같은 입으로, 같은 열정으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을 말한 적이 있는가. 탈북민의 피눈물 나는 증언 앞에서 '인권'이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있는가. 중국의 위구르족 강제 수용을 향해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가.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선택적 인권은 공산주의 인권관의 오랜 문법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에서 인권은 본래적 의미의 보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 투쟁의 도구다. 인권은 억압받는 계급, 즉 혁명의 편에 선 세력을 위한 것이며, 계급적 적으로 규정된 세력에게는 인권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구조 안에서 인권의 선택적 적용은 모순이 아니라 원칙이다. 오늘날 이른바 진보 진영이 구사하는 인권 담론의 문법은 이 전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에는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하마스의 테러 — 2023년 10월 7일, 1,200명의 무고한 생명이 살해되고 240여 명이 납치된 사건 — 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거나 침묵한다. 북한이 자국민을 굶기고 수용소에 가두는 구조적 폭력에는 눈을 감으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자위권 행사에는 국제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은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진영 논리로 포장된 정치적 무기다. 진정한 인권은 편을 가리지 않는다. 억압자가 누구이든, 피해자가 어느 진영에 속하든, 인간의 존엄은 동일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본질이다. 네타냐후와 히틀러의 비유는 역사적 무지인가, 의도적 왜곡인가 이재명 대표의 히틀러 비유는 단순한 수사적 과잉이 아니다. 이 발언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첫째,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다. 홀로코스트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국가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절멸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인류에 대한 범죄'로 엄정하게 정의한 이 사건을 하마스 테러 조직의 공격에 맞서 자국을 방어하는 이스라엘 총리에게 비유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뒤집어 씌우는 이 논법은 역사 인식의 빈곤을 드러낼 뿐 아니라, 반유대주의적 선동에 구조적으로 복무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실존적 맥락에 대한 몰이해다. 이스라엘은 건국(1948년) 첫날부터 주변 아랍 국가들의 총공세를 받았다. 단 한 번의 패배가 곧 국가의 소멸을 의미하는 실존적 전쟁 상태가 76년째 계속되고 있다. 하마스는 그 헌장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제거를 명시하고 있는 테러 조직이다. 이 맥락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대응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공정한 국제법 해석이 아니라 편향된 정치적 판결이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평행한 운명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1948년, 같은 해에 두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모두 건국 즉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외세와 내부 위협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야 했으며, 국제 사회의 냉담 속에서도 홀로 서야 했다. 이스라엘은 오늘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현실 속에서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국민 모두가 병역 의무를 지고, 국가 생존을 위한 결의가 사회 전체를 관통한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피로 지켜낸 실재다. 반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휴전선 너머 핵무기를 개발하며 대남 적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과 대치하면서도, 국내 정치 담론은 그 실존적 위협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희석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시각이 대한민국의 자위권과 동맹 연대를 부정하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흔드는 논리는 곧 대한민국을 흔드는 논리다. 기독교 인권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보편적 존엄 이 논의를 더 깊은 토대 위에 세우려면 기독교 인권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인권의 근거를 사회 계약이나 계급 투쟁에서 찾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7절은 선언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 이 신학적 선언이 인권의 절대적 보편성의 근거다. 인간의 존엄은 국적도, 민족도, 계급도, 정치적 진영도 초월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를 더욱 구체화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웃'의 경계를 묻는 자에게 경계 자체를 해체하는 답을 주셨다.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고통받는 자 앞에서는 진영과 민족을 초월한 응답이 요청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기독교 인권 사상의 핵심이다. 고통은 편을 가리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 앞에서는 이념의 경계가 무력해진다. 이 기준으로 이재명의 인권관을 평가하면 판단은 명료해진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은 아파하면서 북한 주민의 고통은 외면하는 것, 하마스의 테러 피해자에게는 침묵하면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성토하는 것 — 이것은 Imago Dei에 근거한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진영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우상숭배적 인권관이다. 교회의 침묵은 공모다 "정교분리(政敎分離)." 한국 교회가 공적 사안 앞에서 가장 자주 꺼내는 방패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본래 의미는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교회가 국가 권력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이다. 교회가 불의와 거짓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 앞에서도 진실을 말했다. 아모스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불의를 고발했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 전체에 흘러야 한다고 선포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불의한 행위를 면전에서 책망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성경적 선지자 전통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 요청되는 것도 이 전통이다. 이재명의 선택적 인권관이 사회 담론을 지배하고, 북한 인권에 대한 침묵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되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이 집단학살의 언어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Imago Dei의 신학으로 정의롭고 보편적인 인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불의에 대한 묵시적 동의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존귀하다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가자지구의 민간인도, 이스라엘의 납치 피해자도, 북한 수용소의 정치범도, 두만강을 건너다 붙잡힌 탈북민도. 그 어떤 생명도 진영의 논리에 따라 가치의 경중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인권은 불편한 진실 앞에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내 편의 잘못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반대편의 고통에도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 — 그것이 Imago Dei에 기초한 기독교 인권 사상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보편적 인간 존엄의 이상이다. 이재명의 인권관을 비판하는 것은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정치적 무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 땅의 공적 담론 속에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다. 그 일에 교회가, 신앙인이,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이 함께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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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6
  • 트럼프의 '예수 이미지' 사건이 한국 교회에 던지는 질문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올렸던 AI 생성 이미지 한 장의 그림이 세계를 흔들었다. 흰 로브에 붉은 천을 두른 남자가 병상에 누운 환자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그의 손에서는 빛이 쏟아지고, 주변에는 성조기와 독수리, 군인과 간호사가 경건하게 그를 우러러본다.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내려오고, 자유의 여신상이 배경을 장식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지난 4월 12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이 AI 생성 이미지를 아무런 설명 없이 게시했다. 레오 14세 교황을 향해 "나약하고 형편없다"고 공개 비난한 지 불과 한 시간 뒤의 일이었다. 거센 비판이 쏟아지자 그는 게시물을 삭제하고 "의사로서의 나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흰 로브를 걸치고 병자에게 안수하는 장면을 의사의 이미지로 읽을 사람은 거의 없다. 해명은 해명이 되지 못했다. 자기 과시, 그리고 교만이라는 이름의 함정 이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그림 한 장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트럼프의 전체 행보를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읽어야 한다. 그는 이전에도 교황 복장을 한 자신의 이미지를 SNS에 올렸다. 자신의 형사 기소를 "박해받는 메시아"의 서사로 포장했다. 공개 석상에서 "나만이 이 나라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종교특별고문은 그를 예수에 비유했고, 지지자들은 "예수는 나의 구원자, 트럼프는 나의 대통령"을 외쳤다. 그는 그 어느 것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것은 충동적 실수의 연속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특별한 존재, 나아가 신적 권위를 지닌 구원자로 연출하려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욕망이 반복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교만(驕慢)이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형태의 교만, 즉 종교적 언어와 이미지를 빌려 자신을 신격화하는 교만이다. 성경은 교만을 단순한 성격적 결함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영적 반역의 뿌리다. 이사야 14장 13절에서 바벨론 왕의 교만은 이렇게 묘사된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이것이 타락의 원형적 언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 그것이 노골적이든 이미지로 포장되든, 성경은 그것을 동일한 범주로 본다. 잠언 16장 18절은 단호하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는 자에게 역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청구했다. 성경의 증언은 일관되다. 성경이 기록한 교만의 결말들 사도행전 12장의 헤롯 왕은 화려한 왕복을 입고 군중 앞에 섰다.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외쳤을 때, 그는 그 찬사를 묵인했다. 성경은 곧이어 기록한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 12:23) 자기 과시의 절정에서 그는 무너졌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영화를 바라보며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자랑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고, 그는 짐승처럼 들판을 기어 다니는 굴욕을 당했다.(단 4장) 권력의 정점에서 터져 나온 자기 과시가 그를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서 불법의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인간이 신의 자리를 탐하는 행위, 그것이 성경이 묘사하는 가장 심각한 영적 타락의 징표다. 트럼프를 이 인물들과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러나 교만의 패턴, 자기 신격화의 언어, 종교적 이미지를 권력 서사에 끌어다 쓰는 행태. 이것이 성경이 반복적으로 경고해 온 바로 그 길목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지지와 우상화 사이, 한국 교회의 분별이 필요하다 이 사건이 한국 교회에 특별한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 진영 일부에서는 트럼프를 "하나님이 세우신 도구" 혹은 "고레스 왕과 같은 지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하나님께서 불신자를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신 사례는 성경에 실제로 존재한다. 그 자체가 반드시 잘못된 신학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구로 인정하는 것과, 그를 신격화하거나 그의 모든 언행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는 신학적으로 가능한 해석이지만, 후자는 우상숭배의 영역에 위험하게 근접한다. 고레스 왕을 도구로 인정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그를 예배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했고, 고레스는 그분의 손에 들린 수단으로만 이해했다. 분별(分別)은 신앙의 덕목 중 하나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권면했다. 분별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다. 사랑에 뿌리를 두되, 진리로 가지를 뻗는 신앙의 성숙함이다. 그 분별이 없을 때, 신앙은 특정 인물을 향한 맹목적 충성으로 변질되고, 교회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는다. 교회 역사는 이 위험을 반복적으로 경고한다. 히틀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추앙했던 독일 기독교인들, 권력자의 곁에 서서 예언자의 자리를 포기했던 수많은 어용 성직자들. 그들의 공통점은 지지와 우상화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순간 시작되었다. 구원자는 오직 한 분이시다 트럼프는 그림을 삭제했다. 그러나 그 그림이 드러낸 것은 삭제되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박수를 보내는 군중이 있는 한, 그 욕망은 더욱 커진다. 교회가 그 군중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구원자는 성조기와 전투기를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 나사렛에서 오셨고, 환호하는 군중을 뒤로하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다. 그분은 병자의 이마에 손을 얹으시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리하셨다. 오늘 한국 교회는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어떤 지도자 앞에서도 신학적 분별력을 포기하지 않을 용기가 있는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명백히 잘못된 길로 갈 때, 신앙의 이름으로 그것을 덮지 않을 정직함이 있는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그 교만이 종교의 언어를 빌릴 때, 그 위험은 배가된다. 한국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려면, 먼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섬기는 분은 어떤 인간 지도자도 아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편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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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4
  • 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강단을 물든 아첨
    이재명 대통령과 소강석 목사가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청와대 사진단 제공) '부활절'은 기독교 신앙의 정점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기념일이 아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 역사적 사건 위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서 있다. 그러므로 부활절 예배는 오직 한 분 ‑ 부활하신 주님 ‑ 만이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런데 지난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2026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예배에 참석했고, 소강석CBS 재단이사장(새에덴교회 담임)은 환영사에서 대통령을 향해 찬사를 쏟아냈다. 기독교 최고의 절기에 정치 지도자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역사적 좌표를 되묻게 하는 심각한 사건이다. 강단에서 울려 퍼진'용비어천가' 소강석 목사는 환영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누구보다 뼈저린 절망을 경험하셨던 이재명 대통령은 이 시대에 어렵고 힘든 자들을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신다'고 했다. 이어 '우리 대통령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한국교회를 사랑하며, 한반도에 평화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이 자리에 오셨다고 믿는다'고 선언했다. 예배당 강단에서, 부활절 예배 환영사의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회중을 섬기는 직분이다. 강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자리이지, 정치 지도자를 위한 헌사(獻辭)의 무대가 아니다. 소강석 목사가 쏟아낸 언어들은 대통령을 향한 것이었지,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설교의 주 목적은 하나님을 높여 청중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구린내 나는 인간을 드높이는 것은 강단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설교다." —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이것이 단지 한 목사의 개인적 실수라면 논란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다. 소강석 목사는CBS 재단 이사장이라는 공적 지위를 갖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주요 대중적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가 부활절이라는 공적 예배 자리에서 국가 지도자를 향해 이런 찬사를 바치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가 그 지도자를 신앙적으로 인증하는 것처럼 비쳐질 위험이 있다. 성경은 인간을 높이는 것을 경계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린도전서3:21)고 엄중히 경고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이 닷새 후 “십자가에 못 박으라”를 외쳤던 것처럼, 정치적 환호와 신앙적 찬사는 본질상 다르다. 강단에서 이 둘이 뒤섞일 때,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가 된다. 부활절연합예배에서 축사하는 이재명 정교분리를 말하던 입으로 예배당에 선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이 이 자리에 선 배경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불과 수 개월 전,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직적으로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제재가 엄정하다는 것을 반드시 이번 기회에 보여줘야 한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정교분리 원칙이 깨지는 이러한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며 종교단체에 대한 법적 제재까지 거론했다. 그런 사람이 4월 5일 부활절 예배에 직접 참석하여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사도신경을 따라 읊으며, 헌금까지 드렸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정교분리를 강조하던 그가 스스로 교회의 정치화를 주도한 것은 아닌가. 교회를 향해서는 정치에서 손 떼라 하면서, 자신은 교회라는 공간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묻고 싶다. 정교분리의 본래 취지는 국가가 종교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뒤집어 국가가 종교를 단속하는 명분으로 삼는 것은 헌법 정신의 왜곡이다. 지난1월 기자회견에서 정교분리를 강조했던 사람이, 그것도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또 반복하고 있다. 자신이 종교를 향해 정치를 멀리하라고 경고하면서, 정작 자신은 가장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들어와 축사를 하고 박수를 받는 것—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이중성이다. 교회해산법을 추진하며 교회당에 들어선 아이러니 이 사건의 가장 심각한 층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명은 집권 이후, 민주당 주도로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었다. 발의자 11명 중 8명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이 법안은 종교법인이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하거나 선거에 개입한 경우 주무관청이 직접 설립허가를 취소하고, 해산된 법인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장 없는 종교법인 사무소 출입·검사 조항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법안에 대해 기독교계는 '교회폐쇄법'이라 명명하며 격렬히 반발했다. 4월 1일에는 7,000여 명의 개신교인이 국회 본관 앞에 집결해 “종교법인 강제해산 종교의자유 입틀막법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로부터 불과 나흘 후, 이재명 대통령은 부활절 예배에 나타났다. 한 손으로는 교회해산법을 밀어붙이고, 다른 손으로는 부활절 예배에서 헌금을 드린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아니면 정교한 정치 연출인가. 법무법인 전문가들은 이 법안에 대해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해 공익을 해칠 경우 법인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법학회도 “민법 개정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헌법적 가치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민법 개정이 아닌 특별법 제정을 주장했다. 바로 이 긴장 속에서 대통령의 부활절 예배 참석이 이루어졌다. 기독교를 압박하는 법안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최대 절기의 예배에 등장하는 것 —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향한 정치적 회유이자, 기독교계의 조직적 반발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예배는 권력의 무대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자들이 있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열왕기상12:28)고 선포했다. 그의 동기는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었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죄가 되게 한 것”이라고 기록한다. 정치 지도자가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예배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무대로 전락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공의를 저버린 백성의 형식적 예배를 향해 “내가 너희의 다수한 제물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의 분향을 싫어하노라”(이사야1:11,13)고 선언했다. 하나님은 형식이 아니라 진실을 원하신다. 부활절 예배에서 정치인이 “아멘”을 외치고 헌금을 드리는 모습이 미디어를 가득 채울 때, 그리고 그 예배의 사회자가 대통령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으로 선포할 때, 그 예배당 안에 계신 분은 과연 누구인가? 군중의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예배와 권련 앞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예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권력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교회는 국가 권력에 아첨하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맹목적인 반정부 구호의 집결지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의 길은 예언자적 비판과 복음적 초월성에 있다. 세례 요한은 왕의 잘못을 그 앞에서 직언하다 목이 잘렸다(마가복음6:18). 그는 헤롯 왕의 예배당에 초청받아 “왕이시여, 위대하십니다”라고 환영사를 올리지 않았다. 개혁자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권력에 맞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켰다. 독일의 본회퍼는 히틀러 치하에서 교회가 국가에 굴종하는 것을'값싼 은혜'라 이름하며 저항했다. 한국교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권력을 향한 환호가 아니라 복음의 언어로 권력에게 말하는 용기다. 소강석 목사는 예배 강단에서 대통령을 높이는 대신, 부활절 예배의 의미를 선포했어야 한다. “권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을 이루는 자”(로마서13:4)이어야 하지만, 그 권세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두려움 없이 선포했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적 목회자의 직분이다. 부활절은 인간의 권력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패배하는 날이다. 빌라도의 법정도, 로마의 군병도, 무덤 앞의 돌도 부활을 막지 못했다. 그 부활의 능력 앞에서 교회는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부활의 담대함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앞에서 주눅 드는 것도, 정치 권력에 아부하며 강단을 내주는 것도—모두 부활 신앙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태복음22:21). 이것이 정교분리의 복음적 원리이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거룩한 공간이 정치적 연출의 무대로 활용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엄중한 경계선을 다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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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7
  • ‘왕사남’ 속에 발견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나라
    1,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3위에 오른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한 사극의 흥행을 넘어 시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의 유배지를 지킨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권력의 폭력 앞에서 양심을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역사를 빌려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놀랍도록 성경적이다. 첫째, 엄흥도의 의(義)는 순교자의 언어로 말한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종이 아니라 엄흥도다. 그는 처음에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지 유치를 자청한 인물이다. 철저히 세속적 동기로 시작된 그의 선택은, 그러나 단종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변모한다. 감시자에서 보호자로, 이해타산의 인간에서 의리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엄흥도의 여정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의 구조와 닮아 있다. 클라이맥스는 단종의 죽음 이후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진 상황에서, 엄흥도는 홀로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다. 역사 속 그의 말이 전해진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 이 고백은 유교적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정신은 놀랍도록 복음과 맞닿아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산상수훈의 말씀,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엄흥도의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하나님께서 인간 양심에 새기신 의의 요구는 동일하다. 엄흥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둘째, 권력의 덧없음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영화에서 세조(수양대군)는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장항준 감독의 이 선택은 탁월하다. 권력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이고, 역사를 지우고, 진실을 묻어버린다. 한명회가 붉은 관복을 입고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이름 없는 폭력의 실체를 느낀다. 이것은 감각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둠의 세력과 유사하다. 우리의 싸움은 육과 혈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어둠의 권세와 정사들이 끊임없이 이 세계를 둘러싸고 간섭하고 조정한다. 영화에서 경험되는 단종을 향한 대적의 세력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둠의 세력과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선언한다. 단종이 죽은 지 242년 후, 그는 왕으로 복권되었다. 엄흥도는 충의공(忠毅公)으로 기려졌다. 역사의 승자처럼 보였던 세조의 찬탈은 결국 정의의 법정 앞에 섰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의인의 선택은 시간을 이겼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라는 잠언의 말씀처럼,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선언처럼, 역사의 마지막 발언권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게 있다. 교회가 이 장면에서 받아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의를 위해 침묵당하는 이들이 있다.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이야기가 240여 년 후 역사의 법정에서 뒤집혔듯,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도래한다. 믿음이란 그 보이지 않는 나라를 현재 속에서 살아내는 능력이다. 셋째, 단종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의 그림자 이 대목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단종을 그리스도와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오랜 전통인 '유형론(typology)'의 관점에서, 단종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희미하게 반영한다는 성찰은 가능하다.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어린 왕,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존재,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복권된 이름.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한 사람. 이 서사의 구조는 십자가의 이야기와 여러 지점에서 겹친다. 물론 단종은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이셨다. 단종의 비극은 인간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비극을 대속하시는 구원 사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때로 역사와 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의 그림자를 보여주신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1,500만 명의 관객 안에는, 어쩌면 그 그림자를 통해 진짜 빛을 찾아야 할 영혼들이 있다. 복음의 문은 뜻밖의 곳에서 열린다 〈왕과 사는 남자〉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 영화 안에서만 일하시지 않는다. 고난받는 의인의 이야기, 권력의 허무함, 죽음을 넘어서는 충정 - 이 보편적 서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조용히 빛난다. 목회자는 이 영화를 설교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성도는 이 영화를 통해 복음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1,500만 명이 함께 울었다는 것은, 그 눈물의 깊은 곳 어딘가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증거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이 영화는 그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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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0
  • 평화촉구연대의 성명서, 균형을 잃었다
    2026년3월16일 건강한 교회와 사회 포럼, 광교산울교회,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민주시민모임,기독교윤리실천운동, 느헤미야교회협의회, 등 19개 단체로 구성된 평화촉구연대의 ‘불의한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중동전쟁에 대한 성명서는 중동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응답을 표방하고 있다. 성경적 언어와 인도주의적 호소로 포장된 이 성명은 언뜻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면밀히 읽어보면 이 성명은 심각한 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편향된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란 정권의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한 완전한 침묵 성명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불의한 전쟁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전쟁의 배경이 된 이란 정권의 행태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정권은 수십 년간 자국민을 향해 비인간적인 억압을 자행해 왔다. 2019년 11월의 피의 금요일 사태를 비롯한 각종 민주화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성 인권 운동가들과 종교적 소수자들은 조직적인 탄압을 받아왔다. 독립적인 추산에 따르면 이란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야기한 사망자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이란은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반군 등 역내 무장 세력을 지원하며 중동 불안정의 핵심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더불어 미국인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 사망에 이란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성명서는 이러한 맥락을 철저히 배제한 채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규탄하고 있다. 이는 도덕적 판단의 출발점 자체가 불균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간인 피해의 선택적 적용 성명서는 2026년 2월 28일 이란 미나브의 초등학교 공습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민간인 희생을 강조한다. 민간인 보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인도주의적 가치이며, 어떤 전쟁에서도 무고한 희생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명서는 그 공습이 의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는지, 아니면 전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폭이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검토도 없이 이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은 대부분 군사시설 — 해군기지, 공군기지, 미사일 기지, 핵 관련 시설, 공항 등 — 을 겨냥해왔다. 민간 지역 피해가 발생했다면, 그것이 의도적 공격인지 오폭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만약 민간인 학살이 의도적이었다면 동일 지역에 대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공격이 있었어야 하나, 그러한 패턴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명서는 이러한 사실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결론을 먼저 내린 뒤 근거를 꿰맞추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기방어권에 대한 몰이해 국제법은 모든 국가에 자기방어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란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적대적 언사를 공식적으로 반복해왔고, 실제로 탄도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핵 개발 프로그램을 통한 대량파괴무기 획득 시도 역시 국제 사회가 공인한 위협이다. 더구나 미국의 공습과 함께 이란 정권은 주변의 중동국가에 미사일과 드론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감행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이 같은 실존적 위협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라는 측면이 있음에도, 성명서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인 침략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란 국민 상당수는 자국 독재 정권의 몰락을 환영하는 반응을 나타냈다. 정권 핵심 인사들의 사망 또는 제거 소식에 거리에서 환호하거나 소셜미디어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이란 시민들의 모습이 다수 보고되었다. 이는 이란 정권이 자국민에게도 억압자로 인식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성명서가 진정으로 생명과 인권을 염려한다면, 독재 정권 치하에서 신음해온 이란 국민의 자유와 존엄에 대해서도 동등한 무게로 발언했어야 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정치적 압박의 문제 성명서의 세 번째 항목은 한국교회가 특정 국가의 정치적 이해를 신앙으로 정당화하는 태도를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을 신앙의 타락으로 규정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자기모순을 품고 있다. 성명서 자체가 특정한 정치적 방향—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이란 정권에 대한 면죄—을 신앙의 언어로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의 전쟁 논리를 추종하지 말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한쪽 편의 서사만을 일방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무엇이 진짜 불의인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전쟁은 언제나 비극이며, 그 안에서 완전한 정의를 찾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불의는 단지 ‘폭격’이라는 행위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억압과 위협, 그리고 지속적인 폭력의 구조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어떤 정권이 자국민을 억압하고 국제적 위협을 지속해왔다면,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단순한 침략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동시에, 그 대응이 민간인의 생명을 해친다면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진정한 균형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데서 시작된다. 진정한 평화는 균형 있는 진실 위에 선다 그리스도인의 평화 운동은 정치적 편향을 복음의 언어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는 성명이라면,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지역 안정에 가해온 폭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했어야 한다. 핵 위협을 방치하는 것이 평화인지, 독재 정권을 묵인하는 것이 생명 존중인지 물어야 했다. 평화촉구연대의 이 성명은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 중 하나는 철저히 외면한다. 균형을 잃은 평화 호소는 결국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로 서려면, 눈에 보이는 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에 대해서도 동등한 용기로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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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 진단
    2026-03-21
  • 時論/신앙의 자유인가, 타협의 강요인가
    미국 제9연방항소법원이 워싱턴주 올림푸스 스파(Olympus Spa) 사건에서 내린 판결은 단순한 법리 다툼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공적 공간으로부터의 축출을 선언한 판결이며, 창조 질서에 근거한 신앙 양심의 경영권을 법의 이름으로 무력화한 사건이다. 법원은 트랜스젠더의 출입을 제한한 스파의 방침을 차별로 규정함으로써, 성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그에 따른 삶의 실천을 공적 영역에서 퇴출시켰다. 이 판결이 낯선 타국의 이야기로 들린다면, 우리는 아직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이 끊임없이 추진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내일의 예고편이다. “중립”이라는 허울과 신앙의 공동화 법원은 차별금지법(WLAD)이“중립적이고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이기 때문에 종교적 신념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에 관한 스파 측의 주장은 모두 기각됐다. 법원이 말하는 중립은, 그러나 진정한 중립이 아니다. 특정한 세계관을 법의 언어로 확정하고, 그에 배치되는 신앙을 사적 영역으로 봉인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세대를 거슬려 살기를 요구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 신앙은 예배당 안에 머무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공적 생활에서 그 분별의 권리를 박탈했다. 신앙을 가질 자유는 허용하되, 신앙대로 살 자유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빼앗는 역설이다. 창조 질서의 훼손과 원죄적 오만 이번 판결의 핵심 문제는 생물학적 성(Sex)보다 개인의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 선언을 법적으로 우선시했다는 데 있다. 이는 성경의 선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1:27). 하나님이 세우신 남녀의 구별은 억압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이며 은혜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성별을 규정하겠다는 주장은, 창조주의 섭리를 넘어서려는 오만이다. 그것은 에덴의 원죄 -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 -의 현대적 재현이다. 법이 이를 권리로 옹호하는 순간, 가정과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질서는 흔들린다. 올림푸스 스파는 한국 전통 목욕 문화(찜질방)에 기반한 시설로, 나체 서비스의 특성상 성별 분리는 운영의 핵심 원칙이었다. 이러한 문화적·윤리적 맥락조차 고려하지 않은 채 일률적 평등 기준을 적용한 것은, 창조 질서를 차별로 낙인찍는 가치 전도의 극치다. 한국 교회가 대비해야 할 세 가지 전선 미국의 이 판결은 차별금지법이 실제로 작동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 교회는 다음 세 가지 전선에서 진지한 대비가 필요하다. 첫째는 강단의 자유다. 죄를 죄라 말하는 설교, 성경적 인간 이해를 전하는 선포가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4:2)는 사명이 법치의 이름 아래 위협받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둘째는 교육의 영역이다. 기독교 학교에서 창조 질서를 가르치는 것이 혐오 표현으로 규정되고,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이 법적 제약을 받게 될 수 있다. 셋째는 일상의 공간이다.여성 전용 사우나, 탈의실과 같은 최소한의 도덕적 경계마저 평등의 이름으로 허물어지는 날이 올 수 있다. 이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미국에서 이미 현실이 된 문제다. 진리의 기치를 내려놓지 말라 교회는 두 가지 유혹 앞에 서 있다. 세상의 법에 굴복하여 타협의 길을 선택하는 것과, 감정적 반발로 소모적 갈등을 자초하는 것이다. 어느 쪽도 답이 아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은 사도들이 걸어간 그 길이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사도행전5:29). 기독교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한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교회는 그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담보로 한 타협은 결국 사랑도, 진리도 아닌 것이 된다. 한국 교회는 이 시대의 흐름을 분별하며 더 깊은 신학적 성찰과 성숙한 공적 발언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태복음5:13). 맛을 잃은 소금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 바로 진리의 짠맛을 지켜야 할 때다. 진리를 배제한 자유는 방종이며, 하나님을 떠난 평등은 억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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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19

실시간 데스크 칼럼 기사

  • 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AI 이미지 인권을 말하는 자, 누구의 인권을 말하는가 인권이라는 단어만큼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남용되는 언어도 드물다. 누구나 인권을 말하고, 누구나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말해진 인권이 진정한 인권인지를 판별하는 가장 확실한 시험대는 하나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가, 아니면 선택적으로 사용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둘러싸고 쏟아낸 발언들은 그 시험대 위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히틀러에 비유하고,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을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하는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을 넘어, 그의 인권 사상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 발언의 대담함에 있지 않다. 문제는 침묵에 있다. 같은 입으로, 같은 열정으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을 말한 적이 있는가. 탈북민의 피눈물 나는 증언 앞에서 '인권'이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있는가. 중국의 위구르족 강제 수용을 향해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가.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선택적 인권은 공산주의 인권관의 오랜 문법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에서 인권은 본래적 의미의 보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 투쟁의 도구다. 인권은 억압받는 계급, 즉 혁명의 편에 선 세력을 위한 것이며, 계급적 적으로 규정된 세력에게는 인권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구조 안에서 인권의 선택적 적용은 모순이 아니라 원칙이다. 오늘날 이른바 진보 진영이 구사하는 인권 담론의 문법은 이 전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에는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하마스의 테러 — 2023년 10월 7일, 1,200명의 무고한 생명이 살해되고 240여 명이 납치된 사건 — 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거나 침묵한다. 북한이 자국민을 굶기고 수용소에 가두는 구조적 폭력에는 눈을 감으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자위권 행사에는 국제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은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진영 논리로 포장된 정치적 무기다. 진정한 인권은 편을 가리지 않는다. 억압자가 누구이든, 피해자가 어느 진영에 속하든, 인간의 존엄은 동일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본질이다. 네타냐후와 히틀러의 비유는 역사적 무지인가, 의도적 왜곡인가 이재명 대표의 히틀러 비유는 단순한 수사적 과잉이 아니다. 이 발언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첫째,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다. 홀로코스트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국가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절멸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인류에 대한 범죄'로 엄정하게 정의한 이 사건을 하마스 테러 조직의 공격에 맞서 자국을 방어하는 이스라엘 총리에게 비유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뒤집어 씌우는 이 논법은 역사 인식의 빈곤을 드러낼 뿐 아니라, 반유대주의적 선동에 구조적으로 복무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실존적 맥락에 대한 몰이해다. 이스라엘은 건국(1948년) 첫날부터 주변 아랍 국가들의 총공세를 받았다. 단 한 번의 패배가 곧 국가의 소멸을 의미하는 실존적 전쟁 상태가 76년째 계속되고 있다. 하마스는 그 헌장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제거를 명시하고 있는 테러 조직이다. 이 맥락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대응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공정한 국제법 해석이 아니라 편향된 정치적 판결이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평행한 운명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1948년, 같은 해에 두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모두 건국 즉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외세와 내부 위협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야 했으며, 국제 사회의 냉담 속에서도 홀로 서야 했다. 이스라엘은 오늘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현실 속에서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국민 모두가 병역 의무를 지고, 국가 생존을 위한 결의가 사회 전체를 관통한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피로 지켜낸 실재다. 반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휴전선 너머 핵무기를 개발하며 대남 적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과 대치하면서도, 국내 정치 담론은 그 실존적 위협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희석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시각이 대한민국의 자위권과 동맹 연대를 부정하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흔드는 논리는 곧 대한민국을 흔드는 논리다. 기독교 인권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보편적 존엄 이 논의를 더 깊은 토대 위에 세우려면 기독교 인권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인권의 근거를 사회 계약이나 계급 투쟁에서 찾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7절은 선언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 이 신학적 선언이 인권의 절대적 보편성의 근거다. 인간의 존엄은 국적도, 민족도, 계급도, 정치적 진영도 초월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를 더욱 구체화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웃'의 경계를 묻는 자에게 경계 자체를 해체하는 답을 주셨다.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고통받는 자 앞에서는 진영과 민족을 초월한 응답이 요청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기독교 인권 사상의 핵심이다. 고통은 편을 가리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 앞에서는 이념의 경계가 무력해진다. 이 기준으로 이재명의 인권관을 평가하면 판단은 명료해진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은 아파하면서 북한 주민의 고통은 외면하는 것, 하마스의 테러 피해자에게는 침묵하면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성토하는 것 — 이것은 Imago Dei에 근거한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진영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우상숭배적 인권관이다. 교회의 침묵은 공모다 "정교분리(政敎分離)." 한국 교회가 공적 사안 앞에서 가장 자주 꺼내는 방패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본래 의미는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교회가 국가 권력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이다. 교회가 불의와 거짓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 앞에서도 진실을 말했다. 아모스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불의를 고발했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 전체에 흘러야 한다고 선포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불의한 행위를 면전에서 책망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성경적 선지자 전통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 요청되는 것도 이 전통이다. 이재명의 선택적 인권관이 사회 담론을 지배하고, 북한 인권에 대한 침묵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되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이 집단학살의 언어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Imago Dei의 신학으로 정의롭고 보편적인 인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불의에 대한 묵시적 동의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존귀하다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가자지구의 민간인도, 이스라엘의 납치 피해자도, 북한 수용소의 정치범도, 두만강을 건너다 붙잡힌 탈북민도. 그 어떤 생명도 진영의 논리에 따라 가치의 경중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인권은 불편한 진실 앞에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내 편의 잘못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반대편의 고통에도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 — 그것이 Imago Dei에 기초한 기독교 인권 사상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보편적 인간 존엄의 이상이다. 이재명의 인권관을 비판하는 것은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정치적 무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 땅의 공적 담론 속에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다. 그 일에 교회가, 신앙인이,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이 함께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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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6
  • 트럼프의 '예수 이미지' 사건이 한국 교회에 던지는 질문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올렸던 AI 생성 이미지 한 장의 그림이 세계를 흔들었다. 흰 로브에 붉은 천을 두른 남자가 병상에 누운 환자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그의 손에서는 빛이 쏟아지고, 주변에는 성조기와 독수리, 군인과 간호사가 경건하게 그를 우러러본다.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내려오고, 자유의 여신상이 배경을 장식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지난 4월 12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이 AI 생성 이미지를 아무런 설명 없이 게시했다. 레오 14세 교황을 향해 "나약하고 형편없다"고 공개 비난한 지 불과 한 시간 뒤의 일이었다. 거센 비판이 쏟아지자 그는 게시물을 삭제하고 "의사로서의 나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흰 로브를 걸치고 병자에게 안수하는 장면을 의사의 이미지로 읽을 사람은 거의 없다. 해명은 해명이 되지 못했다. 자기 과시, 그리고 교만이라는 이름의 함정 이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그림 한 장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트럼프의 전체 행보를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읽어야 한다. 그는 이전에도 교황 복장을 한 자신의 이미지를 SNS에 올렸다. 자신의 형사 기소를 "박해받는 메시아"의 서사로 포장했다. 공개 석상에서 "나만이 이 나라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종교특별고문은 그를 예수에 비유했고, 지지자들은 "예수는 나의 구원자, 트럼프는 나의 대통령"을 외쳤다. 그는 그 어느 것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것은 충동적 실수의 연속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특별한 존재, 나아가 신적 권위를 지닌 구원자로 연출하려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욕망이 반복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교만(驕慢)이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형태의 교만, 즉 종교적 언어와 이미지를 빌려 자신을 신격화하는 교만이다. 성경은 교만을 단순한 성격적 결함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영적 반역의 뿌리다. 이사야 14장 13절에서 바벨론 왕의 교만은 이렇게 묘사된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이것이 타락의 원형적 언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 그것이 노골적이든 이미지로 포장되든, 성경은 그것을 동일한 범주로 본다. 잠언 16장 18절은 단호하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는 자에게 역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청구했다. 성경의 증언은 일관되다. 성경이 기록한 교만의 결말들 사도행전 12장의 헤롯 왕은 화려한 왕복을 입고 군중 앞에 섰다.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외쳤을 때, 그는 그 찬사를 묵인했다. 성경은 곧이어 기록한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 12:23) 자기 과시의 절정에서 그는 무너졌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영화를 바라보며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자랑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고, 그는 짐승처럼 들판을 기어 다니는 굴욕을 당했다.(단 4장) 권력의 정점에서 터져 나온 자기 과시가 그를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서 불법의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인간이 신의 자리를 탐하는 행위, 그것이 성경이 묘사하는 가장 심각한 영적 타락의 징표다. 트럼프를 이 인물들과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러나 교만의 패턴, 자기 신격화의 언어, 종교적 이미지를 권력 서사에 끌어다 쓰는 행태. 이것이 성경이 반복적으로 경고해 온 바로 그 길목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지지와 우상화 사이, 한국 교회의 분별이 필요하다 이 사건이 한국 교회에 특별한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 진영 일부에서는 트럼프를 "하나님이 세우신 도구" 혹은 "고레스 왕과 같은 지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하나님께서 불신자를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신 사례는 성경에 실제로 존재한다. 그 자체가 반드시 잘못된 신학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구로 인정하는 것과, 그를 신격화하거나 그의 모든 언행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는 신학적으로 가능한 해석이지만, 후자는 우상숭배의 영역에 위험하게 근접한다. 고레스 왕을 도구로 인정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그를 예배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했고, 고레스는 그분의 손에 들린 수단으로만 이해했다. 분별(分別)은 신앙의 덕목 중 하나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권면했다. 분별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다. 사랑에 뿌리를 두되, 진리로 가지를 뻗는 신앙의 성숙함이다. 그 분별이 없을 때, 신앙은 특정 인물을 향한 맹목적 충성으로 변질되고, 교회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는다. 교회 역사는 이 위험을 반복적으로 경고한다. 히틀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추앙했던 독일 기독교인들, 권력자의 곁에 서서 예언자의 자리를 포기했던 수많은 어용 성직자들. 그들의 공통점은 지지와 우상화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순간 시작되었다. 구원자는 오직 한 분이시다 트럼프는 그림을 삭제했다. 그러나 그 그림이 드러낸 것은 삭제되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박수를 보내는 군중이 있는 한, 그 욕망은 더욱 커진다. 교회가 그 군중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구원자는 성조기와 전투기를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 나사렛에서 오셨고, 환호하는 군중을 뒤로하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다. 그분은 병자의 이마에 손을 얹으시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리하셨다. 오늘 한국 교회는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어떤 지도자 앞에서도 신학적 분별력을 포기하지 않을 용기가 있는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명백히 잘못된 길로 갈 때, 신앙의 이름으로 그것을 덮지 않을 정직함이 있는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그 교만이 종교의 언어를 빌릴 때, 그 위험은 배가된다. 한국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려면, 먼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섬기는 분은 어떤 인간 지도자도 아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편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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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4
  • 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강단을 물든 아첨
    이재명 대통령과 소강석 목사가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청와대 사진단 제공) '부활절'은 기독교 신앙의 정점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기념일이 아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 역사적 사건 위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서 있다. 그러므로 부활절 예배는 오직 한 분 ‑ 부활하신 주님 ‑ 만이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런데 지난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2026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예배에 참석했고, 소강석CBS 재단이사장(새에덴교회 담임)은 환영사에서 대통령을 향해 찬사를 쏟아냈다. 기독교 최고의 절기에 정치 지도자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역사적 좌표를 되묻게 하는 심각한 사건이다. 강단에서 울려 퍼진'용비어천가' 소강석 목사는 환영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누구보다 뼈저린 절망을 경험하셨던 이재명 대통령은 이 시대에 어렵고 힘든 자들을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신다'고 했다. 이어 '우리 대통령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한국교회를 사랑하며, 한반도에 평화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이 자리에 오셨다고 믿는다'고 선언했다. 예배당 강단에서, 부활절 예배 환영사의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회중을 섬기는 직분이다. 강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자리이지, 정치 지도자를 위한 헌사(獻辭)의 무대가 아니다. 소강석 목사가 쏟아낸 언어들은 대통령을 향한 것이었지,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설교의 주 목적은 하나님을 높여 청중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구린내 나는 인간을 드높이는 것은 강단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설교다." —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이것이 단지 한 목사의 개인적 실수라면 논란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다. 소강석 목사는CBS 재단 이사장이라는 공적 지위를 갖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주요 대중적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가 부활절이라는 공적 예배 자리에서 국가 지도자를 향해 이런 찬사를 바치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가 그 지도자를 신앙적으로 인증하는 것처럼 비쳐질 위험이 있다. 성경은 인간을 높이는 것을 경계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린도전서3:21)고 엄중히 경고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이 닷새 후 “십자가에 못 박으라”를 외쳤던 것처럼, 정치적 환호와 신앙적 찬사는 본질상 다르다. 강단에서 이 둘이 뒤섞일 때,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가 된다. 부활절연합예배에서 축사하는 이재명 정교분리를 말하던 입으로 예배당에 선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이 이 자리에 선 배경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불과 수 개월 전,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직적으로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제재가 엄정하다는 것을 반드시 이번 기회에 보여줘야 한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정교분리 원칙이 깨지는 이러한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며 종교단체에 대한 법적 제재까지 거론했다. 그런 사람이 4월 5일 부활절 예배에 직접 참석하여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사도신경을 따라 읊으며, 헌금까지 드렸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정교분리를 강조하던 그가 스스로 교회의 정치화를 주도한 것은 아닌가. 교회를 향해서는 정치에서 손 떼라 하면서, 자신은 교회라는 공간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묻고 싶다. 정교분리의 본래 취지는 국가가 종교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뒤집어 국가가 종교를 단속하는 명분으로 삼는 것은 헌법 정신의 왜곡이다. 지난1월 기자회견에서 정교분리를 강조했던 사람이, 그것도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또 반복하고 있다. 자신이 종교를 향해 정치를 멀리하라고 경고하면서, 정작 자신은 가장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들어와 축사를 하고 박수를 받는 것—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이중성이다. 교회해산법을 추진하며 교회당에 들어선 아이러니 이 사건의 가장 심각한 층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명은 집권 이후, 민주당 주도로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었다. 발의자 11명 중 8명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이 법안은 종교법인이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하거나 선거에 개입한 경우 주무관청이 직접 설립허가를 취소하고, 해산된 법인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장 없는 종교법인 사무소 출입·검사 조항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법안에 대해 기독교계는 '교회폐쇄법'이라 명명하며 격렬히 반발했다. 4월 1일에는 7,000여 명의 개신교인이 국회 본관 앞에 집결해 “종교법인 강제해산 종교의자유 입틀막법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로부터 불과 나흘 후, 이재명 대통령은 부활절 예배에 나타났다. 한 손으로는 교회해산법을 밀어붙이고, 다른 손으로는 부활절 예배에서 헌금을 드린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아니면 정교한 정치 연출인가. 법무법인 전문가들은 이 법안에 대해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해 공익을 해칠 경우 법인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법학회도 “민법 개정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헌법적 가치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민법 개정이 아닌 특별법 제정을 주장했다. 바로 이 긴장 속에서 대통령의 부활절 예배 참석이 이루어졌다. 기독교를 압박하는 법안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최대 절기의 예배에 등장하는 것 —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향한 정치적 회유이자, 기독교계의 조직적 반발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예배는 권력의 무대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자들이 있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열왕기상12:28)고 선포했다. 그의 동기는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었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죄가 되게 한 것”이라고 기록한다. 정치 지도자가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예배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무대로 전락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공의를 저버린 백성의 형식적 예배를 향해 “내가 너희의 다수한 제물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의 분향을 싫어하노라”(이사야1:11,13)고 선언했다. 하나님은 형식이 아니라 진실을 원하신다. 부활절 예배에서 정치인이 “아멘”을 외치고 헌금을 드리는 모습이 미디어를 가득 채울 때, 그리고 그 예배의 사회자가 대통령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으로 선포할 때, 그 예배당 안에 계신 분은 과연 누구인가? 군중의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예배와 권련 앞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예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권력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교회는 국가 권력에 아첨하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맹목적인 반정부 구호의 집결지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의 길은 예언자적 비판과 복음적 초월성에 있다. 세례 요한은 왕의 잘못을 그 앞에서 직언하다 목이 잘렸다(마가복음6:18). 그는 헤롯 왕의 예배당에 초청받아 “왕이시여, 위대하십니다”라고 환영사를 올리지 않았다. 개혁자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권력에 맞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켰다. 독일의 본회퍼는 히틀러 치하에서 교회가 국가에 굴종하는 것을'값싼 은혜'라 이름하며 저항했다. 한국교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권력을 향한 환호가 아니라 복음의 언어로 권력에게 말하는 용기다. 소강석 목사는 예배 강단에서 대통령을 높이는 대신, 부활절 예배의 의미를 선포했어야 한다. “권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을 이루는 자”(로마서13:4)이어야 하지만, 그 권세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두려움 없이 선포했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적 목회자의 직분이다. 부활절은 인간의 권력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패배하는 날이다. 빌라도의 법정도, 로마의 군병도, 무덤 앞의 돌도 부활을 막지 못했다. 그 부활의 능력 앞에서 교회는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부활의 담대함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앞에서 주눅 드는 것도, 정치 권력에 아부하며 강단을 내주는 것도—모두 부활 신앙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태복음22:21). 이것이 정교분리의 복음적 원리이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거룩한 공간이 정치적 연출의 무대로 활용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엄중한 경계선을 다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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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7
  • ‘왕사남’ 속에 발견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나라
    1,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3위에 오른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한 사극의 흥행을 넘어 시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의 유배지를 지킨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권력의 폭력 앞에서 양심을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역사를 빌려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놀랍도록 성경적이다. 첫째, 엄흥도의 의(義)는 순교자의 언어로 말한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종이 아니라 엄흥도다. 그는 처음에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지 유치를 자청한 인물이다. 철저히 세속적 동기로 시작된 그의 선택은, 그러나 단종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변모한다. 감시자에서 보호자로, 이해타산의 인간에서 의리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엄흥도의 여정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의 구조와 닮아 있다. 클라이맥스는 단종의 죽음 이후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진 상황에서, 엄흥도는 홀로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다. 역사 속 그의 말이 전해진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 이 고백은 유교적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정신은 놀랍도록 복음과 맞닿아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산상수훈의 말씀,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엄흥도의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하나님께서 인간 양심에 새기신 의의 요구는 동일하다. 엄흥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둘째, 권력의 덧없음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영화에서 세조(수양대군)는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장항준 감독의 이 선택은 탁월하다. 권력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이고, 역사를 지우고, 진실을 묻어버린다. 한명회가 붉은 관복을 입고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이름 없는 폭력의 실체를 느낀다. 이것은 감각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둠의 세력과 유사하다. 우리의 싸움은 육과 혈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어둠의 권세와 정사들이 끊임없이 이 세계를 둘러싸고 간섭하고 조정한다. 영화에서 경험되는 단종을 향한 대적의 세력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둠의 세력과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선언한다. 단종이 죽은 지 242년 후, 그는 왕으로 복권되었다. 엄흥도는 충의공(忠毅公)으로 기려졌다. 역사의 승자처럼 보였던 세조의 찬탈은 결국 정의의 법정 앞에 섰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의인의 선택은 시간을 이겼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라는 잠언의 말씀처럼,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선언처럼, 역사의 마지막 발언권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게 있다. 교회가 이 장면에서 받아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의를 위해 침묵당하는 이들이 있다.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이야기가 240여 년 후 역사의 법정에서 뒤집혔듯,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도래한다. 믿음이란 그 보이지 않는 나라를 현재 속에서 살아내는 능력이다. 셋째, 단종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의 그림자 이 대목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단종을 그리스도와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오랜 전통인 '유형론(typology)'의 관점에서, 단종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희미하게 반영한다는 성찰은 가능하다.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어린 왕,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존재,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복권된 이름.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한 사람. 이 서사의 구조는 십자가의 이야기와 여러 지점에서 겹친다. 물론 단종은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이셨다. 단종의 비극은 인간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비극을 대속하시는 구원 사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때로 역사와 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의 그림자를 보여주신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1,500만 명의 관객 안에는, 어쩌면 그 그림자를 통해 진짜 빛을 찾아야 할 영혼들이 있다. 복음의 문은 뜻밖의 곳에서 열린다 〈왕과 사는 남자〉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 영화 안에서만 일하시지 않는다. 고난받는 의인의 이야기, 권력의 허무함, 죽음을 넘어서는 충정 - 이 보편적 서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조용히 빛난다. 목회자는 이 영화를 설교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성도는 이 영화를 통해 복음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1,500만 명이 함께 울었다는 것은, 그 눈물의 깊은 곳 어딘가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증거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이 영화는 그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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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0
  • 평화촉구연대의 성명서, 균형을 잃었다
    2026년3월16일 건강한 교회와 사회 포럼, 광교산울교회,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민주시민모임,기독교윤리실천운동, 느헤미야교회협의회, 등 19개 단체로 구성된 평화촉구연대의 ‘불의한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중동전쟁에 대한 성명서는 중동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응답을 표방하고 있다. 성경적 언어와 인도주의적 호소로 포장된 이 성명은 언뜻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면밀히 읽어보면 이 성명은 심각한 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편향된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란 정권의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한 완전한 침묵 성명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불의한 전쟁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전쟁의 배경이 된 이란 정권의 행태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정권은 수십 년간 자국민을 향해 비인간적인 억압을 자행해 왔다. 2019년 11월의 피의 금요일 사태를 비롯한 각종 민주화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성 인권 운동가들과 종교적 소수자들은 조직적인 탄압을 받아왔다. 독립적인 추산에 따르면 이란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야기한 사망자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이란은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반군 등 역내 무장 세력을 지원하며 중동 불안정의 핵심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더불어 미국인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 사망에 이란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성명서는 이러한 맥락을 철저히 배제한 채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규탄하고 있다. 이는 도덕적 판단의 출발점 자체가 불균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간인 피해의 선택적 적용 성명서는 2026년 2월 28일 이란 미나브의 초등학교 공습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민간인 희생을 강조한다. 민간인 보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인도주의적 가치이며, 어떤 전쟁에서도 무고한 희생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명서는 그 공습이 의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는지, 아니면 전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폭이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검토도 없이 이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은 대부분 군사시설 — 해군기지, 공군기지, 미사일 기지, 핵 관련 시설, 공항 등 — 을 겨냥해왔다. 민간 지역 피해가 발생했다면, 그것이 의도적 공격인지 오폭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만약 민간인 학살이 의도적이었다면 동일 지역에 대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공격이 있었어야 하나, 그러한 패턴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명서는 이러한 사실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결론을 먼저 내린 뒤 근거를 꿰맞추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기방어권에 대한 몰이해 국제법은 모든 국가에 자기방어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란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적대적 언사를 공식적으로 반복해왔고, 실제로 탄도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핵 개발 프로그램을 통한 대량파괴무기 획득 시도 역시 국제 사회가 공인한 위협이다. 더구나 미국의 공습과 함께 이란 정권은 주변의 중동국가에 미사일과 드론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감행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이 같은 실존적 위협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라는 측면이 있음에도, 성명서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인 침략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란 국민 상당수는 자국 독재 정권의 몰락을 환영하는 반응을 나타냈다. 정권 핵심 인사들의 사망 또는 제거 소식에 거리에서 환호하거나 소셜미디어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이란 시민들의 모습이 다수 보고되었다. 이는 이란 정권이 자국민에게도 억압자로 인식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성명서가 진정으로 생명과 인권을 염려한다면, 독재 정권 치하에서 신음해온 이란 국민의 자유와 존엄에 대해서도 동등한 무게로 발언했어야 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정치적 압박의 문제 성명서의 세 번째 항목은 한국교회가 특정 국가의 정치적 이해를 신앙으로 정당화하는 태도를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을 신앙의 타락으로 규정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자기모순을 품고 있다. 성명서 자체가 특정한 정치적 방향—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이란 정권에 대한 면죄—을 신앙의 언어로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의 전쟁 논리를 추종하지 말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한쪽 편의 서사만을 일방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무엇이 진짜 불의인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전쟁은 언제나 비극이며, 그 안에서 완전한 정의를 찾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불의는 단지 ‘폭격’이라는 행위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억압과 위협, 그리고 지속적인 폭력의 구조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어떤 정권이 자국민을 억압하고 국제적 위협을 지속해왔다면,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단순한 침략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동시에, 그 대응이 민간인의 생명을 해친다면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진정한 균형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데서 시작된다. 진정한 평화는 균형 있는 진실 위에 선다 그리스도인의 평화 운동은 정치적 편향을 복음의 언어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는 성명이라면,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지역 안정에 가해온 폭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했어야 한다. 핵 위협을 방치하는 것이 평화인지, 독재 정권을 묵인하는 것이 생명 존중인지 물어야 했다. 평화촉구연대의 이 성명은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 중 하나는 철저히 외면한다. 균형을 잃은 평화 호소는 결국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로 서려면, 눈에 보이는 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에 대해서도 동등한 용기로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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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 진단
    2026-03-21
  • 時論/신앙의 자유인가, 타협의 강요인가
    미국 제9연방항소법원이 워싱턴주 올림푸스 스파(Olympus Spa) 사건에서 내린 판결은 단순한 법리 다툼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공적 공간으로부터의 축출을 선언한 판결이며, 창조 질서에 근거한 신앙 양심의 경영권을 법의 이름으로 무력화한 사건이다. 법원은 트랜스젠더의 출입을 제한한 스파의 방침을 차별로 규정함으로써, 성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그에 따른 삶의 실천을 공적 영역에서 퇴출시켰다. 이 판결이 낯선 타국의 이야기로 들린다면, 우리는 아직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이 끊임없이 추진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내일의 예고편이다. “중립”이라는 허울과 신앙의 공동화 법원은 차별금지법(WLAD)이“중립적이고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이기 때문에 종교적 신념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에 관한 스파 측의 주장은 모두 기각됐다. 법원이 말하는 중립은, 그러나 진정한 중립이 아니다. 특정한 세계관을 법의 언어로 확정하고, 그에 배치되는 신앙을 사적 영역으로 봉인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세대를 거슬려 살기를 요구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 신앙은 예배당 안에 머무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공적 생활에서 그 분별의 권리를 박탈했다. 신앙을 가질 자유는 허용하되, 신앙대로 살 자유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빼앗는 역설이다. 창조 질서의 훼손과 원죄적 오만 이번 판결의 핵심 문제는 생물학적 성(Sex)보다 개인의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 선언을 법적으로 우선시했다는 데 있다. 이는 성경의 선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1:27). 하나님이 세우신 남녀의 구별은 억압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이며 은혜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성별을 규정하겠다는 주장은, 창조주의 섭리를 넘어서려는 오만이다. 그것은 에덴의 원죄 -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 -의 현대적 재현이다. 법이 이를 권리로 옹호하는 순간, 가정과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질서는 흔들린다. 올림푸스 스파는 한국 전통 목욕 문화(찜질방)에 기반한 시설로, 나체 서비스의 특성상 성별 분리는 운영의 핵심 원칙이었다. 이러한 문화적·윤리적 맥락조차 고려하지 않은 채 일률적 평등 기준을 적용한 것은, 창조 질서를 차별로 낙인찍는 가치 전도의 극치다. 한국 교회가 대비해야 할 세 가지 전선 미국의 이 판결은 차별금지법이 실제로 작동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 교회는 다음 세 가지 전선에서 진지한 대비가 필요하다. 첫째는 강단의 자유다. 죄를 죄라 말하는 설교, 성경적 인간 이해를 전하는 선포가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4:2)는 사명이 법치의 이름 아래 위협받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둘째는 교육의 영역이다. 기독교 학교에서 창조 질서를 가르치는 것이 혐오 표현으로 규정되고,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이 법적 제약을 받게 될 수 있다. 셋째는 일상의 공간이다.여성 전용 사우나, 탈의실과 같은 최소한의 도덕적 경계마저 평등의 이름으로 허물어지는 날이 올 수 있다. 이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미국에서 이미 현실이 된 문제다. 진리의 기치를 내려놓지 말라 교회는 두 가지 유혹 앞에 서 있다. 세상의 법에 굴복하여 타협의 길을 선택하는 것과, 감정적 반발로 소모적 갈등을 자초하는 것이다. 어느 쪽도 답이 아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은 사도들이 걸어간 그 길이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사도행전5:29). 기독교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한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교회는 그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담보로 한 타협은 결국 사랑도, 진리도 아닌 것이 된다. 한국 교회는 이 시대의 흐름을 분별하며 더 깊은 신학적 성찰과 성숙한 공적 발언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태복음5:13). 맛을 잃은 소금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 바로 진리의 짠맛을 지켜야 할 때다. 진리를 배제한 자유는 방종이며, 하나님을 떠난 평등은 억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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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19
  • [時論] 정죄의 돌팔매를 멈추고, 회복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라
    AI이미지 그림 광장의 소음, 그 너머의 본질을 묻다 최근 한국 교계는 거대한 해일에 휩쓸린 듯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의 십수 년 전 과거 발언이 담긴 녹취가 공개되면서 시작된 이 파장은, 디지털 광장이라는 확성기를 타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습니다. 기독교 언론은 물론, 수많은 유튜브 채널과 SNS 공간은 연일 이 사건을 중계하듯 쏟아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흐르는 정서입니다. 사실을 전달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 상대의 인격 전체를 난도질하는 ‘감정적 해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자극적인 파편들은 어느덧 하나의 거대한 ‘정죄의 서사’가 되어 소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춰 서서, 숨 가쁜 비난의 속도를 늦추고 복음의 본질을 직시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의 이 뜨거운 분노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향해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폭력적 쾌락인가를 말입니다. ‘온유한 심령’이라는 이름의 거울 성경은 죄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지향하는 종착지는 언제나 ‘심판’ 그 자체가 아니라 ‘돌이킴과 회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던진 권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준엄한 울림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갈라디아서 6:1) 여기서 말하는 ‘온유한 심령’은 단순히 성격이 부드러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허물 속에서 ‘나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겸손의 극치입니다. “나 또한 저 자리에 있었다면, 나 또한 저 상황이었다면 넘어졌을지 모른다”는 처절한 자기 인식이 전제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바로잡을’ 자격을 얻습니다. 자신을 살피지 않는 정죄는 독이 든 칼날과 같아서, 상대를 죽일 뿐만 아니라 정죄하는 자의 영혼마저 황폐하게 만듭니다. 내려놓음, 그 고통스러운 순종의 무게 사건의 본질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태도입니다. 김문훈 목사는 12년 전의 부적절한 언행이 수면 위로 떠 오르자, 구구절절한 변명 대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교회 홈페이지와 교단 신문을 통해 공식 사과문을 게재했고, 상처 입은 이들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개척하여 척박한 땅에서 일군 대형 교회의 담임직을 사임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반추해 볼 때, 지도자의 허물이 드러났을 때 이토록 신속하고 단호하게 책임을 지는 모습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대개는 공소시효를 논하거나, 음모론을 제기하며 자리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 더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사역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한 직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근간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 그가 선택한 사임은 비겁한 도망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처절한 순종이었습니다. 자신이 걸림돌이 되어 교회가 분열되는 것을 막으려는 그 무거운 결단을, 우리는 마땅히 복음적인 책임 의식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확인사살’이라는 이름의 잔인함을 경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와 교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 공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사과했고, 책임을 졌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광야로 나간 이를 향해 다시 돌을 던지는 행위는 무엇을 위함입니까? 이는 정의의 구현이 아니라 ‘확인사살’에 가깝습니다. 이미 엎드러진 자의 등 위에 다시 칼을 꽂는 행위는 십자가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범죄한 자를 징계한 후, 그가 진심으로 회개하자 공동체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라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2:6-7) 바울은 ‘족하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책임을 물었으니 이제는 그의 영혼이 절망이라는 늪에 잠식되지 않도록 공동체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한 지체가 병들었다고 해서 그 부위를 도려내 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어떻게든 피를 통하게 하고, 살려내어 다시 몸의 일부로 기능하게 하는 것이 생명의 본능입니다. 십자가는 ‘대신 죽음’이지 ‘대신 죽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음한 여인을 대하신 방식을 떠올려 봅니다. 율법의 잣대로는 돌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광기 어린 군중의 양심을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죄를 긍정하지 않으셨지만, 죄인만큼은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죄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 하나님이 직접 목숨을 내어놓으실 만큼 처절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회개한 형제를 향한 끝없는 정죄는, 사실상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는 무임승차가 아니라, 누군가의 처절한 대가 지불로 얻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는 머리된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암덩어리도 아니며, 한몸에 일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령 손가락에 무좀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그 손가락을 내 몸이 아니라고 잘라버리는 정신나간 짓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 약을 먹고 아픈 부분에 약을 발라 치료를 할 것입니다.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지체로써 치료를 위한 방편으로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국 교회가 가야 할 길: 정죄의 문화에서 회복의 문화로 이번 사태는 김문훈 목사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한국 교회 전체의 성숙도를 묻는 시험대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세 가지 소중한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첫째, 지도자의 책임 있는 결단을 귀하게 여기는 문화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완악함입니다. 책임을 지고 물러난 자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최소한의 명예와 기도할 시간을 허락해야 합니다. 둘째, 공동체의 지체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비난의 화살을 쏘는 것은 쉽지만, 함께 울며 회복을 돕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 ‘비판하는 공동체’에서 ‘싸매어 주는 공동체’로 체질을 개선해야 합니다. 셋째, 복음적 공론장의 형성입니다. 미디어가 쏟아내는 자극적인 정보에 휩쓸리지 않고, 성경의 가치관으로 사건을 해석하며 말의 무게를 지키는 성도들의 절제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덮는다’는 것은 죄를 은폐하거나 거짓으로 감추는 행위가 아닙니다. 회개와 책임 지불이 이루어진 후, 그 죄를 더 이상 비난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공동체적 합의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덮개입니다. 정죄의 문화는 교회를 강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차갑게 얼어붙게 만듭니다. 반면, 회복의 문화는 교회를 깊고 따뜻하게 만듭니다. 김문훈 목사의 사태는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돌을 쥐고 있는가, 아니면 수건을 들고 있는가?” 죄는 단호히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거룩해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회개한 이를 향해 격려와 회복의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야말로 십자가를 통과한 교회의 진짜 얼굴입니다. 이제 우리는 비난의 광장에서 내려와 기도의 골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한 목회자의 회복을 위해, 그리고 우리 안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정죄의 독기를 빼내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 길을 선택한다면, 이 아픈 상처는 오히려 더 큰 성숙을 향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정죄가 아니라 은혜로, 확인사살이 아니라 회복으로. 그 좁고 험한 길 끝에,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환한 웃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관련기사 ● 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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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4
  • AGI 시대 앞에 선 그리스도인,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고(AGI), 노동의 가치가 희석되며, 인간의 생존이 기본소득과 자동화된 시스템에 의존하게 될 미래가 목전에 와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거대한 변화를 단순한 ‘기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기술적 적응을 고민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변화는 명백히 ‘인간 이해의 문제’다. "인간은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진정한 자유와 책임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기술에 의해 다시금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술은 인간의 도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AGI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인간의 역할 자체를 흔드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최첨단 기술 대응 전략이 아니다. 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신앙적 재정립이다. 1. 노동이 사라질 때, 소명은 더 선명해진다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가 오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지금까지 인류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쓸모와 존재 가치를 증명해 왔다. 그러나 노동의 총량이 줄어드는 미래에, 일에서 정체성을 찾던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잃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가치를 노동의 유무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Homo Faber)’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된 존재다. 그러므로 노동이 소멸해가는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견고히 붙잡아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소명이 곧 직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소명은 하나님 앞에서의 존재 방식 그 자체다. "무엇을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살아가느냐"가 삶의 본질이 되는 시대, 이것이 우리가 마주할 미래다. 2. 기본소득의 시대, 탐욕 대신 절제를 배워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스템적으로 해결되는 사회는 축복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거대한 위기일 수 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사라진 환경에서는 삶의 치열한 의미 또한 증발하기 쉽기 때문이다. 역사는 풍요가 종종 영적 타락과 궤를 같이했음을 보여준다. 기독교는 풍요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나 풍요를 절제 없이 향유하는 삶은 경계한다. 인간은 소비로 채워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참된 평안을 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AGI 시대에 우리가 훈련해야 할 영성은 ‘더 많이 소유하는 능력’이 아니라 ‘더 깊이 살아가는 태도’다. 단순한 삶, 자발적인 절제, 그리고 일상에 대한 감사의 영성은 미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신앙의 형태가 될 것이다. 3. 통제받는 사회 속에서 자유의 의미를 지켜야 한다 고도로 발달한 AI는 인간을 해치기보다, 인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려 들 것이다. 건강을 위해, 사회적 안정을 위해, 더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 알고리즘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도하고 통제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먼저 위협받는 것은 ‘자유’다. 인간은 실수할 자유, 실패할 자유, 때로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자유를 가진 존재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 불완전한 자유 속에서 일어나는 회개와 변화, 자발적인 사랑과 헌신을 가치 있게 여긴다. 완벽하게 통제된 사회는 안전할지 몰라도 인간다운 사회는 아니다. 편리함보다 자유를, 효율보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가치다. 4. 인간이 잊게 될 질문을 교회가 붙잡아야 한다 AGI가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제시할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의 조건이 완벽히 해결되면 존재의 이유를 묻는 질문은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가장 깊은 공허가 들어선다. 교회는 세상이 잊어버릴 이 질문들을 끝까지 붙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왜 희생해야 하는가?" "왜 진리를 따라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기술은 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답이 주어진다. 5.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영성의 깊이로 결정된다 다가오는 시대는 인간이 더 똑똑해지는 시대가 아니라, 인간다움이 시험받는 시대다. 노동이 줄어들고 삶이 편리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은 더 쉽게 삶의 방향을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준비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존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우고, 풍요 속에서도 절제를 배우며, 통제보다 자유를 선택하는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기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어도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정교한 알고리즘이 아니라, 우리의 영성이다. AGI 시대는 인간의 능력을 시험하는 위기가 아니라, 믿음의 깊이를 드러내는 기회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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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9
  • 김문훈 목사 보도 사태를 통해 본 기독교 저널리즘의 본질적 사명에 대한 고찰
    데스크 칼럼/양봉식 국장 AI 이미지 '심판의 돌과 생명의 펜' 언론의 칼날과 십자가의 사랑 사이 언론(言論)은 본래 날카롭다.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언론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앞에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 그 펜의 무게와 방향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세상의 언론이 ‘팩트(Fact)’를 무기로 상대를 베어내는 데 주력한다면, 기독교 언론은 그 팩트 너머에 있는 ‘진실(Truth)’과 ‘생명(Life)’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 교계 매체가 보도한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관련 기사는 기독교 언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빗나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다. 과거의 실수와 허물을 들추어내어, 이미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로 봉합된 상처를 다시 찢어발기는 행태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의이며, 무엇을 위한 보도인가.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기독교 언론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의 문화인가, 생명의 문화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정죄하여 죽이는 사형틀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를 살려낸 생명의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건 언론 또한 그 생명의 문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작금의 일부 기독교 언론 행태는 생명이 아닌 ‘사회적 매장’을 목적으로 하는 듯하다. 김문훈 목사에 대한 보도는 전형적인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오래전 발생한 일이며, 목회자로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했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취록을 공개하고, 심지어 독자들이 그 자극적인 음성 파일을 직접 다운로드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언론의 공익적 기능을 넘어선 인격 살인에 가깝다. 이는 마치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 돌을 들어치려 했던 군중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의 손에 들린 율법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팩트는 여인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팩트로 여인을 죽이지 않으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기독교 언론의 펜 끝에는 예수의 ‘용서’가 묻어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의 ‘살기’가 서려 있는가. ‘알 권리’라는 미명 하의 폭력성 해당 기사는 목회자의 리더십 검증이라는 공익적 목적을 내세웠다. 물론 공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 지도자는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공익(公益)이 개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공익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지, 공동체의 일원을 파괴하여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보도에서 가장 우려되는 지점은 ‘균형의 상실’과 ‘자극적 배포 방식’이다. 기사는 제3자의 증언과 녹취 등 공격 측의 자료는 방대하게 싣고 있으면서도, 정작 당사자인 김 목사의 현재 입장이나 과거 사과 과정에 대한 반론권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인 공정성을 훼손한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녹취 파일의 다운로드 제공이다. 욕설이나 거친 언사가 담긴 파일을 대중에게 직접 유포하는 것은 사실 전달을 넘어선다. 이는 독자들에게 “이 사람을 함께 미워해 달라”고 선동하는 정서적 폭력이며, 클릭 수를 위한 선정주의적 상술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허물을 전리품처럼 전시하고,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구조는 기독교 언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죽음의 문화’다. 파괴가 아닌 ‘세움’을 향하여 세상 언론은 특종을 잡기 위해 누군가를 무너뜨려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언론은 다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심판’이 아니라 ‘회복’이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만일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했다. 여기서 ‘바로잡다’라는 헬라어는 뼈가 부러졌을 때 다시 맞추는 의료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죄를 지적하는 목적은 그를 공동체에서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건강한 지체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어야 한다. 김문훈 목사의 과거 언행이 목회자로서 부덕(不德)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그 허물을 딛고 회개하며 목양에 힘써왔다면, 그리고 당사자와의 화해가 있었다면, 언론은 그를 다시 과거의 늪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갱신된 지도자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감시하되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적 가치다. 교회와 성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비난이 더 치명적일 때가 많다. 기독교 언론이 ‘내부 총질’의 선봉장이 되어선 안 된다. 비판은 하되 비난하지 말고, 지적은 하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팩트(Fact)를 다루되 임팩트(Impact) 있는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펜을 든 사명자들에게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다.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다음 세대는 교회를 떠나고 있다. 이 엄중한 시기에 기독교 언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어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세워주며 거룩한 방파제가 되는 것인가. 이번 보도 사태는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 언론인들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기사는 사람을 살리는가, 죽이는가?”, “나의 펜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도구인가, 아니면 형제를 찌르는 흉기인가?” 기독교 언론의 사명은 명확하다.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생명의 물결을 일으키는 것이다. 판단과 정죄는 하나님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덮어주고, 싸매주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치유의 저널리즘’을 회복해야 한다. 김문훈 목사를 향한 이번 보도가 단순히 하나의 논란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 기독교 언론이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생명의 펜’을 다시 쥐는 거룩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만이 교회가 살고 언론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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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6
  • 이재명의 자유의 성벽 허무는 ‘정교분리’의 역설 : 종교의 심장을 겨눈 국가의 총구
    時事칼럼/양봉식 국장 동영상 갈무리 대한민국 헌법 제20조는 침묵의 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보이지 않는 성벽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는 선언은 국가가 국민의 영혼에 개입할 수 없음을 천명한 인류 지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터져 나온 발언들은 이 거룩한 성벽에 균열을 내고 있다. 정교분리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목소리를 거세하려는 시도는, 보호의 언어가 아닌 섬뜩한 통제의 언어였다. 거룩한 강단에 가해진 ‘반란’의 낙인 이재명은 기자회견에서 특정 종교와 일부 개신교를 겨냥해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비판하는 설교를 두고 “국민에게 총구를 겨냥하는 반란행위”라며 형사적·안보적 프레임을 씌웠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위험한 비유다. 종교인의 설교는 신앙적 가치에 기반한 양심의 표현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그 자체다. 설교 내용이 위정자의 입맛에 쓰다고 해서 그것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순간, 국가는 이미 신앙의 영역을 검열하는 심판자로 군림하게 된다.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권력이 종교의 입을 막기 위해 ‘정교분리’라는 칼을 빼 드는 것은, 이 원칙의 탄생 배경을 완전히 오독한 비극이다. ‘큰 돌부터 제거’라는 섬뜩한 단계론의 정체 가장 날카로운 우려는 “큰 돌부터 집어내고 그다음 자갈, 잔돌을 집어내겠다”는 그의 수사적 비유에서 정점을 찍는다. 법치국가에서 사법적 판단은 개별 범죄 혐의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나 ‘단계적 제거’를 운운하는 이 언어는 법적 정의가 아니라 정책적 타도 대상을 설정하는 통치자의 서늘한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문법이 아니다. 서구 유럽 국가에서 종교 단체나 비영리법인의 해체는 테러나 무장 폭력 같은 명백한 반국가적 범죄가 입증될 때만 사법부의 극히 보수적인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면, 종교를 ‘국가의 관리 대상’으로 보고 비판 세력을 ‘사회 해악’으로 몰아 해체하는 방식은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나 전체주의 체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적 종교 길들이기가 아닌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선택적 정의, 그리고 공적 신앙의 사멸 이재명의 분노는 지극히 선택적이다. 정치권에는 특정 정권을 지지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종교 세력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권력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종교적 행위에는 침묵하며, 오직 비판적인 목소리에만 ‘정교분리 위반’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것은 원칙의 수호가 아니라 권력의 편의를 위한 ‘선택적 정의’일 뿐이다. 교회는 세상과 단절된 ‘사적 클럽’이 아니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사회 정의를 외치고 권력의 오만을 경계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갖는다. 정교분리를 이유로 교회를 침묵의 섬으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는, 결국 국가 권력을 견제할 마지막 정신적 보루를 무너뜨리겠다는 선언과 같다. 헌법의 족쇄를 풀지 마라 정교분리는 권력자가 종교를 휘두르기 위해 만든 회칙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국민의 신앙과 양심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채워둔 ‘헌법적 족쇄’다. 위정자가 이 족쇄를 스스로 풀고 “질서와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생사여탈권을 쥐려 할 때, 자유의 시대는 저물고 통제의 시대가 밝아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사와 해체의 위협이 아니다. 권력 앞에 당당히 비판할 수 있는 종교의 자유, 그리고 그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민주적 절제다. 영혼의 영역까지 국가의 발길질 아래 두려는 오만을 멈춰야 한다. 성벽이 무너진 뒤에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거대한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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