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8(토)
 
  • 이재명의 선택적 인권관과 기독교 인권 신학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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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을 말하는 자, 누구의 인권을 말하는가

인권이라는 단어만큼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남용되는 언어도 드물다. 누구나 인권을 말하고, 누구나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말해진 인권이 진정한 인권인지를 판별하는 가장 확실한 시험대는 하나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가, 아니면 선택적으로 사용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둘러싸고 쏟아낸 발언들은 그 시험대 위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히틀러에 비유하고,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을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하는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을 넘어, 그의 인권 사상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 발언의 대담함에 있지 않다. 문제는 침묵에 있다. 같은 입으로, 같은 열정으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을 말한 적이 있는가. 탈북민의 피눈물 나는 증언 앞에서 '인권'이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있는가. 중국의 위구르족 강제 수용을 향해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가.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선택적 인권은 공산주의 인권관의 오랜 문법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에서 인권은 본래적 의미의 보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 투쟁의 도구다. 인권은 억압받는 계급, 즉 혁명의 편에 선 세력을 위한 것이며, 계급적 적으로 규정된 세력에게는 인권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구조 안에서 인권의 선택적 적용은 모순이 아니라 원칙이다.

 

오늘날 이른바 진보 진영이 구사하는 인권 담론의 문법은 이 전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에는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하마스의 테러 — 2023년 10월 7일, 1,200명의 무고한 생명이 살해되고 240여 명이 납치된 사건 — 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거나 침묵한다. 북한이 자국민을 굶기고 수용소에 가두는 구조적 폭력에는 눈을 감으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자위권 행사에는 국제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은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진영 논리로 포장된 정치적 무기다. 진정한 인권은 편을 가리지 않는다. 억압자가 누구이든, 피해자가 어느 진영에 속하든, 인간의 존엄은 동일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본질이다.

 

네타냐후와 히틀러의 비유는 역사적 무지인가, 의도적 왜곡인가

이재명 대표의 히틀러 비유는 단순한 수사적 과잉이 아니다. 이 발언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첫째,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다. 홀로코스트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국가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절멸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인류에 대한 범죄'로 엄정하게 정의한 이 사건을 하마스 테러 조직의 공격에 맞서 자국을 방어하는 이스라엘 총리에게 비유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뒤집어 씌우는 이 논법은 역사 인식의 빈곤을 드러낼 뿐 아니라, 반유대주의적 선동에 구조적으로 복무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실존적 맥락에 대한 몰이해다. 이스라엘은 건국(1948년) 첫날부터 주변 아랍 국가들의 총공세를 받았다. 단 한 번의 패배가 곧 국가의 소멸을 의미하는 실존적 전쟁 상태가 76년째 계속되고 있다. 하마스는 그 헌장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제거를 명시하고 있는 테러 조직이다. 이 맥락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대응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공정한 국제법 해석이 아니라 편향된 정치적 판결이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평행한 운명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1948년, 같은 해에 두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모두 건국 즉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외세와 내부 위협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야 했으며, 국제 사회의 냉담 속에서도 홀로 서야 했다.

 

이스라엘은 오늘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현실 속에서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국민 모두가 병역 의무를 지고, 국가 생존을 위한 결의가 사회 전체를 관통한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피로 지켜낸 실재다.

 

반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휴전선 너머 핵무기를 개발하며 대남 적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과 대치하면서도, 국내 정치 담론은 그 실존적 위협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희석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시각이 대한민국의 자위권과 동맹 연대를 부정하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흔드는 논리는 곧 대한민국을 흔드는 논리다.

 

기독교 인권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보편적 존엄

이 논의를 더 깊은 토대 위에 세우려면 기독교 인권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인권의 근거를 사회 계약이나 계급 투쟁에서 찾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7절은 선언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 이 신학적 선언이 인권의 절대적 보편성의 근거다. 인간의 존엄은 국적도, 민족도, 계급도, 정치적 진영도 초월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를 더욱 구체화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웃'의 경계를 묻는 자에게 경계 자체를 해체하는 답을 주셨다.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고통받는 자 앞에서는 진영과 민족을 초월한 응답이 요청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기독교 인권 사상의 핵심이다. 고통은 편을 가리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 앞에서는 이념의 경계가 무력해진다.

 

이 기준으로 이재명의 인권관을 평가하면 판단은 명료해진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은 아파하면서 북한 주민의 고통은 외면하는 것, 하마스의 테러 피해자에게는 침묵하면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성토하는 것 — 이것은 Imago Dei에 근거한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진영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우상숭배적 인권관이다.

 

교회의 침묵은 공모다

"정교분리(政敎分離)." 한국 교회가 공적 사안 앞에서 가장 자주 꺼내는 방패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본래 의미는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교회가 국가 권력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이다. 교회가 불의와 거짓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 앞에서도 진실을 말했다. 아모스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불의를 고발했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 전체에 흘러야 한다고 선포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불의한 행위를 면전에서 책망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성경적 선지자 전통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 요청되는 것도 이 전통이다. 이재명의 선택적 인권관이 사회 담론을 지배하고, 북한 인권에 대한 침묵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되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이 집단학살의 언어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Imago Dei의 신학으로 정의롭고 보편적인 인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불의에 대한 묵시적 동의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존귀하다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가자지구의 민간인도, 이스라엘의 납치 피해자도, 북한 수용소의 정치범도, 두만강을 건너다 붙잡힌 탈북민도. 그 어떤 생명도 진영의 논리에 따라 가치의 경중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인권은 불편한 진실 앞에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내 편의 잘못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반대편의 고통에도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 — 그것이 Imago Dei에 기초한 기독교 인권 사상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보편적 인간 존엄의 이상이다.

 

이재명의 인권관을 비판하는 것은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정치적 무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 땅의 공적 담론 속에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다. 그 일에 교회가, 신앙인이,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이 함께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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