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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AI 이미지 인권을 말하는 자, 누구의 인권을 말하는가 인권이라는 단어만큼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남용되는 언어도 드물다. 누구나 인권을 말하고, 누구나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말해진 인권이 진정한 인권인지를 판별하는 가장 확실한 시험대는 하나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가, 아니면 선택적으로 사용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둘러싸고 쏟아낸 발언들은 그 시험대 위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히틀러에 비유하고,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을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하는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을 넘어, 그의 인권 사상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 발언의 대담함에 있지 않다. 문제는 침묵에 있다. 같은 입으로, 같은 열정으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을 말한 적이 있는가. 탈북민의 피눈물 나는 증언 앞에서 '인권'이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있는가. 중국의 위구르족 강제 수용을 향해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가.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선택적 인권은 공산주의 인권관의 오랜 문법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에서 인권은 본래적 의미의 보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 투쟁의 도구다. 인권은 억압받는 계급, 즉 혁명의 편에 선 세력을 위한 것이며, 계급적 적으로 규정된 세력에게는 인권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구조 안에서 인권의 선택적 적용은 모순이 아니라 원칙이다. 오늘날 이른바 진보 진영이 구사하는 인권 담론의 문법은 이 전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에는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하마스의 테러 — 2023년 10월 7일, 1,200명의 무고한 생명이 살해되고 240여 명이 납치된 사건 — 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거나 침묵한다. 북한이 자국민을 굶기고 수용소에 가두는 구조적 폭력에는 눈을 감으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자위권 행사에는 국제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은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진영 논리로 포장된 정치적 무기다. 진정한 인권은 편을 가리지 않는다. 억압자가 누구이든, 피해자가 어느 진영에 속하든, 인간의 존엄은 동일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본질이다. 네타냐후와 히틀러의 비유는 역사적 무지인가, 의도적 왜곡인가 이재명 대표의 히틀러 비유는 단순한 수사적 과잉이 아니다. 이 발언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첫째,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다. 홀로코스트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국가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절멸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인류에 대한 범죄'로 엄정하게 정의한 이 사건을 하마스 테러 조직의 공격에 맞서 자국을 방어하는 이스라엘 총리에게 비유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뒤집어 씌우는 이 논법은 역사 인식의 빈곤을 드러낼 뿐 아니라, 반유대주의적 선동에 구조적으로 복무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실존적 맥락에 대한 몰이해다. 이스라엘은 건국(1948년) 첫날부터 주변 아랍 국가들의 총공세를 받았다. 단 한 번의 패배가 곧 국가의 소멸을 의미하는 실존적 전쟁 상태가 76년째 계속되고 있다. 하마스는 그 헌장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제거를 명시하고 있는 테러 조직이다. 이 맥락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대응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공정한 국제법 해석이 아니라 편향된 정치적 판결이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평행한 운명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1948년, 같은 해에 두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모두 건국 즉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외세와 내부 위협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야 했으며, 국제 사회의 냉담 속에서도 홀로 서야 했다. 이스라엘은 오늘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현실 속에서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국민 모두가 병역 의무를 지고, 국가 생존을 위한 결의가 사회 전체를 관통한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피로 지켜낸 실재다. 반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휴전선 너머 핵무기를 개발하며 대남 적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과 대치하면서도, 국내 정치 담론은 그 실존적 위협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희석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시각이 대한민국의 자위권과 동맹 연대를 부정하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흔드는 논리는 곧 대한민국을 흔드는 논리다. 기독교 인권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보편적 존엄 이 논의를 더 깊은 토대 위에 세우려면 기독교 인권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인권의 근거를 사회 계약이나 계급 투쟁에서 찾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7절은 선언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 이 신학적 선언이 인권의 절대적 보편성의 근거다. 인간의 존엄은 국적도, 민족도, 계급도, 정치적 진영도 초월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를 더욱 구체화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웃'의 경계를 묻는 자에게 경계 자체를 해체하는 답을 주셨다.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고통받는 자 앞에서는 진영과 민족을 초월한 응답이 요청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기독교 인권 사상의 핵심이다. 고통은 편을 가리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 앞에서는 이념의 경계가 무력해진다. 이 기준으로 이재명의 인권관을 평가하면 판단은 명료해진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은 아파하면서 북한 주민의 고통은 외면하는 것, 하마스의 테러 피해자에게는 침묵하면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성토하는 것 — 이것은 Imago Dei에 근거한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진영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우상숭배적 인권관이다. 교회의 침묵은 공모다 "정교분리(政敎分離)." 한국 교회가 공적 사안 앞에서 가장 자주 꺼내는 방패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본래 의미는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교회가 국가 권력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이다. 교회가 불의와 거짓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 앞에서도 진실을 말했다. 아모스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불의를 고발했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 전체에 흘러야 한다고 선포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불의한 행위를 면전에서 책망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성경적 선지자 전통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 요청되는 것도 이 전통이다. 이재명의 선택적 인권관이 사회 담론을 지배하고, 북한 인권에 대한 침묵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되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이 집단학살의 언어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Imago Dei의 신학으로 정의롭고 보편적인 인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불의에 대한 묵시적 동의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존귀하다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가자지구의 민간인도, 이스라엘의 납치 피해자도, 북한 수용소의 정치범도, 두만강을 건너다 붙잡힌 탈북민도. 그 어떤 생명도 진영의 논리에 따라 가치의 경중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인권은 불편한 진실 앞에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내 편의 잘못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반대편의 고통에도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 — 그것이 Imago Dei에 기초한 기독교 인권 사상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보편적 인간 존엄의 이상이다. 이재명의 인권관을 비판하는 것은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정치적 무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 땅의 공적 담론 속에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다. 그 일에 교회가, 신앙인이,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이 함께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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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예수 이미지' 사건이 한국 교회에 던지는 질문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올렸던 AI 생성 이미지 한 장의 그림이 세계를 흔들었다. 흰 로브에 붉은 천을 두른 남자가 병상에 누운 환자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그의 손에서는 빛이 쏟아지고, 주변에는 성조기와 독수리, 군인과 간호사가 경건하게 그를 우러러본다.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내려오고, 자유의 여신상이 배경을 장식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지난 4월 12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이 AI 생성 이미지를 아무런 설명 없이 게시했다. 레오 14세 교황을 향해 "나약하고 형편없다"고 공개 비난한 지 불과 한 시간 뒤의 일이었다. 거센 비판이 쏟아지자 그는 게시물을 삭제하고 "의사로서의 나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흰 로브를 걸치고 병자에게 안수하는 장면을 의사의 이미지로 읽을 사람은 거의 없다. 해명은 해명이 되지 못했다. 자기 과시, 그리고 교만이라는 이름의 함정 이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그림 한 장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트럼프의 전체 행보를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읽어야 한다. 그는 이전에도 교황 복장을 한 자신의 이미지를 SNS에 올렸다. 자신의 형사 기소를 "박해받는 메시아"의 서사로 포장했다. 공개 석상에서 "나만이 이 나라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종교특별고문은 그를 예수에 비유했고, 지지자들은 "예수는 나의 구원자, 트럼프는 나의 대통령"을 외쳤다. 그는 그 어느 것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것은 충동적 실수의 연속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특별한 존재, 나아가 신적 권위를 지닌 구원자로 연출하려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욕망이 반복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교만(驕慢)이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형태의 교만, 즉 종교적 언어와 이미지를 빌려 자신을 신격화하는 교만이다. 성경은 교만을 단순한 성격적 결함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영적 반역의 뿌리다. 이사야 14장 13절에서 바벨론 왕의 교만은 이렇게 묘사된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이것이 타락의 원형적 언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 그것이 노골적이든 이미지로 포장되든, 성경은 그것을 동일한 범주로 본다. 잠언 16장 18절은 단호하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는 자에게 역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청구했다. 성경의 증언은 일관되다. 성경이 기록한 교만의 결말들 사도행전 12장의 헤롯 왕은 화려한 왕복을 입고 군중 앞에 섰다.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외쳤을 때, 그는 그 찬사를 묵인했다. 성경은 곧이어 기록한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 12:23) 자기 과시의 절정에서 그는 무너졌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영화를 바라보며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자랑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고, 그는 짐승처럼 들판을 기어 다니는 굴욕을 당했다.(단 4장) 권력의 정점에서 터져 나온 자기 과시가 그를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서 불법의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인간이 신의 자리를 탐하는 행위, 그것이 성경이 묘사하는 가장 심각한 영적 타락의 징표다. 트럼프를 이 인물들과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러나 교만의 패턴, 자기 신격화의 언어, 종교적 이미지를 권력 서사에 끌어다 쓰는 행태. 이것이 성경이 반복적으로 경고해 온 바로 그 길목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지지와 우상화 사이, 한국 교회의 분별이 필요하다 이 사건이 한국 교회에 특별한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 진영 일부에서는 트럼프를 "하나님이 세우신 도구" 혹은 "고레스 왕과 같은 지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하나님께서 불신자를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신 사례는 성경에 실제로 존재한다. 그 자체가 반드시 잘못된 신학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구로 인정하는 것과, 그를 신격화하거나 그의 모든 언행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는 신학적으로 가능한 해석이지만, 후자는 우상숭배의 영역에 위험하게 근접한다. 고레스 왕을 도구로 인정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그를 예배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했고, 고레스는 그분의 손에 들린 수단으로만 이해했다. 분별(分別)은 신앙의 덕목 중 하나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권면했다. 분별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다. 사랑에 뿌리를 두되, 진리로 가지를 뻗는 신앙의 성숙함이다. 그 분별이 없을 때, 신앙은 특정 인물을 향한 맹목적 충성으로 변질되고, 교회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는다. 교회 역사는 이 위험을 반복적으로 경고한다. 히틀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추앙했던 독일 기독교인들, 권력자의 곁에 서서 예언자의 자리를 포기했던 수많은 어용 성직자들. 그들의 공통점은 지지와 우상화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순간 시작되었다. 구원자는 오직 한 분이시다 트럼프는 그림을 삭제했다. 그러나 그 그림이 드러낸 것은 삭제되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박수를 보내는 군중이 있는 한, 그 욕망은 더욱 커진다. 교회가 그 군중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구원자는 성조기와 전투기를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 나사렛에서 오셨고, 환호하는 군중을 뒤로하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다. 그분은 병자의 이마에 손을 얹으시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리하셨다. 오늘 한국 교회는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어떤 지도자 앞에서도 신학적 분별력을 포기하지 않을 용기가 있는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명백히 잘못된 길로 갈 때, 신앙의 이름으로 그것을 덮지 않을 정직함이 있는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그 교만이 종교의 언어를 빌릴 때, 그 위험은 배가된다. 한국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려면, 먼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섬기는 분은 어떤 인간 지도자도 아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편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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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강단을 물든 아첨
이재명 대통령과 소강석 목사가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청와대 사진단 제공) '부활절'은 기독교 신앙의 정점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기념일이 아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 역사적 사건 위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서 있다. 그러므로 부활절 예배는 오직 한 분 ‑ 부활하신 주님 ‑ 만이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런데 지난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2026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예배에 참석했고, 소강석CBS 재단이사장(새에덴교회 담임)은 환영사에서 대통령을 향해 찬사를 쏟아냈다. 기독교 최고의 절기에 정치 지도자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역사적 좌표를 되묻게 하는 심각한 사건이다. 강단에서 울려 퍼진'용비어천가' 소강석 목사는 환영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누구보다 뼈저린 절망을 경험하셨던 이재명 대통령은 이 시대에 어렵고 힘든 자들을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신다'고 했다. 이어 '우리 대통령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한국교회를 사랑하며, 한반도에 평화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이 자리에 오셨다고 믿는다'고 선언했다. 예배당 강단에서, 부활절 예배 환영사의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회중을 섬기는 직분이다. 강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자리이지, 정치 지도자를 위한 헌사(獻辭)의 무대가 아니다. 소강석 목사가 쏟아낸 언어들은 대통령을 향한 것이었지,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설교의 주 목적은 하나님을 높여 청중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구린내 나는 인간을 드높이는 것은 강단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설교다." —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이것이 단지 한 목사의 개인적 실수라면 논란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다. 소강석 목사는CBS 재단 이사장이라는 공적 지위를 갖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주요 대중적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가 부활절이라는 공적 예배 자리에서 국가 지도자를 향해 이런 찬사를 바치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가 그 지도자를 신앙적으로 인증하는 것처럼 비쳐질 위험이 있다. 성경은 인간을 높이는 것을 경계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린도전서3:21)고 엄중히 경고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이 닷새 후 “십자가에 못 박으라”를 외쳤던 것처럼, 정치적 환호와 신앙적 찬사는 본질상 다르다. 강단에서 이 둘이 뒤섞일 때,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가 된다. 부활절연합예배에서 축사하는 이재명 정교분리를 말하던 입으로 예배당에 선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이 이 자리에 선 배경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불과 수 개월 전,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직적으로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제재가 엄정하다는 것을 반드시 이번 기회에 보여줘야 한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정교분리 원칙이 깨지는 이러한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며 종교단체에 대한 법적 제재까지 거론했다. 그런 사람이 4월 5일 부활절 예배에 직접 참석하여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사도신경을 따라 읊으며, 헌금까지 드렸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정교분리를 강조하던 그가 스스로 교회의 정치화를 주도한 것은 아닌가. 교회를 향해서는 정치에서 손 떼라 하면서, 자신은 교회라는 공간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묻고 싶다. 정교분리의 본래 취지는 국가가 종교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뒤집어 국가가 종교를 단속하는 명분으로 삼는 것은 헌법 정신의 왜곡이다. 지난1월 기자회견에서 정교분리를 강조했던 사람이, 그것도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또 반복하고 있다. 자신이 종교를 향해 정치를 멀리하라고 경고하면서, 정작 자신은 가장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들어와 축사를 하고 박수를 받는 것—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이중성이다. 교회해산법을 추진하며 교회당에 들어선 아이러니 이 사건의 가장 심각한 층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명은 집권 이후, 민주당 주도로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었다. 발의자 11명 중 8명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이 법안은 종교법인이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하거나 선거에 개입한 경우 주무관청이 직접 설립허가를 취소하고, 해산된 법인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장 없는 종교법인 사무소 출입·검사 조항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법안에 대해 기독교계는 '교회폐쇄법'이라 명명하며 격렬히 반발했다. 4월 1일에는 7,000여 명의 개신교인이 국회 본관 앞에 집결해 “종교법인 강제해산 종교의자유 입틀막법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로부터 불과 나흘 후, 이재명 대통령은 부활절 예배에 나타났다. 한 손으로는 교회해산법을 밀어붙이고, 다른 손으로는 부활절 예배에서 헌금을 드린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아니면 정교한 정치 연출인가. 법무법인 전문가들은 이 법안에 대해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해 공익을 해칠 경우 법인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법학회도 “민법 개정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헌법적 가치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민법 개정이 아닌 특별법 제정을 주장했다. 바로 이 긴장 속에서 대통령의 부활절 예배 참석이 이루어졌다. 기독교를 압박하는 법안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최대 절기의 예배에 등장하는 것 —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향한 정치적 회유이자, 기독교계의 조직적 반발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예배는 권력의 무대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자들이 있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열왕기상12:28)고 선포했다. 그의 동기는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었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죄가 되게 한 것”이라고 기록한다. 정치 지도자가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예배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무대로 전락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공의를 저버린 백성의 형식적 예배를 향해 “내가 너희의 다수한 제물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의 분향을 싫어하노라”(이사야1:11,13)고 선언했다. 하나님은 형식이 아니라 진실을 원하신다. 부활절 예배에서 정치인이 “아멘”을 외치고 헌금을 드리는 모습이 미디어를 가득 채울 때, 그리고 그 예배의 사회자가 대통령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으로 선포할 때, 그 예배당 안에 계신 분은 과연 누구인가? 군중의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예배와 권련 앞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예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권력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교회는 국가 권력에 아첨하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맹목적인 반정부 구호의 집결지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의 길은 예언자적 비판과 복음적 초월성에 있다. 세례 요한은 왕의 잘못을 그 앞에서 직언하다 목이 잘렸다(마가복음6:18). 그는 헤롯 왕의 예배당에 초청받아 “왕이시여, 위대하십니다”라고 환영사를 올리지 않았다. 개혁자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권력에 맞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켰다. 독일의 본회퍼는 히틀러 치하에서 교회가 국가에 굴종하는 것을'값싼 은혜'라 이름하며 저항했다. 한국교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권력을 향한 환호가 아니라 복음의 언어로 권력에게 말하는 용기다. 소강석 목사는 예배 강단에서 대통령을 높이는 대신, 부활절 예배의 의미를 선포했어야 한다. “권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을 이루는 자”(로마서13:4)이어야 하지만, 그 권세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두려움 없이 선포했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적 목회자의 직분이다. 부활절은 인간의 권력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패배하는 날이다. 빌라도의 법정도, 로마의 군병도, 무덤 앞의 돌도 부활을 막지 못했다. 그 부활의 능력 앞에서 교회는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부활의 담대함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앞에서 주눅 드는 것도, 정치 권력에 아부하며 강단을 내주는 것도—모두 부활 신앙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태복음22:21). 이것이 정교분리의 복음적 원리이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거룩한 공간이 정치적 연출의 무대로 활용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엄중한 경계선을 다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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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남’ 속에 발견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나라
1,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3위에 오른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한 사극의 흥행을 넘어 시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의 유배지를 지킨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권력의 폭력 앞에서 양심을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역사를 빌려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놀랍도록 성경적이다. 첫째, 엄흥도의 의(義)는 순교자의 언어로 말한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종이 아니라 엄흥도다. 그는 처음에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지 유치를 자청한 인물이다. 철저히 세속적 동기로 시작된 그의 선택은, 그러나 단종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변모한다. 감시자에서 보호자로, 이해타산의 인간에서 의리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엄흥도의 여정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의 구조와 닮아 있다. 클라이맥스는 단종의 죽음 이후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진 상황에서, 엄흥도는 홀로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다. 역사 속 그의 말이 전해진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 이 고백은 유교적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정신은 놀랍도록 복음과 맞닿아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산상수훈의 말씀,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엄흥도의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하나님께서 인간 양심에 새기신 의의 요구는 동일하다. 엄흥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둘째, 권력의 덧없음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영화에서 세조(수양대군)는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장항준 감독의 이 선택은 탁월하다. 권력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이고, 역사를 지우고, 진실을 묻어버린다. 한명회가 붉은 관복을 입고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이름 없는 폭력의 실체를 느낀다. 이것은 감각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둠의 세력과 유사하다. 우리의 싸움은 육과 혈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어둠의 권세와 정사들이 끊임없이 이 세계를 둘러싸고 간섭하고 조정한다. 영화에서 경험되는 단종을 향한 대적의 세력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둠의 세력과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선언한다. 단종이 죽은 지 242년 후, 그는 왕으로 복권되었다. 엄흥도는 충의공(忠毅公)으로 기려졌다. 역사의 승자처럼 보였던 세조의 찬탈은 결국 정의의 법정 앞에 섰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의인의 선택은 시간을 이겼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라는 잠언의 말씀처럼,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선언처럼, 역사의 마지막 발언권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게 있다. 교회가 이 장면에서 받아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의를 위해 침묵당하는 이들이 있다.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이야기가 240여 년 후 역사의 법정에서 뒤집혔듯,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도래한다. 믿음이란 그 보이지 않는 나라를 현재 속에서 살아내는 능력이다. 셋째, 단종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의 그림자 이 대목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단종을 그리스도와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오랜 전통인 '유형론(typology)'의 관점에서, 단종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희미하게 반영한다는 성찰은 가능하다.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어린 왕,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존재,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복권된 이름.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한 사람. 이 서사의 구조는 십자가의 이야기와 여러 지점에서 겹친다. 물론 단종은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이셨다. 단종의 비극은 인간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비극을 대속하시는 구원 사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때로 역사와 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의 그림자를 보여주신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1,500만 명의 관객 안에는, 어쩌면 그 그림자를 통해 진짜 빛을 찾아야 할 영혼들이 있다. 복음의 문은 뜻밖의 곳에서 열린다 〈왕과 사는 남자〉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 영화 안에서만 일하시지 않는다. 고난받는 의인의 이야기, 권력의 허무함, 죽음을 넘어서는 충정 - 이 보편적 서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조용히 빛난다. 목회자는 이 영화를 설교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성도는 이 영화를 통해 복음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1,500만 명이 함께 울었다는 것은, 그 눈물의 깊은 곳 어딘가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증거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이 영화는 그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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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촉구연대의 성명서, 균형을 잃었다
2026년3월16일 건강한 교회와 사회 포럼, 광교산울교회,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민주시민모임,기독교윤리실천운동, 느헤미야교회협의회, 등 19개 단체로 구성된 평화촉구연대의 ‘불의한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중동전쟁에 대한 성명서는 중동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응답을 표방하고 있다. 성경적 언어와 인도주의적 호소로 포장된 이 성명은 언뜻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면밀히 읽어보면 이 성명은 심각한 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편향된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란 정권의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한 완전한 침묵 성명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불의한 전쟁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전쟁의 배경이 된 이란 정권의 행태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정권은 수십 년간 자국민을 향해 비인간적인 억압을 자행해 왔다. 2019년 11월의 피의 금요일 사태를 비롯한 각종 민주화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성 인권 운동가들과 종교적 소수자들은 조직적인 탄압을 받아왔다. 독립적인 추산에 따르면 이란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야기한 사망자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이란은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반군 등 역내 무장 세력을 지원하며 중동 불안정의 핵심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더불어 미국인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 사망에 이란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성명서는 이러한 맥락을 철저히 배제한 채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규탄하고 있다. 이는 도덕적 판단의 출발점 자체가 불균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간인 피해의 선택적 적용 성명서는 2026년 2월 28일 이란 미나브의 초등학교 공습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민간인 희생을 강조한다. 민간인 보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인도주의적 가치이며, 어떤 전쟁에서도 무고한 희생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명서는 그 공습이 의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는지, 아니면 전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폭이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검토도 없이 이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은 대부분 군사시설 — 해군기지, 공군기지, 미사일 기지, 핵 관련 시설, 공항 등 — 을 겨냥해왔다. 민간 지역 피해가 발생했다면, 그것이 의도적 공격인지 오폭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만약 민간인 학살이 의도적이었다면 동일 지역에 대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공격이 있었어야 하나, 그러한 패턴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명서는 이러한 사실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결론을 먼저 내린 뒤 근거를 꿰맞추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기방어권에 대한 몰이해 국제법은 모든 국가에 자기방어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란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적대적 언사를 공식적으로 반복해왔고, 실제로 탄도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핵 개발 프로그램을 통한 대량파괴무기 획득 시도 역시 국제 사회가 공인한 위협이다. 더구나 미국의 공습과 함께 이란 정권은 주변의 중동국가에 미사일과 드론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감행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이 같은 실존적 위협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라는 측면이 있음에도, 성명서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인 침략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란 국민 상당수는 자국 독재 정권의 몰락을 환영하는 반응을 나타냈다. 정권 핵심 인사들의 사망 또는 제거 소식에 거리에서 환호하거나 소셜미디어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이란 시민들의 모습이 다수 보고되었다. 이는 이란 정권이 자국민에게도 억압자로 인식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성명서가 진정으로 생명과 인권을 염려한다면, 독재 정권 치하에서 신음해온 이란 국민의 자유와 존엄에 대해서도 동등한 무게로 발언했어야 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정치적 압박의 문제 성명서의 세 번째 항목은 한국교회가 특정 국가의 정치적 이해를 신앙으로 정당화하는 태도를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을 신앙의 타락으로 규정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자기모순을 품고 있다. 성명서 자체가 특정한 정치적 방향—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이란 정권에 대한 면죄—을 신앙의 언어로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의 전쟁 논리를 추종하지 말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한쪽 편의 서사만을 일방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무엇이 진짜 불의인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전쟁은 언제나 비극이며, 그 안에서 완전한 정의를 찾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불의는 단지 ‘폭격’이라는 행위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억압과 위협, 그리고 지속적인 폭력의 구조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어떤 정권이 자국민을 억압하고 국제적 위협을 지속해왔다면,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단순한 침략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동시에, 그 대응이 민간인의 생명을 해친다면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진정한 균형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데서 시작된다. 진정한 평화는 균형 있는 진실 위에 선다 그리스도인의 평화 운동은 정치적 편향을 복음의 언어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는 성명이라면,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지역 안정에 가해온 폭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했어야 한다. 핵 위협을 방치하는 것이 평화인지, 독재 정권을 묵인하는 것이 생명 존중인지 물어야 했다. 평화촉구연대의 이 성명은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 중 하나는 철저히 외면한다. 균형을 잃은 평화 호소는 결국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로 서려면, 눈에 보이는 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에 대해서도 동등한 용기로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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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신앙의 자유인가, 타협의 강요인가
미국 제9연방항소법원이 워싱턴주 올림푸스 스파(Olympus Spa) 사건에서 내린 판결은 단순한 법리 다툼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공적 공간으로부터의 축출을 선언한 판결이며, 창조 질서에 근거한 신앙 양심의 경영권을 법의 이름으로 무력화한 사건이다. 법원은 트랜스젠더의 출입을 제한한 스파의 방침을 차별로 규정함으로써, 성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그에 따른 삶의 실천을 공적 영역에서 퇴출시켰다. 이 판결이 낯선 타국의 이야기로 들린다면, 우리는 아직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이 끊임없이 추진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내일의 예고편이다. “중립”이라는 허울과 신앙의 공동화 법원은 차별금지법(WLAD)이“중립적이고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이기 때문에 종교적 신념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에 관한 스파 측의 주장은 모두 기각됐다. 법원이 말하는 중립은, 그러나 진정한 중립이 아니다. 특정한 세계관을 법의 언어로 확정하고, 그에 배치되는 신앙을 사적 영역으로 봉인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세대를 거슬려 살기를 요구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 신앙은 예배당 안에 머무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공적 생활에서 그 분별의 권리를 박탈했다. 신앙을 가질 자유는 허용하되, 신앙대로 살 자유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빼앗는 역설이다. 창조 질서의 훼손과 원죄적 오만 이번 판결의 핵심 문제는 생물학적 성(Sex)보다 개인의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 선언을 법적으로 우선시했다는 데 있다. 이는 성경의 선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1:27). 하나님이 세우신 남녀의 구별은 억압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이며 은혜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성별을 규정하겠다는 주장은, 창조주의 섭리를 넘어서려는 오만이다. 그것은 에덴의 원죄 -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 -의 현대적 재현이다. 법이 이를 권리로 옹호하는 순간, 가정과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질서는 흔들린다. 올림푸스 스파는 한국 전통 목욕 문화(찜질방)에 기반한 시설로, 나체 서비스의 특성상 성별 분리는 운영의 핵심 원칙이었다. 이러한 문화적·윤리적 맥락조차 고려하지 않은 채 일률적 평등 기준을 적용한 것은, 창조 질서를 차별로 낙인찍는 가치 전도의 극치다. 한국 교회가 대비해야 할 세 가지 전선 미국의 이 판결은 차별금지법이 실제로 작동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 교회는 다음 세 가지 전선에서 진지한 대비가 필요하다. 첫째는 강단의 자유다. 죄를 죄라 말하는 설교, 성경적 인간 이해를 전하는 선포가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4:2)는 사명이 법치의 이름 아래 위협받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둘째는 교육의 영역이다. 기독교 학교에서 창조 질서를 가르치는 것이 혐오 표현으로 규정되고,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이 법적 제약을 받게 될 수 있다. 셋째는 일상의 공간이다.여성 전용 사우나, 탈의실과 같은 최소한의 도덕적 경계마저 평등의 이름으로 허물어지는 날이 올 수 있다. 이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미국에서 이미 현실이 된 문제다. 진리의 기치를 내려놓지 말라 교회는 두 가지 유혹 앞에 서 있다. 세상의 법에 굴복하여 타협의 길을 선택하는 것과, 감정적 반발로 소모적 갈등을 자초하는 것이다. 어느 쪽도 답이 아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은 사도들이 걸어간 그 길이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사도행전5:29). 기독교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한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교회는 그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담보로 한 타협은 결국 사랑도, 진리도 아닌 것이 된다. 한국 교회는 이 시대의 흐름을 분별하며 더 깊은 신학적 성찰과 성숙한 공적 발언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태복음5:13). 맛을 잃은 소금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 바로 진리의 짠맛을 지켜야 할 때다. 진리를 배제한 자유는 방종이며, 하나님을 떠난 평등은 억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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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 AI 이미지 인권을 말하는 자, 누구의 인권을 말하는가 인권이라는 단어만큼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남용되는 언어도 드물다. 누구나 인권을 말하고, 누구나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말해진 인권이 진정한 인권인지를 판별하는 가장 확실한 시험대는 하나다. 그것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가, 아니면 선택적으로 사용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둘러싸고 쏟아낸 발언들은 그 시험대 위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히틀러에 비유하고, 이스라엘의 군사 작전을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하는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 표명을 넘어, 그의 인권 사상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문제는 그 발언의 대담함에 있지 않다. 문제는 침묵에 있다. 같은 입으로, 같은 열정으로,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참상을 말한 적이 있는가. 탈북민의 피눈물 나는 증언 앞에서 '인권'이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있는가. 중국의 위구르족 강제 수용을 향해 '제노사이드'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가.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선택적 인권은 공산주의 인권관의 오랜 문법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통에서 인권은 본래적 의미의 보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계급 투쟁의 도구다. 인권은 억압받는 계급, 즉 혁명의 편에 선 세력을 위한 것이며, 계급적 적으로 규정된 세력에게는 인권의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구조 안에서 인권의 선택적 적용은 모순이 아니라 원칙이다. 오늘날 이른바 진보 진영이 구사하는 인권 담론의 문법은 이 전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에는 즉각적이고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스라엘 민간인을 향한 하마스의 테러 — 2023년 10월 7일, 1,200명의 무고한 생명이 살해되고 240여 명이 납치된 사건 — 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거나 침묵한다. 북한이 자국민을 굶기고 수용소에 가두는 구조적 폭력에는 눈을 감으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자위권 행사에는 국제법의 잣대를 들이댄다. 이것은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진영 논리로 포장된 정치적 무기다. 진정한 인권은 편을 가리지 않는다. 억압자가 누구이든, 피해자가 어느 진영에 속하든, 인간의 존엄은 동일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 본질이다. 네타냐후와 히틀러의 비유는 역사적 무지인가, 의도적 왜곡인가 이재명 대표의 히틀러 비유는 단순한 수사적 과잉이 아니다. 이 발언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첫째,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다. 홀로코스트는 600만 명의 유대인이 국가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절멸된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사건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이 '인류에 대한 범죄'로 엄정하게 정의한 이 사건을 하마스 테러 조직의 공격에 맞서 자국을 방어하는 이스라엘 총리에게 비유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뒤집어 씌우는 이 논법은 역사 인식의 빈곤을 드러낼 뿐 아니라, 반유대주의적 선동에 구조적으로 복무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실존적 맥락에 대한 몰이해다. 이스라엘은 건국(1948년) 첫날부터 주변 아랍 국가들의 총공세를 받았다. 단 한 번의 패배가 곧 국가의 소멸을 의미하는 실존적 전쟁 상태가 76년째 계속되고 있다. 하마스는 그 헌장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제거를 명시하고 있는 테러 조직이다. 이 맥락을 무시하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대응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것은 공정한 국제법 해석이 아니라 편향된 정치적 판결이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의 평행한 운명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1948년, 같은 해에 두 나라가 탄생했다. 대한민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는 모두 건국 즉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외세와 내부 위협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야 했으며, 국제 사회의 냉담 속에서도 홀로 서야 했다. 이스라엘은 오늘도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현실 속에서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국민 모두가 병역 의무를 지고, 국가 생존을 위한 결의가 사회 전체를 관통한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피로 지켜낸 실재다. 반면 대한민국은 어떤가. 휴전선 너머 핵무기를 개발하며 대남 적화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과 대치하면서도, 국내 정치 담론은 그 실존적 위협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희석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는 시각이 대한민국의 자위권과 동맹 연대를 부정하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흔드는 논리는 곧 대한민국을 흔드는 논리다. 기독교 인권 신학은 하나님의 형상에 근거한 보편적 존엄 이 논의를 더 깊은 토대 위에 세우려면 기독교 인권 신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은 인권의 근거를 사회 계약이나 계급 투쟁에서 찾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7절은 선언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았다. 이 신학적 선언이 인권의 절대적 보편성의 근거다. 인간의 존엄은 국적도, 민족도, 계급도, 정치적 진영도 초월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진리를 더욱 구체화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이웃'의 경계를 묻는 자에게 경계 자체를 해체하는 답을 주셨다.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고통받는 자 앞에서는 진영과 민족을 초월한 응답이 요청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기독교 인권 사상의 핵심이다. 고통은 편을 가리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 앞에서는 이념의 경계가 무력해진다. 이 기준으로 이재명의 인권관을 평가하면 판단은 명료해진다. 팔레스타인 민간인의 고통은 아파하면서 북한 주민의 고통은 외면하는 것, 하마스의 테러 피해자에게는 침묵하면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성토하는 것 — 이것은 Imago Dei에 근거한 인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진영에 따라 취사선택하는 우상숭배적 인권관이다. 교회의 침묵은 공모다 "정교분리(政敎分離)." 한국 교회가 공적 사안 앞에서 가장 자주 꺼내는 방패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본래 의미는 국가가 교회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교회가 국가 권력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이다. 교회가 불의와 거짓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 앞에서도 진실을 말했다. 아모스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불의를 고발했고,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가 사회 전체에 흘러야 한다고 선포했다.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불의한 행위를 면전에서 책망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성경적 선지자 전통이다. 오늘 한국 교회에 요청되는 것도 이 전통이다. 이재명의 선택적 인권관이 사회 담론을 지배하고, 북한 인권에 대한 침묵이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되며, 이스라엘의 자위권이 집단학살의 언어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교회가 Imago Dei의 신학으로 정의롭고 보편적인 인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침묵은 불의에 대한 묵시적 동의다.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존귀하다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가자지구의 민간인도, 이스라엘의 납치 피해자도, 북한 수용소의 정치범도, 두만강을 건너다 붙잡힌 탈북민도. 그 어떤 생명도 진영의 논리에 따라 가치의 경중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인권은 불편한 진실 앞에서도 일관성을 잃지 않는다. 내 편의 잘못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반대편의 고통에도 같은 눈물을 흘리는 것 — 그것이 Imago Dei에 기초한 기독교 인권 사상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보편적 인간 존엄의 이상이다. 이재명의 인권관을 비판하는 것은 인권이라는 고귀한 가치가 정치적 무기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 땅의 공적 담론 속에 바르게 세우기 위함이다. 그 일에 교회가, 신앙인이, 그리고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이 함께 나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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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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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예수 이미지' 사건이 한국 교회에 던지는 질문
-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올렸던 AI 생성 이미지 한 장의 그림이 세계를 흔들었다. 흰 로브에 붉은 천을 두른 남자가 병상에 누운 환자의 이마에 손을 얹고 있다. 그의 손에서는 빛이 쏟아지고, 주변에는 성조기와 독수리, 군인과 간호사가 경건하게 그를 우러러본다.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내려오고, 자유의 여신상이 배경을 장식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지난 4월 12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SNS 트루스소셜에 이 AI 생성 이미지를 아무런 설명 없이 게시했다. 레오 14세 교황을 향해 "나약하고 형편없다"고 공개 비난한 지 불과 한 시간 뒤의 일이었다. 거센 비판이 쏟아지자 그는 게시물을 삭제하고 "의사로서의 나를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흰 로브를 걸치고 병자에게 안수하는 장면을 의사의 이미지로 읽을 사람은 거의 없다. 해명은 해명이 되지 못했다. 자기 과시, 그리고 교만이라는 이름의 함정 이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그림 한 장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트럼프의 전체 행보를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읽어야 한다. 그는 이전에도 교황 복장을 한 자신의 이미지를 SNS에 올렸다. 자신의 형사 기소를 "박해받는 메시아"의 서사로 포장했다. 공개 석상에서 "나만이 이 나라를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종교특별고문은 그를 예수에 비유했고, 지지자들은 "예수는 나의 구원자, 트럼프는 나의 대통령"을 외쳤다. 그는 그 어느 것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것은 충동적 실수의 연속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특별한 존재, 나아가 신적 권위를 지닌 구원자로 연출하려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욕망이 반복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신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교만(驕慢)이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형태의 교만, 즉 종교적 언어와 이미지를 빌려 자신을 신격화하는 교만이다. 성경은 교만을 단순한 성격적 결함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영적 반역의 뿌리다. 이사야 14장 13절에서 바벨론 왕의 교만은 이렇게 묘사된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이것이 타락의 원형적 언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 그것이 노골적이든 이미지로 포장되든, 성경은 그것을 동일한 범주로 본다. 잠언 16장 18절은 단호하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지 않는 자에게 역사는 반드시 그 대가를 청구했다. 성경의 증언은 일관되다. 성경이 기록한 교만의 결말들 사도행전 12장의 헤롯 왕은 화려한 왕복을 입고 군중 앞에 섰다.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외쳤을 때, 그는 그 찬사를 묵인했다. 성경은 곧이어 기록한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 12:23) 자기 과시의 절정에서 그는 무너졌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의 영화를 바라보며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고 자랑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고, 그는 짐승처럼 들판을 기어 다니는 굴욕을 당했다.(단 4장) 권력의 정점에서 터져 나온 자기 과시가 그를 가장 낮은 곳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4절에서 불법의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인간이 신의 자리를 탐하는 행위, 그것이 성경이 묘사하는 가장 심각한 영적 타락의 징표다. 트럼프를 이 인물들과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러나 교만의 패턴, 자기 신격화의 언어, 종교적 이미지를 권력 서사에 끌어다 쓰는 행태. 이것이 성경이 반복적으로 경고해 온 바로 그 길목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지지와 우상화 사이, 한국 교회의 분별이 필요하다 이 사건이 한국 교회에 특별한 무게로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 진영 일부에서는 트럼프를 "하나님이 세우신 도구" 혹은 "고레스 왕과 같은 지도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하나님께서 불신자를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신 사례는 성경에 실제로 존재한다. 그 자체가 반드시 잘못된 신학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구로 인정하는 것과, 그를 신격화하거나 그의 모든 언행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전자는 신학적으로 가능한 해석이지만, 후자는 우상숭배의 영역에 위험하게 근접한다. 고레스 왕을 도구로 인정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그를 예배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했고, 고레스는 그분의 손에 들린 수단으로만 이해했다. 분별(分別)은 신앙의 덕목 중 하나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9절에서 "너희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어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권면했다. 분별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다. 사랑에 뿌리를 두되, 진리로 가지를 뻗는 신앙의 성숙함이다. 그 분별이 없을 때, 신앙은 특정 인물을 향한 맹목적 충성으로 변질되고, 교회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는다. 교회 역사는 이 위험을 반복적으로 경고한다. 히틀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추앙했던 독일 기독교인들, 권력자의 곁에 서서 예언자의 자리를 포기했던 수많은 어용 성직자들. 그들의 공통점은 지지와 우상화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순간 시작되었다. 구원자는 오직 한 분이시다 트럼프는 그림을 삭제했다. 그러나 그 그림이 드러낸 것은 삭제되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인간의 내면에는 언제나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욕망에 박수를 보내는 군중이 있는 한, 그 욕망은 더욱 커진다. 교회가 그 군중의 일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구원자는 성조기와 전투기를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 나사렛에서 오셨고, 환호하는 군중을 뒤로하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다. 그분은 병자의 이마에 손을 얹으시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그리하셨다. 오늘 한국 교회는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우리는 어떤 지도자 앞에서도 신학적 분별력을 포기하지 않을 용기가 있는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명백히 잘못된 길로 갈 때, 신앙의 이름으로 그것을 덮지 않을 정직함이 있는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그 교만이 종교의 언어를 빌릴 때, 그 위험은 배가된다. 한국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려면, 먼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섬기는 분은 어떤 인간 지도자도 아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편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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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데스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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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예수 이미지' 사건이 한국 교회에 던지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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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강단을 물든 아첨
- 이재명 대통령과 소강석 목사가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청와대 사진단 제공) '부활절'은 기독교 신앙의 정점이다.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기념일이 아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 역사적 사건 위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서 있다. 그러므로 부활절 예배는 오직 한 분 ‑ 부활하신 주님 ‑ 만이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런데 지난 4월 5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2026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장면을 목격했다.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예배에 참석했고, 소강석CBS 재단이사장(새에덴교회 담임)은 환영사에서 대통령을 향해 찬사를 쏟아냈다. 기독교 최고의 절기에 정치 지도자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역사적 좌표를 되묻게 하는 심각한 사건이다. 강단에서 울려 퍼진'용비어천가' 소강석 목사는 환영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누구보다 뼈저린 절망을 경험하셨던 이재명 대통령은 이 시대에 어렵고 힘든 자들을 소망으로 일으켜 주시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신다'고 했다. 이어 '우리 대통령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한국교회를 사랑하며, 한반도에 평화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이 자리에 오셨다고 믿는다'고 선언했다. 예배당 강단에서, 부활절 예배 환영사의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회중을 섬기는 직분이다. 강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자리이지, 정치 지도자를 위한 헌사(獻辭)의 무대가 아니다. 소강석 목사가 쏟아낸 언어들은 대통령을 향한 것이었지,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설교의 주 목적은 하나님을 높여 청중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구린내 나는 인간을 드높이는 것은 강단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최악의 설교다." —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이것이 단지 한 목사의 개인적 실수라면 논란은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다. 소강석 목사는CBS 재단 이사장이라는 공적 지위를 갖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주요 대중적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가 부활절이라는 공적 예배 자리에서 국가 지도자를 향해 이런 찬사를 바치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가 그 지도자를 신앙적으로 인증하는 것처럼 비쳐질 위험이 있다. 성경은 인간을 높이는 것을 경계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린도전서3:21)고 엄중히 경고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을 향해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이 닷새 후 “십자가에 못 박으라”를 외쳤던 것처럼, 정치적 환호와 신앙적 찬사는 본질상 다르다. 강단에서 이 둘이 뒤섞일 때,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가 된다. 부활절연합예배에서 축사하는 이재명 정교분리를 말하던 입으로 예배당에 선 대통령 이재명 대통령이 이 자리에 선 배경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불과 수 개월 전,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직적으로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제재가 엄정하다는 것을 반드시 이번 기회에 보여줘야 한다”고 선언했다. 나아가 “정교분리 원칙이 깨지는 이러한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며 종교단체에 대한 법적 제재까지 거론했다. 그런 사람이 4월 5일 부활절 예배에 직접 참석하여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사도신경을 따라 읊으며, 헌금까지 드렸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정교분리를 강조하던 그가 스스로 교회의 정치화를 주도한 것은 아닌가. 교회를 향해서는 정치에서 손 떼라 하면서, 자신은 교회라는 공간을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되묻고 싶다. 정교분리의 본래 취지는 국가가 종교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뒤집어 국가가 종교를 단속하는 명분으로 삼는 것은 헌법 정신의 왜곡이다. 지난1월 기자회견에서 정교분리를 강조했던 사람이, 그것도 나라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또 반복하고 있다. 자신이 종교를 향해 정치를 멀리하라고 경고하면서, 정작 자신은 가장 거룩한 예배의 자리로 들어와 축사를 하고 박수를 받는 것—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이중성이다. 교회해산법을 추진하며 교회당에 들어선 아이러니 이 사건의 가장 심각한 층위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재명은 집권 이후, 민주당 주도로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되었다. 발의자 11명 중 8명이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이 법안은 종교법인이 정교분리 원칙을 위반하거나 선거에 개입한 경우 주무관청이 직접 설립허가를 취소하고, 해산된 법인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장 없는 종교법인 사무소 출입·검사 조항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법안에 대해 기독교계는 '교회폐쇄법'이라 명명하며 격렬히 반발했다. 4월 1일에는 7,000여 명의 개신교인이 국회 본관 앞에 집결해 “종교법인 강제해산 종교의자유 입틀막법 철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로부터 불과 나흘 후, 이재명 대통령은 부활절 예배에 나타났다. 한 손으로는 교회해산법을 밀어붙이고, 다른 손으로는 부활절 예배에서 헌금을 드린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아니면 정교한 정치 연출인가. 법무법인 전문가들은 이 법안에 대해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해 공익을 해칠 경우 법인을 해산하고 재산을 몰수할 수 있도록 한 점은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교회법학회도 “민법 개정은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라는 헌법적 가치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며 민법 개정이 아닌 특별법 제정을 주장했다. 바로 이 긴장 속에서 대통령의 부활절 예배 참석이 이루어졌다. 기독교를 압박하는 법안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최대 절기의 예배에 등장하는 것 —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향한 정치적 회유이자, 기독교계의 조직적 반발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예배는 권력의 무대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자들이 있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열왕기상12:28)고 선포했다. 그의 동기는 종교적 열정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었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은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죄가 되게 한 것”이라고 기록한다. 정치 지도자가 예배당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예배가 정치적 목적을 위한 무대로 전락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공의를 저버린 백성의 형식적 예배를 향해 “내가 너희의 다수한 제물을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의 분향을 싫어하노라”(이사야1:11,13)고 선언했다. 하나님은 형식이 아니라 진실을 원하신다. 부활절 예배에서 정치인이 “아멘”을 외치고 헌금을 드리는 모습이 미디어를 가득 채울 때, 그리고 그 예배의 사회자가 대통령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으로 선포할 때, 그 예배당 안에 계신 분은 과연 누구인가? 군중의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에 계신가? 예배와 권련 앞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예배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권력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교회는 국가 권력에 아첨하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맹목적인 반정부 구호의 집결지가 되어서도 안 된다. 교회의 길은 예언자적 비판과 복음적 초월성에 있다. 세례 요한은 왕의 잘못을 그 앞에서 직언하다 목이 잘렸다(마가복음6:18). 그는 헤롯 왕의 예배당에 초청받아 “왕이시여, 위대하십니다”라고 환영사를 올리지 않았다. 개혁자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의 권력에 맞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켰다. 독일의 본회퍼는 히틀러 치하에서 교회가 국가에 굴종하는 것을'값싼 은혜'라 이름하며 저항했다. 한국교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권력을 향한 환호가 아니라 복음의 언어로 권력에게 말하는 용기다. 소강석 목사는 예배 강단에서 대통령을 높이는 대신, 부활절 예배의 의미를 선포했어야 한다. “권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을 이루는 자”(로마서13:4)이어야 하지만, 그 권세 역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두려움 없이 선포했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적 목회자의 직분이다. 부활절은 인간의 권력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패배하는 날이다. 빌라도의 법정도, 로마의 군병도, 무덤 앞의 돌도 부활을 막지 못했다. 그 부활의 능력 앞에서 교회는 어떤 권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부활의 담대함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앞에서 주눅 드는 것도, 정치 권력에 아부하며 강단을 내주는 것도—모두 부활 신앙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태복음22:21). 이것이 정교분리의 복음적 원리이다. 예배당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거룩한 공간이 정치적 연출의 무대로 활용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엄중한 경계선을 다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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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에 들어온 정치, 강단을 물든 아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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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남’ 속에 발견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나라
- 1,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3위에 오른 〈왕과 사는 남자〉가 단순한 사극의 흥행을 넘어 시대적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선 6대 왕 단종과 그의 유배지를 지킨 호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권력의 폭력 앞에서 양심을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을 통해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질문을 남긴다. 영화는 역사를 빌려 말하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놀랍도록 성경적이다. 첫째, 엄흥도의 의(義)는 순교자의 언어로 말한다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종이 아니라 엄흥도다. 그는 처음에 마을의 생존을 위해 유배지 유치를 자청한 인물이다. 철저히 세속적 동기로 시작된 그의 선택은, 그러나 단종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변모한다. 감시자에서 보호자로, 이해타산의 인간에서 의리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엄흥도의 여정은 성경이 말하는 회심의 구조와 닮아 있다. 클라이맥스는 단종의 죽음 이후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이 내려진 상황에서, 엄흥도는 홀로 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다. 역사 속 그의 말이 전해진다.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 이 고백은 유교적 언어로 표현되었지만, 그 정신은 놀랍도록 복음과 맞닿아 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산상수훈의 말씀, 그리고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엄흥도의 행동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시대와 언어가 달라도, 하나님께서 인간 양심에 새기신 의의 요구는 동일하다. 엄흥도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복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둘째, 권력의 덧없음이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영화에서 세조(수양대군)는 단 한 번도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폭력은 영화 전체를 짓누른다. 장항준 감독의 이 선택은 탁월하다. 권력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죽이고, 역사를 지우고, 진실을 묻어버린다. 한명회가 붉은 관복을 입고 나타날 때마다 관객은 그 이름 없는 폭력의 실체를 느낀다. 이것은 감각의 세계에서 느낄 수 없는 어둠의 세력과 유사하다. 우리의 싸움은 육과 혈의 싸움이 아니라고 했다. 어둠의 권세와 정사들이 끊임없이 이 세계를 둘러싸고 간섭하고 조정한다. 영화에서 경험되는 단종을 향한 대적의 세력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둠의 세력과 동일해 보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선언한다. 단종이 죽은 지 242년 후, 그는 왕으로 복권되었다. 엄흥도는 충의공(忠毅公)으로 기려졌다. 역사의 승자처럼 보였던 세조의 찬탈은 결국 정의의 법정 앞에 섰고,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의인의 선택은 시간을 이겼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잠 16:18)라는 잠언의 말씀처럼, 불의한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는 선언처럼, 역사의 마지막 발언권은 폭력이 아니라 사랑에게 있다. 교회가 이 장면에서 받아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의를 위해 침묵당하는 이들이 있다.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고,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이야기가 240여 년 후 역사의 법정에서 뒤집혔듯,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보이지 않아도 반드시 도래한다. 믿음이란 그 보이지 않는 나라를 현재 속에서 살아내는 능력이다. 셋째, 단종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의 그림자 이 대목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단종을 그리스도와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오랜 전통인 '유형론(typology)'의 관점에서, 단종의 삶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희미하게 반영한다는 성찰은 가능하다. 권력에 의해 버림받은 어린 왕,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존재, 죽은 뒤 오랜 세월이 지나 비로소 복권된 이름.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킨 한 사람. 이 서사의 구조는 십자가의 이야기와 여러 지점에서 겹친다. 물론 단종은 죄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의인이셨다. 단종의 비극은 인간 역사의 비극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모든 비극을 대속하시는 구원 사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때로 역사와 예술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의 그림자를 보여주신다.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1,500만 명의 관객 안에는, 어쩌면 그 그림자를 통해 진짜 빛을 찾아야 할 영혼들이 있다. 복음의 문은 뜻밖의 곳에서 열린다 〈왕과 사는 남자〉는 기독교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독교 영화 안에서만 일하시지 않는다. 고난받는 의인의 이야기, 권력의 허무함, 죽음을 넘어서는 충정 - 이 보편적 서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조용히 빛난다. 목회자는 이 영화를 설교의 도구로 삼을 수 있고, 성도는 이 영화를 통해 복음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다. 1,500만 명이 함께 울었다는 것은, 그 눈물의 깊은 곳 어딘가에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영원을 향한 갈망이 있다는 증거다. 전도서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이 영화는 그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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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사남’ 속에 발견되는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고 영원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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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촉구연대의 성명서, 균형을 잃었다
- 2026년3월16일 건강한 교회와 사회 포럼, 광교산울교회,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민주시민모임,기독교윤리실천운동, 느헤미야교회협의회, 등 19개 단체로 구성된 평화촉구연대의 ‘불의한 전쟁을 즉각 중단하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중동전쟁에 대한 성명서는 중동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응답을 표방하고 있다. 성경적 언어와 인도주의적 호소로 포장된 이 성명은 언뜻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나 면밀히 읽어보면 이 성명은 심각한 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편향된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란 정권의 폭력과 인권 침해에 대한 완전한 침묵 성명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불의한 전쟁으로 규정하면서도, 이 전쟁의 배경이 된 이란 정권의 행태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정권은 수십 년간 자국민을 향해 비인간적인 억압을 자행해 왔다. 2019년 11월의 피의 금요일 사태를 비롯한 각종 민주화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여성 인권 운동가들과 종교적 소수자들은 조직적인 탄압을 받아왔다. 독립적인 추산에 따르면 이란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야기한 사망자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다. 또한 이란은 하마스, 헤즈볼라, 후티 반군 등 역내 무장 세력을 지원하며 중동 불안정의 핵심 후원자 역할을 해왔다. 더불어 미국인을 포함한 많은 외국인 사망에 이란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성명서는 이러한 맥락을 철저히 배제한 채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만을 규탄하고 있다. 이는 도덕적 판단의 출발점 자체가 불균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간인 피해의 선택적 적용 성명서는 2026년 2월 28일 이란 미나브의 초등학교 공습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민간인 희생을 강조한다. 민간인 보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인도주의적 가치이며, 어떤 전쟁에서도 무고한 희생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명서는 그 공습이 의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는지, 아니면 전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폭이었는지에 대한 어떠한 검토도 없이 이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실제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은 대부분 군사시설 — 해군기지, 공군기지, 미사일 기지, 핵 관련 시설, 공항 등 — 을 겨냥해왔다. 민간 지역 피해가 발생했다면, 그것이 의도적 공격인지 오폭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 만약 민간인 학살이 의도적이었다면 동일 지역에 대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공격이 있었어야 하나, 그러한 패턴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명서는 이러한 사실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정치적 결론을 먼저 내린 뒤 근거를 꿰맞추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기방어권에 대한 몰이해 국제법은 모든 국가에 자기방어권을 인정하고 있다. 이란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적대적 언사를 공식적으로 반복해왔고, 실제로 탄도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감행했다. 핵 개발 프로그램을 통한 대량파괴무기 획득 시도 역시 국제 사회가 공인한 위협이다. 더구나 미국의 공습과 함께 이란 정권은 주변의 중동국가에 미사일과 드론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감행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이 같은 실존적 위협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라는 측면이 있음에도, 성명서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일방적인 침략으로만 규정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란 국민 상당수는 자국 독재 정권의 몰락을 환영하는 반응을 나타냈다. 정권 핵심 인사들의 사망 또는 제거 소식에 거리에서 환호하거나 소셜미디어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이란 시민들의 모습이 다수 보고되었다. 이는 이란 정권이 자국민에게도 억압자로 인식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성명서가 진정으로 생명과 인권을 염려한다면, 독재 정권 치하에서 신음해온 이란 국민의 자유와 존엄에 대해서도 동등한 무게로 발언했어야 했다. 한국교회를 향한 정치적 압박의 문제 성명서의 세 번째 항목은 한국교회가 특정 국가의 정치적 이해를 신앙으로 정당화하는 태도를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 미국의 군사적 입장을 지지하는 것을 신앙의 타락으로 규정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자기모순을 품고 있다. 성명서 자체가 특정한 정치적 방향—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이란 정권에 대한 면죄—을 신앙의 언어로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의 전쟁 논리를 추종하지 말라고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한쪽 편의 서사만을 일방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무엇이 진짜 불의인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전쟁은 언제나 비극이며, 그 안에서 완전한 정의를 찾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불의는 단지 ‘폭격’이라는 행위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억압과 위협, 그리고 지속적인 폭력의 구조 속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어떤 정권이 자국민을 억압하고 국제적 위협을 지속해왔다면, 그에 대한 대응 역시 단순한 침략으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동시에, 그 대응이 민간인의 생명을 해친다면 그것 역시 비판받아야 한다. 진정한 균형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보는 데서 시작된다. 진정한 평화는 균형 있는 진실 위에 선다 그리스도인의 평화 운동은 정치적 편향을 복음의 언어로 위장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는 성명이라면, 이란 정권이 자국민과 지역 안정에 가해온 폭력에 대해서도 동일한 도덕적 잣대를 적용했어야 한다. 핵 위협을 방치하는 것이 평화인지, 독재 정권을 묵인하는 것이 생명 존중인지 물어야 했다. 평화촉구연대의 이 성명은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 중 하나는 철저히 외면한다. 균형을 잃은 평화 호소는 결국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로 서려면, 눈에 보이는 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악에 대해서도 동등한 용기로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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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촉구연대의 성명서, 균형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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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論/신앙의 자유인가, 타협의 강요인가
- 미국 제9연방항소법원이 워싱턴주 올림푸스 스파(Olympus Spa) 사건에서 내린 판결은 단순한 법리 다툼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공적 공간으로부터의 축출을 선언한 판결이며, 창조 질서에 근거한 신앙 양심의 경영권을 법의 이름으로 무력화한 사건이다. 법원은 트랜스젠더의 출입을 제한한 스파의 방침을 차별로 규정함으로써, 성별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그에 따른 삶의 실천을 공적 영역에서 퇴출시켰다. 이 판결이 낯선 타국의 이야기로 들린다면, 우리는 아직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것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이 끊임없이 추진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번 사건은 우리가 마주하게 될 내일의 예고편이다. “중립”이라는 허울과 신앙의 공동화 법원은 차별금지법(WLAD)이“중립적이고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법”이기 때문에 종교적 신념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사의 자유에 관한 스파 측의 주장은 모두 기각됐다. 법원이 말하는 중립은, 그러나 진정한 중립이 아니다. 특정한 세계관을 법의 언어로 확정하고, 그에 배치되는 신앙을 사적 영역으로 봉인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세대를 거슬려 살기를 요구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 신앙은 예배당 안에 머무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판결은 공적 생활에서 그 분별의 권리를 박탈했다. 신앙을 가질 자유는 허용하되, 신앙대로 살 자유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빼앗는 역설이다. 창조 질서의 훼손과 원죄적 오만 이번 판결의 핵심 문제는 생물학적 성(Sex)보다 개인의 젠더 정체성(Gender Identity) 선언을 법적으로 우선시했다는 데 있다. 이는 성경의 선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1:27). 하나님이 세우신 남녀의 구별은 억압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이며 은혜다. 인간 스스로 자신의 성별을 규정하겠다는 주장은, 창조주의 섭리를 넘어서려는 오만이다. 그것은 에덴의 원죄 -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 -의 현대적 재현이다. 법이 이를 권리로 옹호하는 순간, 가정과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질서는 흔들린다. 올림푸스 스파는 한국 전통 목욕 문화(찜질방)에 기반한 시설로, 나체 서비스의 특성상 성별 분리는 운영의 핵심 원칙이었다. 이러한 문화적·윤리적 맥락조차 고려하지 않은 채 일률적 평등 기준을 적용한 것은, 창조 질서를 차별로 낙인찍는 가치 전도의 극치다. 한국 교회가 대비해야 할 세 가지 전선 미국의 이 판결은 차별금지법이 실제로 작동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 교회는 다음 세 가지 전선에서 진지한 대비가 필요하다. 첫째는 강단의 자유다. 죄를 죄라 말하는 설교, 성경적 인간 이해를 전하는 선포가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4:2)는 사명이 법치의 이름 아래 위협받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둘째는 교육의 영역이다. 기독교 학교에서 창조 질서를 가르치는 것이 혐오 표현으로 규정되고,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이 법적 제약을 받게 될 수 있다. 셋째는 일상의 공간이다.여성 전용 사우나, 탈의실과 같은 최소한의 도덕적 경계마저 평등의 이름으로 허물어지는 날이 올 수 있다. 이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미국에서 이미 현실이 된 문제다. 진리의 기치를 내려놓지 말라 교회는 두 가지 유혹 앞에 서 있다. 세상의 법에 굴복하여 타협의 길을 선택하는 것과, 감정적 반발로 소모적 갈등을 자초하는 것이다. 어느 쪽도 답이 아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은 사도들이 걸어간 그 길이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사도행전5:29). 기독교는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한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교회는 그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은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담보로 한 타협은 결국 사랑도, 진리도 아닌 것이 된다. 한국 교회는 이 시대의 흐름을 분별하며 더 깊은 신학적 성찰과 성숙한 공적 발언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태복음5:13). 맛을 잃은 소금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 바로 진리의 짠맛을 지켜야 할 때다. 진리를 배제한 자유는 방종이며, 하나님을 떠난 평등은 억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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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 ‘2016 한국관광의 해’ 개막 행사 개최
- 문화체육관광부는 ‘2016 한국관광의 해’ 개막행사를 1월 20일 저녁, 중국 베이징 21세기극장에서 개최했다. 이날 개막식 행사에 앞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중국 현지에서 인기 높은 한류 스타 한채영 씨에게 ‘2016 한국관광의 해’ 홍보대사 위촉패를 수여하고 정창수 한국관광공사 사장, 박삼구 한국방문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개막 공연에서는 정구호 감독이 한국의 전통 춤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창조한 국립무용단의 ‘향연(饗宴)’ 공연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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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서, ‘2016 한국관광의 해’ 개막 행사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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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관광인, 관광산업 발전을 위하여
- 문화체육관광부는 2016년 새해를 맞이해 ‘친절, 대한민국의 힘이 됩니다’라는 주제로 7일 서울 중구 힐튼 호텔에서 ‘2016년 관광인 신년인사회’를 열었다. 이날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홍주 한국관광협회중앙회 회장, 박삼구 한국방문위원회 위원장, 정창수 한국관광공사 사장 등 주요 내빈들과 ‘K-Smile’ 퍼즐을 완성하는 퍼포먼스를 마친 뒤에 박수를 치고 있다. 김종덕 장관은 신년 인사를 통해 지난해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로 인해 발생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관광산업의 조기 정상화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관광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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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관광인, 관광산업 발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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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조융합벨트, 구성원 한자리에
- 21일 서울 중구 청계천로 문화창조융합벨트(cel 벤처단지)에서 cel 벤처단지 입주기업 등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문화창조융합벨트(cel 벤처단지)의 비전 공유와 융복합 비즈니스를 창출하기 위한 소통의 으로 ‘문화창조융합벨트(cel 벤처단지) 타운홀 미팅’을 열었다. 이날 박민권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이 참석해 처음으로 열리는 타운홀 미팅을 축하하고 이어 차은택 문화창조융합본부 단장이 문화창조융합벨트(cel 벤처단지) 비전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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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조융합벨트, 구성원 한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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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홍보영상(국문/영문자막) - 한류ibc
- 게시일: 2013. 8. 25. 서울특별시 문화관광, 서울특별시 홍보영상, 서울시문화관광(英文字幕)Seoul Special City culture & sightseeing Public relations - English subtitles 제공 : 韓流IBC www.hib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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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청 공무원들 헌혈 동참 '헌혈 통해 생명 나누고 사랑 실천'
- 헌혈은 수혈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을 구합니다. 헌혈은 혈액 성분 중 한 가지 이상이 부족해 생명을 위협받는 다른 사람을 위해 건강한 사람이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의 혈액을 기증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4일 경기도청 공무원들이 도청을 찾은 헌혈버스에서 생명을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는 헌혈에 동참했습니다. ▲ 4일 경기도청을 찾은 헌혈버스에서 도청 공무원이 헌혈을 하고 있다 ▲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에 따르면 헌혈은 수혈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혈액은 아직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거나, 대체할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 헌혈버스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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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청 공무원들 헌혈 동참 '헌혈 통해 생명 나누고 사랑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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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필 ‘혁신 도지사’의 솔선수범 “경차 몰고 출근합니다”
- ▲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3일 오전 경차 모닝을 타고 경기도청으로 출근, ‘혁신 도지사’로서의 쇄신된 면모를 손수 보여줬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3일 오전 경차 모닝을 직접 몰고 경기도청으로 출근, ‘혁신 도지사’로서의 쇄신된 면모를 손수 보여줬다.남경필 도지사는 “혁신 도지사로서 혁신은 나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자가 출근을 하기로 했다”며 “경차는 연비도 좋고 주차하기도 편하다. 앞으로 출퇴근은 계속 이렇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 ▲ 남 지사가 3일 오전 출근하기 위해 집앞의 경차에 오르고 있다. 남경필 지사는 지난 2일 취임 후 첫 월례조회 특강에서 ‘성장은 혁신을 통해 이뤄진다’는 조셉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이론을 들며 “혁신의 시작은 자기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도지사부터 바꾸고 기득권도 내려놓겠다”고 약속했다.이어 남 지사는 “혁신을 통해 일자리가 넘치는 안전하고 따뜻한 경기도를 만들겠다”며 “혁신은 국민의 명령이다. 바뀌지 않으면 3~4년 안에 파도가 돼 밀려온다. 정치도 공직사회도 바뀌어야 한다”고 혁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남 지사가 경기도청에 도착한 후 경차 모닝에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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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필 ‘혁신 도지사’의 솔선수범 “경차 몰고 출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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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대교에 최첨단 LED 조명
- 부산의 랜드마크 광안대교가 최첨단 LED(발광다이오드) 조명으로 새롭게 변신한다. 부산광역시는 지난 5일 광안대교 경관조명사업 제안서평가위원회를 열어, 동영기업 컨소시엄의 ‘凞(빛날 희)’ 콘셉트의 ‘희망의 빛, 도약의 빛’을 선정했다. 국내 대기업을 비롯한 10개 업체가 치열한 경합을 벌여, 향토기업인 동영기업 컨소시엄이 1등을 차지한 것. 광안대교 경관조명사업은 국비 56억 등 96억원을 들여, 다음달까지 실시설계를 마치고 공사에 들어가 내년 부산국제영화제(BIFF)와 부산불꽃축제 행사 전까지 준공할 계획이다. 광안대교 새 경관조명 ‘희망의 빛, 도약의 빛’은 정지된 조명이 아닌 미디어 기능을 갖춘 ‘움직이는 조명’이라는 것이 특징. 광안대교의 앵커블록과 트러스 부분에 ‘미디어파사드’를 도입해 다양한 조명을 연출, 디자인의 독창성이 돋보인다는 평가다. ‘미디어 파사드’란 건축물 겉면에 LED 조명을 설치해 조명은 기본이고 문자, 영상 같은 미디어 기능을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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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대교에 최첨단 LED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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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택시 400대 '질소산화물 저감 시범사업'
- 서울시는 서울시내 전체차량 중 68.7%를 차지하고 있는 휘발유 및 LPG차량에 대해서는 1987년 ‘삼원촉매장치’ 의무화 이후 별도의 추가대책이 마련되지 않아, ‘질소산화물 저감 시범사업’을 통한 질소산화물(NOx) 관리로 대기오염을 개선할 계획입니다.삼원촉매장치’는 엔진 배기가스 내에 존재하는 오염물질을 이산화탄소(CO2), 질소(N2)와 수증기(H2O)로의 전환을 촉진해 오염된 가스 배출을 막고 자체적으로 정화해 내보도록 돕는 장치입니다. 오염물질중 이산화질소(NO2)는 인체에 유해하며, 농도가 높은 경우엔 노약자에게 폐기종․기관지염 등 호흡기 질환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서울시내를 운전하는 법인택시는 일일 2교대 근무로 개인택시에 비해 주행거리가 약 2배 이상 높으며 기상여건에 관계없이 운행해 차량의 노후화가 심하기 때문에 삼원촉매장치의 교체가 필요하지만, 새 촉매의 가격이 20~30만 원대 고가로 교체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시범사업 대상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번에 무상으로 교체하게 되는 대상차량은 사전 신청을 마친 17개 법인택시업체 차량 400대로서 최초등록일이 '10~'11년이며, 누적주행거리가 20만㎞ 이상 주행한 차량입니다.또한, 시범사업임을 고려해 택시 보급차량의 약 75%를 차지하고 있는 쏘나타 단일차종으로 정했습니다. 앞으로 서울시는 이번 LPG택시의 배출가스 저감장치 교체 사업의 성과에 따라 LPG 차량은 물론 휘발유 차량에 대해서도 점진적으로 사업 확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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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택시 400대 '질소산화물 저감 시범사업'


